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재정위기가 몰려오자 독자들은 칼마르크스로 돌아간다
Kate Connolly

칼 마르크스가 돌아왔다. 적어도 독일의 출판사와 서점들의 말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인기가 올라간 것은 현재 경제 위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독일어로 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내놓는 베를린의 출판사 Karl-Dietz의 매니저 Jörn Schütrumpf는 “마르크스가 다시 유행이 되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상황인데 이 수요는 올해말이 되기 전에 급속하게 늘어날 것이다.”

마르크스의 가장 인기있는 대표 저작은 자본론(Das Kapital)이다. Schütrumpf는 마르크스의 독자들이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행복에 대한 약속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음을 깨달은 전형적인 젊은 교양세대”라고 말했다.

독일의 서점들은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쏟아지는 인기에 대해 앞선 언급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매출이 300 %정도 증가했다고 말했다(그런데 실제 매출액수를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판매는 그리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책이 출간되고 사라지는 경향은 항상 얄팍한 상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다. “시장의 신들이 곤경에 빠지고 이 신들의 사탕발림같은 마법은 사라졌다”라는 적절한 문구가 있는 시, The Gods of the Copybook Heading이 다시 유행한다면 이 시를 쓴 Rudyard Kipling이 기뻐할 것처럼, 경제위기가 다시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는 것을 안다면 마르크스도 기뻐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기뻐하는 것이 그가 살아있으면서 앞으로 몇 달 동안 그가 먹고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줄 늘어난 인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과도한 탐욕은 결국 자신을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버린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되뇌이는 것이 유행이 된 이 시점에서 점차 많은 숫자의 독일인들은 기꺼이 마르크스의 팬이 되려는 듯하다. 독일의 떠오르는 좌익정당 Die Linke의 수장인 Oskar Lafontaine가 국가의 부와 일부 에너지 부문을 국유화 하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강령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포함한다고 이야기 했을 때, 일간지 Bild는 그를 “구상을 잃어버린” “미친 좌파”라고 불렀다. 그러나 최근 몇 주 사이에 (경제위기로) 분명 밤잠을 설쳤을 재정부 장관 Peer Steinbrück은 지금 자신이 마르크스의 팬이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 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이론의 몇몇 부분들은 사실상 괜찮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해야한다”고 Steinbrück은 조심스럽게 Spiegel지에서 이야기했다.

Ralf Dorschel는 “최근들어 마르크스는 판돈이 많이 걸린 내기에서 연승을 하고 있다”고 Hamburger Abendblatt지에 언급했다.

그러나 아직도 마르크스의 이론에 빠져들 준비가 안된 사람들에게 이전의 미국 경제 위기에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서한은 좀 더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미국의 몰락은 보기 좋은 구경거리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1857년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지금 급박하고 완벽한 미국의 Wall Street 붕괴를 확실히 예고하고 있다.

출처: Guardian, 2008. 10. 15.

번역: 라티오 출판사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지은이: 이유선
판형: 신국판 변형; 304페이지(13,000원)
발간일: 2008년 10월15일
ISBN: 9788996056126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이유선, 라티오 (#ISBN9788996056126)

도서안내
흔히 철학은 우리 삶과 동떨어진 뭔가 심각하고 추상적인 ‘고민’이며, 문학은 사실성이 결여된 허구세계를 그렸기 때문에 실존적 진리를 탐색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해 로티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철학은 삶의 구체적인 문제에서 발생하는 궁극적인 물음에 답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성, 합리성, 객관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삶의 우연성, 구체성, 유한성을 기꺼이 감수하고 거기서 나름대로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문학은 그런 역할을 잘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아이러니스트 철학자 로티(Richard Rorty)가 주장하는 바도, 문학작품을 통해 인간의 우연적 삶을 통찰하고 저마다의 ‘사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함의 길이라는 것이다. “로티의 철학함의 태도는 본질적이며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는 철학자들의 지적인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폭력성과 오만함을 그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 누구의 철학에도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철학을 만들기를 원한 ‘벗어남’의 철학자였다.” 그리하여 로티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 즉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마지막 어휘로 요약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사적인 완성에 이르는 사람이다.

이 책은 모두 25꼭지의 글들로 이루어졌다. 철학적이면서도 일상적인 주제로 나누어진 각 꼭지에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일상을 이야기하고, 이와 관련된 개념이나 문제를 잘 다루고 있는 철학텍스트와 문학텍스트를 가져와서 연결짓고 해석한다. 문학작품을 열심히 탐독하다가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뭔가 철학이 거대하고 추상적인 담론 속에 삶의 진실을 놓치고 있다는 데 실망한 사람, 혹은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를 진리탐색의 길로 고민해 보고 싶은 사람, 혹은 철학과 문학 텍스트를 깊이 있게 연결시켜 해석해 보고 싶은 사람을 위한 책이다.

“아이러니스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지막 어휘가 다른 사람에게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는 확신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용어로 자신의 삶을 요약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아이러니스트 자신의 사적인 완성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자신보다 큰 힘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삶의 우연성을 긍정하는 것, 곧 삶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스트의 관심사이다.
자유주의는 이러한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완성에 대한 관심을 지켜주는 장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잔인성에 대해 반대하는 자유주의자의 연대는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완성을 위한 노력보다 앞서야 한다. 자유가 없다면 진리도 없다.”(본문 중에서)

차례
아이러니의 일상

  1. 욕망과 환상
    슬라보예 지젝《삐딱하게 보기》, 이해경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2. 동감
    막스 셸러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와《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한수영 《공허의 1/4》

  3. 인간의 유한성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이청준 《벌레 이야기》

  4. 삶은 계속된다
    로버트 브랜덤 《Making it Explicit》, 대니얼 클로즈《고스트 월드》, 나카무라 후미노리《흙 속의 아이》

  5. 소시민의 삶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철학자 가다머 현대의학을 말하다》, 마르틴 발저 《도망치는 말》

  6. 죽음에 대해
    마르틴 하이데거《존재와 시간》, 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

  7. 성(聖)과 속(俗)
    다윈의 진화론,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 문순태《포옹》

  8. 절제의 쾌락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밀란 쿤데라《느림》

공동체의 삶

  1. 사회정의의 요건
    존 롤스 《정치적 자유주의》,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까
    버나드 윌리엄스《Truth & Truthfulness》, 조지 오웰《1984》

  3.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리처드 로티《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최인훈《광장》

  4. 소비와 자유
    지그문트 바우만《자유》, 제레미 리프킨《소유의 종말》, 장 보드리야르《소비의 사회》, 정미경 《무언가》

  5. 지식인의 역할
    플라톤《이상국가》, 황현《매천야록》

  6. 관용의 문제
    마이클 왈쩌《관용에 대하여》, 김애란《침이 고인다》

  7. 휘트먼과 나라 만들기
    안토니오 네그리《제국》, 리처드 로티 《미국 만들기》, 월트 휘트먼《북소리》

  8. 정치적인 것
    샹탈 무페《On the Political》, 아베 코보《모래의 여자》

  9. 인정 질서
    프리드리히 헤겔《정신현상학》, 전상국《우상의 눈물》

  10. 본다는 것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철학이란 무엇인가》, 주제 사라마구《눈먼 자들의 도시》

우연적이고 철학적인 진리

  1. 마음의 존재
    르네 데카르트《방법서설》, 정영문《달에 홀린 광대》

  2. 자살하는 인간
    알베르 까뮈《시지프의 신화》, 김훈《칼의 노래》

  3. 텍스트의 바깥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논리철학 논고》, 아멜리 노통브《살인자의 건강법》

  4. 소통의 목표
    위르겐 하버마스《사실성과 타당성》, 파트리크 쥐스킨트《비둘기》

  5. 구원 없는 종교
    김용준《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심윤경《이현의 연애》

  6. 올바른 말
    언어철학자들, 엠마뉘엘 카레르《콧수염》

  7. 이성과 감성의 모호한 경계
    프리드리히 니체《비극의 탄생》, 토마스 만《베니스에서의 죽음》

저자 소개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서 박사후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현재는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리처드 로티》, 《실용주의》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공공성과 그 문제들》(공역), 《퍼스의 기호학》(공역), 《철학의 재구성》,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공역), 《철학자 가다머 현대의학을 말하다》 등이 있다.

피렌체 사람: 통치자들에게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가르친 사람
Claudia Roth Pierpont

The Prince, The Essential Writings of Machiavelli by Niccolò Machiavelli, trans. by Peter Constantine, Modern Library, 2008.

찬란했던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의 감옥에서 사용하였던 고문 방법 중의 하나는 스트라파도strappado라는 것인데, 이는 죄수의 손을 뒤로 하여 로프로 묶은 후 공중으로 들어올려 자백을 받을 때까지 여러 번 그를 바닥으로 갑자기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대개 어깨의 관절을 탈구시키고 근육을 파열하며 한 팔이나 양팔을 못쓰게 만들기 때문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 “투하”를 6번이나 당한 후 펜과 종이를 요청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키아벨리는 아무것도 자백할 것이 없었다. 그의 이름이 범죄자 리스트에서 발견되었지만, 최근 귀환한 메디치가의 통치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음모에 그가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표적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 였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형인 지오반니 추기경Cardinal Giovanni이라고 말했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 2월 거의 두 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필사적으로 사면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비애감과 대담함,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재치가 뒤섞인 몇 편의 소네트를 써 “위대한 줄리아노”에게 바쳤다. 그는 “줄리아노, 내 다리는 족쇄로 채워져 있소”로 시작하여, 그가 갇힌 감옥 벽 위에 이들은 나비만큼이나 크고 열쇠와 자물쇠의 소리는 제우스의 번개처럼 큰 소리를 낸다고 적었다. 그의 시가 감동을 주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 그는 자신이 부른 뮤즈가 미치광이처럼 사슬에 묶인 남자에게 영감을 주느니 차라리 그 얼굴을 갈길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가문의 후계자에게 그는 “이게 시인을 대우하는 방식인가”라고 분에 찬 불만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특별히 시로 알려진 것은 아니었고, 그를 메디치가의 후원을 요청하는 사람이라고 여길 이도 거의 없었다. 그의 가문은 유명하였지만 부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명백히 공화주의자들과 교제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사촌들 중 두 사람은 1434년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좀 더 잘 보호하기 위해 역사적 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끝낸 왕조의 창시자,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를 반대하다 목이 잘렸다. 마키아벨리가 청년기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 인들이 피지배자로서의 부끄러움이나 날카로운 공격을 느끼지 않게 수 십 년간 피렌체를 다스리며 널리 사랑 받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측근의 학자 모임에 마키아벨리가 발 들여 놓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로렌초는 1492년에 죽었고, 2년 후 메디치가는 시에서 추방당했다. 그때 마키아벨리는 25살이었으며 로렌초의 막내 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15살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뒤를 이은 도미니크회 설교가 사보나롤라Savonarola — 마키아벨리는 설교가의 공화주의적인 개혁은 높이 평가했지만 종교적인 “거짓말들”을 경멸했다 — 의 종교적인 체제 하에서 아무 것도 할 게 없었으나 자신의 구세주를 적대시한 그 자신의 도시로 왔고, 사보나롤라는 (14번의 스트라파도 수난을 당한 후) 목이 매달렸다. 신과 사보나롤라의 후원자들이 정부의 요직을 잃은 1498년, 마키아벨리는 직업을 구했다. 이후 14년 동안, 그는 공화정 체제로 복귀한 이 독립 도시국가를 위해 긍지를 가지고 일했으나, 이제 피렌체의 경계에서 숨어 기다리는 메디치가 세력 혹은 다른 부유한 가문들이 취할 수 있는 위협에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보강작업을 해야 했다.  시의 자유를 위한 최고 안전장치는 도시의회였다. 이 의회는 약 5천명의 피렌체 인구 중 3천명이 넘는 시민들로 구성된 행정기구로, 그 시대의 가장 광범위한 대표정부였다.

