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The Forgotten Virtue: 
How Plato perceived the importance of courage

잊혀진 덕목
플라톤은 용기의 중요성을 어떻게 지각했는가
Harvey Mansfield

Linda R. Rabieh, Plato and the Virtue of Courage, Johns Hopkins, 2006.

용기는 아주 공통된 덕목이어서 누구나,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용기를 지니고 있으며, 용기가 없으면 때로 심하게 비난받고 더욱 흔하게는 멸시당한다. 당신이 겁쟁이처럼 비친다면 당신에 대한 평판은 현저히 나빠질 것이다. 더구나 당신은 가치상대주의로 도피할 수도 없는데, 다른 문제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시대 사유의 두드러진 특징이지만 용기의 경우에는 그럴 수 없다. 당신은 누군가의 용기는 다른 누군가의 비겁함이라는 말로 당신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용기를 정의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이 따른다고는 믿지 않는다. 어떤 사회들은 평화를 좋아 하고 또 어떤 사회들은 호전적이지만, 모든 사회는 용기를 칭송하고 비겁함을 경멸한다.

그럼에도 용기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용기를 칭송하든, 또 얼마나 손쉽게 용기를 정의하든, 오늘날 우리는 용기를 입증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의 개인주의는 자아를 칭송하지만, 용기는 무언가를 위해 일부러 자아를 위태롭게 한다. 무엇을 위해? 그 대답은 분명 우리가 우리의 자아보다, 우리의 개인주의 원칙보다 무언가를 더 높이 평가한다는 것일 테고, 우리는 십중팔구 이런 사실을 직면하기를 불편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삶에서는 크게 주목받지만 이론에서는 거의 존중받지 못하는 예외적인 가치인 용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하자.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이론가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꽁무니를 뺐다고 할 수 있는데, 자유주의의 덕목들을 고찰하는 것이 그들의 공공연한 과업임에도 용기를 고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익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생각하든 혹은 존중(esteem)을 심리학의 언어로 생각하든, 자아는 일종의 신성(神性)이고 우리 시대의 이론가들은 그것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용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보인다.

플라톤의 용기에 관한 린다 라비에의 훌륭한 새 책은 오늘날 이론가들이 용기를 무시한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구식의 전통적인 용기를 벽장에 처박아두고는 급한 경우에는 언제든 그것을 끄집어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무시할 수 있다고 믿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태도에서 예외는 페미니스트들인데, 그들은 용기가 건강하지 못하고, 비인간적이고, 지나치게 남성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성들을 위한 용기,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위한 용기를 주장하려는 소망에 억눌려 있으며, 또한 여성들은 오로지 혹은 전적으로 모성에만 적합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필요성에 억눌려 있다.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협력의 이점을 설교할 때면 홉스와 칸트만큼이나 이질적인 자유주의 이론가들과 한패가 된다. 자유주의 사회가 자아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사회의 주된 걱정거리는 분명 다른 자아들과 충돌할 때 자아를 과장하는 것일 터이다. 자유주의 사회의 적은 용기에 의해 길러진 성마른 자긍심이며, 그 해결책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의 ‘시민적 참여’를 통한 관용이다.

라비에는 친절하게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용기에 관해 할 말이 많은 플라톤에게로 이끌고 간다. 플라톤은 특히 두 대화편 <<라케스>>와 <<국가>>에서 용기를 논하거나 논하도록 한다. <<라케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용기에 관해 무언가를 알아야만 하는 아테네의 두 장군 라케스와 니키아스의 견해를 검토한다. 그러나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설명하면서 몹시 갈팡질팡하며, 그 대화편은 서로 동의한 정의(定義)를 내리지 못한 채 끝난다.

