[외국 도서 소개] Because our fathers lied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Francis Beckett

거의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네 권의 책에서 고통스럽고 격렬한 제1차 세계대전을 본다.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말하지 못한 세계대전 이야기(We Will Not Fight: The Untold Story of World War One’s Conscientious Objectors)]]by Will Ellsworth-Jones, 320pp, Aurum, £18.99

[[왕과 조국을 위해 — 제1차 세계대전의 목소리(For King and Country – Voices from the First World War)]]by Brian MacArthur, 480pp, Little, Brown, £20

[[사상자들: 다섯 남자는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았나(Casualty Figures: How Five Men Survived the First World War)]] by Michèle Barrett, 224pp, Verso, £14.99

[[솜 진흙탕: 한 보병의 프랑스에서의 경험 1916-1919(Somme Mud: The Experiences of an Infantryman in France 1916-1919)]] by E.P.F. Lynch, edited by Will Davies, 368pp, Doubleday, £17.99

2008년 11월 11일은 휴전 90주년 기념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시대를 살아오진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여전히 생생하고 쓰라린 기억이다. 작가와 역사가들은 더 이상 뽑아낼 만한 것이 없을 때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수없이 다루어왔다. 우리는 키치너(Kitchener)와 헤이그(Haig), 애스키스(Asquith)와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클레망소(Clemenceau)와 카이저(Kaiser) 황제에 관해 읽기 원하는 것은 모두 읽어왔고, 현명하게도 올해 출간된 책들은 그런 부류가 아니다.

그 전쟁이 특별히 생생한 이유는 한 세대 전체에게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 대부분이 알 수 있을 만큼 그들과 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여전히 내가 방금 끝마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싸웠던 남자들에 관한 이 네 권의 책을 연달아 읽은 후에(물론 태평한 주말을 위한 사전준비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나는 상자에서 얇고 누런 편지들을 꺼내 나의 할아버지가 경험했던 것을 다시 상상했다.

그는 세 명의 어린 딸이 있어서 징병을 면제받았고, 1914년에 지원병을 신청했지만 근시여서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가 1916년에 사무실에서 런던 남부에 있는 집으로 가는 도중에 한 여성이 그에게 흰 깃(겁쟁이의 상징)을 건넸다. 그는 다음날 입대했다. 그들에게는 근시가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포탄을 멈추게 할 신체를 원했고, 라이플총병 제임스 컷모어(James Cutnore)는 1918년 2월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다가 3월 28일에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때 나의 어머니는 9살이었고 평생 그 사건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때 총명했던 그녀는 말년인 1980년대에 치매로 뇌가 크게 손상받아 자식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무섭고 오래 지속되고 헛된 할아버지의 죽음만은 여전히 기억했다. 그녀는 여전히 할아버지의 마지막에 관해 말할 수 있었는데, 그때 그는 탄환 충격을 크게 입어 거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할머니는 이(louse)를 잡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매일 할아버지의 군복을 다림질했다. 할머니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가 전선에서 쓴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사망한 그의 형제들 및 사촌들에 관한 정보를 보관했다.

할머니는 정치인들을 비난했다. 할머니는 그를 전쟁터로 보낸 세대를 비난했다. 할머니는 키플링(Kipling)의 말에 공감하였다: “누군가 우리가 왜 죽었는지 묻는다면 /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오.” 할머니는 사슨(Sassoon)에게도 공감하였다: “내가 난폭하고, 대머리이고, 숨을 헐떡인다면 / 기지에서 육군 소령들과 함께 지낼 텐데 / 그리고 시무룩한 영웅들을 점점 더 빠르게 사선으로 보낼 텐데…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젊은이들이 죽었을 때 / 나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죽을 텐데.”

그러나 할머니는 무엇보다 할아버지에게 흰 깃을 건넨 불명의 여성과 전국에서 그와 똑같은 짓을 했던 인정머리 없고 독선적인 수천 명의 여성들을 비난했다. 윌 엘즈워스-존스가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에서 일군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흡입력 있고 사려 깊은 설명을 통해 명확히 밝혔듯이, 실제로 그런 여성들이 수천 명 있었다. 전후에 버지니아 울프는 흰 깃을 건넨 사람이 50-60명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엘즈워스-존스의 성실한 연구가 보여주듯 이는 허튼소리이다.

엘즈워스-존스의 이야기들 중 일부는 여전히 독자를 화나게 할 힘을 가지고 있다. 15살 먹은 한 소년이 1914년에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그는 열병에 걸려 집으로 보내지기 전에 몽스(Mons)에서의 후퇴, 마른(Marne) 전투, 첫 번째 이프르(Ypres) 전투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가 푸트니(Putney)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소녀 네 명이 그에게 흰 깃을 건넸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군대에 있다가 제대했으며 이제 겨우 16살이라고 설명했다. 몇몇이 소녀들 주위에 몰려들어 킬킬거렸다. 나는 안절부절 못했고 몹시 당황했고… 매우 수치스러웠다.” 그는 곧장 가장 가까운 신병 모집소로 가서 다시 입대했다.

