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The Florentine: The man who taught rulers how to rule

피렌체 사람: 통치자들에게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가르친 사람
Claudia Roth Pierpont

The Prince, The Essential Writings of Machiavelli by Niccolò Machiavelli, trans. by Peter Constantine, Modern Library, 2008.

찬란했던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의 감옥에서 사용하였던 고문 방법 중의 하나는 스트라파도strappado라는 것인데, 이는 죄수의 손을 뒤로 하여 로프로 묶은 후 공중으로 들어올려 자백을 받을 때까지 여러 번 그를 바닥으로 갑자기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대개 어깨의 관절을 탈구시키고 근육을 파열하며 한 팔이나 양팔을 못쓰게 만들기 때문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 “투하”를 6번이나 당한 후 펜과 종이를 요청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키아벨리는 아무것도 자백할 것이 없었다. 그의 이름이 범죄자 리스트에서 발견되었지만, 최근 귀환한 메디치가의 통치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음모에 그가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표적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 였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형인 지오반니 추기경Cardinal Giovanni이라고 말했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 2월 거의 두 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필사적으로 사면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비애감과 대담함,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재치가 뒤섞인 몇 편의 소네트를 써 “위대한 줄리아노”에게 바쳤다. 그는 “줄리아노, 내 다리는 족쇄로 채워져 있소”로 시작하여, 그가 갇힌 감옥 벽 위에 이들은 나비만큼이나 크고 열쇠와 자물쇠의 소리는 제우스의 번개처럼 큰 소리를 낸다고 적었다. 그의 시가 감동을 주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 그는 자신이 부른 뮤즈가 미치광이처럼 사슬에 묶인 남자에게 영감을 주느니 차라리 그 얼굴을 갈길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가문의 후계자에게 그는 “이게 시인을 대우하는 방식인가”라고 분에 찬 불만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특별히 시로 알려진 것은 아니었고, 그를 메디치가의 후원을 요청하는 사람이라고 여길 이도 거의 없었다. 그의 가문은 유명하였지만 부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명백히 공화주의자들과 교제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사촌들 중 두 사람은 1434년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좀 더 잘 보호하기 위해 역사적 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끝낸 왕조의 창시자,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를 반대하다 목이 잘렸다. 마키아벨리가 청년기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 인들이 피지배자로서의 부끄러움이나 날카로운 공격을 느끼지 않게 수 십 년간 피렌체를 다스리며 널리 사랑 받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측근의 학자 모임에 마키아벨리가 발 들여 놓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로렌초는 1492년에 죽었고, 2년 후 메디치가는 시에서 추방당했다. 그때 마키아벨리는 25살이었으며 로렌초의 막내 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15살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뒤를 이은 도미니크회 설교가 사보나롤라Savonarola — 마키아벨리는 설교가의 공화주의적인 개혁은 높이 평가했지만 종교적인 “거짓말들”을 경멸했다 — 의 종교적인 체제 하에서 아무 것도 할 게 없었으나 자신의 구세주를 적대시한 그 자신의 도시로 왔고, 사보나롤라는 (14번의 스트라파도 수난을 당한 후) 목이 매달렸다. 신과 사보나롤라의 후원자들이 정부의 요직을 잃은 1498년, 마키아벨리는 직업을 구했다. 이후 14년 동안, 그는 공화정 체제로 복귀한 이 독립 도시국가를 위해 긍지를 가지고 일했으나, 이제 피렌체의 경계에서 숨어 기다리는 메디치가 세력 혹은 다른 부유한 가문들이 취할 수 있는 위협에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보강작업을 해야 했다.  시의 자유를 위한 최고 안전장치는 도시의회였다. 이 의회는 약 5천명의 피렌체 인구 중 3천명이 넘는 시민들로 구성된 행정기구로, 그 시대의 가장 광범위한 대표정부였다.

마키아벨리는 29살에 시의 문서와 기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제2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엄청난 육체적 그리고 지적 에너지 (그는 이따금 “희랍어,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고 칼데아어”로 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그가 한 달 내에 10인의 전쟁위원회의 서기로 추가 임명된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주로 임박한 위기에 닥쳤을 때 하찮은 외교적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전쟁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서로 계속 다투고 있는 힘없는 이탈리아의 국가들에 자신들의 강력한 군대를 보내 경쟁적인 주장을 하며 전쟁을 하던 시기였고, 밀라노, 제노바, 피렌체, 베니스, 나폴리 그리고 여러 작은 공국, 후작령, 공화국들은 통일된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방어하기조차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세력들은 더 좋은 조건이 나오면 곧바로 계약을 새로 맺는 오늘날의 메이저 리그의 야구선수들보다 더 쉽게 편을 바꾸는 용병에 의지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긴급한 문제와 대혼란을 타고 성공하였는데, 피렌체 사건을 논하기 위해 안낭鞍囊에 책을 가득 넣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가 돌아와 그가 발견한 것들을 보고하였다. 한 보고에서 그는 자신의 의무가 통치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가 진심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그를 앞서 나가게 하고 혹은 뒤로 물러서게 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협상과 일어난 일들을 통해 미래를 추측”해야 한다고 적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가 심리학자의 재능을 예언자의 임무로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되었던 것 같다.