마키아벨리는 29살에 시의 문서와 기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제2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엄청난 육체적 그리고 지적 에너지 (그는 이따금 “희랍어,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고 칼데아어”로 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그가 한 달 내에 10인의 전쟁위원회의 서기로 추가 임명된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주로 임박한 위기에 닥쳤을 때 하찮은 외교적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전쟁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서로 계속 다투고 있는 힘없는 이탈리아의 국가들에 자신들의 강력한 군대를 보내 경쟁적인 주장을 하며 전쟁을 하던 시기였고, 밀라노, 제노바, 피렌체, 베니스, 나폴리 그리고 여러 작은 공국, 후작령, 공화국들은 통일된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방어하기조차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세력들은 더 좋은 조건이 나오면 곧바로 계약을 새로 맺는 오늘날의 메이저 리그의 야구선수들보다 더 쉽게 편을 바꾸는 용병에 의지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긴급한 문제와 대혼란을 타고 성공하였는데, 피렌체 사건을 논하기 위해 안낭鞍囊에 책을 가득 넣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가 돌아와 그가 발견한 것들을 보고하였다. 한 보고에서 그는 자신의 의무가 통치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가 진심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그를 앞서 나가게 하고 혹은 뒤로 물러서게 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협상과 일어난 일들을 통해 미래를 추측”해야 한다고 적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가 심리학자의 재능을 예언자의 임무로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되었던 것 같다.

그는 그 일을 잘 해냈다.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대사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 공식적으로 일개 외교사절인 그는 매우 당당하게 자신을 피렌체의 서기라고 불렀다 — 그는 자신의 동요치 않는 판단으로 인해 공화국의 최고 관리였던 소데리니Piero Soderini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 교황 율리우스 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궁전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고, 그 곳에서 줄곧 그에게 보여지는 다른 정부형태와 기질들에 대해 연구하였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처럼 마키아벨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궁금해했다. 그런데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만큼 그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없었다. 보르지아는 스페인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그가 권력의 절정에 오른 1502년 우르비노 공작성에서 — 전하는 바에 따르면 검은 옷을 차려 입고 촛불을 밝힌 채 — 마키아벨리를 맞이했는데 당시 이미 극적으로 위험한 인물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보르지아는 근래에 중앙 이탈리아의 광대한 지역과 더불어 우르비노를 대담함, 신속함 그리고 반역으로 정복하였다 (마키아벨리는 특별히 보르지아가 우르비노 공작에게 가까이 있는 마을을 점령하겠다고 대포를 빌린 후 그 마을 대신 무방비 상태의 공작령을 친 책략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보르지아가 보인 놀라운 효율성을 대중적 합의의 필요성이 가진 덕뿐만 아니라 결함을 드러내고 있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느리고 신중한 피렌체 공화국과 비교할 수 밖에 없었고, 흥분하여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그의 상관들에게 이 위엄 있는 적이 보여준 교훈을 적어 보냈다. 그는 이 무자비한 젊은 전사에게서 유력한 영웅, 외국군대를 추방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시적인 이탈리아를 현실적인 실체로 변환시킬 지도자를 본 것이었다.

놀란 외교사절이 보르지아에게 얻은 가장 현실적인 교훈은 시민군의 배치였다. 보르지아가 고용한 용병들이 반역의 음모를 꾸민 후, 그는 작전 중 어느 시점에 자신의 점령지에서 농부들을 징병할 수밖에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피렌체의 용병들이 피사와의 전쟁에서 상황이 너무 거칠어지자 비열하게 도망쳤을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이런 방식의 장점을 알아차렸다. 결국 그 누가 한 움큼(특히 공화국이 지불하는 아주 적은 한 움큼)의 플로린 은화를 위해 기꺼이 죽길 원하겠는가? 반면 누가 자신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지 않겠는가? 1505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시민군에 대한 논거를 주장했고, 1506년 2월 어느 상쾌한 날 수 백만의 토스카나 농부들이 흰 모자에 붉고 흰 바지들을 입은 채 시뇨리아 광장을 재빠르게 행진하였다. 이탈리아 즉흥 가면극적commedia-dell’arte 분위기였으나, 바로 3년 후 마키아벨리는 최근 15년간 진행되는 피사 공격에 1천명의 시민군대를 이끌었고 — 놀랍게도 — 피렌체가 승리를 거두었다.

마키아벨리의 군대는 프라토 근방의 마을을 스페인 군대로부터 방어하다 대오를 이탈하여 대부분의 비겁한 용병들만큼이나 비열하게 도망친 1512년까지 높은 명성을 유지하였다. 더 안 좋았던 것은 이 패배로 인해 피렌체가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과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연합군 간의 더 큰 싸움에서 진 편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피렌체가 취약해지자 오랫동안 분개에 차 있던 친메디치 일파는 기회를 잡아 공화정을 뒤엎어 버렸다. 1512년 9월, 메디치가는 18년 만에 피렌체로 되돌아왔다. 며칠 안에 마키아벨리의 군대와 시민의회는 해산되었다.

곧 마키아벨리는 서기로서 직위를 잃었으나, 메디치가가 복귀하기 전날 탈출을 도왔던 소데리니를 대신하여 공식탄원서를 쓴 것을 보면 그는 일정 정도의 권한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피터 콘스탄틴이 번역, 편집하고 모던 라이브러리에서 출간한) [[마키아벨리의 주요저서]] 에 “메디치가에 보내는 경고A Caution to the Medici”로 영어로는 처음 출간된 이 이례적인 서신은 계속해서 소데리니에게 오명을 씌우는 메디치 분파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친구와 피렌체 인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로 보이는 정치적 근거(“메디치 정부는 망명생활을 하고 있고, 그런 까닭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바로 그 행위로 인해 결국은 약해질 수 있다”)를 그의 이름으로 제시했다. 물론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환상은 감옥에 갇혀 스트라파도를 당하게 되는 몇 달 후인 1513년 2월에 깨졌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그에게 바친 소네트를 읽었는지 아닌지는 논쟁거리이나 그의 중재는 결국 요청되지 않았다. 감옥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마키아벨리는 추기경 지반니 데 메디치가 레오 10세Leo X로 최초의 메디치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베푼 사면 덕분에 석방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신이 우리에게 교황의 직분을 베푸셨으니 우리 모두 이를 즐기자”고 추기경이 줄리아노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흘 동안 피렌체는 넘쳐나는 교황의 금고에서 나올 선물에 대한 성급한 기대와 긍지로 빛났다. 집으로 가는 길의 지친 전前 서기를 맞이한 것은 불꽃놀이, 모닥불, 종소리, 연속포격이 전부였다.

심지어 이 때에도 마키아벨리는 “우리들의 새 주인들”이 그를 써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경험자였고, (43세에) 매우 정력적이었으며 그가 공직에서 있었던 수 년 동안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었다. 그는 친구에게 “나의 가난이 나의 충실함과 덕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절실하게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 해 봄, 여전히 일자리가 없는 그는 시뇨리나 광장의 탑이 조롱하는 광경 속에 도시에서 떠나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살기 위해 산 카시아노San Casciano 근처의 가족 농장으로 물러났다. 그곳은 볼품없이 뻗어있는 황폐한 곳이었다. 그는 카드놀이를 하든지 새를 잡든지 하면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슬프게 지냈고, 그의 세속적인 친구들은 닭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그는 진흙이 묻은 옷을 벗고 대사의 복장을 갖추고 서재에 들어갔다. 르네상스 시대 가장 유명한 서신들 중 한 서신에서, 그는 “나는 의복을 잘 갖추고서 고대의 숭엄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은  부끄러움 없이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대한 동기를 물어보는, 그러면 그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친절함에서 발로한 대답들을 나에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는 리비우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의 대답들을 써내려 갔고 자신이 목격한 역사에 대한 관찰을 덧붙여 1513년 말경 국가통치술에 대한 작은 책 — 군대와 요새에 대해 다루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방법과 같은 엄밀하게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한 책 — 을 완성했다. 이 책은 인민과 그들의 행위들을 “상상된 것으로서가 아닌 실제적인 사실들로” 논의하였으므로, 그가 쓸모 있음을 줄리아노에게 단호히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진실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명확히 증명한 작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통치자를 위한 실용 안내서인 [[군주론]]은, 콘스탄틴의 새 번역판(모던 라이브러리 $8, [[마키아벨리의 주요저서]]에도 포함된)에 서문을 쓴 애스콜리Albert Russell Ascoli를 인용하자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로 서구정치사상과 실제가 공포와 매혹에 휩싸여 주시해 온 세간에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되어버렸다. 이 책은 수 년 동안 필사본으로 유통되다 마키아벨리가 사망한 지 거의 5년이 지난 1532년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십 년 안에 영국의 추기경으로부터 저자는 “인류의 적”이라는 최초의 주목할만한 비판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왕위를 위해 교회의 권력을 빼앗는데 영감을 주었다고 비난 받았다. 약 30년 후 이 책은 프랑스 왕비 카테리느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가 반란을 일으킨 2천명의 프로테스탄트의 대학살을 명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녀의 가계를 제외하고 마키아벨리와 연관이 있다는 근거는 거의 없어 보였다). 그의 악명은 “악마의 책략”과 유사한 제명 하에 이 불쾌감을 주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보다 책이 유발하는 다수의 선정적이고 종종 왜곡된 공격을 통해서 더 높아졌다. 주권자가 교회나 귀족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곳 어디서나, 허세를 부리는 속임수나 살의적인 폭력이 사용되는 곳 어디서나, 올리브 숲 속 한가운데 놓인 그의 책상에서 너무 강력해서 유럽의 권력 구조를 위협하는 독약에 담겨 있는 펜으로 휘갈겨 쓰고 있는 마키아벨리가 은밀하게 탐구되었다.

