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nt and the Early Moderns

Editors: Daniel Garber, Beatrice Longuenesse
Paperback: 276 pages
Publish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August 20, 2008)
Language: English
ISBN-10: 0691137013
ISBN-13: 978-0691137018

Review
이 책은 근대철학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여가 될 것이다. 글쓴이들은 선행 철학자들에 대한 칸트의 비판을 면밀하게 살펴보면서 칸트와 근대 초기의 사상가들, 즉 데카르트, 로크, 라이프니츠, 버클리, 흄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Edwin McCann,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Product Description
지난 200년 동안 칸트는 철학사와 근대 초기 지성사에 관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렌즈 — 더러는 왜곡된 렌즈였지만 — 역할을 해왔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로크, 버클리, 흄에 관한 칸트의 저술은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칸트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편집자들은 세계의 주도적인 철학사가들의 글을 묶어냄으로써 칸트를 선행하는 사상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

기고된 글들은 몇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첫번째 글은 칸트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로크, 버클리, 흄의 철학적 사상에 직접 관련을 맺는 것을 논의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은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러한 초기 철학자들에 좀 더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고 칸트의 독해를 반성함으로써 그들 본래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근대 초기 인식론, 형이상학, 심리철학으로부터 칸트의 비판철학으로의 “초월론적 전환”을 형성하는 논쟁에 관한 풍부하고도 복합적인 그림이다.

기고자들은 다음과 같다. Jean-Marie Beyssade, Lisa Downing, Dina Emundts, Don Garrett, Paul Guyer, Anja Jauernig, Wayne Waxman, and Kenneth P. Winkler.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개인 컴퓨터에서 티셔츠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위해 세계가 값을 치르다
Jeremy Seabrook

Confessions of Eco-sinnerFred Pearce, Confessions of an Eco-Sinner: Tracking Down the Sources of My Stuff, Beacon Press, 2008.

오늘날의 거대한 이주현상 — 지방에서 도시로 이전하거나 지구상의 변두리 지역을 버리고 떠나는 — 을 살펴보면, 영국의 산업화 초기에 일어났던 현상이 전지구적인 규모로 단순히 되풀이 되고 있다고 결론짓기 쉽다. 세계화의 드라마가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던 격변을 세계적인 무대에서 재상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한가운데로 떠난 피어스Fred Pearce의 여행담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제국권력의 경험은 “개발”이라는 거대한 채취사업이 구축될 수 있었던 반영부半影部인 “내륙지역hinterland”에 의존하였다. 오늘날 맹렬한 속도로 이루어지는 산업화는 이러한 공급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이 때문에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지역이 전례 없이 자신들의 — 그리고 다른 — 정부에 의한 내부 식민주의에 고통 받고 있다.

피어스가 찾는 것은 매우 단순해 보인다. 그는 운송되는 상품과 일상생활에서 받고 있는 서비스와 같은 “물건”들이 실제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어한다. 이것들을 생산하는데 관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이런 것들이 어떤 상황 아래서 우리의 세속적인 즐거움이라는 정원에 기적적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피어스는 인류에 대해서 염려하는 만큼 환경적 발자취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다.

그는 일모작으로 인해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으로 덮인 논을 가진 그리고 중개인, 마피아, 정치인들의 조직이 가난한 자들을 위협하는 방글라데시의 적막한 새우 농장으로 떠난다. 그는 여성 노동자들이 시간외 근무와 과도한 노동, 학대에 저항함에 따라 폭력사태가 일어났던 의류공장을 방문한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소금기 가득찬 불모지로 향하는데, 그곳에서는 목화가 아랄해를 집어 삼키고 있다.

피어스는 금으로 된 그의 결혼반지의 기원을 지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남아프리카의 드리폰테인Driefontain의 광산에서 찾는다. 그는 컴퓨터, 파란색의 곰 인형, 신발, 가짜 유화 그림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는 중국의 모든 도시들을 찾아간다.

과학저술가인 피어스는 지구가 망가지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 없어 하는 것을 손만 쥐어짜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녹색당원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위적인 구조와는 다른 맥락 — 이것이 업계에서는 업계에는 현실적인 세계로 알려져 있다 — 에 우리의 일상 생활을 가져다 놓으며, 삶의 유용한 것들을 선전할 때 거의 드러나지 않는 관계를 밝히고 있다. 경이로운 그의 여정 — 항공여행으로 180,000km라는 — 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에너지로 입증된다. 그는 시베리아의 유전에서, 마닐라의 매춘굴에서, 말레이시아의 익명의 야자기름 일모작에서 그리고 에이즈에 시달리고 있는 스와질란드에서 취재한 것을 보고한다. 불안정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다른 지역을 착취하고 소진시키는 것과 결부시키는 이 연결망에 대해 “무언가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피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해지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탄소를 상쇄하는 것에서, 중고의류를 탄자니아의 사업가에 판매하는 것에서, 다카의 의류 공장으로 이주했던 시골 여성의 삶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개선된 것에서 그 유효성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해답”을 찾는데 이르면 피어스는 절망적인 열심 녹색당원만큼이나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그는 다루기 힘든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 “국제적 공동체”로 단합되는 포괄적인 “우리”, 신뢰할 수 없는 일인칭 복수로 물러서고 있다. 세계의 보상물이 분배될 때 “우리와 그들”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대체물이 없을 정도로 자원을 소진하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환기시킴으로써 생존이 위협받는 조건에 처하면 인류가 단결할 것이라는 생각을 맹신하고 있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신들의 숙명을 실현하지 못한 것처럼 인류 생존을 위한 가장 최근의 청사진도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이 밝혀졌으니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를 제외한, 버려진 컴퓨터에서 금속을 회수하기 위해 산酸에 손을 담그는 델리의 어린 노동자들, 사우디 아라비아 황실의 쾌락에 빠진 이들, 아프가니스탄의 양귀비 재배자들, 워싱턴의 무기 판매상들, 그리고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끝나는 시점에서 존재했던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노예화된 사람들이 포함된 이들에게는 초기 자본주의보다 더 위험한 현 상황에서 어떤 구원의 대리인도 없는 것이다. 이들이 연합하는 일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무력한 노동자들이 연합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쓴 시브룩의 최근 저서로는 Consuming Cultures (New Internationalist) 가 있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6. 20.

Unwritten Philosophy

원제: The Unwritten Philosophy and other essays

지은이: F. M. 콘퍼드
옮긴이: 이명훈
판형: 신국판 변형; 216페이지(13,000원)
발간일: 2008년 7월15일
ISBN: 9788996056119

<<쓰여지지 않은 철학>> F. M. 콘퍼드, 이명훈, 라티오 (#ISBN9788996056119)

도서안내
희랍철학의 거장 콘퍼드가 말하는 서양고전의 기반

이 책의 저자인 F.M. 콘퍼드는 [[종교에서 철학으로]](남경희 옮김)와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이종훈 옮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희랍철학 연구의 대가이다. 앞의 두 저작과 달리 [[쓰여지지 않은 철학]]은 그동안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지 않았던 콘퍼드의 논문들을 모은 유고집이며, W.K.C. 거스리가 회고문을 쓰고 편집하였다. 거스리는 이 저작에 실린 논문들 중 [쓰여지지 않은 철학]이 콘퍼드의 탐구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보아, 책의 제목을 ‘쓰여지지 않은 철학’으로 정했다. 콘퍼드에 따르면, 작품을 남긴 작가들 혹은 철학자들은 거미처럼 짜놓은 자신의 작품 뒤에 몸을 숨기기 때문에, ‘숨어있는 철학자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 진정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콘퍼드의 제자이기도 한 거스리는 박종현 교수가 번역한 [[희랍철학입문]]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희랍철학사]]의 원저자이다. [[희랍철학사]]는 거스리를 세계적인 학자로 알려지게 만든 총 6권의 대작으로서 희랍철학에 관하여 방대하면서도 매우 엄정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희랍철학입문]]은 서양고전, 특히 희랍철학이 낯설었던 때에 일찍이 우리에게 그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충당했으며, 고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는 지금도 필독서로 읽힌다.

