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Cloud Nine

단테, <<천국>>편의 새로운 번역
 
Joan Acocella

<<천국>>은 우리의 생각을 구원으로 향하게 할 단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였으며, 그는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였다.

<<신곡>>을 아직까지 읽지 않았다면 — 자신을 잘 알 것이다 — 지금이야말로 읽을 때인데, 로버트 홀랜더(Robert Hollander)와 진 홀랜더(Jean Hollander)가 지금 막 이 경탄스러운 14세기의 시의 번역을 훌륭하게 끝마쳤기 때문이다. 홀랜더 부부의 <<지옥>>은 2000년에, <<연옥>>은 2003년에 출판되었고, 그들의 <<천국>> (Doubleday, $40)이 막 출간되었다. 이 번역판은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떤 영어판보다 관용어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동시에 평이하기 때문에 이 번역판은 더욱 고상하다. 시인인 진 홀랜더가 운문작업을 맡았고, 그의 남편인 로버트 홀랜더가 내용이 정확한지를 감수하였다. 42년 간 <<신곡>>을 가르친 프린스턴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단테 학자인 그가 주해를 달았다.
 
단테 시의 근사하며 영예로운 각운구성은 3운 구법terza rima — aba, bcb, cdc —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를 운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잔인할 정도로 어렵다. <<신곡>>을 영어로 된 3운 구법으로 다시 만들기 위해 계산을 해보면, 세 음절을 포함하는 각운이 대략 4천 5백 개 필요하다. 거의 모든 단어가 모음으로 끝나는 이탈리아어로는 이 정도의 음절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이것은 영어로는 거의 불가능하며, 3운 구법으로 번역하면 터무니 없이 억지로 만든 각운이 잦다고 생각 될 것이다. 일부 번역자들은 aba, cdc로 — 달리 말해서, 3개가 아닌 2개의 각운으로 — 절충하는데, 단테의 텍스트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진 홀랜더는 더 큰 타협을 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운이 없는 시 — 각운이 없는 약강 5보격의 시 — 를 선택한 것이다. 운을 맞추어야 하는 수고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는 오히려 단테의 표현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번역은 시이고, 시처럼 들린다. 로버트 홀랜더는 이 번역이 싱클레어(John D. Sinclair)의 1936-46년 산문 번역본(이 번역본이 내가 학생시절에 선택한 자습서이다)에 크게 빚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겸손해 하고 있다. <<천국>>의 도입부에 대한 싱클레어의 번역을 보자.
 
만물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영광이 우주에 스며들어서, 어떤 곳에서는 많이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는 적게 비춘다. 나는 그분의 빛을 가장 많이 받는 하늘에 있었고 그리고 그 위에서 내려오는 이라도 다시 말할 지식이나 능력이 없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지성은, 원하는 것에 가까이 갈수록, 너무 깊이 빠져 기억이 그것을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진 홀랜더의 번역이다.

만물을 움직이는 그분의 영광이
우주에 스며 들어가 비춘다
어느 부분에서는 많이, 또 다른 부분에서는 적게.
 
나는 그의 빛을 더 많이 받는 하늘에 있었으며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온 이는
그가 본 것을 알 수도 말 할 수도 없었으니,
 
이는 원하는 것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지성이 너무 깊게 빠져들어
기억이 그것을 좇아갈 수 없어서이다.
 
그가 선택한 단어들 대부분이 싱클레어의 단어를 되풀이하고 있지만 그의 영어가 더 읽기 쉽고 (그가 “나는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온 이를 보았다I saw things which he that descends”를 어떻게 풀어서 표현했는지 보면) 더 예술적이다. 그는 노래하고 있지만 싱클레어는 그렇지 않다.
 