그는 그 일을 잘 해냈다.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대사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 공식적으로 일개 외교사절인 그는 매우 당당하게 자신을 피렌체의 서기라고 불렀다 — 그는 자신의 동요치 않는 판단으로 인해 공화국의 최고 관리였던 소데리니Piero Soderini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 교황 율리우스 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궁전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고, 그 곳에서 줄곧 그에게 보여지는 다른 정부형태와 기질들에 대해 연구하였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처럼 마키아벨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궁금해했다. 그런데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만큼 그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없었다. 보르지아는 스페인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그가 권력의 절정에 오른 1502년 우르비노 공작성에서 — 전하는 바에 따르면 검은 옷을 차려 입고 촛불을 밝힌 채 — 마키아벨리를 맞이했는데 당시 이미 극적으로 위험한 인물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보르지아는 근래에 중앙 이탈리아의 광대한 지역과 더불어 우르비노를 대담함, 신속함 그리고 반역으로 정복하였다 (마키아벨리는 특별히 보르지아가 우르비노 공작에게 가까이 있는 마을을 점령하겠다고 대포를 빌린 후 그 마을 대신 무방비 상태의 공작령을 친 책략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보르지아가 보인 놀라운 효율성을 대중적 합의의 필요성이 가진 덕뿐만 아니라 결함을 드러내고 있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느리고 신중한 피렌체 공화국과 비교할 수 밖에 없었고, 흥분하여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그의 상관들에게 이 위엄 있는 적이 보여준 교훈을 적어 보냈다. 그는 이 무자비한 젊은 전사에게서 유력한 영웅, 외국군대를 추방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시적인 이탈리아를 현실적인 실체로 변환시킬 지도자를 본 것이었다.

놀란 외교사절이 보르지아에게 얻은 가장 현실적인 교훈은 시민군의 배치였다. 보르지아가 고용한 용병들이 반역의 음모를 꾸민 후, 그는 작전 중 어느 시점에 자신의 점령지에서 농부들을 징병할 수밖에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피렌체의 용병들이 피사와의 전쟁에서 상황이 너무 거칠어지자 비열하게 도망쳤을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이런 방식의 장점을 알아차렸다. 결국 그 누가 한 움큼(특히 공화국이 지불하는 아주 적은 한 움큼)의 플로린 은화를 위해 기꺼이 죽길 원하겠는가? 반면 누가 자신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지 않겠는가? 1505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시민군에 대한 논거를 주장했고, 1506년 2월 어느 상쾌한 날 수 백만의 토스카나 농부들이 흰 모자에 붉고 흰 바지들을 입은 채 시뇨리아 광장을 재빠르게 행진하였다. 이탈리아 즉흥 가면극적commedia-dell’arte 분위기였으나, 바로 3년 후 마키아벨리는 최근 15년간 진행되는 피사 공격에 1천명의 시민군대를 이끌었고 — 놀랍게도 — 피렌체가 승리를 거두었다.

마키아벨리의 군대는 프라토 근방의 마을을 스페인 군대로부터 방어하다 대오를 이탈하여 대부분의 비겁한 용병들만큼이나 비열하게 도망친 1512년까지 높은 명성을 유지하였다. 더 안 좋았던 것은 이 패배로 인해 피렌체가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과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연합군 간의 더 큰 싸움에서 진 편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피렌체가 취약해지자 오랫동안 분개에 차 있던 친메디치 일파는 기회를 잡아 공화정을 뒤엎어 버렸다. 1512년 9월, 메디치가는 18년 만에 피렌체로 되돌아왔다. 며칠 안에 마키아벨리의 군대와 시민의회는 해산되었다.