거스리는 콘퍼드를 “새로운 탐구를 하는 데 전혀 피곤해 하지 않는” 학문적 열정을 지닌 학자로 회고한다. 이러한 열정적 태도를 가졌던 콘퍼드는 당대가 옹호하는 개념이나 견해에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근본적 가정을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았다. 어느 시대이고 어떤 쟁점에 대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벗어날 수 없었던 유산을 간직하고 있기에, 콘퍼드는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유산으로 전해져 오는 것들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서 철학으로]]에서 “명료한 철학적 진술에 이르는 사유의 양식은 이미 신화의 비추론적 직관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의 탐구가 내적으로 ‘선先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의 영혼만이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가졌으며, 이 영혼은 자신이 본래 있던 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영혼이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이 있다. 아래로 가는 길은 영혼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 영혼 바깥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끌려가는 길이다. 그것이 권력과 금력일 수도 있지만, 다수가 받아들이는 믿음일 수도 있다. 어떤 믿음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영혼이 제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성, 그것은 영혼이 처음부터 있었고 나중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그런 영혼으로 사는 삶이 ‘영혼불멸의 삶’이 되겠다. 그렇다면 불멸하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자는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자라야 하지 않겠는가. 콘퍼드의 이 글들이 그러한 통찰과 결단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차례
1. 문학과 철학에 깃든 무의식적 요소(1921)
2. 천체의 음악(1930)
3. 쓰여지지 않은 철학(1935)
4. 플라톤의 국가(1935)
5. 플라톤의 [[향연]]에 나타난 에로스(1937)
6. 희랍의 자연철학과 근대의 자연과학(1938)
7.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서 제의(祭儀)의 기반(1941)
8. 고대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1942)
부록: 콘퍼드의 고전학 관련 연구목록

저자 소개
콘퍼드(Francis Macdonald Cornford, 1874~1943)는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의 펠로우를 지냈으며, 1931년에 고대철학에 관한 권위있는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로렌스 석좌교수가 되었다. 희랍철학의 대가이자 플라톤 저작들에 관한 탁월한 주석서로 유명하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종교에서 철학으로]](남경희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5),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이종훈 옮김, 박영사, 2006)가 있다.

옮긴이 소개
이명훈은 충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연구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몇몇 대학 강의와 희랍고전 강독을 하고 있다.

<<쓰여지지 않은 철학>> F. M. 콘퍼드, 이명훈, 라티오 (#ISBN9788996056119)

이 책의 저자인 F. M. 콘퍼드는 <<종교에서 철학으로>>(남경희 옮김)와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이종훈 옮김) 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희랍철학 연구의 대가이다. 앞의 두 저작과 달리 [[쓰여지지 않은 철학]]은 그동안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지 않았던 콘퍼드의 논문들을 모은 유고집이며, W.K.C 거스리가 회고문을 쓰고 편집하였다. 거스리는 이 저작에 실린 논문들 중 <쓰여지지 않은 철학>이 콘퍼드의 탐구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보아, 책의 제목을 ‘쓰여지지 않은 철학’으로 정했다.

콘퍼드의 제자이기도 한 거스리는 박종현 교수가 번역한 <<희랍철학입문>> (#ISBN9788930606127)의 원저자이자 아직 번역되지 않은 [[희랍철학사]]의 저자이다. [[희랍철학사]]는 거스리를 세계적인 학자로 알려지게 만든 총 6권의 대작으로서 희랍철학에 관한 방대하면서도 매우 엄정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희랍철학사]]는 아직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희랍철학입문]]은 서양고전, 특히 희랍철학이 낯설었던 때에 일찍이 우리에게 그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충당했으며, 고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는 지금도 필독서로 읽힌다.

거스리는 콘퍼드를 “새로운 탐구를 하는 데 전혀 피곤해 하지 않는” 학문적 열정을 지닌 학자로 회고한다. 이러한 열정적 태도를 가졌던 콘퍼드는 당대가 옹호하는 개념이나 견해에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근본적 가정을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았다. 어느 시대이고 어떤 쟁점에 대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벗어날 수 없었던 유산을 간직하고 있기에, 콘퍼드는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유산으로 전해져 오는 것들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서 철학으로]]에서 “명료한 철학적 진술에 이르는 사유의 양식은 이미 신화의 비추론적 직관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의 탐구가 내적으로 ‘선개념(先槪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다.

당대는 그 이전 시대와 ‘선개념’에 바탕을 두고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일관되고 기본적인 콘퍼드의 입장이다. 가령 [문학과 철학에 깃든 무의식적인 요소]라는 논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논문에서 콘퍼드는 역사가에 대해 비판을 가하려면 그가 이미 처음부터 취하고 있는 사유양식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즉 경제학이 태동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된 사유양식에 대해 먼저 살펴볼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과거도 없고 전통도 없는 인류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던 것이다. 철학이나 그 외의 학문들이 신화에서 곧장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통로를 거치되, 어느 한 개인과 무관하면서도 그들 각자가 무의식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무의식적인 상태를 동일한 원천으로 하여 각 학문의 영역이 일정한 통로를 거쳐 나아가게 된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2장에서 다루는 [천체의 음악]은 시작부터 아베크 족의 정서를 느끼게 한다. 달빛이 어려 있는 분위기에서 사랑하는 두 연인의 달콤한 속삭임이 이어진다. 매우 감상적이다. 그러나 주제는 엉뚱한 쪽으로 흘러간다. 살을 맞대고 몸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려할 텐데 이야기의 흐름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은 티끌이다. 그러니 한낱 부질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티끌이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조화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질서를 가진다는 것은 한계를 가지는 것인데, 그 한계지음이 무한에 대한 척도가 된다. 그리하여 무한과 어우러짐이 되는 것이다. 티끌과 같은 몸이 영혼의 불멸성과 어우러지지 않는 한, 몸은 그저 티끌일 뿐이다. 수학자들의 영혼을 넘치는 기쁨에 빠져들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 천체가 어떤 굉음소리를 낸다면 누군들 그 굉음소리를 듣지 못하겠는가? 그렇지만 천체의 음악은 소리 그 자체가 아니다. 물질로 된 어떤 전달체가 아니므로, 그것을 물질과 관련되어 있는 소리로 보는 한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연인들의 속삭임이 천체의 음악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서구사상사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2장의 논문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3장의 논문 [쓰여지지 않은 철학]은 콘퍼드의 철학적 탐구 자세를 보여준다. 우나무노(Unamuno)는 “철학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찾기 위해 철학적 탐구를 한다”고 말했다. 콘퍼드는 이 점을 거미와 그물의 비유로 설명한다. 거미가 짜 놓은 그물은 당대의 작품이다. 그러나 철학자인 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을 남긴 작가들 또는 철학자들은 거미처럼 그물 뒤편으로 몸을 숨긴다. 숨어있는 철학자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이 진정으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흔하게 받아들이는 개념들은 실상 각 시대마다 같을 수가 없는데, 자신들의 시대에서 취하고 있는 관점이나 개념이해를 기준으로 지난 시대의 저작을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탐구자세가 된다고 콘퍼드는 경고한다. 그 예로서 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시대마다 다르고 또 당대에는 이러한 추상적 개념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4장의 논문에서 다루는 플라톤의 [[국가]]는 그의 참스승인 소크라테스의 평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의 고민은 그의 스승이 겪은 생애에 있다. 한번도 다른 사람을 옭아매려고 한 적도 없는 소크라테스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터무니없이 옭아매여 죄를 뒤집어 쓰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다. 대화편을 통해 스승의 길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대립되는 인물은 칼리클레스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포기하고 일상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할 것”을 충고한다. 그런데 이런 칼리클레스는 결국 플라톤의 시각에서는 소크라테스와는 정반대로 “신의 친구도 인간의 친구도 될 수 없는 강도와 무법자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결국 알려진 바와 같이 플라톤은 철학적 소양을 갖춘 정치가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이 장에서는 플라톤이 경험한 현실과 고민 그리고 인간의 유형에 따라 어떤 공동체가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다.