<<천국>>편에서 이런 아첨이 기꺼이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신곡>>의 세 편 혹은 송가 중에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신곡>> 전편은 우화(allegory)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스콜라 철학자들이 중세 말에 성서와 초대 교회의 교부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뽑아내어 고도로 체계화한 신학의 상징적 재현이다. 그러나 <<천국>>편에서는 이러한 우화가 <<지옥>>편이나 <<연옥>>편보다 더 적나라하다. 단테의 시대에 그리고 그 후 수세기 동안 시를 읽는 독자들(학식 있는 자들로 대부분 성직자들)은 우화에 익숙하였고, 우화가 독자들을 생각하게끔 만들기 때문에 유익한 교육수단이라 생각했다. 보카치오가 그의 <<단테의 생애>>(1374)에서 “수고하여 얻은 것이 더 달콤하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18세기 초 이래 — 즉, 유럽인들이 단테의 주제였던 믿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이래 — <<신곡>>을 우화와 “시”의 “이중적”인 측면에서 논의하는 전통이 있었다. 여기에서 제안하는 것은 우화는 반(反)시적이며 수고로 얻은 것은 수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으로 가장 잘 알려진 현대의 글은 철학자 크로체(Benedetto Croce)가 1921년 쓴  <<단테의 시>>이다. 크로체는 상당한 정도로 <<신곡>>의 일부인 우화가 “시가 아니라”(non-poesia)고 단언했고, 이를 조롱하였다. 실제로 그는 신성시되는 <<지옥>>의 도입 행을 비웃었다. 그는 “우리는 숲이 아닌 숲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태양이 아닌 태양을 바라보며, 야생동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야생동물 세 마리를 만나며, 그 중 가장 사나운 것은 먹어 치우려는 탐욕으로 비쩍 말랐으며, 우리는 어떻게 하여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크로체가 간파했듯이 이는 우화이다: 상상이라는 용광로를 거치지 않은, 힘에 넘치는 형상이나 감성적 진실로 — 즉 시로 — 전환되지 못한 것이다. 시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지만, 우화는 주해를 보기 위해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런데 독자들, 특히 처음 읽는 독자들은 주해를 들춰 보지 말아야 한다. 크로체는 독자들은 우화를 그냥 무시하고,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 종교적 상징주의가 아닌 단테의 진정한 시적 재능인 힘참과 감정을 드러내는 “서정시들”의 모음으로 <<신곡>>을 즐겨야만 한다고 말했다.
 
크로체의 저서는 이탈리아 문학계에 떨어진 폭탄처럼 여겨졌고 — 피란델로(Luigi Pirandello)는 이 책에 대해 분노에 찬 서평을 썼다 — 몇몇 사람들에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책임한 글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20세기 초의 시론에 대한 어느 정도로 정확한 반영이다. (수사학이 이미지로 — “말하는 것”이 “보여주는 것”으로 — 대치된 것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엘리어트(T.S. Eliot)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주장한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신곡>>에 대한 후기 저술의 배후에서 팔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단테 비평가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는 1946년 그의 책 <<미메시스>>에서 <<지옥>>편의 피렌체 귀족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에 대한 묘사가 심리적으로 매우 강력하여 <<신곡>>의 신학 체계 내 (이교도의 실례로서) 파리나타의 위치가 별로 중요치 않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형상이 신의 형상을 무색하게 하였다.” 여기에 다시 또 이중성이 있게 되는데, 이는 우리는 아무런 신비감도 없이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우어바흐는 계속해서 <<신곡>>의 파리나타와 다른 위대한 이야기꾼들에게 “생의 충만함이 너무 풍부하고 강력하여 이의 표현이 독자들의 영혼이 어떤 해석에도 의지하지 않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1929년 단테에 관한 책 (뉴욕 서평New York Review Books에서 최근 재출간하였다)에서 유사한 지적을 하고 있다. ‘단테, 세속적 세계의 시인Dante, Poet of the Secular World‘이란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구체적인 것에 대한 동일한 선호도를 물려받은 현대의 독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송가인 이 <<지옥편을 좋아할 것이다. 또한 <<연옥>>편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연옥에서 순례자는 지옥에서만큼 감정을 자극하는 만남을 갖지 못하지만 몇몇 만남을 갖는다. (<<신곡>>의 주인공 — 지옥에서 천국으로 여행을 하고 이 여정을 이야기하는 사람 — 은 분명히 자서전적이지만 그가 시인과 동일한 사람은 아니다. 때때로 그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통상적으로 “단테”라기보다 “순례자”로 불린다.) 게다가 <<연옥>>편의 감정적인 세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자신들의 죄를 유감스러워하며 고통에 처해 있지만 — 그들은 화염 속이나 이와 유사한 곳을 걸어야만 한다 — 천국으로 가는 도정에 있으며 그들의 동료들도 그들과 같이 가고 있으므로 행복하다. 감정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우애 또는 세속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사랑과 지혜의 혼합이다. 이러한 부드러운 감정의 영역이 단테의 본령은 아니나 — 그는 고통과 환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 그러한 감정들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고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천국>>의 감정들은 이렇지 않다. 단테는 천국이 어떤지 몰랐으나 바로 그 정의에 의해 갈망이나 고통이 없을 것임을 알았다. <<지옥>>편을 읽노라면, 순례자가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데, 이는 바위의 경사와 틈새, 피바다, 빙산, 뜨거운 모래 위를 건너야 하는 너무나 어려운 여정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빛의 단계들을 통과하는 것이 그가 가는 여정의 전부이고 그는 이를 쉽게 건넌다. 지옥에서는 저주받은 이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한다. 한 영혼은 그에게 “나의 아들이 아직 살아있는가”를 묻는다. 다른 영혼은 “내게 로마냐가 전쟁 중에 있는지 평화로운지 말해주시오”라고 말한다. 그들이 새 소식을 원치 않는다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한다. 파리나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오디세우스, 우골리노 백작 그리고 다른 이들이 들려주는 매혹적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홀랜더의 표현처럼 <<신곡>>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겠지만 <<천국>>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 열한 사람이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며 이것 또한 짧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평균 열 네 줄이다. 지옥에서는 우골리노 혼자 일흔 두 줄에 걸쳐 이야기를 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들의 이야기가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 것인데, 이들은 아무런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서 영혼들은 울부짖으며 소리치고 신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다. 천국의 영혼들은 평온하다. 그들 중 한 명인 피카르다가 순례자에게 말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진 것 이외의 어느 것도 원치 않는다.
 