이어서 엘즈워스-존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 버트 브로클스비(Bert Brocklesby)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다른 아들 두 명이 전선에 있었는데도 우편으로 흰 깃을 받았다고 한다. 영국에서 그는 수감될 수 있었을 뿐이지만, 군은 그를 포함한 수감자 16명을 군사법정의 관할 아래 있는, 명령에 불응하면 총살당할 수 있는 프랑스로 보내버렸다. 그들 16명은 자신들에 대한 판결이 마지막 순간에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된 이유를 까맣게 몰랐지만, 엘즈워스-존스의 성실한 연구는 최초로 그 이유를 밝혀낸다. 그것은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군대에 대한 흡입력 있고 놀라운 이야기다.

브로클스비는 기독교 평화주의자였지만, 이 책들에 나오는 기독교는 호전적이고 위선적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교회의 입장은 모든 남자는 신에게서 싸워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었다 — 성직자들은 예외인데, 캔터베리 대주교가 병역이 서품과 모순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은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다.

하원 의장을 돕는 사제인 부주교 바실 윌버포스(Basil Wilberforce)는 “독일인을 죽이는 것은 성서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는 성스러운 일입니다”라고 설교했다. 불로뉴(Boulogne)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더러운 감방에 갇혀있던 브로클스비는 악취에 코를 틀어막은 한 사제의 방문을 받았다. “네 종교가 무엇이냐?” 그 사제가 물었다. “저는 감리교도입니다.” “오, 이런, 너를 도울 수 없겠구나 — 나는 영국 국교도다.” 그 사제가 사형집행이 연기된 브로클스비를 방문해 그를 “인류에 대한 치욕”이라고 부른 후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사제들이 동틀녘에 총살을 선고받은 300명의 남자들에게 보내졌을 때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브라이언 맥아더는 [[왕과 조국을 위해서]]에서 한 군목의 설명을 통해 이 사형수 감방을 보여준다. “내가 어떻게 그의 영혼에 닿을 수 있을까요? 나는 성서를 꺼내 그에게 복음서 한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 관심이 없었고, 읽은 구절에 관해 조금이나마 대화하려는 나의 시도에 냉담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결국 그들은 함께 찬송가를 불렀고 사형을 선고받은 그 불쌍한 군인은 그로부터 약간의 위로를 받은 듯 보였다. 나는 어떤 시끄러운 노래도 그를 위로할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맥아더의 책은 전쟁으로 삶이 갈갈이 찢긴 남성들과 여성들의 편지와 일기를 선별해 묶은 것으로, 그는 참고할 만한 글을 거의 제공하지 않고 또한 거의 아무런 편집도 하지 않은 채 편지와 일기가 스스로 말하도록 한다. 이것이 한 세대에게 상처를 입힌 공포에 독자를 더 가까이 데려간다.

여기 1916년에 동생에게 화를 내며 편지를 쓰고 있는 군인이 있다: “머저리처럼 지원하다니… 너는 여기로 와서 뒈지는 것이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할 거야. 일단 기다려. 너는 죽음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속 태우고 있어.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일단 기다리고, 그 다음에 맨 앞으로 나서기 전까지 기다리면서 네 동료들이 기관총에 맞아 고꾸라지는 걸 본 후에, 그러고 나서 그것이 영광스러운 행동인지 생각해봐… 어머니는 누군가의 생명이 여기서는 0.5펜스의 값어치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나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찢으며 슬퍼하고 계셔. 너는 그걸 보지 못한 거야? 그런데도 자원해서 어머니의 슬픔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거야?”

죽음의 비참함은 미셸 바렛의 [[사상자들]]에서 모든 페이지에 걸쳐 나온다. 한 예로 갈리폴리 전투(Gallipoli campaign)를 치르는 동안 한 군인이 쓴 글을 보자: “터키인들은 이 참호들을 쌓을 때 분명 모래자루가 부족해서 그 대신 여기저기 널린 터키인 시체들 한가운데에서 작업하곤 했다… 그 시체들은 터키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속이는 데 적합했는데, 자신을 존중하는 모래자루라면 결코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참호 사이를 뛰어다닌 군인이 전달한 노트를 보자: “선생님, 오늘밤 구덩이를 파고 심하게 부패한 프랑스인을 다시 묻어야 하는 뚱뚱한 네 녀석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럼주를 약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건 정말이지 야만적인 일이어서 불쌍한 악마들은 그 대가로 무언가를 받을 만하고 게다가 저는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썩어가는 시체들이 내뿜는 엄청난 악취 한가운데에서 시체들은 장비와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었고, 군인들은 삐져나온 라이플총의 총신을 무덤 속으로 집어넣고 시체들의 이름을 개머리판에 적고 있었다. 전장의 규율은 사라졌다: “병기와 장비가 부족해지자 이 관례는 금지되었다.”