5장의 논문에서 다루는 주제는 ‘에로스’이다. 넓게 보면 열정이고 좁게 말하면 욕구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모든 형태의 욕구가 지닌 충동”을 가리킨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흐름이 어떤 곳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거기서 얻는 즐거움도 달라진다. 지식을 향해 있을 때는 영혼이 간직한 즐거움을 향해 간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치닫는 욕망으로서의 에로스도 있게 마련이다. 위로 향해 나아가려는 욕망은 각 단계마다 날아가기 위해 날개가 자란다. 그것은 프시케가 에로스에게서 받는 날개이다. 그렇게 해서 날개를 달고 날아가서 도달하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4장에서 본 칼리클레스와의 대조를 통해 인간의 영혼이 어떤 곳을 향해 가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 편에서 철학자는 ‘왕 중의 왕으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다. 칼리클레스는 힘과 권력으로 다스리기는 하겠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왕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칼리클레스는 태양과도 같은 신을 보고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물을 수조차 없다. 이런 물음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명실상부하게 왕 중의 왕으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할 것이다.

6장의 논문에서는 고대의 자연철학과 근대의 자연과학을 비교한다. 고대의 자연학은 ‘사물의 본성에 관한 탐구’이다. 세계는 생명체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진화형과 창조형으로 나뉘게 된다. 진화형은 데모크리토스에서 볼 수 있고, 창조형은 플라톤이 추구하는 도덕적 철학적 유형의 자연철학이다. 어느 것이 되었든 당대로서는 관찰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원초적 무질서의 상태를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질서가 원초적 무질서에서 생겨나고 생명이 태어났는지를 본 적도 없다. 그리하여 고대의 자연철학과 근대의 자연과학을 방법과 목적에 따라 구별해서 다룬다. 자연철학은 “무엇이 실제로 궁극적으로 있는가?”에 대한 탐구라면, 근대의 자연과학은 “세계의 만물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탐구이다. 이런 주제들이 왜 탐구의 목표가 되는가에 따라 콘퍼드의 논의를 따라가면 그가 지닌 탐구의 열정도 함께 느끼게 된다.

7장의 논문은 헤시오도스의 계획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다룬다. 우선, 신들의 여러 세대를 구분한다. 그리고 우주생성론으로서 질서의 형성과 인류의 탄생에 주목한다. 셋째는 최고통치자로서 제우스를 논의의 중심에 놓는다. 신들의 계보에 따른 각종 일화는 서로 별개로 되어 있는 조각들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 연결되는 이야기라는 점을 콘퍼드는 입증한다. 그렇게 해서 [창세기]는 마르두크 신화에 대한 야훼의 반성이듯이, 헤시오도스의 우주생성론은 제우스의 신화적 찬미에 대한 합리적 반성이 된다. 야훼가 리바이어던을 살해하고 마르두크가 티아마트를 살해하는 것은 ‘기묘한 환상’도 아니고 근거 없는 사유도 아니다. 별개로 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므로 배경이 없었던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논문에서 콘퍼드는 최근의 두 저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을 고대철학에 적용해서 살펴보고 있다. 당시 역사개념은 노동계급의 운동이라는 ‘새로운 사실’에 의해 바뀌게 된다. 엥겔스는 적대계급의 탄생은 당대의 경제적 지위의 산물이며 이것이 실질적인 기반을 이루며, 이를 토대로 각 시대의 종교적·철학적 및 그 외의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정치적인 제도의 전반적인 상부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진술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콘퍼드는 이런 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적어도 일부 철학적 개념이 어떤 점에서는 매우 애매한 구절로 된 사회적인 기원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파링톤과 톰슨의 두 저서를 검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우선 파링톤이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지지하는 세 가지 이유를 검토한다. 즉 원자론이 과학적 참이고, 물질적 진보에 공헌하고 나아가 박애주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지지를 보낸다. 이런 이유에 적합하기 때문에 원자론은 대중의 철학으로서 플라톤의 철학과 대립을 이루게 된다. 플라톤의 철학은 ‘선전활동’이고 ‘고상한 거짓말’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리가 아닌 것을 참지 않으려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거짓을 증오’하는 철학으로서 플라톤이 참스승으로 모신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수난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철학을 물질론적인 기준에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 콘퍼드가 취하는 입장이다. 지혜에 이르는 길이 좁고 설령 그 길을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진리의 문에서 그것을 통과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점이 플라톤의 입장임을 강조한다. 상대성 이론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듯이 지혜에 이르는 길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래서 지혜의 길은 소수정예만을 위해 마련된 길도 아니다. 나아가 지혜는 ‘지배계급’이 비밀리에 거래하는 것일 수 없으니 결코 고상한 거짓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시대가 가진 시각에서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당대 저작을 그 작가의 정신에서 읽는다는 것은 고전읽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콘퍼드의 [[쓰여지지 않은 철학]]은 희랍철학뿐 아니라 나아가 고전학을 대하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한 콘퍼드의 이 글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대답을 암시해주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한번 생각해보자. ‘운동의 비운동, 비운동의 운동.’ 이 말은 고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콘퍼드의 [[쓰여지지 않은 철학]]을 읽으며 나는 다소 엉뚱하게도 이런 고상한 언표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저 문장에 한두 글자를 보태서 ‘운동권의 비운동적 삶, 비운동권의 운동적 삶’이라고 해 보자. 자극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 학문과 사회의 괴리,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있었다. 이런 괴리와 갈등양상을 보며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질을 묻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통찰했다. 콘퍼드도 그 통찰을 알았기에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업적을 기리거나 철학적 탐구가 인간의 활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개인에게는 위로 가는 길과 아래로 가는 길이 열려 있기 마련인데, 공동체를 위한다고 해서 그것이 위로 가는 길이요, 개인을 위한다고 해서 아래로 가는 길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만이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가졌으며, 이 영혼은 자신이 본래 있던 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영혼이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이 있다. 아래로 가는 길은 영혼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 영혼 바깥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끌려가는 길이다. 그것이 권력과 금력일 수도 있지만, 다수가 받아들이는 믿음일 수도 있다. 어떤 믿음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영혼이 제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성, 그것은 영혼이 처음부터 있었고 나중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그런 영혼으로 사는 삶이 ‘영혼불멸의 삶’이 되겠다. 그렇다면 불멸하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자는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자라야 하지 않겠는가. 콘퍼드의 이 글들이 그러한 통찰과 결단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7월
이명훈

문화: 고급문화, 저급문화, 중류문화, 그리고 대중문화
Mark Henrie
2004. 10. 15.