<<국가>>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이론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요구할 뿐 아니라 존중해 마지않는 정의(正義)와 더불어 혹은 정의의 결과로서 용기가 고찰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고, 또한 용기에 대한 정의(定義)가 필요하다. 그러나 곧이어 우리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는 보통의 용기 — 위험에 직면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 — 를 보잘것없게 만드는 보다 높은 형태의 용기, 곧 철학적 용기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철학자가 사회의 의견과 그 자신의 의견 둘 다를 일평생 문제 삼는 위험을 무릅쓰려면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린다 라비에는 용기에 대한 플라톤의 사유에서 우리가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유별나게 희랍적인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거리에 나가 조사를 해보면 플라톤이 발견하지 못했던 용기의 두 가지 문제점을 오늘날에는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우리의 자유주의 이론가들도 원하기만 한다면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나쁜 목적을 위해 싸우는 자의 용기에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며, 용감한 나치 군인이 그 예이다. 이것은 용기가 목적과 분리될 수 있고, 용기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행위자 자신도 혐오할 것이 분명한 부정의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용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가? 한 덕목은 여러 덕목들로 나뉠 수 있지만, 덕목들은 통일성을 지니고 있어서 함께 움직이는 듯이 보이며, 특히 용기와 정의가 그러하다. 자유주의 이론가들 역시 단 하나의 ‘자아’에 관해 말할 때조차, 그들이 인간의 성향이 여럿임을 얼마나 강조하고 싶어 하든 간에, 그러한 통일성을 전제한다.

둘째 문제는 용기가 누군가에게 이익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기는 위험에 응하며 특히 전투에서의 희생을 요구한다. 용기가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 — 이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설령 겁쟁이로 사는 것이 이익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 이러한 희생을 치르는 것이 온당한지를 알기 위해 용기는 신중함의 안내를 받을 필요가 있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고결하지만, 그 위험이 언제 진격하고 언제 후퇴할지를 알기 위해 신중함을 필요로 하는, 반드시 가치있는 것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용기와 신중함은 충돌하는 듯 보인다. 용기는 격하고 열렬하고 위험에 부주의한 반면 신중함은 냉정하고 타산적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오늘날 이라크에서 미합중국 군인들은 국내에 거주하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복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양식은 충돌과 위험보다 평화, 안보, 생존을 우선한다. 따라서 우리의 군인들의 고결함은 후방 동포들의 일상적 삶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더렵혀지고 있다. — 미합중국 군인들이 포기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양식은 우리의 생활양식의 희생을 포함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일깨움으로써 이러한 비일관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때는 우리가 영원히 희생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라비에의 추론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그의 책은 플라톤의 텍스트에 한 줄 한 줄 주석을 다는 책이 아니라 플라톤의 논증을 속속들이 좇는 책이다. 용기에 관해 배우고 싶든, 다만 용기에 관한 배움에 몰두하는 것에 감명을 받고 싶든, 아니면 플라톤을 읽고 싶든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이 책은 용기의 강인함을 다룬다: 그릇된 바람을 거부할 강인함과 어떤 악은 피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강인함. 또한 용기의 장엄함을 다룬다: 자기부정이나 자기희생의 고결함보다 위대한 자기실현의 아름다움. 자기희생이 당신을 향상시킨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희생의 패러독스 — 희생을 위한 희생조차도 어쨌든 당신 자신을 위한 희생이다 — 는 이 탁월한 연구의 주제이다.

라비에는 플라톤을 연구하는 동료 학자들을 공정하고 관대하게 대한다. 그는 겸손하지만 대담한 태도로 플라톤에 대한 역사적 혹은 발전적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 그리고 두 대화편 — <<라케스>>는 소극적이거나 아포리아적(결론보다는 의문으로 더 많이 끝나는)이고 <<국가>>는 더욱 명확하다고 보는 — 을 플라톤이 사물을 더욱 훌륭하게 혹은 다르게 이해해가는 과정의 단계들에 해당한다고 여기는 학자들을 비판한다. 라비에는 두 대화편이 서로 보완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플라톤이 다른 측면들을 제시했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플라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으며(참으로 필요하며) 우리가 용기를 너무나 조심스러워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용기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전쟁을 환영했던 스파르타를 포함하는 당대의 사회들과 대립했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플라톤은 용기를 문젯거리로 여기고 용기와 대립했으니, 그는 용기가 위험하기는해도 그것의 기반인 영혼의 강인함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출처: The Weekly Standard, Volume 012, Issue 19, 2007. 1. 29. 

번역: 라티오 출판사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