곧 마키아벨리는 서기로서 직위를 잃었으나, 메디치가가 복귀하기 전날 탈출을 도왔던 소데리니를 대신하여 공식탄원서를 쓴 것을 보면 그는 일정 정도의 권한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피터 콘스탄틴이 번역, 편집하고 모던 라이브러리에서 출간한) [[마키아벨리의 주요저서]] 에 “메디치가에 보내는 경고A Caution to the Medici”로 영어로는 처음 출간된 이 이례적인 서신은 계속해서 소데리니에게 오명을 씌우는 메디치 분파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친구와 피렌체 인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로 보이는 정치적 근거(“메디치 정부는 망명생활을 하고 있고, 그런 까닭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바로 그 행위로 인해 결국은 약해질 수 있다”)를 그의 이름으로 제시했다. 물론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환상은 감옥에 갇혀 스트라파도를 당하게 되는 몇 달 후인 1513년 2월에 깨졌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그에게 바친 소네트를 읽었는지 아닌지는 논쟁거리이나 그의 중재는 결국 요청되지 않았다. 감옥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마키아벨리는 추기경 지반니 데 메디치가 레오 10세Leo X로 최초의 메디치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베푼 사면 덕분에 석방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신이 우리에게 교황의 직분을 베푸셨으니 우리 모두 이를 즐기자”고 추기경이 줄리아노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흘 동안 피렌체는 넘쳐나는 교황의 금고에서 나올 선물에 대한 성급한 기대와 긍지로 빛났다. 집으로 가는 길의 지친 전前 서기를 맞이한 것은 불꽃놀이, 모닥불, 종소리, 연속포격이 전부였다.

심지어 이 때에도 마키아벨리는 “우리들의 새 주인들”이 그를 써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경험자였고, (43세에) 매우 정력적이었으며 그가 공직에서 있었던 수 년 동안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었다. 그는 친구에게 “나의 가난이 나의 충실함과 덕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절실하게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 해 봄, 여전히 일자리가 없는 그는 시뇨리나 광장의 탑이 조롱하는 광경 속에 도시에서 떠나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살기 위해 산 카시아노San Casciano 근처의 가족 농장으로 물러났다. 그곳은 볼품없이 뻗어있는 황폐한 곳이었다. 그는 카드놀이를 하든지 새를 잡든지 하면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슬프게 지냈고, 그의 세속적인 친구들은 닭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그는 진흙이 묻은 옷을 벗고 대사의 복장을 갖추고 서재에 들어갔다. 르네상스 시대 가장 유명한 서신들 중 한 서신에서, 그는 “나는 의복을 잘 갖추고서 고대의 숭엄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은  부끄러움 없이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대한 동기를 물어보는, 그러면 그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친절함에서 발로한 대답들을 나에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는 리비우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의 대답들을 써내려 갔고 자신이 목격한 역사에 대한 관찰을 덧붙여 1513년 말경 국가통치술에 대한 작은 책 — 군대와 요새에 대해 다루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방법과 같은 엄밀하게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한 책 — 을 완성했다. 이 책은 인민과 그들의 행위들을 “상상된 것으로서가 아닌 실제적인 사실들로” 논의하였으므로, 그가 쓸모 있음을 줄리아노에게 단호히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진실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명확히 증명한 작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통치자를 위한 실용 안내서인 [[군주론]]은, 콘스탄틴의 새 번역판(모던 라이브러리 $8, [[마키아벨리의 주요저서]]에도 포함된)에 서문을 쓴 애스콜리Albert Russell Ascoli를 인용하자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로 서구정치사상과 실제가 공포와 매혹에 휩싸여 주시해 온 세간에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되어버렸다. 이 책은 수 년 동안 필사본으로 유통되다 마키아벨리가 사망한 지 거의 5년이 지난 1532년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십 년 안에 영국의 추기경으로부터 저자는 “인류의 적”이라는 최초의 주목할만한 비판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왕위를 위해 교회의 권력을 빼앗는데 영감을 주었다고 비난 받았다. 약 30년 후 이 책은 프랑스 왕비 카테리느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가 반란을 일으킨 2천명의 프로테스탄트의 대학살을 명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녀의 가계를 제외하고 마키아벨리와 연관이 있다는 근거는 거의 없어 보였다). 그의 악명은 “악마의 책략”과 유사한 제명 하에 이 불쾌감을 주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보다 책이 유발하는 다수의 선정적이고 종종 왜곡된 공격을 통해서 더 높아졌다. 주권자가 교회나 귀족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곳 어디서나, 허세를 부리는 속임수나 살의적인 폭력이 사용되는 곳 어디서나, 올리브 숲 속 한가운데 놓인 그의 책상에서 너무 강력해서 유럽의 권력 구조를 위협하는 독약에 담겨 있는 펜으로 휘갈겨 쓰고 있는 마키아벨리가 은밀하게 탐구되었다.

