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코드

최근 <<아페이론Apeiron>>지에 실린 제이 케네디(Jay Kennedy)의 논문은 플라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발견이 플라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전환시켰고 그에따라 철학과 과학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바뀌었다. 이 발견은 일부 고대 해석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지만 음악, 수학, 그리고 문예 이론에 있어서 플라톤의 선구자적인 역할에 대한 뜻밖의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핵심적인 발견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어떤 철학적 미스터리에서 출발하여 고대의 서적 생산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들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첫째, 미스터리. 몇 세대에 걸쳐 강도높게 연구했지만 플라톤의 대화편과 이를 둘러싼 몇몇 쟁점들은 끈질기게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플라톤의 적극적 철학은 무엇이었는가? 플라톤은 자신 이전의 철학자들의 훌륭한 이야기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직접 밝힌 적은 결코 없었다. 독자들 모두 이러한 플라톤의 익명성 문제와 씨름해야만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플라톤의 핵심적인 주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세우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것 역시 대체로 추측일 뿐이다. 고대와 근대 두 시대에 소수 집단은 플라톤이 적극적 견해를 전혀 갖지 않은 부정적인 회의주의자였다고 결론짓는 가능한 견해의 범위를 예시하였다. 그들에게 플라톤은 뛰어난 선동자였을 뿐이다. 그는 결국 우리 모두 무지한 자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헌신한 것이었다.

왜 플라톤은 고대에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로 여겨졌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플라톤 사상이 형성되는 데는 소크라테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가 더 중요했다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 결국 피타고라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거의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은 플라톤 이전 세기에 밀교 집단을 만든 선지자이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의 추종자였다고 노골적으로 말해 역사가들을 항상 당황케 하였다.

번이트(Myles Burnyeat)가 최근 런던 서평(London Review of Books)에 실은 글에 요약하였듯이 역사가들은 피타고라스의 명성이 매우 과장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이는 더욱더 난감한 사실이다. 피타고라스는 그 유명한 정리를 증명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그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 역시 후대에 날조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의 구성원, 그리고 많은 플라톤의 후대 추종자들까지도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피타고라스의 추종자였다고 주장했다. 버케트(Walter Burkert)는 피타고라스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데 영향을 끼친 한 연구에서 현대의 이러한 난처함을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이 자신들을 피타고라스 이론의 계승자로 본 이유는 추측할 수 밖에 없다”고 요약해버렸다.

대화편은 어떻게 구조화되었는가? 플라톤은 식별할 수 있는 질서가 없는 문서구성을 조롱하였다. 그는 작문은 생물처럼 각각의 부분이 적절한 곳에 위치한 하나의 총체적 유기체여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은 종잡을 수 없고 잡다하며 우회하고 되돌아가는 대화들로 가득하다. 대화 도중 화제를 바꿀 때마다 그 이유가 있고 정리된 질문이나 목표가 더러 나오지만, 대화는 우왕좌왕하는 방식에 맞추어져 있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국가>>는 악명높은 뒤범벅이다. 이 책은 정치 이론에서 문예이론으로, 형이상학에서 수학과 도시계획으로 교육이론에서 신비학으로 이쪽저쪽으로 흔들거리며 진행된다. 많은 학자들은 <<국가>>의 다양한 문체와 주제들이 이 저서가 느슨하게 하나로 꿰매져 있는 구획된 영역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다방면에서 완벽한 문장가인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그의 대작에 대해 어떻게 그리 부주의할 수 있단 말인가?

왜 플라톤의 추종자들은 대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였을까? 고대에서 르네상스 시대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플라톤이 본인의 진정한 철학을 대화편에 숨겼다고 믿었다고 말해도 타당할 것 같다. 신피타고라스주의자, 신플라톤주의자, 르네상스 플라톤주의자 등 다양한 학파들 모두 다양한 의미층을 만들기 위해 상징과 우화가 대화편에 사용되었다는 데 동의하였다. 표면에 드러난 서사는 탐구심을 자극하지만, 상급 학생들은 피타고라스 철학을 담고 더 깊은 곳에 놓여진 상징적 층까지 들어가야만 했다.

타렌트(Harold Tarrant)는 1세기 신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견해를 요약했는데, 이들은 “피타고라스주의 이론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 이론들을 전면에 드러내기 꺼려했던 플라톤의 저서에 숨겨져 있으며, 진정한 피타고라스주의는 플라톤의 텍스트를 심층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게는 신념이 걸린, 피타고라스 형이상학의 구체적인 내용이 숨겨져 있는 플라톤의 텍스트 속에 어떤 난해한 것이 규칙적으로 간파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18세기부터, 성서읽는 훈련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대화 속에는 일관된 상징주의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문자 그대로 읽기를 주장하였다. 퇴폐적이며 미스터리를 파는 추종자들로부터 플라톤을 구하기 위해 이 고대 플라톤주의자들을 한 지적 집단으로 분리하여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신플라톤주의자”로 이름 붙였다.  최근에 더 많은 연구들은 신플라톤주의의 근원을 플라톤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이들의 상징적인 접근 방식은 여전히 이들을 근대 플라톤 연구의 주류 밖에 놓고 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고대의 해석 방식은 매우 기초적이며 플라톤의 상징주의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의 많은 주장들이 경박하며 더 나아가 기괴하기도 하지만 미스터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플라톤에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근접한 이들이 왜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대화편을 상징적으로 읽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왜 플라톤이 구두로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전했다는 소문이 퍼졌을까? 오늘날 유럽 대륙과 영어권의 플라톤 학자들 간에는 주요한 경계선이 있다. 고대에는 플라톤이 “쓰여지지 않은 가르침(unwritten teaching)”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었다.

오늘날 유럽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는 이 가르침이 플라톤의 진정한 철학을 담고 있으며, 이를 그의 추종자들이 전했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튀빙겐 학파의 해석을 대체로 터무니없다면서 폐기하였는데, 이들은 플라톤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그리고 확신할 수 있는 전거는 대화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세이어(Sayer), 딜론(Dillon), 칸(Kahn)같은 일류 플라톤 전문가들은 중도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플라톤이 (그의 “후기 존재론”에서) 비밀스러운 수학적 형이상학을 전개하였다는 단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이론이 지속적으로 비밀스럽게 전해졌다는 데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대화가 가장 우선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 논쟁에서 양측 모두 플라톤의 진정한 철학은 대화에서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보다는 더 비밀스러운 것임에 동의하겠지만, 이는 미스터리를 가중시킬 뿐이다. 이 비밀스러운 철학은 무엇이었으며, 왜 플라톤은 이를 대화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간략한 역사적 여담이 필요할 것 같다. 플라톤은 약 5미터나 10미터 길이의 파피루스 지에 대화를 적어 나갔다. 고대에 문학작품은 일반적으로 대문자로, 띄어쓰기 없이 작성되었다. 즉 단어, 문단 혹은 구절을 나누는 띄어쓰기가 없었고 마침표 역시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다.

이러한 문자들은 보기 좋게 분리된 정사각형의 단 안에 배치되었다. 각각의 단은 일정 수의 정해진 행으로 이루어졌다. 플라톤 이전 한 세기부터 대략 35개의 문자로 구성된 행이 일반적으로 채택되기 시작하였는데, 호메로스의 작품이 이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책의 페이지 수나 글의 단어 수를 세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도 전체 행 수를 세었다. 필경사가 행당 얼마를 받을지 법으로 정했기 때문에 한 작품의 행 수는 그 작품의 필사 가격을 결정했다. 전체 행수를 세는 것이 쉬웠으며, 이 숫자는 흔히 그 작품의 두루마리 안에 명시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거대한 도서관 카탈로그는 각 작품의 길이를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아 있는 기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대략 445,270의 표준 행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플라톤 이후, 헬레니즘 시기 어느 지점에서 필경사가 호메로스 행의 단으로 필사하는 것을 그만두기 시작하였고 가능한 공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여전히 오래된 규범의 행 길이로 텍스트를 측정했으나, 사실 임의적으로 길이를 적용하였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적으로 저술 기술이 발달하여 텍스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읽기 쉬운 모양을 띠기 시작했다.  띄어쓰기와 마침표를 삽입했고 소문자를 사용하여 대문자와 구분하였고 문단을 구분하였으며 장을 매겼고 다양한 종류의 제목을 붙였다.