격렬한 반응을 야기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의 공격자들에게 친숙한 방법인) 전후 관계를 무시하고 끝과 끝을 이어 놓는 방식으로 마키아벨리의 가장 주목할만한 그리고 사악한 요점들 일부를 적어보겠다. “군주는, 특히 신생 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처신할 수 없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주는 종종 무자비하게, 신의 없이, 비인도적으로, 부도덕하게, 비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말이 불리하게 작용할 때는 이를 지킬 수 없으며 지켜서도 안 된다”, “인간은 칭찬해주거나 혹은 무시되어야 하는데, 이는 인간이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쉽게 복수하지만 매우 심각한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을 재산을 잃는 것보다 더 빨리 잊는다”. 그리고 이 검은 양조주를 증류하여 얻은 기는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보다 잃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들이 얼마나 충격적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의식적으로 작업했던 장르의 예들과 이 견해들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젊은 혹은 최근에 군림한 군주들에게 조언하는 일종의 전문 안내서인 [[군주의 거울Mirros of Princes]]은 군주의 판단력과 이를 토대로 국가의 미래를 형성하고자 했다. 철학자는 이와 같은 책을 저술하는 것보다 인류의 운명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바랄 수 없었다. 혹은 현실적으로 말하면 왕실 업무의 평판을 높이는 것을 바랄 수 없었다. 마키아벨리가 책을 저술한지 2년 후, [[기독교 군주의 교육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을 쓴 에라스무스Erasmus는 — 그는 이 논문을 아라곤의 찰스에게 처음 증정하였으나 원하던 재정적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이후 헨리8세에게 증정하였다 — “군주의 마음 속에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깊이 새겨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가능한 최선을 다해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경건한 조언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보르지아의 방식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이해하는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개선되지 않을 지라도 충분히 복잡한 그리고 격언을 즐겨 인용하는 마키아벨리의 노련한 솜씨에서 보면 쉽게 간과되는 맥락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사악함을 서술하였다 해서 그것을 발명하지 않았음은 킨제이가 섹스를 발명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사실이나, 이런 것이 통치자가 (혹은 다른 이들이) 종종 처신하는 방식이라는 핑계에 의지하고자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역의 유명했던 모든 예술가들처럼 — 국가통치술은 르네상스시대의 기예 중의 하나였다 — 마키아벨리는 고대의 이교도 모델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화가는 마돈나를 그 기독교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도 고전적 주랑 현관portico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적 사유에 도달하기 위해 고전 형식의 표면 아래를 깊이 파고 드는 작업들은 — 문학, 철학, 정치학의 연구 — 이교도적 이상과 그리스도교적 이상 간의 충돌 — 권능 대 겸손, 지상의 삶 대 사후의 삶, 영웅 대 성자 — 을 알아차려만 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선택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로마공화정은 그에게 명백한 황금기였다. [[군주론]]을 쓰기 전에 그는 이미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주석을 쓰기 시작했는데 로마의 자유 제도를 면밀히 분석하였고 그가 마음 깊숙히 공화주의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도시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특정선이 아니라 일반선이다. 이러한 일반선이 공화국에서만 준수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 경건함은 정부의 이러한 영웅적 형태를 소생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힘을 점차로 약화시켰다. 자유를 위임받은 인간이 그것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 시대의 위대한 공화국은 실패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친구 소데리니가 적들이 궁극적으로 그를 반대하기 위해 사용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즉 인간의 누그러뜨릴 수 없는 사악함과 남을 샘내 계획한 음모를 극복할 수 있는 선함과 품위를 믿음으로 인해 피렌체를 잃게 되는 것을 보았다.

보르지아는 이러한 약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도덕에 관한 문제를 꼭 고려해야 한다면, 자신을 위해 만든 명성보다 실제로 행한 선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잔인하다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보르지아는 너무 약해서 약탈과 살인이 자신들의 영지에 만연했던 하찮은 여러 통치자들을 평화와 질서가 확립될 때까지 — “몇몇 경고성 처형을 시행하면서” — 축출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명성을 보호하고자 자신들의 권력으로 파벌들 간의 싸움을 중재하기보다 이 싸움 속에서 피스토이아의 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그냥 놔둔 피렌체인들보다 보르지아가 더 진정한 관대함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한 바가 꼭 그대로의 의미는 아닌 기억하기 쉬운 사악한 격언들 중 하나인, “그러므로 군주는 잔인하다고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라 말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죽여야만 하는 문제에 대해, 토마스 모어도 [[유토피아Utopia]]에서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데, [[군주론]]이 저술된 지 3년 후에 나온 이 책은 책제목이 정치적 이상주의라는 개념이 되면서 그 후 내내 [[군주론]]과는 도덕적으로 반대되는 지점에 서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에게 이례적이고 잔인한 조치는 어쩔 수 없는, 빨리 결말지어야 하는 그리고 결과적으로 군주의 백성들이 혜택(안전, 치안, 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혹은 과도하게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는 통치자는 —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왕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을 약탈한 후 자신의 나라에서 내쫓았다 — 어떠한 성과를 거두든지 간에 비난받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권력에 이를 수 있다”고 마키아벨리는 확언했지만 그의 유명한 현실정치적 조언에서 벗어나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영광에 이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사실 도덕주의자인가? 아니면 당치 않지만 성인인가? 마키아벨리는 매우 꼼꼼한 작가여서 문체가 아주 명확해질 때까지 자신의 원고를 계속해서 수정하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멋들어지게 꾸미기 위해 사용하는 불필요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자랑하며, 그는 단순한 단어와 표현에 의지하여 (중요한 저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학문적인 라틴어가 아니라) 자신의 토스카나 지방의 변형된 이탈리아어로 책을 썼다. 마키아벨리가 그의 독자들에게 내놓은 수수께끼들 중 하나는 이 언어의 명료성이 모호한 의미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체홉Chekhov, 토마스 만Thomas Mann, 볼테르Voltaire 그리고 소포클레스Sophocles 등 아찔할 정도로 여러 나라 말로 된 작품을 번역하여 많은 상을 받은 콘스탄틴은 마키아벨리를 “일류문장가, 아름다운 산문의 작가”의 지위에 오르게 할 목적을 가지고 [[군주론]]을 번역하였다고 밝혔다. 사실 마키아벨리가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때 “일류 문장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는 않는다. [[군주론]]만큼 자주 번역된 책은 — 현재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책만해도 여섯 종이 넘는다 — 얼마간의 새로운 주장이 기대된다. 그러나 면밀히 비교해보면 문체상 가장 우아한 [[군주론]] 번역본은 대략 50년 된 조지 불George Bull의 번역으로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공화주의적 산문체를 정확하게 그리고 거의 헤밍웨이 작품의 설명처럼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실례: 콘스탄틴은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문장들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군주는 짐승의 본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법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 모두를 닮아야만 하는데, 사자는 함정을 물리칠 수 없는 반면 여우는 늑대의 무리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함정을 물리치다니defy a snare? 불의 간결한 번역이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어가 갖고 있는 박력을 더 매끄러운 영어로 더 잘 흉내 내고 있다. “군주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법을 알아야만 하므로 여우와 사자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사자가 함정에 무방비상태defenceless이고 여우가 늑대에 무방비상태이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작업은 논의나 해설 없이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게 명쾌해야만 한다. 그러나 단어의 선택이 생각을 의미심장하게 부연할 수 있다. 콘스탄틴이 가장 재치 있는 문필의 마키아벨리를 제공할 수 없다 해도, [[군주론]]의 앞부분에 “당신이 국가를 침략하길 원한다면,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해도 인민들의 지지가 필요하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를 올바른 정치적 방향으로 밀고 있다. 이 문장의 다른 어떤 번역본도, 침략의 성공여부가 거주민의 호의favore de’ provinciali에 달렸다고 쓴 마키아벨리 원문도, “거주민의 호의the goodwill of the inhabitants”라고 번역한 불의 문구도, 비교적 평범한 방식으로 대체로 비슷하게 번역한 다른 이들의 문구도, 이처럼 민주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인민의 지지라는 개념 혹은 근접한 변형 — “인민들의 호의el popolo amico”, “la benivolenzia populare” — 이 마키아벨리의 작은 책에 등장하는데 군주가 반드시 소유해만 하는 것으로 그 중요성의 무게가 천천히 무거워진다. 콘스탄틴이 이점을 강조한 것은 옳다. 다음의 소견은 — “마키아벨리주의”로 결코 간주될 수 없는 — 작가의 보다 잘 알려져 있는 화려한 조언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군주는 인민을 자신의 편에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운한 시기에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군주는 인민들이 자신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을 때 음모에 대해 과도하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적으로 미워한다면, 군주는 모든 것을 그리고 모두를 두려워해야만 한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직설적인 지점은 “군주를 위한 가장 훌륭한 요새는 그의 인민들의 사랑이다” 일 것이다. 자기 보존적 현실정치라는 책의 메세지를 구성하는 또다른 요소로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끊임없이 선전하고 있는 교훈, 즉 군주는 그의 백성을 잘 대우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군주가 사자건 여우건, [[군주론]]은 군주가 자신의 백성인 양(羊)과의 관계에서 복종해야 하는 덫을 놓았다.