내용 요약
‘문화’라는 관념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문화’라는 말의 용례는 아주 많아 그 말이 관념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실체를 가진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문화’라는 답이 나오는 질문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다문화주의’와 ‘문화 전쟁’을 살펴보자.

다문화주의에 따르면 문화들을 판단할 초월적 입장은 없다. 문화란 그 자체가 완전한 ‘전체’로, 그 안에 나름의 판단 기준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문화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의 산물을 이해할 초월적인 시각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얼핏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나 전통적인 교양교육과 다문화주의는 의도하는 목적이 아주 다르다. 전자는 판단력이나 식별력을 날카롭게 다듬으려 하고, 후자는 그러한 구별을 없애려 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다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미적이거나 지적인’ 무언가를 가리킨다. 이러한 문화는 특정한 집단이 공통으로 보유하는 것으로,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화는 구별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문화인이란 고급과 저급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문화란 통합과 분리, 공통성과 구별 모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문화 전쟁’에서 문화는 무엇보다 ‘도덕적’ 의미로 쓰인다. 문화란 우리가 공통으로 갖는 도덕이라는 것이다. 미합중국에서 ‘문화 전쟁’은 공통의 도덕적 지평의 상실과 그에 대한 두 가지 반응, 곧 찬양과 반동을 포함한다. 오래된 전통의 지지자들이 도덕적 반항자들을 새로운 공통성을 벼리려는 집단으로 이해하게 된 바로 그 순간에 미합중국의 ‘도덕적 위기’는 ‘문화 전쟁’이 되었다. 문화란 특정한 공통성이다.

문화와 정치 중 무엇이 우선하는가? 고전시대에는 정치가 문화에 우선했다. 그러나 계시종교가 출현한 이래로 ‘사회적’인 무언가가 정치 영역 외부에서 등장했고, 이는 상당 부분 ‘컬트cult’가 도시의 주권적 감독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문화(culture)라는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했을까? 문화는 유럽혁명시대 이후의 범주이다. 그리고 ‘문화’는 — 우리가 문화를 경험하는 문제적 방식으로 — 자유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애초에 ‘공적인 것res publica’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완전한 삶의 방식을 구성했다. 기독교는 개인들을 공적인 것에서 떼어낸 후 상이하고 더 높은 수준에서 공통의 지반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자유주의 체제는 사람들을 ‘개인들’로 추상화함으로써 정치와 문화를 분리했다. 한때 정치적 삶은 공동체의 열망을 반영하고 표출했지만, 자유주의 체제는 그와는 다른 것 — 개인들의 의지의 총합? 최소공통분모? 최고악을 피하자는 합의? 자유롭고 평등한 거래를 위한 전제조건? — 을 표출했다.

문화의 문제는 이러한 전개의 결과이다. 따라서 문화라는 답이 나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정치가 한때 자신의 자율성이라고 선언했던 공동선의 잔여물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문화는 공통의 무언가에 관해 공적으로 더 말하려는 공통된 열망의 표현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문화의 범위가 줄어드는데, 이는 공동선, 인간의 선 또한 위축된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고급문화, 저급문화, 중류문화, 대중문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대중문화(mass culture)는 대중들에게 호소하여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생산된 문화이다. 곧 유기적으로 연결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인들을 위한 문화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모조리 대중문화 — 저급문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문화 — 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중류문화 역시 고급문화인 척하는 대중문화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고급문화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문화는 ‘공통성’에 뿌리 박고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것’에서 등을 돌리는 것은 문화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 공동체의 공동선을 표상하는 것이며, 이심성(離心性)이 아니라 중심성이 진정한 문화의 표어이다. 이러한 문화 내에서만이 고급이 저급을 이끄는 방식으로 고급과 저급이 공존할 수 있다. 따라서 수도사가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수도사는 그들 자신의 공통성에 뿌리 박고 있으면서도 가장 공통적인 것들을 길러내기 때문이다.

전체 번역문: Mark Henrie, Culture
출처: The Intercollegiate Review

번역: 라티오 출판사

난해한 개념들
최근에 한 독자가 나에게 공부에 관한 조언을 요청해왔다. 그는 흔하지 않은, 난해한 문헌을 다루는 강좌에서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그 개념들이 많았고, 이해하기가 미묘하며, 불명확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표준적인 퀴즈와 답변으로는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가 없는 상황이 분명했기에 나는 그 독자에게 불완전하지만 내가 선호하는 공부 기술인 집중적 결합 방법(focused cluster method)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아직 충분하지가 않다. 독자들이 재빨리 알아챘듯이, 각각의 핵심들이 나선형으로 꼬이면서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즉각적인 문제들이 생기는 것처럼, 수많은 방식으로 연결된 수많은 자료들이 있다. 다시 봐야 할 문제들이 매우 많이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제안할 만한 다른 기술을 갖고 있는데, 바로 내가 미니 텍스트북 방법이라 부르는 접근법이다. 이것은 퀴즈와 답변이나 집중적 결합 방법보다는 느리지만, 난해한 자료를 다루는 강좌에 괴로워하는 학생들에게 거의 틀림없이 자료를 정복하는 최선의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미니 텍스트북 방법
상당한 분량의 난해한 자료를 다루는 강좌에 맞닥뜨렸을때, 노트를 텍스트북 스타일의 챕터 묶음으로 줄여라. 실제 텍스트북처럼 적어라.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완결된 문장과 논리적 설명을 사용해야 한다.(그러나 이것이 글쓰기를 좋게 하는데에, 혹은 정상적인 문법에 잘 들어맞도록 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오로지 당신을 위한 일이다.)

목적은 요약과 종합에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적어도 매주마다 챕터를 간결하게 노트에 정리하는 것이다.

표본 챕터에 포함되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다.
* 챕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개념에 대한 높은 수준의 설명
* 정의들의 목록
* 중요한 사상, 이론, 구성에 대한 유익하고 간결한 설명
* 이전 항목과의 연관 혹은 비교와 대조를 통해 얼마나 다른 요소들이 있는지에 대한 논의

챕터 쓰기 과정 그 자체는, 우리가 방대한 노트를 재검토하기 쉬운 일관되고 촘촘한 형태로 변환시킨 구조로 구성하는, 강력한 재검토가 된다.