현대의 플라톤 표준 텍스트인 옥스퍼드 고전 판(Oxford Classical Texts)은 이러한 방식으로 현대화된 것이다. 나는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텍스트를 워드 프로세서로 고대의 판형으로 복원시켰다. 텍스트를 호메로스 행의 통일된 단으로 다시 배열하였으며, 마침표와 띄어쓰기를 뺐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플라톤의 손에 쥐어진 그대로의 대화편을 헬레니즘 시대 이후로 처음 본 것이 나였다.

패턴이 두드러져 보였다. 표준 행과 통일된 단으로 텍스트를 재배열하니 유사한 개념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텍스트 안에서 수학적으로 의미심장한 위치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플라톤 이전의 피타고라스 전통이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우주와 그 안의 만물이 어떤 근본적인 수학적 구조를 가졌다는 생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이들의 멋진 이론에 따르자면, 궤도를 따라 돌고 있는 행성조차 일정한 수학적 음정을 띤 톤의 교향곡을 들려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천체의 하모니”를 지혜로운 자만이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로마의 건축 저술가인 비트루비우스(Virtuvius)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자신들의 텍스트를 수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고 말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전체 길이를 측정해보면 그의 주장에 대한 놀라운 증거가 제시된다. 플라톤의 텍스트가 수세기 동안 필사되는 과정에서 이 텍스트가 1~2퍼센트의 오차 내로 사소하게 누락되거나 수정되었다 하더라도 일부 대화편의 길이는 놀라울 정도로 그 끝이 꼭 맞아 떨어진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1200행 혹은 12 단에 100행

<<프로타고라스>>, <<크라틸로스>>, <<필레보스>>, <<향연>>은 각 2400행 혹은 12 단에 200행

<<고르기아스>>는 3600행 혹은 12 단에 300행

<<국가>>는 12,000행 혹은 12 단에 1000행

<<법률>>은 14,400행 혹은 12 에 1200행

대화편의 중요한 개념과 서사의 전환 역시 대체로 수학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점들 간의 일정한 간격을 부연된 에피소드와 논쟁이 메우고 있다.

일부 대화편은 주변 대화와 명확히 분리된 한묶음의 연설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연설들의 길이와 위치는 쉽게 측정되며 플라톤이 저술하면서 행을 세었다는 더 유력한 증거를 보여준다. 이러한 각각의 증거들이 사소하게 보인다해도, 이어지는 부분에서 바탕에 놓인 구조를 위한 더 체계적인 증거를 구축하고 있다.

여러 사례들 중의 하나를 들자면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연설은 그의 첫 번째 연설에 비해 세배나 길다. 최초의 연설은 7,169개의 희랍문자로 쓰여졌다. 이 수의 세배는 21,507이며 두 번째 연설의 문자 수가 21,508이다.

<<향연>>은 일련의 연설 묶음들이며 행 수에 관한 증거가 특히 풍부하다. 이는수 12가 건축학적 구조상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암시하고 있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연설의 시작은 대화의 12분의 2지점에 놓여있으며, 에뤽시마코스(Eryximachos)의 연설(그의 딸꾹질을 포함해서)의 시작은 12분의 3지점에,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연설의 시작은 12분의 4지점에 놓여있다. 에로스에 대한 찬미가 최고조에 달한, 아가톤(Agathon)의 연설을 결말짓는 미사연구는 12분의 6지점, 즉 대화의 한 중간에 놓여 있다.

1에서 12라는 척도는 <<향연>>의 더 긴 연설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예를들이 디오티마(Diotima)의 연설에는 중요한 지점이 두 번 있는데, 미의 탄생에 대한 서술과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미의 초월적 형상에 대한 설명이 그것들이다. 이 두 부분은 대화가 이어지는 과정 중 12분의 8, 12분의 9지점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 두 부분은 12분의 1 간격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은 즉시 이는 근거 없는 수비학일 뿐이지 않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지난 세대 동안 과학사가들이 자연과학에 선행 했던 유사과학을 반드시 탐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음을 알아야만 하겠다. 근대 화학과 천문학은 연금술과 형이상학에서 기원하였다. 수학은 산술학과 기하학, 수비학과 신비주의, 음악 이론과 형이상학의 이상한 조합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수학의 초기 전(前)-역사에 대한 지식은 플라톤에 대한 이 발견의 단서였다. 나는 철학자들에게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고급과정을 가르쳤고, 수학과 학생들에게는 수학사를 가르쳤다. 최초의, 중요한 통찰력을 갖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두 분야의 결합이었다.

<<국가>>와 다른 대화편에 플라톤의 수비학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 것을 전제할때, 플라톤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비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의외라고 말하는 것은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의 역사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는 희랍수학 혁명의 심장부였다. 플라톤과 그의 학생들은 태양계와 음계의 수학적 이론을 향해 역사적인 걸음을 내디뎠다. 이 선구자들이 때로는 도에 지나치게 수학의 제국을 확장하려 하였으며,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수학을 밀어 붙였다고 말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과학과 유사과학간의 우리의 구별은 최초로 과학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들의 기여에 의거한다.

플라톤이 수비학에 안목 높은 관심을 가졌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플라톤이 수비학을 자신의 대화편을 구성하기 위해 이용하였다는 것을 가정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동료 중 한 명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말한 것처럼, “플라톤이라면 해보았을만한 그런 것이다.”

수비학의 주제는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도 가끔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 학설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정보제공자이지만 피타고라스에 대해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그의 연구는 그가 박식한 문외한이었을 뿐임을 보여주고 있다. 때때로 그의 신랄한 비판은 그가 피타고라스 학설을 전수받은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위에서 숫자 12가 대화편의 구조에 일정한 역할을 맡았다고 말했는데, 더 깊은 탐구는 놀랍고도 근사한 통찰로 귀결된다. 플라톤은 각각의 대화편에 12 음표를 묻어 놓았다. 다시 말해서 각 텍스트의 12분의 1지점에 어떤 상징을, 그리고 12분의 2지점에 이 상징과 연관된 다른 상징을 집어 넣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향연>>에서 “조화롭게 하는 것” 또는 “하나로 혼합하는 하는 것” 이라는 표현은 음표를 표시하는데 쓰였다. 음악적 하모니에 대한 에뤽시마코스의 논의, 아리스토파네스의 진정한 연인들이 하나가 됨, 디오티마의 이상적으로 통일된 미의 형상에 대한 생각 모두 음표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개념의 일정한 패턴이 음계를 형성한다. 각각의 대화에서 다른 유개념이 전개되더라도, 12배수 패턴은 동일하다.

곧 발간될 나의 저서 <<플라톤 대화편의 음악적 구조: 증거에 대한 안내The Musical Structure of Plato’s Dialogues: a Guide to the Evidence>>는 두 대화편에 보이는 음악적 기호들의 패턴에 주석을 달고 있다. 이 패턴들이 수학적으로 규칙적이기 때문에 플라톤의 기호 체계는 정확하고도 엄밀하게 연구될 수 있으며, 이는 더 뜻밖의 발견으로 귀결되는데 이로써 패턴이 음계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널리 알려졌듯이 음악적 조화를 정수 비율과 동일시 하였다. 길이가 2대 3의 비율을 갖는 현악기가 내는 곡조는 음이 잘 맞지만 반대로 7대 2의 비율은 귀에 거슬린다.

플라톤의 친구이자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 학파인 아르키타스(Archytas)와 다른 이들은 이 생각을 일반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음계의 음은 대체로 그 중 가장 마지막에 있는 음과 조화를 이루는지 아닌지에 따라 차례가 정해진다. 12음계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여섯 번째, 여덟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 음은 열두 번째 음과 조화를 가장 잘 이룬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적극적이고 더 “플라톤적인” 개념 — 형상, 탁월함, 올바름, 아름다움, 조화 등 — 은 조화로운 음의 위치에 놓여 진다. 더욱 부정적인 개념 — 악, 부정, 참주, 지하세계 등 — 일수록 더욱 더 불협화음의 위치에 놓여진다.