세상의 사악함에 대한 비난 외에 이 영혼들은 천국 밖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별 감흥이 없다. 우리는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게된다. <<지옥>>편의 앞 부분에서 순례자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이 어떻게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말해준다. 단테가 청년시절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 — 그가 학자들이 실존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라면 단테와 동갑이었던 그는 스물 다섯 살에 죽었다 — 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내려와서 (이교도였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단테를 자신에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였고, 베르길리우스는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베아트리체에게 천국의 평화에 익숙한 그가 지옥에 내려온 것이 두렵지 않았는지 물어본다. 그는 활기차게 “전혀”라 대답한다. 그가 천국에 갔기 때문에, 신은 그의 자비로움으로 저주받은 이들의 고통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그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순례자와 재회한 이후로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그의 관계 역시 대체로 (홀란드의 단어로) ‘개인을 넘어선 것'(post-personal)이다. 순례자를 천국과 연옥에 데리고 다닌 후 베르길리우스가 그를 베아트리체에게 넘겨 주고 다시 그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의 에피소드는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서글퍼한다. 그러나 베아트리체가 순례자를 천국의 정상에 데려간 후 그를 떠나는 시점의 장면은 그것의 삼분의 일 분량이고 이별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냉담해 보인다. 방금 전에 베아트리체는 순례자 옆에 있었는데 그는 이제 가 버린 것이다. 그가 위를 보니 축복받은 이들 중에 신을 우러러 보며 앉아 있는 그녀가 있는 것이다. 그는 베아트리체가 되돌아오길 원하여 그의 행복을 시기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다 괜찮다.
 
그러나 우리는 괜찮지 않다. 우리에게는 크로체가 쓴 것처럼, “슬픔에서 태어나 슬픔으로 되 돌아갈 운명인 실제의 기쁨 또는 일부는 어두움으로 어두움과 싸워야 하는, 그것을 정복하고 부분적으로 그것에 의해 정복되는 빛을 상상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즉 우리는 중간의 비극적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천국>>편 역시 그렇지 않다.
 
이 어두움의 결핍이 시적으로는 천국의 감정적 삶에서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곳의 영혼들은 모두 다 자비롭다. 순례자가 화성천에 도착할 때 영혼들은 “아, 여기에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킬 자가 있다!”고 외친다. 금성, 화성, 그리고 목성천의 영혼들이 그를 보며 기뻐할수록 그리고 그들의 인사말들이 쌓일수록 우리는 지옥에서의 절규와 방귀가 조금 그리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순례자의 베아트리체와의 사제관계 역시 우리를 지치게 한다. 베아트리체는 “나의 오류가 없는 의견으로는” 이라고 말을 시작한다. 그는 “자… 되돌아가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겠는데” 라고 말을 잇는다. 순례자는 그의 오류가 없는 의견을 결코 의심치 않으며 단지 점점 더 커지는 존경심으로 그의 의견을 구할 뿐이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베아트리체는 스콜라 신학의 전 과정을 순례자에게, 그에따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천국>>편은 우리의 생각을 구원으로 향하게 할 단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였으며, 그는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였다. <<지옥>>편과 <<연옥>>편에서 그는 대부분 사례를 들어 우리를 가르쳤고 이 사례들은 천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죄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 그는 더 이상 우리를 아처럼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보조자들은 신학을 단도직입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미리 예정되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예수의 십자가 매달림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신의 손으로 창조된 것들이 그의 피조물들이 만들어 낸 것과 어떻게 다를까? 왜, 언제, 어떻게 신은 천사들을 만들었을까? 당신이 신에게 어떤 것을 바치기로 맹세했을 때,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있을까? 최후의 심판에서 천국의 영혼들은 자신들의 육신을 돌려 받을까? 설명이 때때로 은유로서 감화를 주나, 대부분의 설명들은 관념적이다. 교훈은 길게 느껴진다. 단테는 우리가 이를 어렵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아트리체가 이를 “먹기 어려운 음식”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확신을 가진 중세 기독교 신자였으며 위험에 처한 것은 우리의 불멸할 영혼들 — 우리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을 수도 천국에 있는 성자들과 합류할 수도 있다 — 이라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정보들을 열망할 것을 바랐다. 어느 시점에서 단테는 그가 지금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열망”의 상태로 내 팽개쳐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오늘 그 점에 대해 의사표시를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우리는 <<천국>>편을 읽어야만 한다. 이야기의 처음 삼분의 이를 읽고 어떻게 끝까지 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우리의 종교적 성향이 어떠하든 간에 가장 체계화 된 형태의 기독교에 대해 배우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니다.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는 스콜라철학적인 종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를 알지 못하고 유럽의 과거를 이해할 수는 없다.
 