마키아벨리는 종종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문구에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그가 꼭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이 개념은 사실 희랍 비극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묵시적인 윤리적 상대주의가 그의 저서의 핵심이다.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군주론]]이 의도했던 바를 보면, 이 책은 실패작이었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이 책을 읽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고, 마키아벨리가 책을 헌납한 피렌체의 후계자, 줄리아노의 독재적인 조카 로렌초는 선물로 한 쌍의 사냥개들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여하튼 군주는 작가에게 일자리를 주기로 결정하지도 않았다. 책의 구성으로 보면 마지막 장은 너무 중요해서 — 이탈리아 국가들의 통일 — 이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어떠한 수단뿐만 아니라 이를 서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떠한 언어도 정당화되는 결말을 그리고 있다. 문장이 갑자기 과장되기 시작하고 감상적으로 흐르는데, 우승기가 휘날리며 트럼펫이 울리는 등 결정적으로 선동적으로 변한다.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정당화를 하거나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주에게 목표를 향해 돌진하라고 충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개인적 권력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그렇게 많은 해가 지난 후 자신을 해방시킬 사람을 환영해야만 한다”고 그는 선언하고 있다. “외국군대의 범람으로 고난을 겪던 이탈리아가 얼마나 많은 흠모의 정을 가지고 그를 맞이할 것인가, 복수에 대한 그들의 갈망, 강철같은 그들의 충성심, 그들의 헌신과 눈물은 끝이 없을 것이리라. 모든 문이 활짝 열릴 것이리라. 이러한 지도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이러한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판단해도 [[군주론]]은 실패작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민족주의적 희망들이 널리 퍼진 게 된 것은 3백5십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들 중 많은 부분이 매우 급진적으로 새로워서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을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위대한 탐험의 시대 —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사촌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Agostino Vespucci가 그가 피렌체의 대법관에서 일할 시 그의 조수였다 — 에 산 마키아벨리는 미지의 바다와 대륙을 찾아 다니는 것만큼 위험한 임무를 지녔기에 자신을 그들의 동료라고 여겼다.

문화 전반에 걸쳐 위험했던 게 사실이었다. [[군주론]]은 우리가 아직도 살고 있는 기독교적 국가에 최초로 크나큰 세속적인 충격을 주었다. 다윈이 등장하기 훨씬 전, 마키아벨리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는 확실한 세계, “해야 한다”가 아닌 “이다”의 세계, 그리고 인간이 짐승들과 결부되어 냉정하게 고찰되고 지상의 정부가 우리의 자연적 곤경을 개선시켜 줄 유일한 희망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여기저기에서 지지를 이끌어내었지만 — 17세기에는 영국의 군주정치 반대자들, 19세기에는 독일의 민족주의자들 –, 학자들이 그의 저주받은 명성에서 그를 분리하기 시작한 것은 현대에 들어 와서였다. 1954년 리돌피Roberto Ridolfi의 획기적인 전기는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적 온후한 기질을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몇 년 후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마키아벨리의 도리에 어긋난 진술 대부분이 단지 그가 깜짝 놀래키고 즐겁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라찌아Sebastian de Grazia의1989년 퓰리처 수상작인 [[지옥의 마키아벨리Machiavelli in Hell]]는 지난 날의 사악한 인간을 대단히 기독교적인 사상가로 논하며 그를 완벽하게 구제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마키아벨리를 지적 자유의 투사, 자유의 표본을 고대에서 근대세계로 전달한 사람으로 보는 정치철학 학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놀라운 것은 사악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교정하고자 하는 전문가들의 열망이 아니라 그 인물을 가장 자극적으로 천박한 형태로 만든 것이다. [[마피아 관리인: 마키아벨리 기업에 대한 안내서]], [[왕녀: 여성을 위한 마키아벨리]], 그리고 유쾌하게 제목을 붙인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할까? 목적이 비열함을 정당화한다]]와 같은 책들은 현재 가장 잘 팔리는 문학장르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업계와 사교계에서 그는 — 어떻게 해서든지 — 이기는 게 전부라는 주의를 대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그는 역사상 최초의 문화적 영웅이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는 마키아벨리가 감옥에서 출소한 후 그의 지위를 다시 얻는데 실패하고 권력의 밖에서 쇠약해지는 시기를 가리키는 문구였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통탄하면서 메디치 가의 호의를 계속 얻으려 하는 동안에도 그는 매우 열광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써 내려갔다. 그는 공화주의적 이상에 대한 학문적 송가인 [[로마사논고]]를 완성하였으며 — 존 아담스John Adams는 이 책을 매우 좋아하였다 — 루첼라이 궁의 정원에 모였던, 점점 증가하고 있는 반-메디치 모임의 친구들에게 이 책을 소리 높여 읽어주었던 것 같다. 그는 단테 풍의 3운구법으로 고전적인 주제의 시를 짓는데 전념하였고 연극에 대한 재능도 발견하였다. 매우 놀랍게도 이 어두운 시기의 한 가운데서 그는 희극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내를 두려워하는 악당에 대한 이야기,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Terence의 작품을 개작한 이야기 그리고 야심만만한 연인, 멍청한 남편, 타락한 성직자 3인 모두가 르네상스 시대의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을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풍자적이고 음탕하며 종종 분변을 언급하는 익살극인 [[만드라골라]]가 있다. 이 작품은 마키아벨리의 경력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작품의 연대가 불확실하나 — “이곳 피렌체에서 당신이 여당편이 아니라면… 개조차 당신에게 짖지 않는다”라고 장기간의 곤경을 서술하고 있다 — 희극이 1520년 초연되었으며 공연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교황 레오 10세가 그 다음 해에 교황의 궁전에서 어전공연을 명령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7년이 되던 해 불륜과 성직자의 수상쩍은 윤리를 유쾌하게 거래하는 공연을 즐거워한 교황 덕분에 — 레오 10세가 마르틴 루터를 파문한 바로 그 해였다 —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메디치가의 호의를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대체로 다시 찾았다.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인간은 적응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군주론]]의 핵심교훈이고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보인다. 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공화주의자로, 군주가 통치할 때는 그의 충실한 종으로, “시대에 맞게 행동하는 자는 성공할 것이다”. 이제 마키아벨리는 레오 10세와 그의 사촌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 — 피렌체의 대주교와 경멸 당했던 로렌초의 죽음 이후로 피렌체의 사실상 통치자 — 에게서 공식적으로 [[피렌체 사]]를 저술할 것을 의뢰받는다. 이 임무는 그를 저명한 문학집단에 속하게 하였고 그에게 보수가 두둑한 다른 일거리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모순되기는 하지만 [[군주론]]의 부수적인 교훈은 아무리 그가 애써도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메디치가에서 의뢰 받은 역사서를 쓰면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였고, 그 결과는 결코 아첨꾼의 그것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르고자 하는” 가문의 욕망이 살의적인 음모와 계획 이외에는 어떤 대안도 다른 분파들에게 남기지 않은 채 모든 정치적 적수의 진압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상술하면서, 그는 메디치 체제에서 “자유는 피렌체에서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기탄없이 결론짓고 있다.

음모에 관해서는 1522년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살해하려는 계획이 루첼라이궁 정원의 학자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모임은 해산되었고 마키아벨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추방당하거나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는 — 10년 전에 있었던 메디치가 음모와는 매우 다르게 — 체포되지도 연루되지도 않았다.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피렌체 당국의 의견과 그가 역사적으로 너무 수상쩍은 인물이어서 그의 친구들에게 그의 가담은 위험스러운 것이었다는 생각에 동의해왔다. 그러나 로스 킹Ross King은 그에 대한 개략적인 전기 [[마키아벨리: 권력의 철학자 Machiavelli: Philosopher of Power]]에서 마키아벨리가 매우 이상하게도 자주 정치적 음모에 대해 썼고, 공공연한 동정심을 가지고 음모자들을 서술하였으며, 그가 작성한 [[피렌체 사]]의 1522년 부분에서 그는 밀라노의 폭군 스포르차Sforza 살해음모의 15세기 주모자들을 로마공화정 영웅이 받을만한 존경심으로 대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적어도 마키아벨리가 이 사건들에 대해 결백하였는지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522년 그에게 불리한 증거는 아주 사소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513년 그를 사건에 연루하게 만든 아주 작은 것이 마키아벨리를 음모자들이 준수했어야만 했던 규칙들 —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신뢰해서는 안되며, 복수를 할 수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살려두어서는 안되고 그 무엇보다도 어떤 것도 글로 적어놓아서는 안 된다 — 에 대해 매우 심각한 생각을 하게 했을 수도 있다.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가 클레멘트 7세Clement VII로 교황에 오른 1523년 군사적 기회마저 되살아났다. 외국으로부터의 압력의 수위가 높아지던 시기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의 요새를 지키라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는 그의 임무를 열정적으로 — 심지어는 도취해서 — 수행했고 잘 해냈다. 1527년 봄, 황제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통해 남쪽으로 요란스럽게 진군해왔고 벽과 요새가 돌파하기 너무 어려울 거라 판단하여 겁에 질린 도시를 우회하였다. 대신에 성이 나있고 굶주린, 반은 스페인인이고 반은 루터교도인 이 통제가 안 되는 군대는 곧바로 로마로 진군하여, 병사들이 벽을 뚫고 들어가 잔혹하게 도시를 약탈하였다. 약탈, 강간, 살해, 파괴가 여러 날 지속되었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클레멘트 교황이 탈출하도록 도왔다. 그는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사랑한 피렌체를 위해 그리고 적게는 자신을 위해 이 일을 한 것이었다. 잇따른 혼란 속에서 피렌체의 메디치 통치가 전복되었고, 공화정이 복원되었으며 시민의회가 부활되었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반대편에 섰을 때조차 기원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 체제에 뛰어나게 적응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았다. 메디치가의 지지자로서 그는 다시 한번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되었고, 메디치가가 처음 복귀했을 때 받았던 유사한 종류의 정치적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58세의 나이로 더 이상 새로 시작할 능력이 없었다. 불가사의한 위장병 증세가 나타나 눕게 만들었고 공화정이 복구된 지 몇 주 안에 마키아벨리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충성스러운 친구들 그리고 성직자가 참석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승리에 관한 전문가가 그렇게 많은 것을 잃어버려야 했다는 게, 그리고 또 다시 잃어버렸다는 게 이상하다. 소문에 의하면 [[군주론]]에서 가르침을 받은 헨리 8세가 왕국의 권력을 강탈하는 것을 묵과하길 거부하여 목이 달아난 — 결국에는 성자의 반열에 오른 — 토마스 모어 못지않게, 뒤틀어진 방식이기는 하나, 마키아벨리도 자신의 신념을 따른 순교자였다. 물론 모어는 그 시대의 윤리적 경향의 반대지점에 설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그의 시대였다. 그는 정치적 관습들과 무언의 원칙들에 불변의 형태와 힘을 주었다. 근대 정치를 시작한 것은 마키아벨리라고 종종 이야기되나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회피한다. 이 나라가 여태까지 보아 온 군주들의 조언자 중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마키아벨리주의자”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그가 무엇이든지 피렌체의 서기에게서 배웠다는 암시에 “우리가 현시대에 사용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의 방법이라고는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 뒷걸음질쳤다. (이 영역에서 키신저의 유일한 적수인 칼 로브Karl Rove는 [[마키아벨리의 그림자Machiavelli’s Shadow]]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온 전기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무시할 수 없게 만든 정치와 윤리 사이 — 사생활과 공생활, 개인의 윤리와 현실정치 — 의 틈 속에서 계속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은 모범적이며 (점점 더 많은 수가) 신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지만 그리 강제적이지 않은 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이리 되었단 말인가? 정말로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상향Utopia을 악평하는 —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집단학살을 저지른 다른 군주들이 자신들은 더 우월한 세계를 건설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리고 수단은 절멸이고 목적은 환상이었던 — 세기에서 출현하였기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를 씁쓸하게도 여전히 논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속된 결과가 어떤 것이든 — 개인으로서, 국가로서 — 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예의식 (혹은 양심, 혹은 밤에는 잘 수 있는 능력)과 같은 행위들이 없단 말인가?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고문을 사용하는 것을 심지어 그 자신이 피해자가 된 이후에도 묻지 않았다. 그는 [[로마사 논고]]에 “나라의 전적인 안전이 결의에 달려 있을 때, 정의인가 아니면 부정인가, 인간다움인가 아니면 잔인함인가, 명예로운 것인가 아니면 명예롭지 않은 것인가에 관한 어떤 생각들도 팽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적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정부들이 암묵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했음은 의심할 바 없다. 지금 우리 정부의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부통령 체니Cheney는 테러용의자들과 대처할 때는 “악한 측면”으로 갈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고 법무장관 무카세이Mukasey는 “강화된” 심문의 어떤 방법에 고문을 넣을 것인가를 결정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사용되었던 방법 스트라파도 — 오늘날 “팔레스타인 교살”로 알려져 있는 — 에 대해서는 질문의 여지가 없다. 이 방법은 2003년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의 미 중앙정보부에 수감되어 있던 이라크 정치범의 사망원인으로, 팔이 등 뒤로 수갑에 채워진 채 매달려 있던 죄수가 질식으로 죽은 것이었다. 나라가 강력하고 안전할 때에는 사적 윤리가 다시금 우세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위안을 주는 사람들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그런 때가 올 가능성을 없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나는 나 자신의 영혼보다 내 나라를 더욱 사랑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적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충분하게 그의 연구를 평가한다해도 나라를 더 사랑하겠다는 그의 결정이 결코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로서 그것은 끔찍한 선택이다.