바렛의 짧고 흡입력 있는 책은 참전했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생존자 다섯 남자의 회고록이다. 그녀의 강조점은 생존자들이 전사한 그들의 전우들만큼이나 심한 충격을 받은 사상자들이라는 것으로, 그녀는 전쟁 중과 전후 그들의 궤적을 쫓는다.

1917년 6월 8일, 그들 중 한 사람인 포병 로널드 스커스(Ronald Skirth)는 모든 전우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았다. 사방이 피범벅이었지만 그의 악몽에 나오는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은 독일인이었다. 그 독일인은 소년이었고 작은 언덕에 앉아 있었다. 그 소년은 분명 지갑 속에 있던 부모님과 여자친구 사진을 보다가 죽었는데, 그 여자는 훗날 아내가 된 스커스의 여자친구와 매우 닮아 보였다. 그 여자의 사진에는 “나의 한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한스를 죽였는가? “내가 쏜 포탄이 그를 죽였을 리 없다. 그랬다면 그의 몸은 다른 이들, 다른 것들처럼 부풀어올라 터져버렸을 것이다. 그는 탄환 충격으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라고 스커스는 썼다. 스커스는 포탄을 쏘고 있었다.

또 다른 생존자 E.P.F. 린치는 젊은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1921년 연습장 20권에 연필로 놀랍도록 생생한 전쟁 회고록을 썼지만, 시장(market)이 장군과 정치인의 자기정당화를 요구하고 실제 전쟁 기억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쓰라렸던 기간에는 출간되지 않았다. 린치가 죽고 20년이 흐른 뒤인 2002년 그의 손자는 린치의 회고록을 영화제작자이자 군사 전문 역사가인 윌 데이비스(Will Davies)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그것을 편집해 [[솜 진흙탕]]으로 출간했다.

데이비스는 소개글에서 자신은 린치의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르지 못한 언급과 인종적 서술”을 완화하려는 유혹을 거부했다고 썼는데, 독자는 그것 때문에 처음 몇 쪽만을 읽고도 곧바로 역겨움을 느끼겠지만 나는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고 본다. 린치를 실은 군수송선이 케이프타운(Capetown)으로 가는 도중에 멈춰 섰을 때 “깜둥이들은 고함을 질렀고 우리를 불렀다.” 그들은 페니를 원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몇 페니를 던져주고 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군가 1실링을 내보이며 거구인 깜둥이 두 명에게 다시 싸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고 다시 한 번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에 싫증이 나자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동전을 빨갛게 될 때까지 달궈서 던졌고 그 결과를 보며 박장대소했다. 기껏해야 몇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이 괴이한 에피소드에 관한 서술과 같은 것이야말로 전쟁에 관한 린치의 솔직하고 호소력 있는 글이 가진 힘이며, 우리는 점차 그와 그의 동료들을 걱정하면서 그들이 보았던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진흙탕에 빠진 한 남자를 구하려고 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그는 “난도질 당해 엉망이 된 시체”였다. 그는 깨끗하게 반으로 절단되어 있었고 가슴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피투성이에 석고처럼 굳은 그의 육체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젊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의 회고는 대다수 영국인의 서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바로 쓰라리고 격한 환멸을 결여하고 있다.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을 목격하고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입은 영국 군대는 슬픔을 안고 귀국했다. 그들 중 일부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조국이 그들의 희생을 존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 역시 방식은 달랐지만 똑같이 상처 입은 삶을 살았다. 어머니, 아내, 여자형제, 연인들은 죽은 자들을 애도했고, 자신들이 지킨 소수의 낯설고 상처 입은 남자들을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전쟁만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떤 전쟁도 제1차 세계대전처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했다. 1920년대 초만 하더라도 혁명은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나이든 남자들이 다시 권리를 주장하면서 혁명은 점차 시들어갔지만, 1945년 이후 전쟁과 싸운 세대가 마침내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적 합의와 복지국가는 애틀리(Attlee)와 맥밀런(Macmillan)에 의해 수행되었고, 발을 질질 끄는 것으로 유명한 맥밀런의 걸음걸이 — 1960년대 풍자작가들에게는 큰 선물이었던 — 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역사가들에게 그 전쟁은 여전히 균형 잡힌 시각으로 되돌아보면서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과 우리 사이에는 학문적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네 권의 책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여전히 그 전쟁을 고통과 열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1914년 수상 애스키스(Asquith)는 말했다: “전쟁은 언제나 폭도들에게 인기가 좋다.” 당시에는 그 말이 사실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결코 그렇지 않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우리에게 쓰라리고 실제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출처: The Guardian, 2008. 5. 17.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