그 과정의 다음 단계는 이러한 챕터들의 각각을 위한 즉석 노트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챕터의 기본적인 개요를 기록한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재검토를 한다. 챕터 별로 내용에 상응하는 개요를 궁리한다. 선호하는 워드 프로세서를 가동시키고, 개요를 안내지로 삼아, 메모한 것에서 텍스트북의 챕터에 대한 새로운 초안을 쳐넣는다. 원래의 챕터를 들춰보면 안 된다.

노트를 하는 우리의 목적은 원래의 챕터를 정확하게 옮겨적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우리는 잘못 읽었을지도 모르는 텍스트를 매번 보지 않고 쓰는 일을 한다. 핵심은 우리의 개요에 들어있는 모든 사상, 정의, 연관 그리고 논의들을 스스로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납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한 다음에는, 결과물을 원본 텍스트와 대조하여 체크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퀴즈를 내고 답변하는 식으로 조사하고 또 조사하라.

왜 이런 방법인가
난해하면서 두꺼운, 상호연관적인 자료를 다루는 강좌에서 이러한 방법의 이점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자료를 텍스트북 챕터로 압축시키는 것은 재검토할 정보의 양을 줄여준다. 종합된 챕터는 집중적 결합 방법과 같은 기술에서 사용되는 즉각적인 문제 유형의 길고 방대한 페이지 목록보다 훨씬 간결하다.

둘째, 표본 텍스트북의 챕터를 타자로 치면 소리내어 설명하는 것보다 빠른 검토가 가능하다. 말로 하는 것보다는 타자로 침으로써 난해한 사상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치는 것과 함께 필요할 때에는 문단을 편집할 수 있고, 구조에 조사하고 재배열할 수 있다. 반면에 말하는 것은, 개념들이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힌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끊기기가 쉽다.

신중하게 사용하기
많은 상황에서 이 기술은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강좌에서, 다소 늦더라도, 메모한 것으로 자신의 텍스트북을 쓰는 일은 실질적으로 자료를 제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출처: Study Hacks

번역: 라티오 출판사

다윈은 어떻게 진화론 경쟁에서 승리했는가   
Robin McKie

다윈이 과학사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이라는 가장 획기적인 발견을 한지 150년이 지났다. 그러나 다윈의 독창적인 연구는 지구 반대편의 한 젊은 조류학자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로빈 맥키Robin McKie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에 감추어진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1858년 초, 말레이 제도 터네이트Ternate 섬에서 한 젊은 표본 채집가가 매우 잡기 어려운 이 섬의 극락조를 추적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이후에 그는, ‘매일 오한과 잇단 고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워서 내가 특별히 관심 갖고 있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머리 속은 돈이나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질병과 기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떻게 이것들이 인구를 제한하는지, 그리고 지구의 나이가 광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근의 발견들을 생각하였다. 그는 영겁의 시간 동안 되풀이되는 이 죽음의 물결이 어떤 영향을 미쳐 서로 다른 종들을 만들어 내는지가 궁금했다.

열이 내려가자 영감이 떠 올랐다. 그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변종들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 남아 마침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연선택 이론이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 중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열병처럼 떠 오른 것이다. 월리스는 그의 생각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그 당시 박물학자로 이미 유명했던 다윈에게 보냈다. 이 서신은 1858년 6월 18일 그러니까 150년 전 지난 주에 켄트의 다운Downe에 있는 다윈에게 전달되었다.

다윈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20년 동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해왔는데, 이제 다른 사람이, 오늘날 고생물학자인 굴드Stephen Jay Gould가 ‘자연사에 가장 위대한 이념 혁명’이라 부른, 또는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인간의 심상에 떠오른 가장 중요한 생각’이라고 말한 연구로 그 공적을 가로 챌 지도 모르게 된 것이었다. 고통 속에서 다윈은 친구인 식물학자 후커Joseph Hooker와 지질학자 라이엘Charles Lyell에게 편지를 썼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과학사에서 전설이 되었다.

후커와 라이엘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대한 주장을 보호해 주기 위해 피카딜리의 벌링톤 하우스Burlington House에서 린네 학회를 열어 두 사람의 연구물을 같이 살펴보았다. 7월 1일 학회 회원들이, 지금은 왕립 아카데미의 일부가 된 방에 역사상 다른 어떤 것보다 인류에게 모욕적이며 문제를 일으킨 이론에 대해 듣고자 모였다. 정확히 150년 전 다음 주, 마르크스의 생각보다 더 급진적인 개념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맨 처음에 다윈과 월리스가 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린네 학회 회원들의 환호에 맞추어 웅변적인 연설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측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월리스는 여전히 말레이 제도에 있었고 다윈은 집에서 그의 아내 엠마와 함께 6월 28일 성홍열로 죽은 19개월 된 아들 찰스때문에 비통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젠틀맨으로 구성된 청중들이 있었다. 다윈과 월리스의 노트와 논문, 서신들을 읽은 후 그들은 몇 시간 동안 학회업무의 몇몇 항목들을 가지고 심한 말다툼을 하였다. 역사가인 무디JWT Moody가 그 모임에 대한 1986년의 연구에서 묘사한 것처럼 회원들은 ‘새로운 개념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기보다 자신들에게 쏟아진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 채 결국 자리를 떴다. 인류가 창조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소식을 맞이한 것은 지루한 침묵이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아주 하찮은 지적인 대응도 없었다. 린네 학회장 벨Thomas Bell은 1858년에 대한 검토에서 ‘과학분과에 즉시 혁명을 일으킬 어떤 놀라운 발견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도화선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유전학자 존스Steve Jones는 ‘월리스의 편지가 다윈을 한 방 먹였다. 다윈은 20년 동안 얼버무리려 했고, 다른 사람이 유사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 다음 20년도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윈에게 1858년 여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결코 거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윈은 자신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왕립 학술원 금메달 수상자였고 말레이 제도에 있는 애송이 표본 채집자에게 굴복 당할 수는 없었다. 그의 긴 다리에 알맞은 집안에 있는 유일한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판을 놓고 지난 20년 간의 연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다윈 탄생 200주년과 더불어 출간 150주년을 내년에 맞이할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놀랍게도 이 글은 중요한 자연과학 논문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쓰여진 저서로 그 엇갈려 짜인 줄거리가 엘리어트George Eliot 혹은 디킨스Charles Dicken의 작품에 비교되어 온, 독창적인 은유가 풍부한 책이다. 다윈의 전기를 쓴 브라운Janet Browne은 ‘다윈은 영원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였다’고 말했다.