이것이 플라톤 대화편의 구조에 대한 열쇠이다. 끊임없이 정점을 향해 쌓아나가는 대신, 대화는 각 대화로부터 4분의 3지점에 있는, 조화로운 9번째 음에서 절정에 이르고 이후 일련의 불협화음을 거치면서 점차 쇠약해진다. 따라서 <<향연>>에서, 디오티마의 연설이 절정에 이른 후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의 수치스럽고도 파괴적인 연설이 불협화음인 10번째, 11번째 음표까지 계속된다. 이점은 대화편이 좌절감을 느낄 정도로 결론이 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겉으로는 두서없이 보인다해도, 플라톤의 대화는 표면적인 서사 밑에 음악적 형태로 우아하면서도 엄밀하게 짜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피타고라스가 우주는 들리지 않는 멜로디를 낸다고 생각했듯이 플라톤의 저서도 은밀한 음악을 품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하모니이거나 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독자들이 플라톤의 서사 안에 있는 음계를 가로질러 간다면, 일련의 조화와 부조화의 부분들에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반향할 수 있을 것이다. 묻혀있는 음계는 독자의 영혼 안에 있는 무의식의, 지적 음악을 연주하도록 계획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이 그의 독자들을 악기처럼 연주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이 음계가 대화편 안에 있다면, 고대의 독자들은 이를 알아차렸을까? 스미르나의 테온(Theon of Smyrna)이라 불리는 2세기의 플라톤주의자는 아주 혼란스러운 책을 썼다. 책제목은 <<플라톤을 읽는데 유용한 수학에 관하여On the Mathematics Useful for Reading Plato>>라고 붙여졌는데, 대화편의 독서법과는 별 상관 없어 보였다. 희랍 수학과 수비학 역사가들에게는 중요하였지만, 현대의 플라톤 학자들에게는 대체로 무시되었다. 부분적으로는 테온 그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다. 그는 현재는 잊혀진 낡은 플라톤 입문서들을 편집한 이었으며, 그의 수학이 플라톤의 어떤 특정 부분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언급하지 못했다.

테온의 저서의 장황한 절들은 대화편이 상징적이며 숨은 층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초기 플라톤주의자들의 유실된 글들을 요약 정리하고 있다. 이들의 책들은 [비밀에 관하여] 혹은 [플라톤 철학에 남겨져 있는 의미]와 같은 감질나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테온의 자세한 설명으로부터 우리는 이들이 플라톤의 해석자에게 동일한 간격을 둔 12개의 음계의 연구를 권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화편 어디에서도 공공연하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들은 대화편에는 없는 상대적 화성 이론의 연구도 권했으며, 이에 대한 공을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데메스에게 돌리고 있다.

따라서 대화편을 해석하는 맥락에서 일부 고대 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존된 또는 숨겨진 형이상학 이론이 있으며, 이는 피타고라스와 연관이 있고 12개의 규칙적인 간격을 둔 음계가 논의되었으며, 상대적 화성 이론이 검토되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는 이 저술가들이 남긴 빈약한 양의 글이 재평가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들이 대화편의 음악적 구조를 인정했다는 자명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가 일정 정도 불명확하지만, 이 해석자들은 여전히 행을 셀 수 있게 만들어 음악적 구조를 단숨에 알 수 있는 판형의 대화편 사본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세대 전에 콜럼비아 대학교수인 히에트(A.Kent Hieatt)는 스펜서의 잘 알려진 시에 수학적 구조가 숨겨져 있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세익스피어에 비하면 이류였지만, 스펜서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뛰어난 시인이었고 르네상스 플라톤주의자였다. 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연구되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히려 그 구조가 더 일찍 지적되지 않았다는데 놀랐다. 히에트의 발견은 연구방향을 전환시켰고, 이후로 대학 교과과정에도 반영되었다. 파울러(Fowler)는 후에 조사를 진행하여 단테의 <<신곡>>에서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만큼 많은 문예작품들이 수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서를 저술하였다. 학자들이 어떻게 스펜서의 시 안에 있는 구조를 간과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파울러는 “인문학자들은 셈을 못한다”고 빈정거렸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표면적인 서사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상징을 집어 넣는데 뛰어나다. 단테, 스펜서, 조이스, 만 그리고 다른 우의작가들에 대한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징체계를 해독하고 설명해내는 확립된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후기 작품들의 특징이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독법으로 사용되지는 않아야겠지만, 전례들은 중요할 것이다.

음악적 상징주의가 플라톤의 상징방식의 열쇠이다. 한번 풀리면, 이는 다른 숨겨진 체계를 풀게 해준다. 고대 독자들이 말했듯이, 대화편은 상징으로 얽히고 설켜있다.

특히 어떤 상징들은 수학적, 음악적 위치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이 상징들은 다른 이론을 함유하고 있다. 플라톤의 적극적 철학은 근저에 놓여있는 형상에 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두 번째 논문은 대화편의 저층위를 탐색하고 있다. 예를들어 이 연구는 각 대화 안에 있는 음악적 순서가 대화의 순서로 귀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서른 남짓의 대화는 일관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구두로 몰래 전달되었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비전의 수학 철학에 대한 끊임없는 평판은, 보통의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았더라도, 대화편 내에 숨겨진 의미의 층으로 인해 널리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그의 이론을 이런 방식으로 숨기려 하였을까? 플라톤의 동기에 대한 논쟁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고대의 우애집단, 길드, 종교집단에게 비밀은 통상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성스러운 것은 밀실 안에 보존되어야만 한다는 본능을 가졌던 듯 하다. 그렇지만 비밀은 사회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비밀은 집단을 외부인으로부터 분리하여 더욱 강하게 응집시켰다. 특히 초기 피타고라스 학파는 박해 받는 집단으로 간주되어 자신들의 정체성과 이론을 비밀리에 숨겼다.

문학적인 비유와 지식의 보존에 대한 플라톤의 관심은 대화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문학에서의 상징주의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 주제가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집단에게 특별히 중요한 주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하였던 우의문학 장르는 “피타고라스적인 것”으로 불리었다. 맥락상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겠지만, 노이제(Neuse)의 간결한 요약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피타고라스 학파 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술가가 그의 작품에 불어넣어야만 하는 암시적인 혹은 숨은 조화로움이었다. 따라서 (플라톤주의자인 스펜서의 시에 내재한) 수로 표시되는 상징 체계는 피타고라스 학파 풍으로 우주의 수학적 위계질서와 은밀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는데 이바지했다. 추상적 구조 또는 패턴에 대한 요구와 결합시키기 위해 인문주의적 피타고라스주의는 예술작품 제작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술가들의 상상은 자연의 흐름으로 들어가야 하며, 이와 동일시 되어야 하고, 자연의 힘으로 이미지가 생성되어야 한다.”

플라톤과 같은 일류 저자가 왜 부차적이고 상징적인 수준의 문체에 의지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플라톤이 문예 상징주의의 이론가일 뿐 아니라 이를 실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안다.

대화편의 숨겨진 의미층을 판독하는 것은 무덤을 열어 플라톤의 새로운 저서를 발굴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플라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변환시킬 것이다. 그는 유럽의 지적 전통의 상징적인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이들이 말한 바와 같이 피타고라스주의자였다. 그들의 이론이 비밀의 장막에 쌓여있을지라도, 피타고라스 학파는 플라톤이 살아 있을 당시에 비범한 정치세력이었다. 그의 친구인 아르키타스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를 다스렸다. 테바이에서 피타고라스 학파는 스파르타의 점령에 대항하는 반란을 이끌었으며, 군대를 소집하여 고대의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에서 스타르타르인들을 전멸시켰다. 이제 <<파이돈>>과 <<향연>>에 나타난 테바이에 대한 경의가 이해될 것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시대에 중요한 개혁운동에도 관여하였다.

