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The woman behind a saint

성자 뒤의 여인
Eamon Duffy

John Guy, A Daughter’s Love: Thomas and Margaret More, Fourth Estate, 2008.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가장 사랑받았지만 동시에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잉글랜드 정치가라는 점에서 처칠에 견주어지곤 한다. 그를 연구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에게서 천재와 영웅 둘 다를 발견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인 모어는 1516년에 출간한 [[유토피아(Utopia)]]에서 서구 문화의 위대한 우화들 가운데 하나를 창조했다. 모어는 변호사들 가운데는 드물게 정치가였으며, 전제적인 왕이 강요하는 그릇된 서약을 묵인하기보다는 참수당하는 편을 선택할 만큼 흔들림 없는 청렴한 인물이었다. 가톨릭교도들에게 그는 교회 통합을 위해 희생된 결연한 순교자였다. 로버트 볼트(Robert Bolt)와 같은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는 “사계절의 사나이“, 이데올로기에 맞선 개인적 양심의 주창자였다.

그러나 이와 명백히 모순되는 또 다른 모어가 있다. 이 인물은 1529-1533년에 점차 높아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파도에 맞서 백오십만 자에 달하는, 때로는 신랄한 논증을 퍼붓고, 이교도들에 대한 추적과 처형을 열정적으로 정당화한 논쟁적인 저술가였다. 모어는 대법관이 되기 전에도 금서들을 찾아내기 위한 단속에 앞장섰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로 의심되는 자들을 심문하는 일에 관여했고, 대법관 임기 중에는 이단 혐의를 받은 여섯 명 중 세 명에 대한 화형을 집행하겠다는 영장에 개인적으로 서명했다. 이러한 모어는 그를 찬양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튜더 왕조 시대의 가톨릭 전기작가들은 그의 경력 가운데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는 쪽을 택한 반면 프로테스탄트 저술가들은 존 폭스(John Foxe) 이래로 그를 고문가이자 광신자라고 비난했다.

존 가이는 지난 50년 동안 대다수 다른 잉글랜드 역사가들보다 모어의 위대함을 학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 모어의 공적 경력에 대한 그의 1980년 연구(The Public Career of Sir Thomas More는 십여년 동안 모어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저서였다. 가이는 튜더 왕조의 혼란스러운 초기 정치에서 모어가 수행한 역할을 밝혀내고, 계몽적이고 혁신적인 대법관으로서의 토머스 경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전에는 경시되었던 많은 문헌을 이용했다. 모어의 삶과 평판에 대한 그의 2000년 연구(Thomas More)는 여전히 최선의 입문서이다.

가이의 새 책은 이러한 저술들의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을 포함하지만 그 호소력은 매우 다르다. [[딸의 사랑(A Daughter’s Love)]]은 모어와 그의 맏딸 마가렛(Margaret)에 대한 이중 전기이다. 모어는 여자아이도 남자아이만큼 교육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한참 앞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이 아들들과 똑같은 교양 교육을 받도록 했다.
신동이었던 마가렛은 라틴어와 희랍어에 숙달해 당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아버지의 친구인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텍스트들을 교정할 수 있었다. 1524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시행하게 될 검열법에 저항하여 에라스무스가 쓴 [[주의 기도에 대한 성찰(Meditations on the Lord’s Prayer]]의 뛰어난 번역본을 출간했다. 모어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상담자가 되어 그의 사유를 공유했으며 은밀히 아버지가 입었던 참회의 마모직(馬毛織) 상의를 빨았다.

그는 모어가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마지막이자 가장 적합한 위안 상대였다. 모어가 자신의 독방에서 썼던, 일부는 목탄불에 그을려 조각만 남은 일련의 숭고한 편지들 가운데 가장 친밀하고 솔직한 편지는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버지가 처형당한 후에 그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런던교의 대못에 걸려 있던 모어의 머리를 구했다. 결국 그는 그것을 자신의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그의 가장 귀중한 보존 행위는, 마침내 마리 영왕 치세에 인쇄된 위대한 2절판에 대비해, 런던탑에서 쓴 편지들로 감동적인 절정에 달한 아버지의 모든 영어 저술을 모은 것이었다.