이번 8월에 BBC 채널 4에서 방영할 다윈 시리즈에서 도킨스는 이러한 칭송을 되풀이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종의 기원]]을 읽을 때 다윈이 몹시 이해 되길 원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윈은 그저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이 진리라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그가 그렇게 하려고 몹시 애썼기 때문에 이 책이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문장이 현대의 기준으로는 좀 지루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책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선택을 확신하는 이러한 서술이 이해되기 쉬웠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생생한 형태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다윈이 걱정했던 비통에 찬 격분에 찬 반응도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오래 전에 다윈을 가르친 선생 세지윅Adam Sedgwick는 그의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완전히 거짓이며 극도로 유해’하다고 말했다. 다윈을 보호하기 위한 후커, 라이엘, 헉슬리Thomas Huxley 등으로 이루어진 다윈 지지자들의 모임은 1860년 6월 옥스퍼드 영국 고등과학협회에서 벌어진 헉슬리와 윌버포스Wilberforce 주교간의 유명한 논쟁으로 정점에 오르게 된 싸움을 시작하였다. 헉슬리는 졸업생의 3분의 2가 성직자가 되는 기관에서 윌버포스를 이겨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헉슬리의 결정적인 ‘승리’의 본질이 지금 여러 역사가들에게 문제되고 있지만 형편없는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동점으로 비겼다고 평가했다. 다른 한편으로 변화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으며 [[종의 기원]]의 출간이 이 변화를 가속화시켰음은 분명하다. 그 때까지 자연세계에 대한 권한을 가진 교회는 그 토대를 잃어가고 있었으며 과학이 그 자리를 물려 받고 있었다.

‘그 다음 몇 십 년에 걸쳐 다윈의 옹호자들이 영국과 미합중국의 지성계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브라운은 기록하고 있다. ‘세기말에는 그들이 의회, 국교회, 대학, 정부처, 식민지의 관청, 귀족, 해군, 변호사들과 의사 등 영국과 해외 전역에 퍼졌다.’ 이들은 자연선택론이 지속되도록 지켰으며, 다윈이 1882년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히게 되는 사실 — 불가지론자라고 시인한 이에게는 과히 나쁘지 않은 — 에서도 이를 볼 수 있었다.

다윈의 초상이 10파운드 지폐에도 있듯이 그는 현재까지 숭배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월리스는 잊혀졌다. 그는 기꺼이 다윈과 그의 친구들이 자연선택론을 널리 알리게 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것이 제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명한 이를 알았고 그를 도왔다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혹이 막연하게나마 남아있다. 보잘것 없는 집안 출신으로 독학한 월리스는 성공한 의사였던 부친이나 대학교육 등과 같이 다윈에게 주어진 특권 중 그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는 견습 목수로서 자신의 길을 닦아야 했으며 저명한 박물학자가 되기 바로 전에는 토지 측량기사로 훈련 받았다. 그는 또한 초기 사회주의자였고 여성의 참정권 및 토지개혁 운동을 지지했으며 매우 숙련된 저술가였다. 콘라드Joseph Conrad는 월리스가 8년 간 그 지역에서 지내며 저술한 보고서인 [[말레이 제도The Malay Archipelago]]를 침대 곁에 두고 그의 작품들 —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로드 짐Lord Jim]]이다 — 을 쓰는데 이 책을 참조하였다.

그러나 월리스는 운도 없었고 성격도 형편없었다. 그의 최초의 원대한 표본 채집 탐험인 아마존 행은 영국으로 귀환하는 배에 화재가 나 그의 수입원이 될 수천 개의 표본과 함께 가라 앉음으로써 대실패로 끝났다. 월리스는 몇 권의 노트와 아마존에서 가져 온 앵무새만 지닌 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월리스는 충동적이었다. 다윈이 그의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여 이 이론이 그의 아내를 포함한 기독교 신자들을 당황케 할 것을 알고 출간을 유보했다면, 월리스는 돌진하여 기꺼이 사회를 뒤집어 놓으려 하였다. 작년에 [뉴욕커]에 월리스에 대한 글을 쓴 로젠Jonathan Rosen은 그가 그런 일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여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 그가 대중들의 의식으로부터 거의 잊혀진 여러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월리스는 (다윈과 그의 친구들이 경멸한) 심령술을 믿었고 나중에는 종두 반대운동을 벌였다. 어텐버로우David Attenborough는 ‘월리스는 감탄할 만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성인같았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그는 다윈에게 필적할 수 없었다. 월리스는 수 주 동안 말라리아 열에 들떠 자연선택에 관한 이론을 생각해 냈다. 다윈은 이론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엄청난 정보들을 모았다.’

역사가인 엔더스비Jim Endersby도 이러한 지적을 뒷받침한다. ‘자연선택 이론은 놀라운 생각이었으나 그것이 믿을만 했던 것은 다윈이 제공한 증거의 양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윈을 자연선택 이론의 제일의 창시자로 기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31년에서 1836년까지 비글 호를 타고 세계일주 항해를 하면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공책을 그가 관찰한 것들,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의 각기 다른 섬에서 본 밀접하게 관련된 동물들에 대한 관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다운의 거대한 정원에서 난초를 교배하고 시계풀을 재배했으며 종종 지렁이가 진동에 어떤 반응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바순을 연주했다. 그는 자신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것을 입증하고자 동식물의 번식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러나 월리스는 이와 같은 것들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라해도 다윈과 그의 지지자들이 월리스를 망하게 하려고 더러운 책략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멈춘건 아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다윈은 그가 주장한 것보다 몇 주 전에 월리스의 서신을 타네이트로부터 받았고 그 내용을 슬쩍 훔쳐 자신의 것인양 [[종의 기원]]에 썼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20년 전에 미합중국에서 출간된 브랙만Arnold Brackman(A delicate arrangement: the strange case of Charles Darwin and Alfred Russel Wallace)과 브룩스John Langdon Brooks(Just before the origin: Alfred Russel Wallace’s theory of evolution)의 책들에서 약술되었는데, 이 책은 다윈을 파렴치한 기회주의자이며 지적 절도범으로 그렸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 모두 설득력이 없으며 그 후 학계의 대다수가 이들의 주장이 공평하지도 믿을만 하지도 않다고 결론내렸다.

Alfred Wallace월리스의 전기(Alfred Russel Wallace: A Life)를 쓴 래비Peter Raby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어떤 흥미로운 이론도 빈약한 증거 위에 세워질 수는 없다. 인간적인 요소로 보자면, 다윈의 생애에서 그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지적 사기를 칠 수 있었을 거라는 주장을 펼 어떠한 요인도 없다. 그가 특별히 자신의 이론에 대한 출처와 신세 진 부분에 대해 인정할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실상 역사가들은 다윈이 아니었다면 자연선택 이론이 매우 손상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윈이 자연선택 이론을 발전시킨 최초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월리스가 명성과 주목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이론은 매우 다른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결국 월리스는 더 높은 힘이 때때로 진화를 이끈다고 믿게 되었다’고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 판으로 곧 출간 될 [[종의 기원]]의 편집자 엔더스비는 덧붙인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이 인간정신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인류는 동물의 왕국 외부에서 다루어지는 힘에 의해 영향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위험하게도 현대 창조론자들이 내놓은 개념, 신이 진화의 과정을 지휘하였다는 지적인 설계 개념에 근접한다. 정반대로 다윈이 보는 상은 엄격하여 굴드가 서술한 것처럼, 인류는 ‘삶이라는 거대한 나무모양의 관목의 작은 나뭇가지에 불과하며, 이것이 종자로부터 다시 심어진다 해도 다시 이 나뭇가지로 자라날 수 없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을 암시했다. 다윈에 따르면 어디에도 인류를 위한 탈출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박테리아나 거북이처럼 자연선택의 법칙에 매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용서할 수 없는 이론의 근원지는 매우 인간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다윈의 삶과 경력은 꼭 맞물려 있었다. 그는 참으로 가정적인 인물이었고 1858년에는 아들 찰스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겨 있었다면 1851년에는 10살 난 그의 딸 애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고 다윈의 고손자인 케인즈Randal Keynes는 그의 책 [[애니의 상자: 찰스 다윈, 그의 딸과 인간진화Annie’s Box: Charles Darwin, his daughter and human evolution]]에서 밝히고 있다. Annie's Box겨자 습포, 브랜디, 표백분, 암모니아가 애니가 아프기 시작 할 당시 줄 수 있는 약의 전부였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애니가 1851년 4월 23일 ‘한 숨도 내쉬지 못할’ 때까지 겪은 구토와 정신착란을 낫게 하지 못했다. 다윈은 ‘노년의 나이를 위로하는 집안의 기쁨을 잃었다’고 회상했다.

