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Hunter-gatherers Noble or savage

수렵-채집인, 고귀한 또는 야만적인?

수렵-채집의 시대는 몇몇 사람들이 말하듯이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에덴 동산이 아니었다.

인간은 지구 상에서 수렵-채집인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왔다. 적어도 8만5천년 전에서 그 후 농업이 출현한 7만3천 년경까지 인간은 수렵한 고기에 채집한 채소를 곁들였다. 안다만 해의 북부 센티넬 섬의 주민들은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센티넬인들은 여전히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거부하는 유일한 수렵-채집인들이다. 풀로 만든 작은 허리띠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벌거벗은 늘씬하고 건강한 검은 색 피부의 수려한 외모의 인종인 이들은 바로 고귀한 야만인의 표본이다. 유전학은 6만년 이전에 아프리카에서 확산된 이후로 안다만 제도의 토착민들이 고립되어 왔었다고 주장한다.

대략 만2천년 전에 인간은 농업이라는 실험에 착수하였고, 몇몇 사람들은 인류와 지구가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들었다고 말한다. 농업은 급격한 인구증가, 단백질과 비타민 결핍, 새로운 질병 그리고 산림벌채를 초래하였다. 실제로 근동지역에서 처음 작물을 수확한 이래 인간의 키가 거의 6인치가량 줄었다. 그렇다면 UCLA의 지리학 교수이며 진화생물학자인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말한 것처럼 농업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였는가?

만5천년 전, 구세계의 스냅 사진을 찍어보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현명한 이 새 인류는 최초로 아프리카를 자신들의 대륙으로 개척하고 시베리아의 일부를 제외한 아시아, 호주 그리고 유럽을 개척하였으며 아메리카 대륙으로 거주하기 직전이었다. 이들은 작살, 보트, 바늘, 손도끼, 그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그림을 그렸고, 자신의 몸을 치장하였으며 영혼을 믿었다. 이들은 음식, 조개 껍질, 원자재와 아이디어를 교류하였다. 이들은 노래를 불렀으며, 이야기를 하였고 약초를 조제하였다.

이들은 “수렵-채집인”이었다. 대체로 남자들은 사냥하였고 여자들은 채집하였다: 노동의 성적 분업은 경작을 하지 않는 인간들 사이에서 여전히 보편적이며 이것은 아마도 직립 원인(호모 에렉투스) 선조들과 공유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수렵-채집인”들은 고기와 야채를 먹을 수 있었고 이것은 질에 안정성을 곁들인 기민한 책략이었다.

왜 변화하였는가? 1970년대 후반 고고학자인 코헨Mark Cohen은 농업이 창조적인 자극이 아닌 필사적인 상황에서 창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부터의 증거가 그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나투프 지역의 수렵-채집인들은 저온의 건조한 기후와 결합한 인구밀도의 상승으로 인해 도토리, 가젤 양과 목초 씨앗이 부족해졌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집트 콩밭이나 개밀 밭을 유지, 강화시키려 하였고 곧 파종, 제초, 수확, 탈곡이 시작되었다.

인류는 그 후 수 천년 동안 매우 독립적으로 적어도 6개의 다른 지역- 양지 강 유역, 뉴기니, 멕시코, 안데스, 서부 아프리카의 중심 계곡, 아마존 강 유역-에서 유사한 단계를 밞아 왔다. 그리고 에덴동산이 종말을 맞는 것 같았다. 수렵-채집인들은 음식에서 다량의 지방과 비타민은 물론 단백질도 섭취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 탄자니아의 하자인들은 한 주에 14시간 가량 “일을 했는데”, 보츠와나의 쿵인은 그만큼 일하지 않았다.

최초의 농작인들은 전성기의 수렵-채집인들보다 건강하지 않았다. 작은 체구 외에 그들은 고된 노동으로 인해 골격이 더욱 손상되었고, 이빨이 더 상했으며 단백질과 비타민이 결핍한 상태였고 가축으로 인한 질병 — 소로부터 홍역이, 오리에게서 인프루엔자가, 쥐로부터 흑사병이, 비료로 사용되는 그들 자신의 배설물에서 기생충병 — 에 걸렸다.

또한 그들은 처음으로 불평등에 호되게 시달리게 되었다. 서로의 수렵, 채집운을 공유하여야 하는 상호의존도는 놀라울 정도로 수렵-채집인들을 평등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성공한 농부는 다른 이들의 노동을 살 수 있게 되어 더욱 부유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특별히 그가 물을 통제할 수 있는 관개 지역의 강 유역에서, 그의 피지배자들에게 횡포를 휘두르는 제왕이 될 수 있었다.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농업을 정치적 순수성의 상실로 본 것은 옳은 것 같다.