출처: The New Yorker, 2008. 9. 15.

번역: 라티오 출판사

Democracy

Author: Paul Ginsborg
Paperback: 224 pages
Publisher: Profile Books Ltd (April 17, 2008)
ISBN-10: 184668093X
ISBN-13: 978-1846680939

Paul Ginsborg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유엔에 가입한 국가들 중에서 “넓은 의미에서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의 수(2000년에 192개국 중 120개국)가 늘어났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질은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정치의 본질은 변화하였다. 마르크스와 존 스튜어트 밀의 저작들을 배경으로 삼은 이 책은 사람들이 역동적이고 참여적인 정치적 과정에 더많이 동조한 사람일수록 박탈감을 느낀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인가? Ginsborg는 아주 신랄하게 세부적인 것들을 찾아낸다. 새로운 시장과 이윤을 찾아 “지구를 사냥”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자산을 재빨리 이전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삶은 영원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우리의 사회조직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기업만이 아닌데, 다른 한편으로 정치권의 로비스트들은 자신들의 주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려고 끊임없이 로비를 하고 있으며, 이것 역시 훨씬 미세하게 영향을 끼친다. 가족에 대한 “가장 크고 단일한 문화적 영향”은 텔레비전인데, 이 서비스는 비견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텔레비전 회사들은 비즈니스 제국이 경영하고 있으며, 그들이 방송하는 메세지는 결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여기서의 논증은 상상력의 산물이고, 세심하지만 재치있는 것이다. Ginsborg는 처음에는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간주하면서 시작하나 현재의 위기의 원인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경제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젠더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의 재발견과 재활성화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은 직감과 확신이 혼합된 것이고, 정치가들이 할 수 있을만한 것들을 담고 있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7. 27.

번역: 라티오 출판사

그들의 투쟁
Niall Ferguson 
  
[[히틀러의 제국: 나치의 유럽 점령지 지배Hitler’s Empire: Nazi Rule in Occupied Europe]] by Mark Mazower, 726pp, Allen Lane £30 
  
[[히틀러Hitler]] by Ian Kershaw, 1,030pp, Allen Lane £30 
  
[[히틀러, 독일인과 최종해결책Hitler, The Germans and the Final Solution]] by Ian Kershaw, 394pp, Yale University Press £19.99 

1942년 9월 힘러Heinrich Himmler는 제국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20년 사이에 “게르만 인들”이 8천3백만 명에서 1억 2천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고, 이들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소련에서 탈취한 영토에 재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나아가 “잉게르만 지역Ingermanland” 처럼 멋들어진 이름을 가진 새로운 구역을 늘릴 수도 있었다. 아우토반과 고속철도가 돈, 볼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랄 지역까지를 “한 줄로 꿰어 놓은 진주” — 독일의 전초지를 강화하는 — 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힘러의 표현에 따르자면 독일의 “동부지역” 정복은 “세계가 영원히 지켜보게 될 가장 위대한 식민지 건설작업”일 수 있었다. 
  
사실상 나치 제국은 여태까지 가장 성공하지 못한 식민지 건설을 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독일의 1871년 국경선을 확장하려는 운동은 1938년 시작되어 1942년 말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때까지 제국은 유럽 대륙의 약 삼분의 일과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거의 절반 — 2억 4천4백만 명 — 을 포괄하였다. 그러나 적군이 동 프로이센으로 진군해 온 1944년 10월경에는 제국은 사라져버려 역사상 가장 단기간 존재했던 제국들 중의 하나이면서 최악의 제국이 되었다.  
  
나치 제국은 왜 이처럼 끔찍하게 실패하였을까? 너무 강력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 형편없어서?

마조워Mark Mazower는 자신이 [[히틀러의 제국]]이라 부른 새로운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에서 최근 들어 제3제국에 대해 상당히 종합적인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많은 역사가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버레이Michael Burleigh와 투즈Adam Tooze처럼, 마조워는 나치 체제가 전쟁과 정복에 있어서만 그 진정한 성향을 드러내었다는 사실에 매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체제는 단순히 변형된 국민국가 역시 아니었다. 나치 체제는 처음부터 제국이 되고자 하였다.  
  
마조워는 최초의 나치 식민지 — 분할된 체코슬라바키아를 대신하여 시작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대한 보호령” — 를 그 전에 프랑스가 튀니스와 모로코에 혹은 영국이 이집트와 이라크에 설립한 보호령과 비교하고 있다. 전시 포즈나니 지역의 주지사였던 뵈트케르Viktor Böttcher가 1914년 전에는 독일 카메룬의 관리였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수행하였던 건설작업을 이제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나치 관리들 중의 한 명이었다. 나치는 소련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을 항상 “식민지적 방식으로 경제적 착취”를 할 수 있는, “식민지적 관점에서” 중요시하였다.   
  
마조워가 언급한 것처럼, 동시대인을 놀라게 한 다른 점은 동부 유럽에서 피식민자가 식민자와 피부색이 같다는 것이었다. 나치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초기 해설가 중 한 명인 에드리Eugene Erdely는 1941년에 “백인종에 속하는 어떤 민족도 이러한 조건을 이전에 강요 받은 적이 없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나치는 자신들의 비틀린 교묘한 인종 이론 덕분에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힘러에게 슬라브 인종 모두는 동부지역에 새로운 “금발의 주”를 창출하기 위해 “아리안 인종”으로 대치되어야 할 “몽골 유형”이었다. 히틀러에게 러시아 인들은 “북미 인디언들”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나치 제국의 존속기간이 짧았던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제3제국이 대영제국뿐만 아니라 소련 그리고 미합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된 이후로 제국은 분명하게 파멸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마조워의 책은 제국으로서 제3 제국의 실패를 이차적인, 내생적인 설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단순한 인구통계로 볼 때, 8천만 명의 독일인들에게 유럽 대륙을 떠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론적으로, 영국이 우타르 프라데시를 지배한 것보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는 것이 더 수월했어야만 했다. 우선 첫째로, 칸푸르와 런던 사이의 거리보다 키예프와 베를린이 더 가까웠다. 둘째로, 독일인은 1941년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에서 해방군으로서 진심으로 환영 받았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뿐만이 아니었다. 1930년대 스탈린은 소련의 서부지역 전역을 인종적 소수자로 혐의를 두고 폭력적으로 다루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의 지배가 더 나을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마조워가 보여주듯이, 독일인들은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살리는데 실패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4단어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함, 냉담함, 잔인함, 어리석음이 그것들이다. 물론 모든 제국은 이러한 악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치제국은 이러한 악을 극한으로 몰고가 지배를 지속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애 버렸다. 제국은 후반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신경을 썼다. 나치 제국은 무정한데다 무심했다.     

장식이 많은 군복을 입고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거만한 제국 독일인들”은 심지어 외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주장하는 같은 인종의 독일인들조차 소외시켰다. 게다가 이들은 새로이 지배 받게 된 민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였다.  
  
제국의원 코흐Erich Koch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책임을 맡을 당시 “나는 이 나라에서 마지막 모든 한 방울까지 짜낼 것이다”, “나는 이곳에 행복을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했다. 
  
괴링Hermann Göring 은 독일인이 아닌 자들이 “굶주림으로 쓰러진다” 해도 “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떠벌렸다. 
  
예를 들어, 바르바로사 작전 후 적군 포로 3백9십만 명이 생포되어 1942년 2월에는 겨우 1백1십만 명만이 살아남아있을 정도로 극도로 무관심한 대우를 받았다. 철조망으로 둘러싼 영창에 가두어 진 채, 그들은 영양실조와 질병에 방치되었다.  
  
나치가 피정복자들을 굶기는데에만 만족한 것도 아니었다. 나치는 (히틀러 식 경례를 하지 못했거나 혹은 주제넘게 했거나 입맛에 따라 행해질 수 있는) 즉흥적인 구타에서 산업화된 대량살육까지 모든 방식으로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즐겼다.  
  