격렬한 반응을 야기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의 공격자들에게 친숙한 방법인) 전후 관계를 무시하고 끝과 끝을 이어 놓는 방식으로 마키아벨리의 가장 주목할만한 그리고 사악한 요점들 일부를 적어보겠다. “군주는, 특히 신생 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처신할 수 없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주는 종종 무자비하게, 신의 없이, 비인도적으로, 부도덕하게, 비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말이 불리하게 작용할 때는 이를 지킬 수 없으며 지켜서도 안 된다”, “인간은 칭찬해주거나 혹은 무시되어야 하는데, 이는 인간이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쉽게 복수하지만 매우 심각한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을 재산을 잃는 것보다 더 빨리 잊는다”. 그리고 이 검은 양조주를 증류하여 얻은 기는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보다 잃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들이 얼마나 충격적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의식적으로 작업했던 장르의 예들과 이 견해들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젊은 혹은 최근에 군림한 군주들에게 조언하는 일종의 전문 안내서인 [[군주의 거울Mirros of Princes]]은 군주의 판단력과 이를 토대로 국가의 미래를 형성하고자 했다. 철학자는 이와 같은 책을 저술하는 것보다 인류의 운명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바랄 수 없었다. 혹은 현실적으로 말하면 왕실 업무의 평판을 높이는 것을 바랄 수 없었다. 마키아벨리가 책을 저술한지 2년 후, [[기독교 군주의 교육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을 쓴 에라스무스Erasmus는 — 그는 이 논문을 아라곤의 찰스에게 처음 증정하였으나 원하던 재정적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이후 헨리8세에게 증정하였다 — “군주의 마음 속에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깊이 새겨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가능한 최선을 다해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경건한 조언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보르지아의 방식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이해하는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개선되지 않을 지라도 충분히 복잡한 그리고 격언을 즐겨 인용하는 마키아벨리의 노련한 솜씨에서 보면 쉽게 간과되는 맥락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사악함을 서술하였다 해서 그것을 발명하지 않았음은 킨제이가 섹스를 발명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사실이나, 이런 것이 통치자가 (혹은 다른 이들이) 종종 처신하는 방식이라는 핑계에 의지하고자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역의 유명했던 모든 예술가들처럼 — 국가통치술은 르네상스시대의 기예 중의 하나였다 — 마키아벨리는 고대의 이교도 모델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화가는 마돈나를 그 기독교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도 고전적 주랑 현관portico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적 사유에 도달하기 위해 고전 형식의 표면 아래를 깊이 파고 드는 작업들은 — 문학, 철학, 정치학의 연구 — 이교도적 이상과 그리스도교적 이상 간의 충돌 — 권능 대 겸손, 지상의 삶 대 사후의 삶, 영웅 대 성자 — 을 알아차려만 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선택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로마공화정은 그에게 명백한 황금기였다. [[군주론]]을 쓰기 전에 그는 이미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주석을 쓰기 시작했는데 로마의 자유 제도를 면밀히 분석하였고 그가 마음 깊숙히 공화주의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도시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특정선이 아니라 일반선이다. 이러한 일반선이 공화국에서만 준수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 경건함은 정부의 이러한 영웅적 형태를 소생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힘을 점차로 약화시켰다. 자유를 위임받은 인간이 그것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 시대의 위대한 공화국은 실패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친구 소데리니가 적들이 궁극적으로 그를 반대하기 위해 사용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즉 인간의 누그러뜨릴 수 없는 사악함과 남을 샘내 계획한 음모를 극복할 수 있는 선함과 품위를 믿음으로 인해 피렌체를 잃게 되는 것을 보았다.