우리는 과학과 수학에 있어서의 플라톤의 역할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자들은 플라톤이 높은 수준의 탐구에 적극적으로 몰두했는지 아니면 그저 앞장서서 과학을 예찬한 사람이었는지 논의를 벌여왔다. 대화편에 고등 수학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가 과학을 부차적인 것으로 권장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상징체계에 고등 수학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 처음으로 우리는 플라톤이 대화편에 수학적 구조를 깔아 놓으면서 정교한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게다가 대화편의 일부 수학적 기호는 아카데메이아에서 발전된 명확한 고등수학 지식을 보여준다. 플라톤이 정리를 증명했으며, 핵심 문제 연구에 집중했다는 고대 기록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연구자들이 대화의 상징층에 암호화된 모든 원리들을 발굴하고 평가하는데 몇 년이 걸릴 것이다. 소수의 학자들만이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고대철학, 음악이론, 수학, 문예이론 그리고 피타고라스 철학에 정통하다. 결국에는 철학의 탄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며, 플라톤은 새롭게 될 것이다.

부가적인 학문적인 논의와, 참고서적, 플라톤의 저서에 대한 스테파누스의 인용은 <<아페이론: 고대철학과 자연과학지>>의 “Plato’s Forms, Pythagorean Mathematics, and Stichometry”를 볼 것, 음계의 위치를 알려주는 주석을 단 옥스포드 고전판의 플라톤의 대화편 파일은 저자의 맨체스터 대학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할 수 있음.

제이 케네디는 맨체스터 대학의 자연과학과 기술사 연구소의 방문학자이다.

출처: TPM: The Philosophers’ Magazine

https://reader.exacteditions.com/issues/52098/thumbs

번역: 라티오 출판사

휴 트레버-로퍼의 <역사와 계몽주의History and the Enlightenment>
조나단 리(Jonathan Ree)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는 종교를 조소하였으나 이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고, 계몽주의에 대한 과대평가라는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History and the Enlightenment by Hugh Trevor-Roper, edited by John Robertson (Yale)

역사학자 휴 트레버-로퍼가 2003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부고 기사는 많았지만 호의적인 것들은 아니었다. 트레버-로퍼는 20년 넘게 옥스퍼드 대학에서 근대사 흠정교수였고 그 후에는 캠브리지 대학의 피터하우스 칼리지 학장이었으며, 1979년에는 상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토리당의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도 그는 권력 층 내에서 그리 많은 호감을 얻지는 못하였다. 또한 <타임스>의 이사를 역임했으나 고위층 부고 담당 기자들 역시 동정적이지는 않았다. <<로드 대주교Archbishop Laud>>(1940), <<히틀러의 마지막 날들The Last Days of Hitler>>(1947), <<유럽의 마녀 열풍The European Witch Craze>>(1970) 등의 일부 저서에 대한 간단한 인사치례 정도의 호평은 있었지만, 그가 새로 발견된 히틀러의 일기라고 알려진 노트가 원본이라는데 자신의 명성을 걸었던 1985년, 그 정신 나갔던 순간이 부각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재빠르게 철회하였으나 이미 <타임스>는 독점 연재권을 얻는데 엄청난 비용을 지불한 후였다. 존경할만한 역사학자가 곧바로 <프라이빗 아이Private Eye>지의 지면에서 매우-신통치 못한 휴(Hugh Very-Ropey)가 되어 버렸으나 <타임스>는 이에 대한 복수를 그가 사망할 때까지 아껴두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비호감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호감을 갖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적수들을 적절히 상대하지 못했으며 자신보다 타인에 대해 더 아이러니컬했다”며 히죽거렸다.

트레버-로퍼의 명성은 그가 사망한 이래로 더 커졌다.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은 역사학자로서의 그의 놀라운 열정을 높이 평가하였다: 흩어진 문서더미에서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내는 요령(그는 손쉽게 8개 국어로 작업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것을 그래함 그린(Graham Greene)만큼 이국적으로, 그리고 이블린 워(Evelyn Waugh)만큼 익살스러운 이야기로 만드는 재주. 뛰어난 중국학자이며 위대한 박애주의자 그리고 구제불능의 거짓말쟁이며 사기꾼인 에드문드 백하우스(Edmund Backhouse)에 대한 그의 1976년 연구서 <<북경의 은둔자The Hermit of Peking>>를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은 사실 역사적 발견이라는 위대한 업적이 아니었더라도 희극 소설로서의 그 위치를 쉽게 고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여러 강의와 에세이 그리고 책으로 출판될 만큼의 분량을 지닌 연구물 (이 중 대부분이 생전에 출판되지 않기를 원했다 — 특히 2006년 그의 사망 후 출판된 17세기 전환기의 유럽 문화생활에 대한 흥미로운 탐구인 <<유럽의 내과의사Europe’s Physician>>) 등에 다양하게 적용된다.

그는 자신이 흥미로운 세부사항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이론을 다룰 줄 아는 진지한 역사 사상가임을 보여주었다. 트레버-로퍼는 골수 보수주의자였겠으나, 보수 세력의 편협함을 경멸했고 근래 들어 그에게 붙여진 “토리 마르크스주의자”라는 표현에 전혀 이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근대 초기의 유럽 정치 드라마가 정당성의 구조적 위기의 일부이며, 역사적 지식이 일개 국가나 일개 언어에 제한된 이들(대부분의 그의 전문가 집단 동료와 같은)은 이 점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이나 다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를 공격할 때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이들의 유물론이 아니라 구조적 분석을 무시하며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도덕적인 순교자를 위해 과거를 닦아 내려는 이들의 습관인 “감상주의”였다. 그가 영국의 제도를 옹호하였다면, 이는 이 제도를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인간 어리석음에 대한 영예로운 기념비로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예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교리”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당황하였지만, 바보 같은 믿음에 달라붙어 있는 태평스러움을 즐길 수만 있다면 영국 국교회의 의식에 기쁘게 참여하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고대 유대의 광적인 베두인, 비잔티움 혹은 로마의 마그레브의 건달 성직자, 17세기의 박식한 영국 국교회 주교, 그리고 19세기의 훌쩍거리는 감리교 성가학자”에서 나온 여러 유산들 중 하나를 뽑는 게임과 같은 것이었다.

트레버-로퍼가 모든 것 (혹은 거의 모든 것)에 재미삼아 놀리는 태도를 갖게된 것은 군복무때문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을 영국군대에서 독일군의 정보를 해독하며 보냈지만, 1945년 널리 믿어지는 것과 달리 히틀러가 정말로 벙커에서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사 — 이후 베스트셀러가 된 책 — 를 쓰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이러한 학문외적인 경험때문에 그는 이전에 훈련한 편협한 학습법에 반대하게 되었다. 그는 철학자들이 철학을 멸종시킨 것처럼 전문 역사가들이  “중요하지 않은 진실”을 위한 그릇된 열성으로 역사를 멸종시킬 위험이 있다고 썼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 독자들이 역사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공적 담론으로 알리는데 전념했다.

세계 대전 기간에 트레버-로퍼는 18세기 회의주의자이며 <<로마 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의 저자인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역사에 대한 완벽한 연구서가 있다면 트레버-로퍼에게 <<로마 제국 쇠망사>>가 바로 그것이었고, 역사 과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연구의 창시자는 마르크스가 아닌 기번, 즉 프랑스 사회이론가인 몽테스키외의 어깨 위에 서있는 기번이었다. 남은 인생동안 트레버-로퍼는 자신들의 학문분야가 의미심장한 과거를 갖고 있음을 동료 역사가들이 깨닫도록 지속적으로 설득하려했고, 이 일에 전념한 그의 에세이와 강의가 마침내 <<역사와 계몽주의>>라는 제목으로 묶였다.