<<천국>>편을 읽는 문학적 이유도 있다. 더 없는 기쁨은 천국이다. 단테는 불꽃과 장미, 강과 무지개 등 장엄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천국의 빛은 “모든 곳에 반짝이며, /화염에서 흘러 나오는 쇳물처럼” 보인다. 피조물은 “다른 항구들을 향해/대양의 광대함 위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의 독자들은 단테를 이러한 장엄함이 아니라 그 반대, 즉 간결함, 속악함, 활력과 같은 크로체가 칭송하고 있는 성향들 때문에 사랑하며, 우리는 <<천국>>에서도 여전히 그의 이러한 면을 본다. 단테는 어느 지점에서 인간이 화염 속에 있을지라도 베아트리체의 미소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경우에 영혼은 순례자에게 항상 진실을 말할 것을 조언하나, 사람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가려운 자가 긁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성의 주요한 원천은 은유이며 가장 훌륭한 예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신곡>>을 저술할 때 단테가 속한 당파가 패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고향인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때로는 베로나에서, 때로는 로마냐 혹은 라벤나에서 친구들과 지내야 했다. <<신곡>>은 그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기 2년 전인 1300년에 일어나는 이야기며, 천국에서 그의 고조부 카차구이다는 그의 추방을 예언한다. 카차구이다는 그가 다른 사람의 빵이 얼마나 짠지, 그리고 남의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길게만 여겨지는 계단, 이상한 맛의 빵보다 더 단순하며 구체적일 수 있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홀랜더는 오늘날까지도 피렌체의 제빵업자들이 빵을 구울 때 소금을 넣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비평가들은 얼마나 많은 세상사가 상상의 내세인 [[신곡]]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감탄한다. 천국에서 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눈이 내리고 태양이 새벽안개를 증발시켜 없애버린다. 시계가 종을 울려 시간을 알린다 (유럽문헌 중에 처음으로 기계장치로 된 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젖먹이가 젖을 먹고 돼지들과 개들은 본연의 일을 한다. 순례자는 사원 — 그가 여행하기로 서약한 장소 — 에 도착하여 그가 귀향한 순간 이웃들이 모든 것을 알고자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 안의 여기저기를 탐욕스럽게 쳐다본다. 이 결말은 이미지 이상이다. 그것은 작은 이야기이다.   
 
삶의 이러한 단편적 묘사들 중 일부는 태양이 안개 속에서 타오르는 것만큼 단순하거나 서정적이지는 않다. 그 대신 복잡한 정신적 과정과 연루되는데, 이는 단테가 우리를 데리고 통과해야만 하는 것으로 목소리를 낮추어야 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연옥>>편에 경탄할 만한 예가 있다. 연옥으로 가는 문에서 천사는 순례자의 이마에 일곱 개의 “P”자(일곱 개의 큰 죄를 가리키는 peccati)를 새긴다. 각 산의 선반에서 그는 죄를 하나씩 대리로서 속죄할 것이고 그러면 ‘P’자가 한 개씩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맨 처음 P자가 없어졌을 때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머리 위에 이고 가다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손을 올려 왜 그런지
찾아보고 알아냄으로써
눈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했다.
 