마조워가 지적한 바와 같이 소수의 독일인만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인식했다. 1944년 2월 프라우엔펠트Gauleiter Alfred Frauenfeld의 표현에 의하자면, “무자비한 만행의 원칙, 지난 수세기 동안 유색인종 노예들에게 사용한 방식과 관점에 따라 이 나라[우크라이나]를 취급한 것…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을 대우하는 본능이 완전히 결여되었음을 입증하며, 이에 대한 결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참담함이었다.”  
  
동부지역 담당부서의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의 동료들 중 한 사람이 말한 바처럼, “부적당한 처우의 대표작… 완벽하게 친독일적이었고 우리를 해방자로서 기쁘게 맞이하였던 열렬한 지지자들을 일년 안에 숲과 늪지로 몰아넣었다.” 
  
오만함에 더해 냉담함과 잔인함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일찍이 1938년 한 독일 국방군 참모 장교는 새로이 획득한 주데텐 지방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국가의 터무니없는 무능력의 정도”에 대해 논평하였다. 로젠베르크의 동부 지역 부서(Ost-Ministerium)는 곧 “혼란 부서”(Cha-Ost-Ministerium)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친위대는 제국을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집중된 힘을 확립하길 열망하였다. 그러나 마조워는 힘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8십만 명의 독일 인종의 재정착을 어떻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오렌도르프Otto Ohlendorf — 게슈타포 출동부대의 충실한 사령관으로 수만 명의 소련의 유대인들을 대량 살해한 데 책임이 있는 — 는 힘러의 특기가 “무질서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통탄하였다. 그러나 나치 제국의 기능장애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로젠베르크나 힘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인에게 있었다. 결국 제3제국의 책임자는 히틀러였다. 6백50개의 주요한 입법 명령이 전시에 내려졌는데, 72개를 제외하고 전부가 그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이거나 공포된 법령이었다.  
소련의 침공 바로 직후, “동부 점령 지역의 광대한 규모로 보아 이 지역에서 치안을 확립할 수 있는 군사력은 재판소에서 판결을 내려 저항세력을 벌주는 대신 점령군이 주민들 중 저항하려는 모든 의지를 궤멸시킬만한 테러를 확산시킬 때에만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이는 히틀러였다. 점령지역을 진압하는 방법으로 “여하간 의심스러워 보이는 모든 자를 쏠” 것을 선호했던 이는 히틀러였다.  
  
제국주의적 통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제정신으로 생각했던 제3제국에 드문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베스트Werner Best의 눈에 히틀러는 당대의 칭기즈칸 — 자신의 제국마저 유지시킬 수 없는 파괴의 전문가 — 이었다. 스탈린 체제가 1941년 무너졌거나 (거의 일어날 뻔했던) 혹은 미합중국이 태평양 지역 우선 작전을 채택했다면 이 제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탱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마조워는 이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이번에 펭귄출판사에서 한 권으로 (주를 빼고) 재출판 된 커쇼 경Sir Ian Kershaw의 기념비적인 히틀러 전기 독자들에게 놀랍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에 대단했던 역사편찬 논쟁에서 그를 “목적론자intentionalist들”보다 “구조주의자들”과 유사한 태도를 취하게 한 커쇼의 초기 저서는 제3제국에 대한 대중적 태도에 맞추어졌었다. 그러나 그의 전기가 진전됨에 따라 히틀러의 중심적 역할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가장 최근의 소논문들을 단행집으로 펴낸 [[히틀러, 독일인들과 최종 해결책]]에서 커쇼가 쓴 것처럼, “히틀러가 없었다면, 친위대-경찰 국가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1930년대 후반기까지 유럽의 전면적인 전쟁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소련에 대한 침공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홀로코스트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이 히틀러가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의 구체적인 모든 사항까지 명백하게 명령을 내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나치당원들 — 나치 제국의 “점증적인 과격화”에 책임이 있는 자들 — 은 자신들을 다소 애매하게 “총통을 지향하여 노력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없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취했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히틀러의 제국은 1945년에 그 역사적 유효기간이 다한 개념을 원칙적으로 무리하게 적용한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부유해 지는 길은 외국인들과 그 땅의 착취를 거쳐야한다고 그럴 듯하게 말해왔다. 생활권Lebensraum 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제국은 정착할 새로운 땅과 세금을 물릴 새로운 인민을 위해 싸워왔다. 그러나 20세기 동안, 선진 산업경제는 식민지 없이도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명백해졌다. 참으로, 식민지는 불필요한 짐과 같은 것일 수 있다.  
  
1942년에 경제학자 슈베르트Helmut Schubert는 독일의 진정한 미래는 “영구적인 그리고 증가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존하여 “거대한 산업 지구”가 되는 것에 있다고 적었다.  
  
동부 지역의 독일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일의 동부화는 농업에서 산업으로 노동의 세속적인 이동이 지속됨에 따라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전시 경제의 급박한 상황이 이러한 관점을 정당화하였다. 1944년 말까지 약 5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구 제국의 광산과 공장에서의 노동에 징집당했다. 재미있는 아이러니로 인해 인종적으로 순수한 절대적 통치권에 대한 꿈이 독일 자신을 다인종 노예국가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물론 의도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을 때 의도하지 못한 결과가 가장 잘 일어날 수 있다. 히틀러의 해석자는 후에 “나치는 끊임없이 천년 제국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5분 앞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논평했다. 그들 제국의 존속 기간이 그렇게 짧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6년조차도 매우 매우 길었다.
  
Niall Ferguson은 The Financial Times의 기고 편집자이다.  
 
출처: Financial Times, 2008. 9. 13.

번역: 라티오 출판사

The Cunning of Unreason: Making Sense of Politics

Author: John Dunn
Paperback: 416 pages
Publisher: Basic Books (August 21, 2001)
Language: English
ISBN-10: 0465017487
ISBN-13: 978-0465017485

Product Description
John Dunn은 논증과 사상의 형성과 해석에 있어 역사적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접근법을 정치이론에 도입한 Cambridge 학파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The Cunning of Unreason은 현재의 정치적 환경에 대한 이 학파의 접근법을 적용한 강력한 사례이다. Dunn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위대한 정치사상가들 사이의 지속적인 연관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 부패, 세계화, 보수주의에 관한 최근의 경향 등에 관한 당대의 논의를 검토한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이유선, 라티오 (#ISBN9788996056126)

이 원고는 필자가 문예지인 정신과 표현에 ‘문학과 철학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부터 연재해 온 글들 가운데 일부를 골라 모은 것이다.

아이러니의 일상, 공동체의 삶에 대한 생각, 사적이고 철학적인 진리 등의 주제에 해당하는 문학작품과 철학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초고: 문학과 철학의 경계

2008년 10월 출간 예정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Francis Beckett

거의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네 권의 책에서 고통스럽고 격렬한 제1차 세계대전을 본다.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말하지 못한 세계대전 이야기(We Will Not Fight: The Untold Story of World War One’s Conscientious Objectors)]]by Will Ellsworth-Jones, 320pp, Aurum, £18.99

[[왕과 조국을 위해 — 제1차 세계대전의 목소리(For King and Country – Voices from the First World War)]]by Brian MacArthur, 480pp, Little, Brown, £20

[[사상자들: 다섯 남자는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았나(Casualty Figures: How Five Men Survived the First World War)]] by Michèle Barrett, 224pp, Verso, £14.99

[[솜 진흙탕: 한 보병의 프랑스에서의 경험 1916-1919(Somme Mud: The Experiences of an Infantryman in France 1916-1919)]] by E.P.F. Lynch, edited by Will Davies, 368pp, Doubleday, £17.99

2008년 11월 11일은 휴전 90주년 기념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시대를 살아오진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여전히 생생하고 쓰라린 기억이다. 작가와 역사가들은 더 이상 뽑아낼 만한 것이 없을 때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수없이 다루어왔다. 우리는 키치너(Kitchener)와 헤이그(Haig), 애스키스(Asquith)와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클레망소(Clemenceau)와 카이저(Kaiser) 황제에 관해 읽기 원하는 것은 모두 읽어왔고, 현명하게도 올해 출간된 책들은 그런 부류가 아니다.

그 전쟁이 특별히 생생한 이유는 한 세대 전체에게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 대부분이 알 수 있을 만큼 그들과 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여전히 내가 방금 끝마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싸웠던 남자들에 관한 이 네 권의 책을 연달아 읽은 후에(물론 태평한 주말을 위한 사전준비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나는 상자에서 얇고 누런 편지들을 꺼내 나의 할아버지가 경험했던 것을 다시 상상했다.

그는 세 명의 어린 딸이 있어서 징병을 면제받았고, 1914년에 지원병을 신청했지만 근시여서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가 1916년에 사무실에서 런던 남부에 있는 집으로 가는 도중에 한 여성이 그에게 흰 깃(겁쟁이의 상징)을 건넸다. 그는 다음날 입대했다. 그들에게는 근시가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포탄을 멈추게 할 신체를 원했고, 라이플총병 제임스 컷모어(James Cutnore)는 1918년 2월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다가 3월 28일에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때 나의 어머니는 9살이었고 평생 그 사건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때 총명했던 그녀는 말년인 1980년대에 치매로 뇌가 크게 손상받아 자식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무섭고 오래 지속되고 헛된 할아버지의 죽음만은 여전히 기억했다. 그녀는 여전히 할아버지의 마지막에 관해 말할 수 있었는데, 그때 그는 탄환 충격을 크게 입어 거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할머니는 이(louse)를 잡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매일 할아버지의 군복을 다림질했다. 할머니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가 전선에서 쓴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사망한 그의 형제들 및 사촌들에 관한 정보를 보관했다.

할머니는 정치인들을 비난했다. 할머니는 그를 전쟁터로 보낸 세대를 비난했다. 할머니는 키플링(Kipling)의 말에 공감하였다: “누군가 우리가 왜 죽었는지 묻는다면 /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오.” 할머니는 사슨(Sassoon)에게도 공감하였다: “내가 난폭하고, 대머리이고, 숨을 헐떡인다면 / 기지에서 육군 소령들과 함께 지낼 텐데 / 그리고 시무룩한 영웅들을 점점 더 빠르게 사선으로 보낼 텐데…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젊은이들이 죽었을 때 / 나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죽을 텐데.”

