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The rest is history

남는 것이 역사다
Charlotte Higgins

낭만적이고 두서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다가 뜬소문에 열광한다는 평판이 자자했던 헤로도토스는 당대의 진지한 사상가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샬럿 히긴스(Charlotte Higgins)는 헤로도토스의 저작이 유쾌할뿐더러 매우 도덕적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지만, 헤로도토스가 투키디데스와 같은 의미에서 역사가의 역사가인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보다 15살 가량 어린 투키디데스는 서기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벌어진 전쟁을 직설적으로 서술했고, 두려움이나 편파 없이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비꼬는 표현과 견실한 정치적 통찰력을 풍부하게 곁들여 흥미를 돋우었다. 투키디데스의 이야기는 목격자의 서술에 바탕을 두는데, 대개는 그 자신이 목격한 것들이다. 그는 증거를 신중하게 가려내어 사건들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견해만을 제시한다. 그는 매우 영향력 있는 세계관, 곧 강자 앞에서 도리 없이 구슬프게 쓰러지는 약자라는 세계관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투키디데스는 수상들과 대통령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고대 역사가이며 미육군사관학교(스파르타라는 별명이 붙은 기관)에서도 그를 가르친다. 후대의 사상가들은 (예를 들어 민주정이 어떻게 참혹한 군사 원정에 휩쓸리는지를 수월하게 설명하기 위해)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끌어들이곤 했다. 미합중국의 고전학자 버나드 녹스(Bernard Knox)는 미합중국의 베트남 개입을 언급하면서 투키디데스를 인용했지만, 그러한 발상은 분명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도 적용되었다.

반면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유력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에게 등을 돌렸으며, 그가 공상적이고 낭만적이라고 묘사한 헤로도토스의 세계관에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한 비판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서기전 481~479년에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서술에서는 마라톤 전투 개시 전까지 기간이 전체 아홉 권 가운데 무려 여섯 권(로빈 워터필드Robin Waterfield의 탁월한 영역본에서는 300쪽 남짓)을 차지한다. 많은 이들은 헤로도토스의 작업이 두서가 없고 후대에 학적 분과가 된 역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다소 실망스러운 시도라고 여긴다.

헤로도토스의 허튼소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길에서 만나는 수염을 기른 여사제; 이집트인들의 미라 만드는 기술에 대한 묘사;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는 수다스러운 여성들(그중에는 다리우스의 아내 아토사도 있는데, 그녀는 잠자리에서 페르시아 왕과 정담을 나누면서 그가 그리스인들을 정복할 마음을 먹도록 부추겼다고 한다); 여우보다는 크고 개보다는 작으며 금을 얻기 위해 땅속에 깊은 굴을 파는 인도의 흥미로운 거인 거미; 대초원에 거주하며 사람 가죽으로 외투를 만들어 입는 스키타이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돌고래가 생명을 구해준 악사 아리온; 꼬리가 너무 길어서 작은 수레에 꼬리를 얹은 채 끌고 가는 아라비아의 양. 이와는 반대로 투키디데스의 세계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다 — 여성, 동물, 아이, 종교 등에 관한 잡다한 얘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의 내밀한 생활에 매료되고, 쉴새 없이 떠들어대고, 뜬소문에 열광하는 헤로도토스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가 ‘고대 그리스’라 부르는 곳의 매혹적인 지식인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헤로도토스는 터키 에개해 연안의 그리스 도시 할리카르낫소스(지금의 보드룸)에서 태어났다. 바로 이 이오니아 연안에서 계몽운동, 곧 그리스와 그 너머의 사상 조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영향을 미친 지적 운동, 올림포스 산의 신들을 왕좌에서 쫓아버리겠다고 위협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탈레스(일반적으로 최초의 과학자-철학자로 여겨지는)와 같은 사상가들은 자연의 무시무시한 변천을 포세이돈의 분노, 제우스의 벼락, 헤라의 질투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순리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우주를 합리화하는 서술을 제시했다. 헤로도토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선행자이자 최초로 산문으로 글을 쓴 그리스인들 가운데 한 명인 밀레투스의 헤카타이오스는 지리와 계보를 합리화하는 저술을 남겼다. 얼마 후에는 코스 섬과 니도 섬에서 의사들이 출현했는데, 그중 히포크라테스가 가장 유명하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들의 의학 논문들은 병을 하늘에서 내린다는 관념을 거부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오히려 의사들은 사태의 원인에 대한 이성적 탐구를 추구했다.

사태의 원인에 대한 탐구, 헤로도토스가 서언에서 제시한 기획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데다가 가까스로 연합을 유지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정복을 막아낸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역사》의 서언은 《일리아스》—고전 문헌 중 최고이자 가장 중요한 작품이며 후대의 그리스 작품들에 미친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한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불화하게 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지난날을 돌이키면서 시작한다. 호메로스의 대답은 아폴로 신의 분노이다. 헤로도토스의 작업은 페르시아 전쟁을 일종의 제2 트로이 전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호메로스가 제시한 허구의 동기에 대한 서술을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한 조사로 바꾸어놓는다.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에 관해 헤로도토스가 제시하는 대답은 신들 탓도 아니고, 페니키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주장하듯이 서로 앙갚음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간에 오랫동안 계속되었다고 하는 신화적인 부녀자 유괴 탓도 아니라 실제 세계의 정치와 외교정책 탓이라는 것이다. 사건들에 대한 책임을 하늘로부터 떳떳하게 현세의 인간들에게 돌리는 것은 2500년이 지난 지금 보기에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헤로도토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이것이야말로 키케로가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가 부른 이유이다.