케인즈는 애니의 죽음이 다윈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다. ‘생의 말기에 애니의 얼굴이 치명적인 병으로 수척해져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하는 것을 다윈은 지켜 보았다. 무자비한 자연의 힘에 매달려 본 사람만이 삶의 진정한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윈은 진화를 추동하는 용서 없는 과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몇 년 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기쁨에 차서 빛나는 자연의 얼굴을 본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하는 일 없이 지저귀는 새들이 곤충과 씨앗을 먹고 살며 따라서 삶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거나 잊어 버린다. 혹은 얼마나 많은 노래하는 새들이나 그들의 알들이나 그들의 갓 태어난 병아리들이 새들과 맹수에 의해 잡혀먹는지 잊어 버린다.’ 그가 다른 곳에 적었듯이 ‘모든 자연은 전쟁이다.’

맹목적인 계기가 생존투쟁과 진화과정에서 결정적 요인으로 강조되는 이와 같은 무자비한 생각은 근면과 자조를 굳게 믿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1세기 반 동안 관찰을 통해 옹호되어 왔고 지금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자연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것은 즐거운 과정이 아니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자연선택론은 과학이론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주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소수이나 사회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집단에 의해 주기적으로 거부당하고 공격받고 있다. 이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 빅뱅 이론,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별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나 인류가 나머지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다거나 원숭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생각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런던 대학의 유전학 교수 존스는 ’20년 전에는 이러한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요즘에 수 십 명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 때문에 진화에 대한 강의를 듣지 않겠다고 요청하고 있다. 심지어 이 학생들은 내가 자연선택이 객관적인 사실들로 입증된다고 말하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멘델의 유전 법칙을 믿는지 물어본다. 물론 그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DNA의 존재를 믿냐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인간과 침팬지가 DNA의 98퍼센트를 공유하고 있는 것을 믿냐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자연선택이 뭐가 잘못되었냐고 하면 그건 다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정말 모르겠다.’

도킨스도 이와 같은 당황스러움을 겪고 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이 만년도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규모의 질서에서 보면 틀린 것이다.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이다. 이들은 그냥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무지하다. 그러나 나는 상식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존스 역시 동의하고 있다. ‘지나가는 단계다. 20년 안에 이러한 터무니 없는 생각은 없어질 것이다.’ 존스는 자연선택은 너무 중요해서 이것 없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생태계의 문법이고 우리 지구상의 무수한 동식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을 생물학자들에게 제공한다. 어텐버로우도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그의 [지구상의 생명Life on Earth] 프로그램은 다윈주의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대자들은 자연 선택이 관찰이나 실험에 근거한 이론이 아니며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고 증명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글쎄, 그렇지 않다. 이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이론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1066년 일어난 헤이스팅스의 전투를 증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전투가 그 때 일어난 것을 알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구상의 진화의 과정이 다윈이 옳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음을 안다.’

다윈과 월리스의 이론: 4가지 핵심적인 부분
1. 동일한 종의 생물체는 유전된 방식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것은 변종으로 알려졌다. 다윈이 상세하게 연구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거대한 거북이 그 사례이다.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이 거북들 중에 일부는 다른 거북보다 긴 목을 갖게 될 수도 있다.

  1.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생물체들이 태어난다. 이것이 생존경쟁이다.

3. 동일한 종의 일부 생물체는 그 종의 다른 일부보다 생존과 번식을 더 잘 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갈라파고스 거북의 경우에 긴 목을 가진 거북은 풀을 먹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고 이 특성은 가뭄이 들어 먹을 풀이 없게 되었을 때 유용할 것이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1. 이 우세한 특성은 다음 세대로 전해져 쌓이게 된다. 오랜 기간 동안 새로운 생물체가 서서히 나타난다. 이것이 종들의 기원이다. 갈라파고스 제도 중 더 건조한 섬들에서 더 높은 가지까지 몸을 뻗칠 수 있는 거북이 나타난 것이 종의 기원이다.

우연한 발견: 다윈의 행운
찰스 다윈의 이름은 자연 선택과 돌이킬 수 없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론에 연루된 것은 미리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비글호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였는데 곧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게다가 그가 배 위에서 수행한 직책에는 기원이 있었다. 박물학자 자리는 비글호의 함장인 피츠로이Robert Fitzroy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댄 것이었다. 피츠로이는 타고난 뱃사람이었지만 토리 당원으로 1822년 8월 12일 자신의 목을 그어 죽은 외삼촌 카슬레이 자작의 자살에 사로잡힌 우울한 사람이었다. 피츠로이는 자신도 동일한 자살 성향을 물려받아 항해 중 어느 때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5년의 여행기간 동안 의기소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동반자, 즉 다윈에게 돈을 지불한 것이었다. 다윈은 피츠로이의 ‘의기소침’이 어느 때는 정신이상에 가까웠다고 회상했다. 따라서 다윈의 장기간의 여행은 한 사람의 유전적 정신이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보수당 정부의 원로의원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의 조카는 가문의 광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테고 그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도와 줄 박식한 동반자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사도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다윈주의라는 용어는 알려지지 않았을 터이고 오늘날 우리는 자연선택을 이야기 할 때마다 월리스주의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윈의 존재는 유익했었던 것 같다. 피츠로이는 무사히 돌아왔고 후에 기상청이 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해상기상예보 지역) 기구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살에 대한 공포는 빗나가지 않았다. 1865년 4월 30일 우울한 나머지 그는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했다.

간략한 진화론의 역사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그들이 말한 것

서기전 6세기
종이 변할 수 있고 다른 종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윈과 월리스가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하기 전에 존재했다. 예를 들면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초보적인 진화 개념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생각이 심각하게 논의된 것은 식물학과 지질학이 발전한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박물학자에게 문제는 단순했다. 신이 모든 유형의 생물체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떤 한 유형의 동물 혹은 식물이 다른 유형으로 변화한 것일까? 어떤 과정이 진화를 추동 한 것일까?