보르지아는 이러한 약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도덕에 관한 문제를 꼭 고려해야 한다면, 자신을 위해 만든 명성보다 실제로 행한 선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잔인하다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보르지아는 너무 약해서 약탈과 살인이 자신들의 영지에 만연했던 하찮은 여러 통치자들을 평화와 질서가 확립될 때까지 — “몇몇 경고성 처형을 시행하면서” — 축출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명성을 보호하고자 자신들의 권력으로 파벌들 간의 싸움을 중재하기보다 이 싸움 속에서 피스토이아의 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그냥 놔둔 피렌체인들보다 보르지아가 더 진정한 관대함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한 바가 꼭 그대로의 의미는 아닌 기억하기 쉬운 사악한 격언들 중 하나인, “그러므로 군주는 잔인하다고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라 말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죽여야만 하는 문제에 대해, 토마스 모어도 [[유토피아Utopia]]에서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데, [[군주론]]이 저술된 지 3년 후에 나온 이 책은 책제목이 정치적 이상주의라는 개념이 되면서 그 후 내내 [[군주론]]과는 도덕적으로 반대되는 지점에 서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에게 이례적이고 잔인한 조치는 어쩔 수 없는, 빨리 결말지어야 하는 그리고 결과적으로 군주의 백성들이 혜택(안전, 치안, 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혹은 과도하게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는 통치자는 —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왕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을 약탈한 후 자신의 나라에서 내쫓았다 — 어떠한 성과를 거두든지 간에 비난받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권력에 이를 수 있다”고 마키아벨리는 확언했지만 그의 유명한 현실정치적 조언에서 벗어나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영광에 이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사실 도덕주의자인가? 아니면 당치 않지만 성인인가? 마키아벨리는 매우 꼼꼼한 작가여서 문체가 아주 명확해질 때까지 자신의 원고를 계속해서 수정하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멋들어지게 꾸미기 위해 사용하는 불필요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자랑하며, 그는 단순한 단어와 표현에 의지하여 (중요한 저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학문적인 라틴어가 아니라) 자신의 토스카나 지방의 변형된 이탈리아어로 책을 썼다. 마키아벨리가 그의 독자들에게 내놓은 수수께끼들 중 하나는 이 언어의 명료성이 모호한 의미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체홉Chekhov, 토마스 만Thomas Mann, 볼테르Voltaire 그리고 소포클레스Sophocles 등 아찔할 정도로 여러 나라 말로 된 작품을 번역하여 많은 상을 받은 콘스탄틴은 마키아벨리를 “일류문장가, 아름다운 산문의 작가”의 지위에 오르게 할 목적을 가지고 [[군주론]]을 번역하였다고 밝혔다. 사실 마키아벨리가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때 “일류 문장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는 않는다. [[군주론]]만큼 자주 번역된 책은 — 현재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책만해도 여섯 종이 넘는다 — 얼마간의 새로운 주장이 기대된다. 그러나 면밀히 비교해보면 문체상 가장 우아한 [[군주론]] 번역본은 대략 50년 된 조지 불George Bull의 번역으로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공화주의적 산문체를 정확하게 그리고 거의 헤밍웨이 작품의 설명처럼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실례: 콘스탄틴은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문장들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군주는 짐승의 본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법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 모두를 닮아야만 하는데, 사자는 함정을 물리칠 수 없는 반면 여우는 늑대의 무리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함정을 물리치다니defy a snare? 불의 간결한 번역이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어가 갖고 있는 박력을 더 매끄러운 영어로 더 잘 흉내 내고 있다. “군주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법을 알아야만 하므로 여우와 사자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사자가 함정에 무방비상태defenceless이고 여우가 늑대에 무방비상태이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작업은 논의나 해설 없이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게 명쾌해야만 한다. 그러나 단어의 선택이 생각을 의미심장하게 부연할 수 있다. 콘스탄틴이 가장 재치 있는 문필의 마키아벨리를 제공할 수 없다 해도, [[군주론]]의 앞부분에 “당신이 국가를 침략하길 원한다면,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해도 인민들의 지지가 필요하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를 올바른 정치적 방향으로 밀고 있다. 이 문장의 다른 어떤 번역본도, 침략의 성공여부가 거주민의 호의favore de’ provinciali에 달렸다고 쓴 마키아벨리 원문도, “거주민의 호의the goodwill of the inhabitants”라고 번역한 불의 문구도, 비교적 평범한 방식으로 대체로 비슷하게 번역한 다른 이들의 문구도, 이처럼 민주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인민의 지지라는 개념 혹은 근접한 변형 — “인민들의 호의el popolo amico”, “la benivolenzia populare” — 이 마키아벨리의 작은 책에 등장하는데 군주가 반드시 소유해만 하는 것으로 그 중요성의 무게가 천천히 무거워진다. 콘스탄틴이 이점을 강조한 것은 옳다. 다음의 소견은 — “마키아벨리주의”로 결코 간주될 수 없는 — 작가의 보다 잘 알려져 있는 화려한 조언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군주는 인민을 자신의 편에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운한 시기에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군주는 인민들이 자신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을 때 음모에 대해 과도하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적으로 미워한다면, 군주는 모든 것을 그리고 모두를 두려워해야만 한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직설적인 지점은 “군주를 위한 가장 훌륭한 요새는 그의 인민들의 사랑이다” 일 것이다. 자기 보존적 현실정치라는 책의 메세지를 구성하는 또다른 요소로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끊임없이 선전하고 있는 교훈, 즉 군주는 그의 백성을 잘 대우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군주가 사자건 여우건, [[군주론]]은 군주가 자신의 백성인 양(羊)과의 관계에서 복종해야 하는 덫을 놓았다.