그러나 할머니는 무엇보다 할아버지에게 흰 깃을 건넨 불명의 여성과 전국에서 그와 똑같은 짓을 했던 인정머리 없고 독선적인 수천 명의 여성들을 비난했다. 윌 엘즈워스-존스가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에서 일군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흡입력 있고 사려 깊은 설명을 통해 명확히 밝혔듯이, 실제로 그런 여성들이 수천 명 있었다. 전후에 버지니아 울프는 흰 깃을 건넨 사람이 50-60명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엘즈워스-존스의 성실한 연구가 보여주듯 이는 허튼소리이다.

엘즈워스-존스의 이야기들 중 일부는 여전히 독자를 화나게 할 힘을 가지고 있다. 15살 먹은 한 소년이 1914년에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그는 열병에 걸려 집으로 보내지기 전에 몽스(Mons)에서의 후퇴, 마른(Marne) 전투, 첫 번째 이프르(Ypres) 전투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가 푸트니(Putney)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소녀 네 명이 그에게 흰 깃을 건넸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군대에 있다가 제대했으며 이제 겨우 16살이라고 설명했다. 몇몇이 소녀들 주위에 몰려들어 킬킬거렸다. 나는 안절부절 못했고 몹시 당황했고… 매우 수치스러웠다.” 그는 곧장 가장 가까운 신병 모집소로 가서 다시 입대했다.

이어서 엘즈워스-존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 버트 브로클스비(Bert Brocklesby)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다른 아들 두 명이 전선에 있었는데도 우편으로 흰 깃을 받았다고 한다. 영국에서 그는 수감될 수 있었을 뿐이지만, 군은 그를 포함한 수감자 16명을 군사법정의 관할 아래 있는, 명령에 불응하면 총살당할 수 있는 프랑스로 보내버렸다. 그들 16명은 자신들에 대한 판결이 마지막 순간에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된 이유를 까맣게 몰랐지만, 엘즈워스-존스의 성실한 연구는 최초로 그 이유를 밝혀낸다. 그것은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군대에 대한 흡입력 있고 놀라운 이야기다.

브로클스비는 기독교 평화주의자였지만, 이 책들에 나오는 기독교는 호전적이고 위선적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교회의 입장은 모든 남자는 신에게서 싸워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었다 — 성직자들은 예외인데, 캔터베리 대주교가 병역이 서품과 모순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은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다.

하원 의장을 돕는 사제인 부주교 바실 윌버포스(Basil Wilberforce)는 “독일인을 죽이는 것은 성서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는 성스러운 일입니다”라고 설교했다. 불로뉴(Boulogne)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더러운 감방에 갇혀있던 브로클스비는 악취에 코를 틀어막은 한 사제의 방문을 받았다. “네 종교가 무엇이냐?” 그 사제가 물었다. “저는 감리교도입니다.” “오, 이런, 너를 도울 수 없겠구나 — 나는 영국 국교도다.” 그 사제가 사형집행이 연기된 브로클스비를 방문해 그를 “인류에 대한 치욕”이라고 부른 후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사제들이 동틀녘에 총살을 선고받은 300명의 남자들에게 보내졌을 때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브라이언 맥아더는 [[왕과 조국을 위해서]]에서 한 군목의 설명을 통해 이 사형수 감방을 보여준다. “내가 어떻게 그의 영혼에 닿을 수 있을까요? 나는 성서를 꺼내 그에게 복음서 한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 관심이 없었고, 읽은 구절에 관해 조금이나마 대화하려는 나의 시도에 냉담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결국 그들은 함께 찬송가를 불렀고 사형을 선고받은 그 불쌍한 군인은 그로부터 약간의 위로를 받은 듯 보였다. 나는 어떤 시끄러운 노래도 그를 위로할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맥아더의 책은 전쟁으로 삶이 갈갈이 찢긴 남성들과 여성들의 편지와 일기를 선별해 묶은 것으로, 그는 참고할 만한 글을 거의 제공하지 않고 또한 거의 아무런 편집도 하지 않은 채 편지와 일기가 스스로 말하도록 한다. 이것이 한 세대에게 상처를 입힌 공포에 독자를 더 가까이 데려간다.

여기 1916년에 동생에게 화를 내며 편지를 쓰고 있는 군인이 있다: “머저리처럼 지원하다니… 너는 여기로 와서 뒈지는 것이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할 거야. 일단 기다려. 너는 죽음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속 태우고 있어.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일단 기다리고, 그 다음에 맨 앞으로 나서기 전까지 기다리면서 네 동료들이 기관총에 맞아 고꾸라지는 걸 본 후에, 그러고 나서 그것이 영광스러운 행동인지 생각해봐… 어머니는 누군가의 생명이 여기서는 0.5펜스의 값어치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나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찢으며 슬퍼하고 계셔. 너는 그걸 보지 못한 거야? 그런데도 자원해서 어머니의 슬픔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거야?”

죽음의 비참함은 미셸 바렛의 [[사상자들]]에서 모든 페이지에 걸쳐 나온다. 한 예로 갈리폴리 전투(Gallipoli campaign)를 치르는 동안 한 군인이 쓴 글을 보자: “터키인들은 이 참호들을 쌓을 때 분명 모래자루가 부족해서 그 대신 여기저기 널린 터키인 시체들 한가운데에서 작업하곤 했다… 그 시체들은 터키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속이는 데 적합했는데, 자신을 존중하는 모래자루라면 결코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참호 사이를 뛰어다닌 군인이 전달한 노트를 보자: “선생님, 오늘밤 구덩이를 파고 심하게 부패한 프랑스인을 다시 묻어야 하는 뚱뚱한 네 녀석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럼주를 약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건 정말이지 야만적인 일이어서 불쌍한 악마들은 그 대가로 무언가를 받을 만하고 게다가 저는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썩어가는 시체들이 내뿜는 엄청난 악취 한가운데에서 시체들은 장비와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었고, 군인들은 삐져나온 라이플총의 총신을 무덤 속으로 집어넣고 시체들의 이름을 개머리판에 적고 있었다. 전장의 규율은 사라졌다: “병기와 장비가 부족해지자 이 관례는 금지되었다.”

바렛의 짧고 흡입력 있는 책은 참전했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생존자 다섯 남자의 회고록이다. 그녀의 강조점은 생존자들이 전사한 그들의 전우들만큼이나 심한 충격을 받은 사상자들이라는 것으로, 그녀는 전쟁 중과 전후 그들의 궤적을 쫓는다.

1917년 6월 8일, 그들 중 한 사람인 포병 로널드 스커스(Ronald Skirth)는 모든 전우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았다. 사방이 피범벅이었지만 그의 악몽에 나오는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은 독일인이었다. 그 독일인은 소년이었고 작은 언덕에 앉아 있었다. 그 소년은 분명 지갑 속에 있던 부모님과 여자친구 사진을 보다가 죽었는데, 그 여자는 훗날 아내가 된 스커스의 여자친구와 매우 닮아 보였다. 그 여자의 사진에는 “나의 한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한스를 죽였는가? “내가 쏜 포탄이 그를 죽였을 리 없다. 그랬다면 그의 몸은 다른 이들, 다른 것들처럼 부풀어올라 터져버렸을 것이다. 그는 탄환 충격으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라고 스커스는 썼다. 스커스는 포탄을 쏘고 있었다.

또 다른 생존자 E.P.F. 린치는 젊은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1921년 연습장 20권에 연필로 놀랍도록 생생한 전쟁 회고록을 썼지만, 시장(market)이 장군과 정치인의 자기정당화를 요구하고 실제 전쟁 기억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쓰라렸던 기간에는 출간되지 않았다. 린치가 죽고 20년이 흐른 뒤인 2002년 그의 손자는 린치의 회고록을 영화제작자이자 군사 전문 역사가인 윌 데이비스(Will Davies)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그것을 편집해 [[솜 진흙탕]]으로 출간했다.

데이비스는 소개글에서 자신은 린치의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르지 못한 언급과 인종적 서술”을 완화하려는 유혹을 거부했다고 썼는데, 독자는 그것 때문에 처음 몇 쪽만을 읽고도 곧바로 역겨움을 느끼겠지만 나는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고 본다. 린치를 실은 군수송선이 케이프타운(Capetown)으로 가는 도중에 멈춰 섰을 때 “깜둥이들은 고함을 질렀고 우리를 불렀다.” 그들은 페니를 원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몇 페니를 던져주고 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군가 1실링을 내보이며 거구인 깜둥이 두 명에게 다시 싸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고 다시 한 번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에 싫증이 나자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동전을 빨갛게 될 때까지 달궈서 던졌고 그 결과를 보며 박장대소했다. 기껏해야 몇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이 괴이한 에피소드에 관한 서술과 같은 것이야말로 전쟁에 관한 린치의 솔직하고 호소력 있는 글이 가진 힘이며, 우리는 점차 그와 그의 동료들을 걱정하면서 그들이 보았던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진흙탕에 빠진 한 남자를 구하려고 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그는 “난도질 당해 엉망이 된 시체”였다. 그는 깨끗하게 반으로 절단되어 있었고 가슴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피투성이에 석고처럼 굳은 그의 육체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젊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의 회고는 대다수 영국인의 서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바로 쓰라리고 격한 환멸을 결여하고 있다.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을 목격하고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입은 영국 군대는 슬픔을 안고 귀국했다. 그들 중 일부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조국이 그들의 희생을 존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 역시 방식은 달랐지만 똑같이 상처 입은 삶을 살았다. 어머니, 아내, 여자형제, 연인들은 죽은 자들을 애도했고, 자신들이 지킨 소수의 낯설고 상처 입은 남자들을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전쟁만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떤 전쟁도 제1차 세계대전처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했다. 1920년대 초만 하더라도 혁명은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나이든 남자들이 다시 권리를 주장하면서 혁명은 점차 시들어갔지만, 1945년 이후 전쟁과 싸운 세대가 마침내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적 합의와 복지국가는 애틀리(Attlee)와 맥밀런(Macmillan)에 의해 수행되었고, 발을 질질 끄는 것으로 유명한 맥밀런의 걸음걸이 — 1960년대 풍자작가들에게는 큰 선물이었던 — 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역사가들에게 그 전쟁은 여전히 균형 잡힌 시각으로 되돌아보면서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과 우리 사이에는 학문적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네 권의 책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여전히 그 전쟁을 고통과 열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1914년 수상 애스키스(Asquith)는 말했다: “전쟁은 언제나 폭도들에게 인기가 좋다.” 당시에는 그 말이 사실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결코 그렇지 않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우리에게 쓰라리고 실제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출처: The Guardian, 2008. 5. 17.

