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우리가 읽고 쓰는 이유》

 

 

AI가 인간의 지능을 앞설 것이라는 기계적 사실의 시대,

인간만이 읽고 쓸 수 있는 ‘진실’에 관하여

 

 

책 읽기는 물론 모든 것의 이유로서 ‘흥미’가 거론되는 요즘이지만, 읽고 쓰는 행위의 근본 목적과 방법은 ‘진실의 소통’이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대화뿐 아니라 문자나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는 텍스트도 진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인간 정신의 매개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명백한 명제를 터득하기 위해 이 책은, 우리가 읽고 써야 할 진실의 의미, 그 진실의 표현 방법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여정은 진실한 한 문장을 쓰고자 세계와 인간을 치밀하게 탐구한 고전 작가들과 진실을 생성하고 존속시키고자 헌신했던 인물들에 관한 탐색이다. 이는 ‘진실’의 의미를 음미하게 하는 이야기들일 뿐만 아니라, 진실한 위인들에 관한 전기이자 그들 작품에 관한 서평이며,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진실에 접근하여 읽고 쓸 수 있는지에 관한 지침들이다.

플라톤의 말처럼 “우리가 어떤 것에 진실성을 혼합해 넣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실로서 생성될 수 없을 것이며, 생성된다 해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기에, 진실의 생성과 존속의 방법에 대한 이러한 배움은 우리를 참된 지성과 감성으로 이끄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진실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과 진실은 서로 밀접하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사실과 진실의 미묘한 차이를 보여 준다. ‘거짓말’이 겉으로 드러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면 ‘선의’는 그 속에 깃든 진실이다. 역사학자 존 아널드는 “역사(history)란 진실한 이야기(true story)”라고 정의한다. 역사는 사실(true) 자료를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그 공백과 빈틈을 역사가의 해석(story)으로 채운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일도 넓은 관점에서는 역사가의 일과 비슷하다. 우리는 사실의 파편들 사이를 이야기와 상상으로 채우면서 삶이라는 서사를 이어 나간다.

 

진실은 때로 허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위대한 작가들이 알아야 했던 시대의 진실은 작품의 진실이 되었다. 진실한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한 글일 수도 있고, 글쓴이가 개연적 요소를 추가하여 재구성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진실을 드러내는 데 사실이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사실을 적으면 된다. 진실을 밝히는 데 허구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만 이야기를 지어 내면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기쁨이나 고통만큼 수많은 보편적 진실이 존재한다

위대한 작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깊은 진실을 본다. 삶과 세상을 통찰하는 직관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온갖 수고와 위험을 감수하며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노고를 쏟아붓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작가들이 우리에게 알려준 진실한 이야기 안에는 수많은 삶의 진실과 세상의 보편적 진실이 담겨 있다.

 

완전한 하나의 진실은 없기에 변화무쌍한 진실에 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진실도 알려고 하는 만큼만 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렇게 보면 이런 면이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런 면이 보여서 완전한 하나의 진실은 보기 어렵고, 그때그때 달라 보이기도 하는 것이 진실의 모습이다. 세계와 삶의 진실은 반듯한 형태보다는 울퉁불퉁한 모습에 더 가깝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참된 것을 하나로 일관되게 꿰뚫어 보려는 적극적인 노력만큼이나, 쉽게 단정짓지 않고 끝까지 여러 가능성을 두루 알아보려는 열린 태도 역시 중요하다.

 

■ 지은이 소개

이강룡은 인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학생이자 선생이다. 학문의 경계를 나누지 않고 폭넓은 지식을 탐구하고자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논픽션 작품들을 좋아하고, 픽션만이 지닌 표현력과 전달력에도 주목한다.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과학의 위로》, 《글쓰기는 한 문장부터》,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같은 교양서를 썼고, 《퍼펙트 레드》 등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정보통신문화신서 공모전에 당선되어 작가로 데뷔했고, DMZ국제다큐영화제 백일장 및 창비 청소년 글쓰기대회 심사위원, EBS 글쓰기 논술 강사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국어 및 세계사 교과서와 지도서 약 20종에 글이 실려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제1부 진실을 쓰기 위하여

  1. 세상을 즐겁게 관찰하다_요한 볼프강 폰 괴테
  2. 위대한 영혼들과 교감하다_슈테판 츠바이크
  3. 보편적 인권을 소명하다_에밀 졸라
  4. 실천을 통해 이론을 완성하다_프리드리히 엥겔스
  5. 모호한 표현을 배제하다_조지 오웰
  6. 사실과 허구를 화해시키다_헤밍웨이와 스타인벡
  7. 실존의 불안을 직설하다_오에 겐자부로
  8. 절박한 순간을 듣고 또 듣다_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제2부 진실을 읽기 위하여

  1. 역사성을 토대로 문자 해독하기
  2. 흔적으로 실체 상상하기
  3. 클리셰에서 상식의 지혜 익히기
  4. 정보를 통해 명료한 지식 넓히기
  5. 통계와 확률로 사실적 미래 전망하기
  6. 진짜를 가짜로 이해하기