그는 (일부 인문주의자들이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진리의 빛이 18세기 초 유럽에서 갑작스럽게 밝혀졌다는 다소 진부한 개념에는 흥미가 없었으며, 과거에 사람들이 겁내던 악마는 그들의 미신적인 상상의 산물임을 밝혔다. 트레버-로퍼가 기리려 했던 계몽주의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이는 의미 없는 사실 또는 교화적인 모범이 아닌 “사회학적 내용”,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 사회는 내재적 역동성을 가졌고 이는 이들의 사회구조와 명확한 전개에 달려있다”는 혁명적인 개념을 헌신적으로 파헤친, 새로운 종류의 역사에 대한 기번의 연구에 의해 두드러진다. 역사를 “지상으로 끌어 내림”으로써 기번과 계몽주의 역사가들은 다른 많은 철학자들이 했던 것보다 더욱더 무지한 신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기번은 종교를 조롱했으나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트레버-로퍼의 표현에 따르자면, “사회 구조와 정치 유형에 연관된 가치들”을 수반하고 있음을 인정했고, 그에따라 사람들이 종교를 위해 타인을 죽이거나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종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오랜 동맹인 볼테르를 비난했는데, 볼테르는 성직자의 비행에 대한 분노로 인해 자신의 적의 거울 이미지, 즉 기번의 표현에 따르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편견이 심한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기번은 자신의 주장을 멋있게 펼쳤으며, 트레버-로퍼 역시 그러했다: 회의적인 세속주의가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면 이는 역사는 좀 더 많이 그리고 철학은 덜 필요로 할 것이며, 더 많은 설명과 더 적은 분노를 필요로 할 것이다.

출처: New Humanist Volume 125 Issue 3 May/June 2010

번역: 라티오출판사

The Argument and the Action of Plato’s “Laws”

Author: Leo Strauss
Paperback: 196 pages
Publisher: Chicago University Press; New edition edition (9 July 1998)
Language English
ISBN-10: 0226776980
ISBN-13: 978-0226776989

Product Description
Leo Strauss 사후에 출간된 이 책은 1973년 그가 죽기 얼마 전에 편집된 것이다. Strauss는 Platon의 고전 텍스트를 조심스럽고 면밀하게 읽음으로써 통찰력있고 유익한 독법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Plato’s Philosophers: The Coherence of the Dialogues

Author: Catherine H. Zuckert
Hardcover: 896 pages
Publish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 edition (June 1, 2009)
Language: English
ISBN-10: 0226993353
ISBN-13: 978-0226993355

Product Description
플라톤의 진정한 사상과 그것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서로 대립되는 문제에 직면하면 그것을 구별하려는 학자들은 대화편 안에서는 물론이고, 대화편들끼리도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Catherine Zuckert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이 산문 드라마가 철학에 대한 플라톤의 포괄적 이해를 어떻게 정합적으로 드러내는지를 설명한다.

Zuckert는 이 정합성을 드러내기 위해 대화편들이 쓰여졌다고 여겨지는 순서가 아닌 플라톤이 그 대화들이 벌어졌다고 말한 드라마의 순서에 따라 검토한다. 이는 일반적인 탐구방식이 아니지만 이로써 이야기의 시작, 전개 그리고 소크라테스적 철학의 한계가 낱낱이 드러난다. 예를들어 드라마의 초기 대화들에서 비소크라테스적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대답하려고 하는 정치적 철학적 문제들을 끌어들인다(이 내용이 이 책의 제1부에 해당한다). 두번째 드라마 묶음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방법이 드러난다(이 내용이 이 책의 제2부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후기 대화편들은 그의 철학의 한계를 밝혀내는 대화가담자들을 주로 다룬다(이 내용이 이 책의 제3부에 해당한다). Zuckert는,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최선의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게 함으로써 대화편의 중심 인물로 만들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게다가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불완전함을 드라마로 만들면서 인간의 삶과 비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명백하게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간극 — 과학과 인문학의 분리 그리고 과학적 진보가 탈인간화라는 결과에 이를 가능성 — 이 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시기에는 플라톤의 전 저작에 대한 Zuckert의 이 탁월한 해석이 과거와 현재 세계에 대한 참으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할 것이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Thucydides: The Reinvention of History

Author: Donald Kagan
Paperback: 340 pages
Hardcover: 272 pages
Publisher: Viking Adult (October 29, 2009)
Language: English
ISBN-10: 0670021296
ISBN-13: 978-0670021291

Product Description

명망있는 학자가 다시 살펴본 최초의 근대적 역사가와 그의 방법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장엄함과 힘은 2500년 동안이나 독자와 역사가 그리고 정치가를 사로잡아 왔으며, 그 저작과 저자는 국제 관계와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쳐왔다. Thucydides에서 우리 시대 가장 앞선 고전 학자 중의 한 명인 Donald Kagan은 이 위대한 역사가와 그의 저작을 그의 시대 안에서 검토하고 그를 수정주의적 역사가로 간주하면서 조명한다.

투키디데스는 인간 행위에 대한 설명을 신의 의지 또는 심지어 개인의 의지에서 찾기를 거부하고 사회 속의 인간 행위에서 바라봄으로써 근대성으로의 놀라운 도약을 이룩하였다. Kagan은 이러한맥락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그 당대 사람들이 내놓은 고찰을 통해 설명하며, 그에 이어 그때 이후 역사를 개념화하는 방식에 극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 책이 최초의 근대적 정치사로 자리잡게 된 사정을 보여준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국내 관련 도서|
도널드 케이건(지음), 박재욱, 허승일(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까치글방, 2006.

도널드 케이건(지음), 김지원(옮김), <<전쟁과 인간>>, 세종연구원, 2004.

The Young Karl Marx: German Philosophy, Modern Politics, and Human Flourishing

Author: David Leopold
Paperback: 340 pages
Publish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August 6, 2009)
Language: English
ISBN-10: 0521118263
ISBN-13: 978-0521118262

Product Description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관한 획기적이고도 중요한 연구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은 강력하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지성에게는 매혹적인 장관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끔찍한 해석의 장애물이기도 하다. 저자 David Leopold는 그 저작들의 지적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저작들의 정치적 차원을 어떻게 조명하는지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영향과 목표에 관한 박식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논의는 근대 국가의 출현, 성격, 미래의 대체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와 비판적으로 결합된 저자의 논의를 틀짓는다. 역사적 접근과 분석적 접근을 이렇게 결합함으로써 이 책은 소외, 시민, 공동체, 반유대주의, 유토피아주의와 같은 근본적 주제에 대한 동조적이기는 하나 비판적인 탐색으로 귀결된다. 이 책은 독일철학, 근대 정치학, 인간의 번영에 대한 마르크스의 복합적이고도 종종 오해되는 견해를 근본적이고 설득력있게 재해석하고 있는 학적 독창적 저작이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Thinking about Property

Thinking about Property: From Antiquity to the Age of Revolution

Author: Peter Garnsey
Paperback: 286 pages
Publish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 edition (February 4, 2008)
Language: English
ISBN-10: 052170023X
ISBN-13: 978-0521700238

Product Description
재산과 관련하여 고대의 ‘근본적’ 텍스트들을 탐구하고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여러 사상가들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을 연구한다. 이 책은 <<국가>>에 나타난 플라톤의 비전, 금욕과 빈곤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황금시대의 이야기, 원시적 공산체제에서 소유권 체제로의 이행 등에 관한 고찰을 포함한다. 사적 소유권의 정당화라는 주제는 여러 시대에 걸쳐 주요 정치사상가들 뿐만 아니라 신학자, 법률가들의 정신을 움직였다. 이 책은 권리 이론, 특히 재산에 관한 권리의 역사적 전개를 포괄적으로 검토한다. 미합중국과 프랑스의 인권선언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이 책은 마무리되는데, 현대의 코멘트들을 참조하여 프랑스인들은 재산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인정한 반면 미합중국은 그렇지 않았던 까닭을 탐구한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남는 것이 역사다
Charlotte Higgins