이빨에 시금치가 끼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단테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경험을 알아챌 것이지만, 나는 이런 방식이 이전의 유럽 시에서 사용되었던 적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며 읽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천국>>편에서 단테는 태양천의 영혼들이 어떻게 그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었는지 들려주며, 우리에게 여인들을 생각하라고 청한다: “여인들이 춤을 출 자세를 갖춘 채, /말없이, 멈추어 서서, 새로운 음악이/ 들릴 때까지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얼마나 어여쁜 광경인가: 파티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무도회장에서 다 함께 멈추어서 새로운 음악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 우리는 머리를 위로 쳐들고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것이다. 이들은 태양천의 영혼들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예는 단테가 어떤 진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준비하는 베아트리체를, 그녀의 어린 것들을 위해 나가서 음식을 구할 수 있게 태양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는 밤의 끝자락의 새에 비유한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밤이 새도록
그녀의 귀여운 새끼들의 보금자리에
앉아 있는 새처럼,
 
새끼들의 눈과 부리를 바라보기 위해
그들에게 먹일 먹이를 찾기 위해
힘겨우나 그녀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달가워
 
때 이르게 탁 트인 가지 위에서
열렬한 애정으로 태양을 기다리며,
새벽이 밝아 오기를 여념 없이 바라보는…
 
나는 위의 도입구절에 이어 베아트리체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잊어버렸으나, 태양을 가리는 잎사귀들을 피해 (이는 아주 중요한 세부묘사이다) 가지 밖으로 움직이는 어미 새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천국>>편에서는, 이런 탐색하는 은유들이 증가하는 것 같은데, 이는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단테의 불안 때문이다. 이미 서두의 구절에서 그는 자신이 천국에서 본 것은 표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 점을 거듭 지적한다. 그는 단테 학자들이 “화해하는 은유accommodative metaphors”라 부르는 것을 고안함으로써 이 문제를 그가 할 수 있는 한 해결하였는데, 이 은유는 그가 의도하는 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하면서 어떤 종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 의도에 적응하게 한다. 이런 예들은 세 번째 송가 전편에서 정신적 과정을 거치는 은유들과 중첩되면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사례들에는 <<천국>>편의 비애감이 놓여있다. 천국의 영혼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지 않으나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단테이다.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이 창작해내고 있는 것은 단지, 노련한 단테 학자인 프레체로(John Freccero)의 표현에 따르자면, “침묵을 결여한 타협”이라는 점을 매 순간 인식하고 있었다. 순례자가 엠피레오에 도착한 마지막 곡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나사가 꽉 죄어졌다. 천국의 더 낮은 곳을 묘사하기 어려웠다면 어떻게 그는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는 광경이 너무 눈이 부셔 기억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즉시 화해하는 은유를 시작한다: “꿈꾸는 사람들처럼, 그가 깨어 난 뒤에, /아직 꿈으로 인해 일어난 감정에 취하여/ 꿈의 나머지를 마음에 불러 올 수 없었다.” 그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여 태양처럼 매우 밝게 빛나는, 그러나 태양은 아니어서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되는 환영을 기억해 낸다. 사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이는 그에게 매우 큰 행복을 주었다. 그것은 우주의 뜻을 이해한 것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은유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사적인 것으로 그가 라벤나의 책상에서 막 끝낸 바로 그 책에 관한 것이었다. 빛의 심연에서 그는 “우주에 흩어져 있는 페이지들”이 사랑에 의해 한 권으로 묶이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이전에 느끼지 못했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시인이다. 그는 짧은 그리고 아마도 가장 근사한 또 다른 은유를 사용한다.
 
그 순간의 나의 기억은
아르고의 그림자를 포세이돈이 깜짝 놀라
바라본 위업 이후
25세기가 흐른 것보다 더 잊혀져 갔다.
 
그렇게 나의 온 마음을 빼앗긴 채,
응시하였다…
 
어떤 이미지를 서술하려고 했는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학자들은 여전히 이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이미지에만 주목하라.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용사들은 건조한 최초의 배를 타고 황금 양털을 가져와야 하는 위험한 임무를 띠고 대양을 항해하는 중이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해저에서 올려다 보았다. 측정할 수 없는 깊이를 뚫고 그는 그림자 — 배 — 를 보았고 그것에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는 신이었지만 이와 같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인해 우리는 단테가 자신이 하느님에게 다가갔을 때의 느꼈을 놀라움을 우리에게 알아달라고 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에 다른 어떤 것이 있는데, 단테는 그 자신이 놀라움에 대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점이다. 아르고처럼 순례자는 다른 어떤 이도 맡지 못했던 임무를 가지고 광대한 푸른 심원 (천국)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시인도 <<신곡>>이 재현하는 상상의 여행을 할 만큼 그리 야심적이지 못했다. 단테는 작은 배를 본 고대의 신처럼 기독교의 신이 시인의 항해를 보고 놀랐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신성모독 — 신은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으며, 모든 것의 운명을 정한다 — 이겠으나, 단테는 매우 자신만만한 예술가였다. 어쨌든 이것은 서양 시에서 경이로운 것에 대한 가장 놀라운 행위일 것이다.
 