가이는 재능과 위대함이라는 측면에서 모어의 경쟁자로서 마가렛을 매우 높게 평가하며, 그가 모어라는 인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자료 대부분을 제공했다고 본다. 그는 눈감아줄 수 있는 과장을 섞어 마가렛이 없었다면 그의 아버지는 “단지 역사의 또 다른 각주”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그는 마가렛의 탁월한 희랍어 학식과 번역에 근거하여 마가렛을 튜더 왕조 초기 잉글랜드에서 틴들(Tyndale)의 것에 필적하는 신약성서 번역본을 내놓을 수 있었던 정통 가톨릭교도로 본다. 가이는 이 점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헨리 왕조의 주교들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물론 그녀는 여자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결코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회고담으로 모어에 대한 초기 전기작가들에게 최선의 자료를 제공한 마가렛의 남편 윌리엄 로퍼(William Roper)를 모욕한다. 가이는 그를 부인의 성취로 명성을 얻은 기회주의자로 본다. 그는 가부장제를 맹목적으로 신봉하여 모어의 정치적 삶에서 마가렛을 “덮어버렸다”는 이유로 모어에 대한 최초의 전기작가인 성직자 니콜라스 합스필드(Nicholas Harpsfield)를 비난한다. 이는 전혀 공정하지 못하다: 합스필드는 제한된 사료를 가지고 작업했으면서도 마가렛의 학식과 선한 성품 그리고 토머스의 “가장 중요하고 거의 유일한 세속적 위안”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열광적으로 칭찬했다. 그럼에도 가이의 책은 모어의 가장 중요한 관계에 적절한 초점을 맞춘, 모어의 삶에 공감하는 전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모어에 대한 가이의 공감은 몇 가지 측면에서 놀랍다. 가이의 이전 작업은 그의 훌륭한 스승 제프리 엘튼 경(Sir Geoffrey Elton)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인 모어의 종교적 견해에 대한 열광의 결여를 공유했다. 그러나 이번 저작에서 가이는 따뜻하고 탄복하는 어조로 모어에 관해 저술하며, 모어가 분명 영웅이었고 심지어 성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몇 가지 유보조건을 유지한다. 그는 모어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저술들을 따분해하며 그 맹렬한 표현을 거부한다. 그는 튜더 왕조 시대의 논박들 가운데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은 모어의 [[이교도들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Heresies)]]를 두고 “매우 중요하다”는 입에 발린 말을 한다. 그러나 이 기지 넘치고 강력한 논증을 펼친 책에 대한 그의 열광에는 확신이 없으며, 그는 이 저작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폭력의 정당화에 초점을 맞춘다. 가이는 모어의 복잡한 인성 가운데 이러한 측면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탐색하지 않은 채 이전의 이상에 대한 배반으로만 본다.

가이의 책은 인쇄된 자료에 대한 독보적인 지식뿐 아니라 기록보관소들에서의 새로운 작업에 근거한다. 이 책은 지식을 가볍게 전달한다 — 각주는 없으며 학식은 뒷부분의 도서목록에 대한 에세이 안에 감추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 따뜻하고 생생한 초상화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전문가도 읽을 만할 것이다.

Eamon Duffy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기독교 역사학 교수이다.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 경(1478-1535)은 런던시의 주 장관 대리로 정치적 삶을 시작하여 승진을 거듭해 하원 의장이 되었으며 이후 1529-1532년에는 대법관을 지냈다. 1516년에 펴낸 [[유토피아]]는 책 제목이 하나의 술어가 되었다.. 그는 헨리 8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한 지 400년 후인 193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처형대에 올라서서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이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 죽는다고 말했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7. 18.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