마키아벨리는 종종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문구에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그가 꼭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이 개념은 사실 희랍 비극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묵시적인 윤리적 상대주의가 그의 저서의 핵심이다.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군주론]]이 의도했던 바를 보면, 이 책은 실패작이었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이 책을 읽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고, 마키아벨리가 책을 헌납한 피렌체의 후계자, 줄리아노의 독재적인 조카 로렌초는 선물로 한 쌍의 사냥개들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여하튼 군주는 작가에게 일자리를 주기로 결정하지도 않았다. 책의 구성으로 보면 마지막 장은 너무 중요해서 — 이탈리아 국가들의 통일 — 이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어떠한 수단뿐만 아니라 이를 서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떠한 언어도 정당화되는 결말을 그리고 있다. 문장이 갑자기 과장되기 시작하고 감상적으로 흐르는데, 우승기가 휘날리며 트럼펫이 울리는 등 결정적으로 선동적으로 변한다.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정당화를 하거나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주에게 목표를 향해 돌진하라고 충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개인적 권력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그렇게 많은 해가 지난 후 자신을 해방시킬 사람을 환영해야만 한다”고 그는 선언하고 있다. “외국군대의 범람으로 고난을 겪던 이탈리아가 얼마나 많은 흠모의 정을 가지고 그를 맞이할 것인가, 복수에 대한 그들의 갈망, 강철같은 그들의 충성심, 그들의 헌신과 눈물은 끝이 없을 것이리라. 모든 문이 활짝 열릴 것이리라. 이러한 지도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이러한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판단해도 [[군주론]]은 실패작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민족주의적 희망들이 널리 퍼진 게 된 것은 3백5십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들 중 많은 부분이 매우 급진적으로 새로워서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을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위대한 탐험의 시대 —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사촌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Agostino Vespucci가 그가 피렌체의 대법관에서 일할 시 그의 조수였다 — 에 산 마키아벨리는 미지의 바다와 대륙을 찾아 다니는 것만큼 위험한 임무를 지녔기에 자신을 그들의 동료라고 여겼다.

문화 전반에 걸쳐 위험했던 게 사실이었다. [[군주론]]은 우리가 아직도 살고 있는 기독교적 국가에 최초로 크나큰 세속적인 충격을 주었다. 다윈이 등장하기 훨씬 전, 마키아벨리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는 확실한 세계, “해야 한다”가 아닌 “이다”의 세계, 그리고 인간이 짐승들과 결부되어 냉정하게 고찰되고 지상의 정부가 우리의 자연적 곤경을 개선시켜 줄 유일한 희망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여기저기에서 지지를 이끌어내었지만 — 17세기에는 영국의 군주정치 반대자들, 19세기에는 독일의 민족주의자들 –, 학자들이 그의 저주받은 명성에서 그를 분리하기 시작한 것은 현대에 들어 와서였다. 1954년 리돌피Roberto Ridolfi의 획기적인 전기는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적 온후한 기질을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몇 년 후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마키아벨리의 도리에 어긋난 진술 대부분이 단지 그가 깜짝 놀래키고 즐겁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라찌아Sebastian de Grazia의1989년 퓰리처 수상작인 [[지옥의 마키아벨리Machiavelli in Hell]]는 지난 날의 사악한 인간을 대단히 기독교적인 사상가로 논하며 그를 완벽하게 구제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마키아벨리를 지적 자유의 투사, 자유의 표본을 고대에서 근대세계로 전달한 사람으로 보는 정치철학 학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놀라운 것은 사악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교정하고자 하는 전문가들의 열망이 아니라 그 인물을 가장 자극적으로 천박한 형태로 만든 것이다. [[마피아 관리인: 마키아벨리 기업에 대한 안내서]], [[왕녀: 여성을 위한 마키아벨리]], 그리고 유쾌하게 제목을 붙인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할까? 