시인은 이제 그가 신에 대한 기억으로 되돌아 간다. 그는 고귀한 빛 안에서 다른 색깔의 그러나 같은 크기의 세 개의 원을 본다. 현실적으로는 원이 같은 크기라면 가장 위에 있는 원의 색상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있지 않으며, 삼위일체 중 어떤 하나가 최고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또한 실망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원이 세 개란 말인가? 그렇게 쌓아 올린 후에? 단테는 그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오 말이란 얼마나 빈약한가”라며 호소한다. 그리고 나서 그의 빈약한 말로 더 높게 뛰어 올라 황홀경에 취한 세 구절에서 원들에 대한 환영보다 더욱 강력하게 자신을 감싸는 기적을 짜 맞춘다:
 
오, 영원한 빛이여, 홀로 당신 안에 있고,
홀로 깨달으며, 그리고, 스스로 이해되고
또한 스스로 이해하면서, 사랑하고 미소 짓는구나!
 
갑자기 그는 원안에서 어떤 것을 본다: “la nostra effige”, 우리의 모습 즉 인간의 얼굴이다. 이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한 예수이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얼굴이 원에 어울릴 수 있을까? 그는 이를 알아낼 수 없었으며, 그의 마지막 은유로서 우리의 주의를 기하학의 그 유명한 풀리지 않는 문제 — 원의 면적 구하기 — 로 돌리게 한다. 당신은 원을 측정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며, 인간의 모습을 신과 관련지어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 이 시에서 순례자가 신을 대면하면서 일어나는 바로 그 행위 —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인데, 그가 자신에게 해답을 주는 벼락을 갑작스레 맞지 않았었다면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은유를 들 수 없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그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의지와 욕망은,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다른 모든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지옥>>편과 <<연옥>>편에서처럼, <<천국>>편도 “별”이라는 단어로 끝난다. 순례자는 천체를 여행하면서 아직도 천국에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지구로 돌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세 구절은 음률과 표현이 부드럽다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 그가 잠이 들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시 엄청난 체험 후에 잠자리에 들 것 같은 기분이다.
 
<<천국>>편이 다 이렇지는 않지만 —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 — 일부는 이렇고, 여러분들은 결말을 보기 위해 나머지도 읽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로버트 홀랜더는 텍스트에 비해 거의 30배가 넘는 길이의 주해를 달아 놓았다. 이제 이 시를 읽기 위해 주해가 필요할 것이다. 단테는 성서와 라틴어로 된 문헌을 완벽하게 알았고 우리 역시 이 저서들을 잘 알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논리적 관련 없이 이 저서들을 인용하고 있다. 대부분 우리는 이 저서들을 잘 모르고, 따라서 베아트리체가 경솔한 서약 — “그가 처음 본 것을 바치겠다고 한 입다(Jephthah)”처럼 — 은 하지 말아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판관기] 11장에서 암몬인들을 쳐서 이길 수 있다면 그의 대문에서 나온 그가 처음 본 것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한 히브리 용사 입다에 대해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입다가 승리를 거둔 후 그의 집에서 처음으로 나온 것은 그의 외동딸이었으며 그는 신앙심 깊게 그녀를 죽여야만 했다. 이는 끔찍한 이야기이며, 경솔한 서약에 대한 적절한 경고이다. 이런 내용을 아는 것이 우리가 시를 음미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구절에 대한 홀랜더의 주해에서 매우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홀랜더는 단테가 딸을 살해하는 성서의 이야기와 아가멤논이 이피게니아를 희생시키는 고전의 이야기를 혼합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알기 바라며, 그는 시인이 이러한 성서/고전의 쌍을 다른 곳에서도 시도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가 입다의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는 “서약”이라는 단어가 이전의 세 개의 곡에서 몇 번 사용되었는지 (일곱 번이다) 말해주고 있다. 그는 “mancia” 혹은 “제물”이라는 단어가 “심한 공격”이란 뜻도 가지고 있음을 써 두었다. 존경 받을만한 동료로서 그는 가장 먼저 누가 이 단어를 말했는지를 — “보스코/레지오 Bosco/Reggio”(제5곡 66절) — 그리고 그들이 다른 것들도 말했는지, 예를 들어, 아퀴나스 역시 입다를 인용했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피게니아로 말하자면, 홀랜더는 그녀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단테가 입다의 불행한 딸의 이야기와 이피게니아의 이야기를 혼합시켰다는 점을 덧붙였다: “단테는 자신이 처녀로서 죽는 것에 대한 슬픔을 산에 가서 애곡하는 입다의 딸의 눈물을 (판관기 11:37-38) 이피게니아의 볼로 바꾸어 놓았다. Torraca를 보라 (제5곡 70-72절)”. 이러한 주해를 다 읽는 시점이면 우리는 입다의 서약이 무엇이었는지 알고자 했다는 점마저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거의 모든 시 구절이 이렇게 취급되고 있다. 홀랜더의 목적은 우리에게 <<신곡>>의 저술에 기여했을, 단테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무엇보다도 그가 읽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홀랜더는 단테가 선택한 단어에 관심이 있다. 그는 단어가 hapax (이 송가에서 단 한번 사용된) 혹은 3-hapax (<<신곡>>의 송가 한 편에서 한번만 사용된), 혹은 “완전한 hapax” (이탈리아 문헌에서 단 한번 사용된)로 사용되었을 때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단테가 실수를 한 때도 알려주고 있다. (<<천국>>편에서 1072년에 죽은 성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추기경으로 붉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추기경은 13세기가 되어서야 붉은 모자를 썼다.) 그는 시인이 정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나 있음을 환기시켜준다. 베아트리체가 서약을 지키기 위해 대리물을 바칠 수 있다고 했으나 그것은 서약한 제물의 반 정도의 가치를 지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1904년 단테가 가치를 올려놓았다고 지적한 학자를 인용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5분의 일만큼 그 가치가 증가하나, 단테는 이를 2분의 일로 올려놓았다.”
 