낭만적이고 두서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다가 뜬소문에 열광한다는 평판이 자자했던 헤로도토스는 당대의 진지한 사상가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샬럿 히긴스(Charlotte Higgins)는 헤로도토스의 저작이 유쾌할뿐더러 매우 도덕적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지만, 헤로도토스가 투키디데스와 같은 의미에서 역사가의 역사가인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보다 15살 가량 어린 투키디데스는 서기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벌어진 전쟁을 직설적으로 서술했고, 두려움이나 편파 없이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비꼬는 표현과 견실한 정치적 통찰력을 풍부하게 곁들여 흥미를 돋우었다. 투키디데스의 이야기는 목격자의 서술에 바탕을 두는데, 대개는 그 자신이 목격한 것들이다. 그는 증거를 신중하게 가려내어 사건들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견해만을 제시한다. 그는 매우 영향력 있는 세계관, 곧 강자 앞에서 도리 없이 구슬프게 쓰러지는 약자라는 세계관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투키디데스는 수상들과 대통령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고대 역사가이며 미육군사관학교(스파르타라는 별명이 붙은 기관)에서도 그를 가르친다. 후대의 사상가들은 (예를 들어 민주정이 어떻게 참혹한 군사 원정에 휩쓸리는지를 수월하게 설명하기 위해)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끌어들이곤 했다. 미합중국의 고전학자 버나드 녹스(Bernard Knox)는 미합중국의 베트남 개입을 언급하면서 투키디데스를 인용했지만, 그러한 발상은 분명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도 적용되었다.

반면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유력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에게 등을 돌렸으며, 그가 공상적이고 낭만적이라고 묘사한 헤로도토스의 세계관에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한 비판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서기전 481~479년에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서술에서는 마라톤 전투 개시 전까지 기간이 전체 아홉 권 가운데 무려 여섯 권(로빈 워터필드Robin Waterfield의 탁월한 영역본에서는 300쪽 남짓)을 차지한다. 많은 이들은 헤로도토스의 작업이 두서가 없고 후대에 학적 분과가 된 역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다소 실망스러운 시도라고 여긴다.

헤로도토스의 허튼소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길에서 만나는 수염을 기른 여사제; 이집트인들의 미라 만드는 기술에 대한 묘사;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는 수다스러운 여성들(그중에는 다리우스의 아내 아토사도 있는데, 그녀는 잠자리에서 페르시아 왕과 정담을 나누면서 그가 그리스인들을 정복할 마음을 먹도록 부추겼다고 한다); 여우보다는 크고 개보다는 작으며 금을 얻기 위해 땅속에 깊은 굴을 파는 인도의 흥미로운 거인 거미; 대초원에 거주하며 사람 가죽으로 외투를 만들어 입는 스키타이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돌고래가 생명을 구해준 악사 아리온; 꼬리가 너무 길어서 작은 수레에 꼬리를 얹은 채 끌고 가는 아라비아의 양. 이와는 반대로 투키디데스의 세계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다 — 여성, 동물, 아이, 종교 등에 관한 잡다한 얘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의 내밀한 생활에 매료되고, 쉴새 없이 떠들어대고, 뜬소문에 열광하는 헤로도토스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가 ‘고대 그리스’라 부르는 곳의 매혹적인 지식인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헤로도토스는 터키 에개해 연안의 그리스 도시 할리카르낫소스(지금의 보드룸)에서 태어났다. 바로 이 이오니아 연안에서 계몽운동, 곧 그리스와 그 너머의 사상 조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영향을 미친 지적 운동, 올림포스 산의 신들을 왕좌에서 쫓아버리겠다고 위협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탈레스(일반적으로 최초의 과학자-철학자로 여겨지는)와 같은 사상가들은 자연의 무시무시한 변천을 포세이돈의 분노, 제우스의 벼락, 헤라의 질투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순리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우주를 합리화하는 서술을 제시했다. 헤로도토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선행자이자 최초로 산문으로 글을 쓴 그리스인들 가운데 한 명인 밀레투스의 헤카타이오스는 지리와 계보를 합리화하는 저술을 남겼다. 얼마 후에는 코스 섬과 니도 섬에서 의사들이 출현했는데, 그중 히포크라테스가 가장 유명하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들의 의학 논문들은 병을 하늘에서 내린다는 관념을 거부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오히려 의사들은 사태의 원인에 대한 이성적 탐구를 추구했다.

사태의 원인에 대한 탐구, 헤로도토스가 서언에서 제시한 기획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데다가 가까스로 연합을 유지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정복을 막아낸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역사》의 서언은 《일리아스》—고전 문헌 중 최고이자 가장 중요한 작품이며 후대의 그리스 작품들에 미친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한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불화하게 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지난날을 돌이키면서 시작한다. 호메로스의 대답은 아폴로 신의 분노이다. 헤로도토스의 작업은 페르시아 전쟁을 일종의 제2 트로이 전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호메로스가 제시한 허구의 동기에 대한 서술을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한 조사로 바꾸어놓는다.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에 관해 헤로도토스가 제시하는 대답은 신들 탓도 아니고, 페니키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주장하듯이 서로 앙갚음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간에 오랫동안 계속되었다고 하는 신화적인 부녀자 유괴 탓도 아니라 실제 세계의 정치와 외교정책 탓이라는 것이다. 사건들에 대한 책임을 하늘로부터 떳떳하게 현세의 인간들에게 돌리는 것은 2500년이 지난 지금 보기에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헤로도토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이것이야말로 키케로가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가 부른 이유이다.

그렇다면 한담과 뜬소문이나 늘어놓는다는 그의 평판은 어떤가? 《역사》를 읽으면서 나는 그를 끝내주게 유쾌한 저녁식사 손님(특히 와인이 몇 잔 돈 후에)처럼 느꼈지만, 독자들은 그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내놓으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의 기획은 사태의 심층에 놓인 원인을 캐묻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서술을 시작할 때, 그는 설득력 있게 먼저 페르시아의 팽창 정책의 패턴들을 서술하는데, 이것은 서기전 6세기에 당시 근동의 강대국이었던 리디아를 신생 제국인 페르시아가 무찌른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적절히 풀어내기 위해 그는 여담으로 리디아의 역사를 말하며, 여기에는 당시의 왕이었던 크로이소스로부터 다섯 세대 전 인물인 기게스가 어떻게 권세를 얻었는지에 대한 놓칠 수 없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기게스는 리디아의 왕 칸다우레스가 신임하는 조언자였다 자신의 아내에게 푹 빠져 있던 칸다우레스는 기게스가 왕비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음미할 수 있도록 그녀의 알몸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기게스는 화들짝 놀라 이 괴상망측한 계획을 그만두라고 주군을 설득했지만 칸타우레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기게스는 왕의 침실 문 뒤에 숨어서 왕비를 흘끗 훔쳐보았다.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기게스는 왕비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튿날 왕비가 기게스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선택을 내려라. 나에게 네 목숨을 내놓든지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해라.” 칸다우레스를 죽인 기게스는 왕비와 결혼하여 리디아의 왕이 되었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캐서린 클리프튼은 사막 모닥불 주위에 둥글게 모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 남편의 동료 알마시와의 사랑을 예시하면서. 온다치는 이 소설에서 인간사와 큰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려 했다 — 이것은 《역사》의 모든 페이지에 깃든 교훈이다. 헤로도토스의 서술이 한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것을 분명히 가로막는 ‘여담'(고대 역사가 캐롤린 드월드가 표현했듯이, 이 여담들은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처럼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에 “걸려 있다”)은 오락적 요소인 것만큼이나 서술을 명확히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폭넓은 구조적 패턴은 《역사》의 처음 절반까지 계속된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팽창 정책을 기록하면서 중간중간 정복당한 각 나라들에 대해 기술한다. 그중에서 책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이집트에 대한 서술이 가장 범위가 넓다. 헤로도토스가 어마어마하게 넓은 지역을 몸소 여행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더할 수 없이 정력적으로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려 하는데, 때로는 비범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때로는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를 밝히고, 때로는 허튼소리(이집트 여자들은 서서 소변을 보고 남자들은 쪼그려 앉아 소변을 본다는 ‘정보’와 같은)를 퍼뜨린다. 그리고 헤도로토스는, 언제나 외국의 관습을 그리스의 관습과 연관짓기는 하지만, 현대의 민족지 연구자처럼 자기의식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 “모든 인류에게 세상의 관습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고르라고 하면 각 집단은 충분히 고려한 후에 그들 자신의 관습을 고를 것이다. 각 집단은 그들 자신의 관습을 단연 최고로 여긴다”고 그는 관찰했다.