에필로그

작업 노트_ 독서 목록을 대신하여

 

■  본문 속에서

괴테가 세상 만물을 두루 관찰하며 세계의 거대한 연관성을 파악하고자 했다면,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위대한 인물들의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 세상을 아는 길이라고 믿었다. 한 민족에 대해서, 그리고 한 시대에 대해서 가장 깊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책을 통해서도 아니고 답사를 통해서도 아니며, 오로지 그 시대의 훌륭한 인물들을 만나 우애를 쌓아 감으로써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런 신념이 있었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기에 위대한 평전 작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_28쪽

스타인벡은 만년에 쓴 에세이 《아메리카와 아메리카 인》에 이렇게 적었다. “모자를 쓰는 방법은 무수히 많지만 철모를 쓰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여러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데, 스타인벡이 보기에 전쟁이 개입된 세상에서 삶은 그 반대다. 모자를 쓰는 다양한 방법이 평화로운 세상의 다양한 행복이라면, 철모를 쓰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전쟁 시기의 획일화된 불행이다. 톨스토이가 본 것과 스타인벡이 본 것, 둘 중 어느 것 하나만이 진실인 것은 아닐 것이다.__87쪽

행위 주체인 주어를 숨기는 화법은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다. 행위 주체를 모호하게 표현하여 독자의 판단 기준을 흐리게 만든다. ‘오해가 있었다’고 시작하는 사과문은 사과하기 싫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어느 단체에서 사과 성명을 내면서 ‘많은 분들이 고통과 불편을 당하신 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같은 식으로 가해자인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기사에 ‘~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같은 피동형 구절이 보이면, 기자가 익명으로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 싶은 거라고 보면 된다. 중요한 대목에 피동형 표현이 많이 나온다면 숨겨야 할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정치 영역에서 언어 표현은 훨씬 더 다의적이고 미묘하며 민감한 문제가 된다._96쪽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때에도 뭔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없음으로 있음을 추정하는 일이다. 빔 프로젝터 제품 광고 중에 ‘캠핑장을 영화관으로!’ 같은 문구가 보인다면 일단 성능에 대한 눈높이는 조금 낮추고 제품을 고르시기 바란다. 밝은 데서도 잘 보일 정도로 성능이 좋은 프로젝터라면 굳이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삼아 광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싼 프로젝터들 광고를 한번 보라, 대부분 대낮 회의실이 배경일 것이다. 모든 상품 광고의 속성이 그렇다. 장점처럼 보이는 것만 드러내지 단점이 될 만한 것을 일부러 표현하진 않는다. 일부러 감출 거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말해 줄 리도 없는 것이다. 가격표가 안 붙어 있다면 일단 저렴한 상품은 아니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물건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판매자가 말하는 것들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_148쪽

이솝 우화가 펼쳐 보이는 진실이란 인생에서 중요한 덕목과 지혜가 아니라, 살면서 눈앞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므로 매사에 그저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경고뿐이다. 이솝 우화에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이 ‘~인 줄도 모르고~ 하다니 내가 이런 일을 당해도 싸지!’라는 뒤늦은 후회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럼에도 이야기들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가 있는데,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라서, 사람을 바꾸어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사람을 잘 가려서 곁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한 생존법이다. 이솝 우화에서는 개과천선 같은 순진한 기대와 바람은 거의 실현되지 않는다. 개울에 떠내려가는 개미에게 나뭇잎을 준 비둘기가 나중에 개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하는 아주 드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받는 이야기보다는 선행을 베풀었음에도 배신을 당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_154쪽

철학자 칸트는 절대 불변하는 뉴턴의 평평한 시공간 개념을 굳게 믿었고, 그런 확고한 믿음 위에 《순수 이성 비판》을 썼다. 학문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칸트가 보편타당한 토대로 여겼던 전제들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는 점이 밝혀졌다. 뉴턴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시공간 개념으로 논박되었고, 유클리드의 절대적 기하 공간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대체되었으며, 논리학과 수론의 완전무결함과 보편성은, 모든 체계에는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항상 존재함을 증명한 쿠르트 괴델(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무너졌다.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속적 운동과 인과율의 세계는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에 자리를 내주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우리 인류가 밝힌 냉정한 현실이요 진실이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새로운 것을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과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_180쪽

다수결은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의사 결정 방식으로 언뜻 보면 공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불합리한 점도 품고 있다. 선거에서 어부지리로 당선된 최악의 후보를 ‘콩도르세 승자’라고 부른다. 프랑스 혁명기에 활동했던 정치학자이자 수학자인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투표 과정의 합리성을 수학적으로 해명하려고 애썼는데, 다수결 방식에 불합리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반드시 포함된다는 점을 알아냈다. 1972년에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 역시 다수결의 원리가 합리적 의사 결정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겉으로 공평해 보여도 모순을 품고 있는 일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_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