단테는 생전에도 유명했으며, <<신곡>>에 대한 주해작업은 그가 1321년 (라벤나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한 후 곧바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700년에 가까운 학문적 업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홀랜더가 중요한 연구자들을 다 인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것 같아 보인다. 이 주해 부분이 재미있어질 것이다. 역사적 시기와 상관없이 학자들 모두가 한 방에 모여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도용하고 있는 훌륭한 스카르타찌니(Scartazzini)가 있다. 저기에 홀랜더가 어려운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불려간 믿음직한 토쩌(Tozer)가 있다. 여기에 단테가 동성애자라고 생각한 최근의 덜링(Durling)이 있다. 저기에 성실한 다니엘로(Daniello)가 — 그는 커다란 종이와 함께 생각이 난다 — 단테의 엠피레오에서 축복받은 영혼들이 앉아 있었던 장미 모양의 공간의 면적을 계산해 내려고 하고 있다. 고상한 체 하는 여성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단테는 어떻게 성 베르나르두스가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 시 그녀의 “자궁”에 대해 말하게 했단 말인가? 그는 더 좋은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단 말인가?) 광신자들도 자신들의 말을 하고 있다. (엠피레오에 기독교도들보다 유대인들이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국가별 팀을 이룬다. 단테 사상에 있어 비정통적인 부분을 미국의 논평자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탈리아 논평자들은 이에 대해 근심한다. 싸움이 시작된다: “가브리엘(10절)이 최초로 누가의 관찰에 대해 다소 의문을 표명하였다. 롬바르디아는 심장에 못을 박았다.” 홀랜더는 때때로 논쟁자들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해석으로 가슴에 못을 박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어떤 학자는 “터무니없는 오독”을 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는 “어리석은 의견”을 내고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비호감인들로 부각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르디(Nardi)는 계속하여 실수를 지적 받는다. 싱글톤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경우에는 세심한 예의를 갖추어 인용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싱글톤(Charles S. Singleton)의 풍부한 주해를 단 <<신곡>> 번역판은 틈새 시장을 — 홀랜더 번역본의 대상인 고급과정에 있는 학생들 — 점령하였다. 홀랜더는 심지어 학생들의 글도 인용하고 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4년 전에 은퇴하였다. 이러한 주해들은 그의 선생으로서의 경력에 대한 집대성이자 고별사로 읽힌다.
 