여행 작가들과 해외 특파원들은 헤로도토스가 자신들의 조상임을 안다. 리스자드 카푸친스키는 폴란드에서 젊은 특파원으로 발탁되어 인도와 중국의 난해한 이질성을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이 그리스인에게 본능적인 동료 의식을 느꼈으며, 그의 책 《헤로도토스와 여행하기》는 그때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한다. 헤로도토스의 기법은 저널리스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서술하곤 하며 때로는 출처를 밝히기도 한다. 7권의 한 대목에서 아르고스인들이 페르시아인들 편에 섰는지에 관해 쓰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내가 들은 것들을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것들을 믿을 의무는 없다.” 또 2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그런 이야기들이 믿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이집트 이야기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이 서술 전체에 걸쳐 나의 일은 나의 정보원들로부터 내가 들은 모든 것들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헤로도토스가 텍스트를 자신의 선입견에 맞추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도덕적 관점이 《역사》 전체를 관류한다. 헤로도토스는 개혁가이자 속담에서 아테네의 현자라 일컬어지는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방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예술품과 황금으로 가득한 자신의 보고를 보여주고는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솔론이 자신을 지목하기를 잔뜩 기대했다. 그러나 솔론은 그런 사람은 아테네의 탈레스라 답했는데, 그는 가문을 일으키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그가 죽자 사람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요?” 크로이소스가 물었다. 크로이소스를 격노케 한 솔론의 대답은 클레오비스 형제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수레에 어머니를 태우고 가다가 헤라 신전에서 죽고 말았다. 크로이소스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솔론은 누구도 죽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행복하다 할 수 없으니, 삶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크로이소스의 사례에서 다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를 무찌를 수 있다는 크로이소스의 빗나간 자신감이 낳은 결과는 제국의 상실과 치욕이다. 헤로도토스의 도덕적 메시지는 그의 동료이자 아마도 친구였을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핵심에 놓인 것이기도 하다. 이 극에서 부유하고 사랑받던 남자는 하루 아침에 눈이 멀고 추방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우리는 행운이 당연히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 시대를 위한 도덕이라는 행운 말이다.

출처 : The Guardian, 2009. 1. 3.

번역: 라티오 출판사

잊혀진 덕목
플라톤은 용기의 중요성을 어떻게 지각했는가
Harvey Mansfield

Linda R. Rabieh, Plato and the Virtue of Courage, Johns Hopkins, 2006.

용기는 아주 공통된 덕목이어서 누구나,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용기를 지니고 있으며, 용기가 없으면 때로 심하게 비난받고 더욱 흔하게는 멸시당한다. 당신이 겁쟁이처럼 비친다면 당신에 대한 평판은 현저히 나빠질 것이다. 더구나 당신은 가치상대주의로 도피할 수도 없는데, 다른 문제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시대 사유의 두드러진 특징이지만 용기의 경우에는 그럴 수 없다. 당신은 누군가의 용기는 다른 누군가의 비겁함이라는 말로 당신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용기를 정의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이 따른다고는 믿지 않는다. 어떤 사회들은 평화를 좋아 하고 또 어떤 사회들은 호전적이지만, 모든 사회는 용기를 칭송하고 비겁함을 경멸한다.

그럼에도 용기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용기를 칭송하든, 또 얼마나 손쉽게 용기를 정의하든, 오늘날 우리는 용기를 입증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의 개인주의는 자아를 칭송하지만, 용기는 무언가를 위해 일부러 자아를 위태롭게 한다. 무엇을 위해? 그 대답은 분명 우리가 우리의 자아보다, 우리의 개인주의 원칙보다 무언가를 더 높이 평가한다는 것일 테고, 우리는 십중팔구 이런 사실을 직면하기를 불편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삶에서는 크게 주목받지만 이론에서는 거의 존중받지 못하는 예외적인 가치인 용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하자.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이론가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꽁무니를 뺐다고 할 수 있는데, 자유주의의 덕목들을 고찰하는 것이 그들의 공공연한 과업임에도 용기를 고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익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생각하든 혹은 존중(esteem)을 심리학의 언어로 생각하든, 자아는 일종의 신성(神性)이고 우리 시대의 이론가들은 그것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용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보인다.

플라톤의 용기에 관한 린다 라비에의 훌륭한 새 책은 오늘날 이론가들이 용기를 무시한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구식의 전통적인 용기를 벽장에 처박아두고는 급한 경우에는 언제든 그것을 끄집어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무시할 수 있다고 믿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태도에서 예외는 페미니스트들인데, 그들은 용기가 건강하지 못하고, 비인간적이고, 지나치게 남성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성들을 위한 용기,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위한 용기를 주장하려는 소망에 억눌려 있으며, 또한 여성들은 오로지 혹은 전적으로 모성에만 적합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필요성에 억눌려 있다.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협력의 이점을 설교할 때면 홉스와 칸트만큼이나 이질적인 자유주의 이론가들과 한패가 된다. 자유주의 사회가 자아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사회의 주된 걱정거리는 분명 다른 자아들과 충돌할 때 자아를 과장하는 것일 터이다. 자유주의 사회의 적은 용기에 의해 길러진 성마른 자긍심이며, 그 해결책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의 ‘시민적 참여’를 통한 관용이다.

라비에는 친절하게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용기에 관해 할 말이 많은 플라톤에게로 이끌고 간다. 플라톤은 특히 두 대화편 <<라케스>>와 <<국가>>에서 용기를 논하거나 논하도록 한다. <<라케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용기에 관해 무언가를 알아야만 하는 아테네의 두 장군 라케스와 니키아스의 견해를 검토한다. 그러나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설명하면서 몹시 갈팡질팡하며, 그 대화편은 서로 동의한 정의(定義)를 내리지 못한 채 끝난다.

<<국가>>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이론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요구할 뿐 아니라 존중해 마지않는 정의(正義)와 더불어 혹은 정의의 결과로서 용기가 고찰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고, 또한 용기에 대한 정의(定義)가 필요하다. 그러나 곧이어 우리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는 보통의 용기 — 위험에 직면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 — 를 보잘것없게 만드는 보다 높은 형태의 용기, 곧 철학적 용기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철학자가 사회의 의견과 그 자신의 의견 둘 다를 일평생 문제 삼는 위험을 무릅쓰려면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린다 라비에는 용기에 대한 플라톤의 사유에서 우리가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유별나게 희랍적인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거리에 나가 조사를 해보면 플라톤이 발견하지 못했던 용기의 두 가지 문제점을 오늘날에는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우리의 자유주의 이론가들도 원하기만 한다면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나쁜 목적을 위해 싸우는 자의 용기에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며, 용감한 나치 군인이 그 예이다. 이것은 용기가 목적과 분리될 수 있고, 용기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행위자 자신도 혐오할 것이 분명한 부정의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용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가? 한 덕목은 여러 덕목들로 나뉠 수 있지만, 덕목들은 통일성을 지니고 있어서 함께 움직이는 듯이 보이며, 특히 용기와 정의가 그러하다. 자유주의 이론가들 역시 단 하나의 ‘자아’에 관해 말할 때조차, 그들이 인간의 성향이 여럿임을 얼마나 강조하고 싶어 하든 간에, 그러한 통일성을 전제한다.

