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In Tough Times, the Humanities Must Justify Their Worth

고난의 시기에 인문학은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해야만 한다.
Pariticia Cohen

예일과 같은 엘리트 대학교들, 점차 늘어나는 위스콘신 대학교와 같은 공립 교육제도, 그리고 루이스 & 클라크 대학교와 같은 규모가 작은 사립 대학들이 수 세대 동안 공유했던 관념은, 전통적인 교양교육은 그 정의에 의하면 학생들이 특정한 직업을 갖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이 발달시키는 비판적 사유, 시민적 역사적 지식과 윤리적 추론은 다른 목적을 지향한다: 그것들은 직업 선택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성장하고 자유민주주의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실업률이 증가하고 대학 기부금이 줄어드는 이 새로운 시대에, 복잡하고 기술이 요구되는 세계에서 인문학이 과연 중요한가라는 의문들이 최근 다급하게 제기되었다. 과거의 경기 침체기에는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느슨하게 묶인 분과들 — 일반적으로 언어학, 문학, 예술학, 역사학, 문화 연구, 철학, 종교학을 포함하는 — 의 재학생 수가 줄어들었다. 이 분야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이번 경제 위기에 이 분과들이 가장 모진 타격을 받지 않을까 우려한다.

이미 학자들은 근심스러운 신호들을 지적하고 있다. 고등교육신문(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과 무디스(Moody’s Investors Services)가 2008년 12월에 고등교육기관 200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5%는 고용을 완전히 동결했고 43%는 일부 동결했다.

[Wikihost.org]의 채용 공고에 따르면, 지난 세 달 동안 적어도 24개 대학들이 종교와 철학 분과의 교수 구인을 취소하거나 늦추었다. 현대언어협회(Modern Language Association)의 연말 직업 목록을 보면 2008-09년에 영어, 문학, 외국어는 그 전 해와 비교해 21% 떨어졌는데, 이는 지난 34년 동안 가장 큰 하락이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미합중국 연구 책임자 앤드루 델반코(Andrew Delbanco)는 “인문학에 속한 사람들은 늘 인문학의 형편을 한탄해왔지만 자신들의 분야가 점차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전면적 추가 감축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연방정부가 교육에 경기부양 자금 수백만 달러를 쏟는다 할지라도, 인문학은 행정관, 정책 입안자, 학생과 부모에게 인문학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느끼고 있다. 기술 행정관들, 연구자들, 그리고 기업 지도자들은 훈련받은 엔지니어와 과학자를 충분히 배출하는 것이 미합중국의 경제적 활력과 국가 방어, 그리고 건강 관리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충실한 인문학 옹호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인문학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주장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이번 신용 위기는 오랫동안 인문학의 중심적이고 신성한 사명으로 간주되어왔던 것 —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 — 을 재평가하도록 부추겼다.

매사추세츠의 고등교육위원 리처드 프리랜드(Richard M. Freeland)는 20세기에 인문학 연구가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지적 발달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들이 세상에서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교양교육과 과학, 그리고 우리의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분리해왔던 것이다.”

프리랜드는 그가 “고등교육에서 교양교육과 과학 및 직업 프로그램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한 혁명적 움직임이라 부르는 것에 참여하고 있다. 전미대학연합(Association of American Colleges and Universities)이 최근에 발행한 보고서는 인문학이 “교양교육에 대한 구식 상아탑 견해”를 포기하고 그 대신 실제적 경제적 가치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달에 프리랜드와 전미대학연합은 매사추세츠의 우스터에 있는 클라크 대학교에서 바로 이 주제에 관한 회의를 주최한다. 국가 지도층은 고등교육에 관심이 많지만 교수들과 학과장들은 그러한 아이디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프리랜드는 말했다.

인문학 분야에 속한 몇몇은 인문학을 부정하게 팔아먹는 행위를 언짢아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고 고등교육에 관한 책을 몇 권 저술한 데릭 복(Derek Bok)은 “인문학은 학생들이 직업생활을 준비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글쓰기와 분석적 기법만이 아니라 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새로운 기술로 인해 제기된 윤리적 쟁점들까지 가리킨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교양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경제를 개량하는 것 말고도 훨씬 더 많다. 나는 이것이 정책 입안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것 말이다.”

예일 대학교의 법학 교수이자 <<교육의 종말: 우리의 대학은 왜 삶의 의미를 포기했는가(Education’s End: Why Our Colleges and Universities Have Given Up on the Meaning of Life)>>의 저자인 앤서니 크론먼(Anthony T. Kronman)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크론먼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탐구가 가져오는 이로움을 고갱이만 추려 요약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재정적 폭락으로 이어진 탐욕, 무책임, 기만에 대한 폭넓은 비난을 지적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나의 오래된 견해의 필요성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재검토할 시기인데, 인문학은 이 문제를 “제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델반코가 보기에 그 이로움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가장 탁월하게 해낸 사람은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포크너, 링컨과 두보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통령에 관해 “그는 학구적 인문주의자들이 근래에 잘하지 못했던 것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공동 기획, 우리 모두에게 속한, 비극과 희화화를 포함하는 역사, 미합중국인으로서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

20세기 후반기에 점점 더 많은 미합중국인들이 대학에 들어갈수록 그 학생들 중 점점 더 적은 비율만이 인문학에 전념했다. 미합중국예술과학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 Sciences )가 최근에 공개한 새로운 데이터베이스인 HIP(Humanities Indicators Prototype)에 따르면, 전체 대학 학위 가운데 인문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1950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의 전성기와 비교해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현재 인문학 학위를 받는 학생들은 약 8%(약 110,000명)인데, 이 수치는 십 년이 넘도록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인문학 학위 수치가 가장 낮았던 시기는 경기 침체가 극심했던 1980년대 초였다.

인문학은 엘리트 교양교육 학교들에서는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립 학교들과 다른 학교들 사이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president emeritus이자 윌리엄즈 대학의 관념사 교수인 프랜시스 오클리(Francis C. Oakley)는 몇몇 대규모 주립대학교들이 관례적으로 인문학 과정에 등록하려는 학생들을 물리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돈이 궁해질수록 인문학은 전체 인구 중 극소수만이 대학에 다녔던 지난 세기 시작 무렵의 상황으로 점점 더 되돌아갈 것이다. 부자들의 속주로 말이다.

그러한 사태는 불행하지만 피할 수 없다고 크론먼은 말했다. 인문학 교육의 본질 — 위대한 문학과 철학 작품들을 읽고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파악하는 것” — 은 “다수가 감당할 수 없는 값비싼 사치”가 될지도 모른다.

출처: The New York Times, 2009. 2. 25.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