이와 같은 주해는 그 범위가 너무 광대하여 단테에 대한 통일된 비판적 관점을 내놓을 수 없어 보이는데도, 홀랜더는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단테 비평가가 근본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한다. 한 부류는 낭만주의자들로 우화를 고려하지 않고 <<신곡>>을 자신들의 영감으로 읽을 수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다. 크로체가 가장 중요한 본보기일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에 반대되는 부류는 단테의 세계를 그가 보았듯이 보아야 한다는, 따라서 시를 우화에 일치시켜야 한다는 이들로, 홀랜더가 중요한 전형적 인물일 것이다. 그의 경력은 단테의 우화를 설명하고 방어하는데 바쳐졌다. 신학적 하부구조를 무시하는 이들은 이 시에 대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홀랜더는 크로체가 많은 독자들(나는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처럼 오디세우스를 영웅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크로체와 현대의 다수의 독자들은 요부 프란체스카 다 라미니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다. 홀랜더가 고통에 차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베아트리체보다 프란체스카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홀랜더는 이것은 매우 틀린 것으로 그의 주해에서 단테가 그의 이야기 구조에서 프란체스카와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명확한 죄를 지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사기꾼”이라고 주장한다.
 
우화에 대한 그의 주장은 오디세우스와 프란체스카를 넘어 서고 있다. 이것은 <<신곡>> 전편에 대한 어떤 태도, 즉 숭고한 태도가 된다. 이 시에서는 불안케 하는 그 어떤 것도 없고, 그는 아무 문제도 없고 아무런 긴장도 없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는 <<천국>>편의 많은 부분이 지루하다는 점을 대체로 인정한다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송가를 “시화된 신학”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독자들이 가장 “힘들고 달갑지 않게” 여길 곡이 어떤 곡(제2곡)인지에 대해 농담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그리고 우리가 <<천국>>편에서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들은 다 이유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베아트리체가 “교회학 박사처럼 들린다면” 이는 “바로 단테가 그녀에게 원하던” 바였기 때문이다. “천국에 다양함이 없다면” 이는 “축복받은 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주해를 읽는다면 역시 이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결국에는 홀랜더는 축복받은 이들처럼 말하고 있다. 그는 그가 가진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는다. <<신곡>>을 40여년 동안 가르친 후, 그는 단테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신을 좋아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피조물을 사랑으로 내려보는 신을 생각할 것을 청한다). 사실 그는 때때로 <<신곡>>이 허구의 작업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단테가 엠피레오에 도착했을 때 장미 계단의 착석 방식을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는데 — 히브리 어린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독교 어린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남성과 여성은 나누어서 혹은 같이 있을까? — 그는 거의 3 페이지 분량의 주해를 들어 문제점과 그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을 열거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시처럼 <<신곡>>도 다소 열린 결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편협한 시야는 우화를 옹호하는 입장의 깊은 뿌리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신곡>> 이후 7세기가 지난 우리가 단테의 관점이 어떠하였는지 명확히 말할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역사주의자로 보이나 이는 실상 비역사주의자로 모든 지식의 역사성,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항상 우리의 시대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를 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위하여 단테의 관점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상 우리의 가슴과 마음이 <<신곡>>을 읽기 충분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신곡>>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비평가인 카르네-로스(David Carne-Ross)의 표현에 의하자면, 독자들이 시에 대한 일종의 진지한 체험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이어야만 할 때 이들에게 “중세 기독교인의 화려한 드레스와 예복을 빌려 입고” 시를 읽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홀랜더의 주해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사실들보다 비전(秘傳)을 더 좋아하고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누려 하는 학자들과, 특히 대학원생들을 위한 것이다. 입다의 서약에 대한 그의 풍부한 주해에서 당신이 발견할 수 없는 단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으로, 입다의 서약이 무엇인가 이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보스코/레지오에 사로잡혀 홀랜더는 이를 언급해야 함을 잊어 버렸다. 다른 경우에도 그는 필요한 정보를 주는 것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홀랜더의 번역본은 현재 시중에서 가장 우수한 번역본이다. <<신곡>>을 읽으려 한다면 이 번역본을 사라. 그리고 키아르디(John Ciardi)의 번역본 (Signet에서 나온 페이퍼백) — 좋은 책이기는 하나 홀랜더의 책만큼 훌륭하지 않은 — 을 위해 22달러를 쓴 후 이 책의 훌륭하면서 비상식적이지 않은 주해를 이용하라. 키아르디는 입다의 서약이 무엇이었는지 알려 줄 것이다. 몇 개의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에서 그는 홀랜더의 주해에 동의하지 않는데, 홀랜더가 옳다고 해도, 단테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교황이 보니파티우스 8세였는지(키아르디) 혹은 요한 22세(홀랜더)였는지 신경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모든 구절을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베어울프>>를 제외하면 <<신곡>>은 당신이 언제까지라도 읽을 수 있는 기독교 시대의 가장 오래된 시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까지 쓰여진 시들 중 가장 야심적인 작품일 것이다. 성 바울로는 살아 생전 우리는 희미하게 볼 뿐이며 이후에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단테는 우리에게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려 하고 있다. 때로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출처: The New Yorker, 2007. 9. 3.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