둘째 문제는 용기가 누군가에게 이익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기는 위험에 응하며 특히 전투에서의 희생을 요구한다. 용기가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 — 이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설령 겁쟁이로 사는 것이 이익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 이러한 희생을 치르는 것이 온당한지를 알기 위해 용기는 신중함의 안내를 받을 필요가 있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고결하지만, 그 위험이 언제 진격하고 언제 후퇴할지를 알기 위해 신중함을 필요로 하는, 반드시 가치있는 것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용기와 신중함은 충돌하는 듯 보인다. 용기는 격하고 열렬하고 위험에 부주의한 반면 신중함은 냉정하고 타산적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오늘날 이라크에서 미합중국 군인들은 국내에 거주하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복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양식은 충돌과 위험보다 평화, 안보, 생존을 우선한다. 따라서 우리의 군인들의 고결함은 후방 동포들의 일상적 삶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더렵혀지고 있다. — 미합중국 군인들이 포기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양식은 우리의 생활양식의 희생을 포함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일깨움으로써 이러한 비일관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때는 우리가 영원히 희생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라비에의 추론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그의 책은 플라톤의 텍스트에 한 줄 한 줄 주석을 다는 책이 아니라 플라톤의 논증을 속속들이 좇는 책이다. 용기에 관해 배우고 싶든, 다만 용기에 관한 배움에 몰두하는 것에 감명을 받고 싶든, 아니면 플라톤을 읽고 싶든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이 책은 용기의 강인함을 다룬다: 그릇된 바람을 거부할 강인함과 어떤 악은 피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강인함. 또한 용기의 장엄함을 다룬다: 자기부정이나 자기희생의 고결함보다 위대한 자기실현의 아름다움. 자기희생이 당신을 향상시킨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희생의 패러독스 — 희생을 위한 희생조차도 어쨌든 당신 자신을 위한 희생이다 — 는 이 탁월한 연구의 주제이다.

라비에는 플라톤을 연구하는 동료 학자들을 공정하고 관대하게 대한다. 그는 겸손하지만 대담한 태도로 플라톤에 대한 역사적 혹은 발전적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 그리고 두 대화편 — <<라케스>>는 소극적이거나 아포리아적(결론보다는 의문으로 더 많이 끝나는)이고 <<국가>>는 더욱 명확하다고 보는 — 을 플라톤이 사물을 더욱 훌륭하게 혹은 다르게 이해해가는 과정의 단계들에 해당한다고 여기는 학자들을 비판한다. 라비에는 두 대화편이 서로 보완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플라톤이 다른 측면들을 제시했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플라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으며(참으로 필요하며) 우리가 용기를 너무나 조심스러워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용기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전쟁을 환영했던 스파르타를 포함하는 당대의 사회들과 대립했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플라톤은 용기를 문젯거리로 여기고 용기와 대립했으니, 그는 용기가 위험하기는해도 그것의 기반인 영혼의 강인함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출처: The Weekly Standard, Volume 012, Issue 19, 2007. 1. 29. 

번역: 라티오 출판사

“문화”를 맥락 속에 놓기
Penny Howard

Kate Crehan, Gramsci, Culture and Anthropology, Pluto, 2002.

그람시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가운데 <<그람시, 문화와 인류학(Gramsci, Culture and Anthropology)>>은 이에 대한 환영할 만한 기여이다. 명쾌하고 문체가 간명한 케이트 크리언(Kate Crehan)의 책은 그람시의 생애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시작하는데, 특히 그람시가 토리노에서 혁명적 정치에 개입한 것과 후일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투옥된 것을 강조한다. 크리언은 “그람시가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기획한 바를 이해하려면, <<옥중수고>>를 쓰는 계기가 되었던 그람시의 정치적 개입과 <<옥중수고>>를 구성하는 기간에 그람시가 처했던 환경 둘 다에 대한 시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옥중수고>>는 무엇보다 감방에 갇힌 그람시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개입 활동이었으며, 거기서 그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지배적인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억압당하는 자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투쟁을 근본적인 투쟁이라 보았다.”(p. 18)

크리언은 독자들이 그람시의 저술을 직접 접할 수 있도록 <<옥중수고>>를 폭넓게 인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옥중수고>>가 특정한 주제들에 관한 ‘노트’에서 인용한 것들로 채워져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옥중수고>>의 파편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크리언은 ‘문화’라는 술어의 인류학적 사용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사용법은 또한 ‘문화 차이’나 ‘문화 충돌’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란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유형화”되거나 “결속”된 전체라는 가정, 그리고 “전통과 근대성 사이에 기본적인 대립”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비판한다(p. 66). 그는 그러한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가정들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리언은 문화에 대한 그람시의 관심이 혁명적 변화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생활하는 방식이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실행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상상하는 능력을 필연적으로 모양 짓기” 때문이다(p. 71).

문화를 개별 구성원들의 행위를 설명하는 결속된 전체로 보는 대신, 그람시는 문화를 경제적 역사적 과정과, 특히 계급관계와 “유기적” 관련을 맺으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방식이라 보았다. 그람시를 폭넓게 인용하는 이 절은 문화와 경제적 관계, 헤게모니, “서발턴(subaltern)” 문화, 상식과 양식(良識), 지식인의 역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용하고 흥미로운 논의를 담고 있다. 크리언은 그람시에게는 인류학자들이 분명 가치 있게 여길 만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주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 절은 오늘날 인류학 내에서 그람시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특히 헤게모니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추적하고 비판하는데, 이 개념은 학계에서 크리언이 “헤게모니 아류(hegemony lite)”라 부르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그는 인류학에서 그람시가 대부분 문화사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와 인류학자 존 코머로프(John Comaroff)와 진 코머로프(Jean Comaroff)가 내린 해석에 따라 인용되어왔음을 추적한다. 불행히도 이 경우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와 동의어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람시 자신은 헤게모니를 서구 부르주아 민주정 내에서 권력이 국가와 그 다양한 제도들에 의해 행사되는 복합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이해했다.

또한 그람시는 헤게모니라는 술어를 혁명적 정당들이 투쟁들을 연계하고, 터득한 교훈들을 일반화하고, 마침내 사회를 변혁하는 데 필요한 신뢰할 만한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 운동과 실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람시에게 헤게모니란 사회적 관계, 실천적 행동, 동의, 힘과 관념이 복합적으로 혼합된 것이었다. 그런 다음 크리언은 그람시를 끌어들인 것으로 잘 알려진 인류학 저술 세 편에 이러한 비판을 적용하여 그람시에 대한 두루뭉술한 이해가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논증한다.

이 책은 인류학 내적인 “역사 쓰기” 단계를 넘어서 더욱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접근법으로 되돌아가려는, 현재 인류학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잠정적인 전환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개스턴 고딜로(Gaston Gordillo)의 <<악마의 경관: 아르헨티나 차코에서의 장소와 기억의 긴장 상태(Landscapes of Devils: Tensions of Place and Memory in the Argentine Chaco)>>(차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과이 3국에 걸친 아열대 대평원)는 명시적으로 그람시와 게오르그 루카치에 의거하여 현재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토바(Toba) 원주민에 대한 계급 착취와 국가 폭력의 영향을 이해하려 한다. 고딜로의 책은 영향력 있는 미민족학회(American Ethnological Society)로부터 “first book award”를 받았다.

미인류학협회(American Anthropology Association, AAA)의 2008년 연례 총회에는 전세계 각지에서 6천명 넘게 참석했는데, 이라크 점령과 미합중국 군대에 대한 인류학적 개입의 윤리에 관한 몇몇 모임들이 두드러졌다. 미인류학협회는 적법한 인류학 조사와 군대를 위한 간첩행위를 분명히 구별하도록 윤리 강령을 바꾸는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논쟁은 인류학에 폭넓은 충격을 가하고 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프라이스(David Price)가 미합중국 공군과 해군에 의한 인류학의 사용을 토론하는 미인류학협회 회합에서 주장했듯이, “인류학은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경제학에 속해 있다. 메타-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거부가 인류학계에서 지배적이었던 결과, 우리는 인류학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할 만한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

미인류학회의 회의에서 미합중국의 제국적 기획에 인류학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했던 자들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문화적 이해”의 힘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크리언의 그람시 해석에서 한 가지 취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진보 세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분리된 문화들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계급, 역사, 권력의 역학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출처: International Socalism, Issue 122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