그렇다면 한담과 뜬소문이나 늘어놓는다는 그의 평판은 어떤가? 《역사》를 읽으면서 나는 그를 끝내주게 유쾌한 저녁식사 손님(특히 와인이 몇 잔 돈 후에)처럼 느꼈지만, 독자들은 그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내놓으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의 기획은 사태의 심층에 놓인 원인을 캐묻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서술을 시작할 때, 그는 설득력 있게 먼저 페르시아의 팽창 정책의 패턴들을 서술하는데, 이것은 서기전 6세기에 당시 근동의 강대국이었던 리디아를 신생 제국인 페르시아가 무찌른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적절히 풀어내기 위해 그는 여담으로 리디아의 역사를 말하며, 여기에는 당시의 왕이었던 크로이소스로부터 다섯 세대 전 인물인 기게스가 어떻게 권세를 얻었는지에 대한 놓칠 수 없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기게스는 리디아의 왕 칸다우레스가 신임하는 조언자였다 자신의 아내에게 푹 빠져 있던 칸다우레스는 기게스가 왕비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음미할 수 있도록 그녀의 알몸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기게스는 화들짝 놀라 이 괴상망측한 계획을 그만두라고 주군을 설득했지만 칸타우레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기게스는 왕의 침실 문 뒤에 숨어서 왕비를 흘끗 훔쳐보았다.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기게스는 왕비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튿날 왕비가 기게스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선택을 내려라. 나에게 네 목숨을 내놓든지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해라.” 칸다우레스를 죽인 기게스는 왕비와 결혼하여 리디아의 왕이 되었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캐서린 클리프튼은 사막 모닥불 주위에 둥글게 모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 남편의 동료 알마시와의 사랑을 예시하면서. 온다치는 이 소설에서 인간사와 큰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려 했다 — 이것은 《역사》의 모든 페이지에 깃든 교훈이다. 헤로도토스의 서술이 한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것을 분명히 가로막는 ‘여담'(고대 역사가 캐롤린 드월드가 표현했듯이, 이 여담들은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처럼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에 “걸려 있다”)은 오락적 요소인 것만큼이나 서술을 명확히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폭넓은 구조적 패턴은 《역사》의 처음 절반까지 계속된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팽창 정책을 기록하면서 중간중간 정복당한 각 나라들에 대해 기술한다. 그중에서 책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이집트에 대한 서술이 가장 범위가 넓다. 헤로도토스가 어마어마하게 넓은 지역을 몸소 여행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더할 수 없이 정력적으로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려 하는데, 때로는 비범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때로는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를 밝히고, 때로는 허튼소리(이집트 여자들은 서서 소변을 보고 남자들은 쪼그려 앉아 소변을 본다는 ‘정보’와 같은)를 퍼뜨린다. 그리고 헤도로토스는, 언제나 외국의 관습을 그리스의 관습과 연관짓기는 하지만, 현대의 민족지 연구자처럼 자기의식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 “모든 인류에게 세상의 관습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고르라고 하면 각 집단은 충분히 고려한 후에 그들 자신의 관습을 고를 것이다. 각 집단은 그들 자신의 관습을 단연 최고로 여긴다”고 그는 관찰했다.

여행 작가들과 해외 특파원들은 헤로도토스가 자신들의 조상임을 안다. 리스자드 카푸친스키는 폴란드에서 젊은 특파원으로 발탁되어 인도와 중국의 난해한 이질성을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이 그리스인에게 본능적인 동료 의식을 느꼈으며, 그의 책 《헤로도토스와 여행하기》는 그때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한다. 헤로도토스의 기법은 저널리스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서술하곤 하며 때로는 출처를 밝히기도 한다. 7권의 한 대목에서 아르고스인들이 페르시아인들 편에 섰는지에 관해 쓰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내가 들은 것들을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것들을 믿을 의무는 없다.” 또 2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그런 이야기들이 믿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이집트 이야기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이 서술 전체에 걸쳐 나의 일은 나의 정보원들로부터 내가 들은 모든 것들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헤로도토스가 텍스트를 자신의 선입견에 맞추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도덕적 관점이 《역사》 전체를 관류한다. 헤로도토스는 개혁가이자 속담에서 아테네의 현자라 일컬어지는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방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예술품과 황금으로 가득한 자신의 보고를 보여주고는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솔론이 자신을 지목하기를 잔뜩 기대했다. 그러나 솔론은 그런 사람은 아테네의 탈레스라 답했는데, 그는 가문을 일으키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그가 죽자 사람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요?” 크로이소스가 물었다. 크로이소스를 격노케 한 솔론의 대답은 클레오비스 형제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수레에 어머니를 태우고 가다가 헤라 신전에서 죽고 말았다. 크로이소스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솔론은 누구도 죽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행복하다 할 수 없으니, 삶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크로이소스의 사례에서 다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를 무찌를 수 있다는 크로이소스의 빗나간 자신감이 낳은 결과는 제국의 상실과 치욕이다. 헤로도토스의 도덕적 메시지는 그의 동료이자 아마도 친구였을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핵심에 놓인 것이기도 하다. 이 극에서 부유하고 사랑받던 남자는 하루 아침에 눈이 멀고 추방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우리는 행운이 당연히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 시대를 위한 도덕이라는 행운 말이다.

출처 : The Guardian, 2009. 1. 3.

번역: 라티오 출판사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