1800
최초로 제안된 작동기제 중 하나는 프랑스 박물학자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동물이 사는 동안 획득한 형질을 다음세대에게 물려준다고 주장했다. 근육이나 긴 목을 발달시킨 동물은 이 형질을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진화론을 유도해 낸 최초의 적절한 시도였다. 라마르크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이론은 과학의 엄밀한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꼬리가 잘려 나간 고양이들의 일족이 꼬리가 없는 고양이들로 진화하지는 않는다. 이 생각이 20세기까지 중요한 과학적 개념으로 존속하였지만,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1830-1833
종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작동기제의 발전에 주요한 또 다른 사건은 1830년에서 1833년까지 3권으로 출간된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였다. 라이엘은 지구의 역사는 단기간의 격렬한 변환이나 대이변이 아닌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일어난 점증적인 변화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지구가 영겁의 시간 동안 일어난 부식, 퇴적물의 형성, 바람의 영향 그리고 다른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 작은 변화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런 통찰력이 박물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1858
월리스와 다윈의 이론들이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읽혀졌다. 지구 상의 야생 생물에 대한 관찰이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다윈은 비글 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동안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 책은 갈라파고스와 다른 지역의 동식물에 대한 다윈의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월리스의 경우에는 아마존과 말레이 제도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1865
1859년 출간된 [[종의 기원]]에는 유전학에 대한 이해라는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이 결핍되어 있다. 이 지식은 멘델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는 1865년 식물을 연구하여 유전학의 법칙들을 발전시켰다. 유전학의 기본단위는 유전자로 이는 자연선택을 강제하는 힘이다. 그러나 멘델의 법칙은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주류 자연과학계에서 간과되었고,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연선택을 입증하는 유전학적 작동기제가 이해되었다.

1953
크릭Francis Crick과 왓슨James Watson은 개미에서 고래까지 모든 생물체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질인 DNA(디옥시리보핵산)의 2중 나선구조를 풀었다. 이 발견으로 과학자들이 자연선택이 분자 단위에서 벌어지는 영향을 상세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출처: The Observer, 2008. 6. 22.

번역: 라티오 출판사

Damasio’s Error and Descartes’ Truth: An Inquiry into Consciousness,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Author: Andrew Gluck
Paperback: 100 pages
Publisher: University of Scranton Press (June 15, 2007)
Language: English
ISBN-10: 1589661273
ISBN-13: 978-1589661271

Product Description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에 의해 제시된 정신과 육체의 관계 문제는 아직도 철학자들에게 근본적인 논쟁거리이다. 이 책에서 Andrew Gluck는 Antonio Damasio의 저작 Descartes’ Error에 대해 다차원적인 응답을 구축하고 있다. Gluck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Damasio의 책에서 발견되는 중립적이고 일원론적인 주장을 비판하면서 적응이론(adaptive theory) — 자연과학에서는 물리적 일원론, 사회과학에서 이원론, 미학에서는 중립적 일원론 — 을 옹호하고 있다. Gluck의 저작은 역사적 논쟁에 있어서 새로운 의의가 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

Author : Antonio R. Damasio
Paperback: 336 pages
Publisher: Harper Perennial; 1 edition (November 1, 1995)
Language: English
ISBN-10: 0380726475
ISBN-13: 978-0380726479

From Library Journal
정신은 육체와 분리된 실체라는 생각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언명한 이후부터 서구 문화에 심오한 영향을 끼쳐왔다. Iowa대학에서 인지심리학과 인간의 뇌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Damasio는 감정과 정서가 인간의 합리성에서 수행하는 중심적인 역할에 관한 논증을 가지고 이 전제에 도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동일한 뇌 구조가 인간의 생물학과 행동을 규율하며, 이는 정상적인 인지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Damasio는 전두엽 피질에 손상을 입은 환자(자신의 환자는 물론 19세기 철도 노동자인 Nicholas Gage)가 효과적인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서를 더이상 만들어내지 못함을 논증하고 있다. 재능있는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Damasio는 Oliver Sack 스타일의 르포르타쥬를 복잡하고 이론적인 신경과학의 주제들과 잘 결합시키고 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 1999년 한국어판 출간, 현재 절판 상태.

|국내 관련 도서|
올리버 색스(지음), 조석현(옮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이마고, 2006.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더 많은 가라오케를!”
Justin Wintle

Daniel A. Bell, China’s New Confucianism: Politics and Everyday Life in a Changing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문화대혁명 동안에, 유교는 마오쩌둥에게 혐오받았던 ‘중요한 조타수’ 중의 하나였다. 최근에 들어서 — Daniel Bell의 저서가 섬세하게 탐구하고 있는 바와 같이 — 유교는, 적어도 떠들기를 좋아하는 부류에서 만큼은 재조명받고 있다. 마오쩌둥의 붉은 책(Little Red Book) 이래로 어떤 출판물도 위딴(于丹)이 편집한 논어선집만큼 널리 읽히지 않았다. 중국의 대학들에서도 공자를 다시 가르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에 앞서, 중국 정부는 포스터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도 베이징의 거주민들이 외국인에게 유교적 “올림픽 문명”을 홍보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모범적 개체”의 전형인 문명은, 중국이 마오쩌둥에게 물려받은 도덕적 공백을 채우려는 것으로서 문제가 되는 이슈이다. 신흥 부유층들은 (대개의 경우 한 명뿐인) 자녀와 그들 자신을 위하여 “문명 사회”로의 복귀를 모색하고 있다. 유교는 자식에 대한 애정은 물론 어른에 대한 “존경”까지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유서깊은 가치를 마음 속에 심어주는 일은 어른들에게 뚜렷한 이익이 있다.



베이징에 있는 칭화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Bell은 중국인들의 변화하는 태도에 대해 적절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는 강의실에서, 거리에서, 혹은 가라오케에서 공산주의 이전 전통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되살아나는 징후를 발견한다. 후자는 특히 Bell의 주의를 끈다. 유학자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진, 긴밀한 유대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특성은 가라오케 바에서 명백해지고 있다. 호스티스가 성 뿐만 아니라 조화로운 대화까지도 제공한다면, 그것은 군자가 충분히 바랄만한 것이다. 그는 서기전 5세기의 자신의 제자들에게 만족스러워하며 말했었다. “나는 외면적인 아름다움보다 덕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Bell이 논의하듯이) 그러한 조합은, 호스티스에게 이익이 되는 ‘고용기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가족을 유지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궁극적인 유교적 선이다. 남편이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지만 머지않아 그 가정이라는 토대로 돌아온다. 의료기관 종사자들과 여성주의자들은 불쾌할 수 있지만, Bell은 문화적 차이들을 날카롭게 감지한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정치적 방향이다. 그는 그것이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니지만 거기에서 굉장한 포괄성을 감지한다. 그는 내적 탐구로서 유학에 대한 위딴의 시덥잖은 재조명을 평가절하하면서 장칭을 높게 평가한다. 장칭의 유교적 정치는, 선출되지 않은 현명한 연장자들이 정부에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의심할 바 없이 사회주의적이었다.



Bell이 우리에게 꺼내놓는 흥미롭고도 놀라운 이야기 중에는 자유주의 철학자에 의해 미합중국화된 유교와 근대 간의 대화가 있다. ‘Hu 교수’는 소크라테스적 방법을 ‘비판적 사고’를 위한 수단으로서 촉구하지만, 유교는 이미 그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방법은 과다한 지식을 습득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학생들을 불필요한 스트레스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그는 반박한다.

[[중국의 신유학]]은 어떤 도식적인 개관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 저작은 중요한 오늘날의 경향에 대한 세련되고 통찰력있는 잠정적인 응답이라 하겠다. 


출처: Independent Books, 2008. 6. 6.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