목적이 비열함을 정당화한다]]와 같은 책들은 현재 가장 잘 팔리는 문학장르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업계와 사교계에서 그는 — 어떻게 해서든지 — 이기는 게 전부라는 주의를 대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그는 역사상 최초의 문화적 영웅이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는 마키아벨리가 감옥에서 출소한 후 그의 지위를 다시 얻는데 실패하고 권력의 밖에서 쇠약해지는 시기를 가리키는 문구였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통탄하면서 메디치 가의 호의를 계속 얻으려 하는 동안에도 그는 매우 열광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써 내려갔다. 그는 공화주의적 이상에 대한 학문적 송가인 [[로마사논고]]를 완성하였으며 — 존 아담스John Adams는 이 책을 매우 좋아하였다 — 루첼라이 궁의 정원에 모였던, 점점 증가하고 있는 반-메디치 모임의 친구들에게 이 책을 소리 높여 읽어주었던 것 같다. 그는 단테 풍의 3운구법으로 고전적인 주제의 시를 짓는데 전념하였고 연극에 대한 재능도 발견하였다. 매우 놀랍게도 이 어두운 시기의 한 가운데서 그는 희극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내를 두려워하는 악당에 대한 이야기,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Terence의 작품을 개작한 이야기 그리고 야심만만한 연인, 멍청한 남편, 타락한 성직자 3인 모두가 르네상스 시대의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을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풍자적이고 음탕하며 종종 분변을 언급하는 익살극인 [[만드라골라]]가 있다. 이 작품은 마키아벨리의 경력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작품의 연대가 불확실하나 — “이곳 피렌체에서 당신이 여당편이 아니라면… 개조차 당신에게 짖지 않는다”라고 장기간의 곤경을 서술하고 있다 — 희극이 1520년 초연되었으며 공연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교황 레오 10세가 그 다음 해에 교황의 궁전에서 어전공연을 명령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7년이 되던 해 불륜과 성직자의 수상쩍은 윤리를 유쾌하게 거래하는 공연을 즐거워한 교황 덕분에 — 레오 10세가 마르틴 루터를 파문한 바로 그 해였다 —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메디치가의 호의를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대체로 다시 찾았다.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인간은 적응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군주론]]의 핵심교훈이고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보인다. 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공화주의자로, 군주가 통치할 때는 그의 충실한 종으로, “시대에 맞게 행동하는 자는 성공할 것이다”. 이제 마키아벨리는 레오 10세와 그의 사촌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 — 피렌체의 대주교와 경멸 당했던 로렌초의 죽음 이후로 피렌체의 사실상 통치자 — 에게서 공식적으로 [[피렌체 사]]를 저술할 것을 의뢰받는다. 이 임무는 그를 저명한 문학집단에 속하게 하였고 그에게 보수가 두둑한 다른 일거리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모순되기는 하지만 [[군주론]]의 부수적인 교훈은 아무리 그가 애써도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메디치가에서 의뢰 받은 역사서를 쓰면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였고, 그 결과는 결코 아첨꾼의 그것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르고자 하는” 가문의 욕망이 살의적인 음모와 계획 이외에는 어떤 대안도 다른 분파들에게 남기지 않은 채 모든 정치적 적수의 진압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상술하면서, 그는 메디치 체제에서 “자유는 피렌체에서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기탄없이 결론짓고 있다.