번역: 라티오 출판사

성자 뒤의 여인
Eamon Duffy

John Guy, A Daughter’s Love: Thomas and Margaret More, Fourth Estate, 2008.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가장 사랑받았지만 동시에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잉글랜드 정치가라는 점에서 처칠에 견주어지곤 한다. 그를 연구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에게서 천재와 영웅 둘 다를 발견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인 모어는 1516년에 출간한 [[유토피아(Utopia)]]에서 서구 문화의 위대한 우화들 가운데 하나를 창조했다. 모어는 변호사들 가운데는 드물게 정치가였으며, 전제적인 왕이 강요하는 그릇된 서약을 묵인하기보다는 참수당하는 편을 선택할 만큼 흔들림 없는 청렴한 인물이었다. 가톨릭교도들에게 그는 교회 통합을 위해 희생된 결연한 순교자였다. 로버트 볼트(Robert Bolt)와 같은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는 “사계절의 사나이“, 이데올로기에 맞선 개인적 양심의 주창자였다.

그러나 이와 명백히 모순되는 또 다른 모어가 있다. 이 인물은 1529-1533년에 점차 높아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파도에 맞서 백오십만 자에 달하는, 때로는 신랄한 논증을 퍼붓고, 이교도들에 대한 추적과 처형을 열정적으로 정당화한 논쟁적인 저술가였다. 모어는 대법관이 되기 전에도 금서들을 찾아내기 위한 단속에 앞장섰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로 의심되는 자들을 심문하는 일에 관여했고, 대법관 임기 중에는 이단 혐의를 받은 여섯 명 중 세 명에 대한 화형을 집행하겠다는 영장에 개인적으로 서명했다. 이러한 모어는 그를 찬양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튜더 왕조 시대의 가톨릭 전기작가들은 그의 경력 가운데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는 쪽을 택한 반면 프로테스탄트 저술가들은 존 폭스(John Foxe) 이래로 그를 고문가이자 광신자라고 비난했다.

존 가이는 지난 50년 동안 대다수 다른 잉글랜드 역사가들보다 모어의 위대함을 학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 모어의 공적 경력에 대한 그의 1980년 연구(The Public Career of Sir Thomas More는 십여년 동안 모어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저서였다. 가이는 튜더 왕조의 혼란스러운 초기 정치에서 모어가 수행한 역할을 밝혀내고, 계몽적이고 혁신적인 대법관으로서의 토머스 경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전에는 경시되었던 많은 문헌을 이용했다. 모어의 삶과 평판에 대한 그의 2000년 연구(Thomas More)는 여전히 최선의 입문서이다.

가이의 새 책은 이러한 저술들의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을 포함하지만 그 호소력은 매우 다르다. [[딸의 사랑(A Daughter’s Love)]]은 모어와 그의 맏딸 마가렛(Margaret)에 대한 이중 전기이다. 모어는 여자아이도 남자아이만큼 교육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한참 앞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이 아들들과 똑같은 교양 교육을 받도록 했다.
신동이었던 마가렛은 라틴어와 희랍어에 숙달해 당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아버지의 친구인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텍스트들을 교정할 수 있었다. 1524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시행하게 될 검열법에 저항하여 에라스무스가 쓴 [[주의 기도에 대한 성찰(Meditations on the Lord’s Prayer]]의 뛰어난 번역본을 출간했다. 모어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상담자가 되어 그의 사유를 공유했으며 은밀히 아버지가 입었던 참회의 마모직(馬毛織) 상의를 빨았다.

그는 모어가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마지막이자 가장 적합한 위안 상대였다. 모어가 자신의 독방에서 썼던, 일부는 목탄불에 그을려 조각만 남은 일련의 숭고한 편지들 가운데 가장 친밀하고 솔직한 편지는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버지가 처형당한 후에 그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런던교의 대못에 걸려 있던 모어의 머리를 구했다. 결국 그는 그것을 자신의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그의 가장 귀중한 보존 행위는, 마침내 마리 영왕 치세에 인쇄된 위대한 2절판에 대비해, 런던탑에서 쓴 편지들로 감동적인 절정에 달한 아버지의 모든 영어 저술을 모은 것이었다.

가이는 재능과 위대함이라는 측면에서 모어의 경쟁자로서 마가렛을 매우 높게 평가하며, 그가 모어라는 인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자료 대부분을 제공했다고 본다. 그는 눈감아줄 수 있는 과장을 섞어 마가렛이 없었다면 그의 아버지는 “단지 역사의 또 다른 각주”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그는 마가렛의 탁월한 희랍어 학식과 번역에 근거하여 마가렛을 튜더 왕조 초기 잉글랜드에서 틴들(Tyndale)의 것에 필적하는 신약성서 번역본을 내놓을 수 있었던 정통 가톨릭교도로 본다. 가이는 이 점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헨리 왕조의 주교들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물론 그녀는 여자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결코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회고담으로 모어에 대한 초기 전기작가들에게 최선의 자료를 제공한 마가렛의 남편 윌리엄 로퍼(William Roper)를 모욕한다. 가이는 그를 부인의 성취로 명성을 얻은 기회주의자로 본다. 그는 가부장제를 맹목적으로 신봉하여 모어의 정치적 삶에서 마가렛을 “덮어버렸다”는 이유로 모어에 대한 최초의 전기작가인 성직자 니콜라스 합스필드(Nicholas Harpsfield)를 비난한다. 이는 전혀 공정하지 못하다: 합스필드는 제한된 사료를 가지고 작업했으면서도 마가렛의 학식과 선한 성품 그리고 토머스의 “가장 중요하고 거의 유일한 세속적 위안”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열광적으로 칭찬했다. 그럼에도 가이의 책은 모어의 가장 중요한 관계에 적절한 초점을 맞춘, 모어의 삶에 공감하는 전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모어에 대한 가이의 공감은 몇 가지 측면에서 놀랍다. 가이의 이전 작업은 그의 훌륭한 스승 제프리 엘튼 경(Sir Geoffrey Elton)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인 모어의 종교적 견해에 대한 열광의 결여를 공유했다. 그러나 이번 저작에서 가이는 따뜻하고 탄복하는 어조로 모어에 관해 저술하며, 모어가 분명 영웅이었고 심지어 성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몇 가지 유보조건을 유지한다. 그는 모어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저술들을 따분해하며 그 맹렬한 표현을 거부한다. 그는 튜더 왕조 시대의 논박들 가운데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은 모어의 [[이교도들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Heresies)]]를 두고 “매우 중요하다”는 입에 발린 말을 한다. 그러나 이 기지 넘치고 강력한 논증을 펼친 책에 대한 그의 열광에는 확신이 없으며, 그는 이 저작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폭력의 정당화에 초점을 맞춘다. 가이는 모어의 복잡한 인성 가운데 이러한 측면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탐색하지 않은 채 이전의 이상에 대한 배반으로만 본다.

가이의 책은 인쇄된 자료에 대한 독보적인 지식뿐 아니라 기록보관소들에서의 새로운 작업에 근거한다. 이 책은 지식을 가볍게 전달한다 — 각주는 없으며 학식은 뒷부분의 도서목록에 대한 에세이 안에 감추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 따뜻하고 생생한 초상화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전문가도 읽을 만할 것이다.

Eamon Duffy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기독교 역사학 교수이다.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 경(1478-1535)은 런던시의 주 장관 대리로 정치적 삶을 시작하여 승진을 거듭해 하원 의장이 되었으며 이후 1529-1532년에는 대법관을 지냈다. 1516년에 펴낸 [[유토피아]]는 책 제목이 하나의 술어가 되었다.. 그는 헨리 8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한 지 400년 후인 193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처형대에 올라서서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이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 죽는다고 말했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7. 18.

번역: 라티오 출판사

물, 어디에나 있는 물: 이 신선한 역사는 우리가 마시기에 충분한 것을 제공한다
Jonathan Gibbs

Rupert Wright, Take Me to the Source: In Search of Water, Harvill Secker, 2008.

밀레투스의 탈레스에 따르면 “만물은 물이다.” 우리의 신체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 전체의 2/3가 물로 이뤄져있다는 사실은, 물이 인간생활의 모든 요소들 — 정치, 종교, 예술 그리고 학문 — 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주제를 아우르는, 물에 대한 책을 쓰는 일은, 웃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면, 바보같은 짓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우리가 무시하는 것만큼 우리가 취하는 것이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물의 즐거움 — 목욕할 때 아이들이 물장구 — 과 그것의 무서운 면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1931년 중국 황하에서 일어난 홍수는 “어디든지 백만에서 사백만에 이르는” 인명을 앗아갔다.

“물을 찾아서”란 부제가 달린 Rupert Wright의 개관은 독자들에게 개인적인 관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세계은행에서 물 문제에 관해 일하면서 그의 관점은 더 세련돼졌다. 정치인들이 수질보건 관련 팜플렛을 망쳐놓았던 우간다에서 일했던 경험과 슬럼가의 가족들이 하루치의 식수를 배급받기 위해 길 모퉁이에서 기다리던 뉴델리에서의 여행을 그는 회상한다. 물은 깨끗하고 이용이 자유롭지만, 그곳의 아이들은 학교 바깥에서 식수를 실은 물 탱크를 줄지어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Wright는 거대한 스케일의 물 관련 프로젝트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놀랄만치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는 경고를 포함한 10개의 계율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사람은 그들이 먹을 물을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다. 배송비용을 지불하고도 물의 낭비를 막기에 충분한 비용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1983년에 전임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Boutros Boutros-Ghali의 “앞으로 서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정치가 아닌 물과 관련해서 일어날 것이다”라는 발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라크에서 두 차례의 전쟁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확실히 물 때문이 아니었다고 반문할 수 있다.

환경정치를 다루는 부분은 이 책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나는 지하수의 최대 매장지인, 여러 대수층帶水層에 관해 배운 것이 만족스러웠다. 몇몇은 유익했지만 몇몇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예시의 나열이나 숨겨진 이야기가 아닌, 사실과 전체적인 지도를 원했다. 이러한 산발적인 접근은 독자들에게 피상적인 인상만 남길 수 있다. Wright는 미네랄이 함유된 깨끗한 물을 검사하며 수맥탐지업자가 자신의 정원을 살펴보게는 하지만, 현상을 속속들이 조사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이들이 어떤 감명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조지아 주 의회의사당의 중앙 단상 위에 서서 이 지역의 사상 유례없는 가뭄을 끝내고자 기도하고 있는 Sonny Perdue 주지사의 엉뚱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세계은행은 그에게 연락을 줄 것이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7. 22.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