음모에 관해서는 1522년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살해하려는 계획이 루첼라이궁 정원의 학자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모임은 해산되었고 마키아벨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추방당하거나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는 — 10년 전에 있었던 메디치가 음모와는 매우 다르게 — 체포되지도 연루되지도 않았다.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피렌체 당국의 의견과 그가 역사적으로 너무 수상쩍은 인물이어서 그의 친구들에게 그의 가담은 위험스러운 것이었다는 생각에 동의해왔다. 그러나 로스 킹Ross King은 그에 대한 개략적인 전기 [[마키아벨리: 권력의 철학자 Machiavelli: Philosopher of Power]]에서 마키아벨리가 매우 이상하게도 자주 정치적 음모에 대해 썼고, 공공연한 동정심을 가지고 음모자들을 서술하였으며, 그가 작성한 [[피렌체 사]]의 1522년 부분에서 그는 밀라노의 폭군 스포르차Sforza 살해음모의 15세기 주모자들을 로마공화정 영웅이 받을만한 존경심으로 대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적어도 마키아벨리가 이 사건들에 대해 결백하였는지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522년 그에게 불리한 증거는 아주 사소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513년 그를 사건에 연루하게 만든 아주 작은 것이 마키아벨리를 음모자들이 준수했어야만 했던 규칙들 —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신뢰해서는 안되며, 복수를 할 수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살려두어서는 안되고 그 무엇보다도 어떤 것도 글로 적어놓아서는 안 된다 — 에 대해 매우 심각한 생각을 하게 했을 수도 있다.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가 클레멘트 7세Clement VII로 교황에 오른 1523년 군사적 기회마저 되살아났다. 외국으로부터의 압력의 수위가 높아지던 시기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의 요새를 지키라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는 그의 임무를 열정적으로 — 심지어는 도취해서 — 수행했고 잘 해냈다. 1527년 봄, 황제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통해 남쪽으로 요란스럽게 진군해왔고 벽과 요새가 돌파하기 너무 어려울 거라 판단하여 겁에 질린 도시를 우회하였다. 대신에 성이 나있고 굶주린, 반은 스페인인이고 반은 루터교도인 이 통제가 안 되는 군대는 곧바로 로마로 진군하여, 병사들이 벽을 뚫고 들어가 잔혹하게 도시를 약탈하였다. 약탈, 강간, 살해, 파괴가 여러 날 지속되었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클레멘트 교황이 탈출하도록 도왔다. 그는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사랑한 피렌체를 위해 그리고 적게는 자신을 위해 이 일을 한 것이었다. 잇따른 혼란 속에서 피렌체의 메디치 통치가 전복되었고, 공화정이 복원되었으며 시민의회가 부활되었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반대편에 섰을 때조차 기원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 체제에 뛰어나게 적응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았다. 메디치가의 지지자로서 그는 다시 한번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되었고, 메디치가가 처음 복귀했을 때 받았던 유사한 종류의 정치적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58세의 나이로 더 이상 새로 시작할 능력이 없었다. 불가사의한 위장병 증세가 나타나 눕게 만들었고 공화정이 복구된 지 몇 주 안에 마키아벨리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충성스러운 친구들 그리고 성직자가 참석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승리에 관한 전문가가 그렇게 많은 것을 잃어버려야 했다는 게, 그리고 또 다시 잃어버렸다는 게 이상하다. 소문에 의하면 [[군주론]]에서 가르침을 받은 헨리 8세가 왕국의 권력을 강탈하는 것을 묵과하길 거부하여 목이 달아난 — 결국에는 성자의 반열에 오른 — 토마스 모어 못지않게, 뒤틀어진 방식이기는 하나, 마키아벨리도 자신의 신념을 따른 순교자였다. 물론 모어는 그 시대의 윤리적 경향의 반대지점에 설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그의 시대였다. 그는 정치적 관습들과 무언의 원칙들에 불변의 형태와 힘을 주었다. 근대 정치를 시작한 것은 마키아벨리라고 종종 이야기되나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회피한다. 이 나라가 여태까지 보아 온 군주들의 조언자 중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마키아벨리주의자”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그가 무엇이든지 피렌체의 서기에게서 배웠다는 암시에 “우리가 현시대에 사용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의 방법이라고는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 뒷걸음질쳤다. (이 영역에서 키신저의 유일한 적수인 칼 로브Karl Rove는 [[마키아벨리의 그림자Machiavelli’s Shadow]]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온 전기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무시할 수 없게 만든 정치와 윤리 사이 — 사생활과 공생활, 개인의 윤리와 현실정치 — 의 틈 속에서 계속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은 모범적이며 (점점 더 많은 수가) 신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지만 그리 강제적이지 않은 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이리 되었단 말인가? 정말로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상향Utopia을 악평하는 —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집단학살을 저지른 다른 군주들이 자신들은 더 우월한 세계를 건설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리고 수단은 절멸이고 목적은 환상이었던 — 세기에서 출현하였기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를 씁쓸하게도 여전히 논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속된 결과가 어떤 것이든 — 개인으로서, 국가로서 — 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예의식 (혹은 양심, 혹은 밤에는 잘 수 있는 능력)과 같은 행위들이 없단 말인가?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고문을 사용하는 것을 심지어 그 자신이 피해자가 된 이후에도 묻지 않았다. 그는 [[로마사 논고]]에 “나라의 전적인 안전이 결의에 달려 있을 때, 정의인가 아니면 부정인가, 인간다움인가 아니면 잔인함인가, 명예로운 것인가 아니면 명예롭지 않은 것인가에 관한 어떤 생각들도 팽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적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정부들이 암묵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했음은 의심할 바 없다. 지금 우리 정부의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부통령 체니Cheney는 테러용의자들과 대처할 때는 “악한 측면”으로 갈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고 법무장관 무카세이Mukasey는 “강화된” 심문의 어떤 방법에 고문을 넣을 것인가를 결정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사용되었던 방법 스트라파도 — 오늘날 “팔레스타인 교살”로 알려져 있는 — 에 대해서는 질문의 여지가 없다. 이 방법은 2003년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의 미 중앙정보부에 수감되어 있던 이라크 정치범의 사망원인으로, 팔이 등 뒤로 수갑에 채워진 채 매달려 있던 죄수가 질식으로 죽은 것이었다. 나라가 강력하고 안전할 때에는 사적 윤리가 다시금 우세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위안을 주는 사람들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그런 때가 올 가능성을 없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나는 나 자신의 영혼보다 내 나라를 더욱 사랑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적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충분하게 그의 연구를 평가한다해도 나라를 더 사랑하겠다는 그의 결정이 결코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로서 그것은 끔찍한 선택이다.

출처: The New Yorker, 2008. 9. 15.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