농업은 또한 성적 불평등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많은 소작농업 공동체에서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더욱 고된 노동을 시켰다.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남자들은 주로 여자들보다 적은 칼로리를 벌어왔고, 먹기 전에 부패하지 않는 작고 흔한 먹이감보다 크고 희귀한 먹이감을 포획하려는 그래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성가신 경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인류학자들은 농업의 발명이 실수라는 관점을 은근슬쩍 수정하였다. 그들은 수렵-채집인들의 에덴 동산에서 음흉한 뱀, 고귀한 야만인들 사이에서 야만인을 발견하였다. 결국은 8만년 동안의 야영 휴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2006년 두 명의 인도 어부들이 작은 보트 안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어 표류하다 북부 센티넬 섬의 해안가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주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들의 시체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사체를 수습하러 간 헬리콥터는 빗발치듯 퍼붓는 창과 화살에 의해 쫓겨 났다. 센티넬인들은 불법 침입자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매우 가끔 코코넛 선물로 그들을 작은 섬 해변가로 유인하여 불러 내는데 빗발치는 화살 없이 이 선물을 이들이 가지고 가는 일은 오로지 한두 번 있을 뿐이다.

여러 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근래 들어 수렵-채집 사회가 최근의 시대보다 더욱 폭력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칼라하리의 쿵에서 북극의 이누이족, 호주 원주민들까지 현대의 수렵-채집인들의 삼분의 이가 거의 지속적인 부족전쟁 상태에 처해 있고, 그들 중 거의 90퍼센트가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전쟁터에 나가고 있다. 전쟁이란 말은 새벽의 기습, 소규모 접전 그리고 수많은 전쟁 제스처에 비하면 너무 큰 단어이겠으나 사망률은 높아 통상 살인으로 죽는 성인 남성이 25퍼센트에서 30퍼센트에 이른다. 일리노이 대학의 키리Lawrence Keeley가 수렵-채집 사회에 전형적이라고 추정한 주민의 0.5퍼센트가 되는 연간 전쟁 사망률은 20세기 동안 사망한 20억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인류학자들은 이것을 근대적 병리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이를 자연상태로 보기 시작했다. 하버드 대학의 랭함Richard Wrangham은 수컷들이 서로 협조하여 체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동물은 오로지 침팬지와 인간밖에 없다고 말했다. 침팬지와 인간의 사망률은 유사하다. 하버드 대학의 르브랑Steven LeBlanc 역시 루소주의의 희망적 사유때문에 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의 증거를 간과하게 된다고 말한다.

전쟁에서 여성이 남성만큼 많이 죽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이들이 싸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적 전리품으로 납치되는 것은 수렵-채집 사회에서 거의 확실한 여성의 일반적인 운명이었다. 에덴 동산은 잊어버리고 매드 맥스를 생각하라.

끊임없는 전쟁은 인구밀도를 일 제곱 마일당 한 사람으로 감소시키는데 필수적이었다. 그 인구밀도에서 농부들은 100배 살 수 있었다.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는 약자가 죽어야 했기 때문에 매우 유연하고 건강했을 것 같다. 농업의 발명과 정주 사회의 출현은 단순히 높은 사망률을 높은 질병률로 맞바꾸었을 뿐이었는데, 사람들에게 만성적인 전쟁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고 따라서 이들은 모두 소멸되기 보다 적어도 어렵게 생존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과의 유사함에 주목해보자. 시골지역의 농부들이 그들의 오두막집을 랭카셔의 방직공장과 맞바꾸어야 했을 때 이것이 개선이라고 여겨졌을까? 디킨스의 관점에서 공장은 전원의 목가를 도시의 비참함, 가난, 오염 그리고 질병으로 대체시켜버린 것이었다. 공장은 실상 비참한 상태였고 도시의 빈민은 과도하게 노동하였으며 음식섭취를 충분히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춥고 진흙투성의 굶주려야 하는 지옥 같은 시골에서 탈출하기 위해 공장에서의 일자리를 구하려 떼지어 몰려다녔다.

18세기 영국의 시골지역은 매해 봄이 되면 겨울 비축량이 다 소진되기 때문에 굶주려야 하는 곳이었고, 흉년에 가난한 지역에서는 장시간 농업노동을 해도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기 힘들었으며, 고향의 방직 공장의 “하청” 시스템은 공장에서 줄 수 있는 것 보다도 더 적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과도하게 일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잠비아인들이 왜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광산에서 저임금을 받고 일하는지 또는 베트남인들이 왜 다국적 공장에서 셔츠를 만들고 있는지 물어보라) 산업혁명은 어린아이들의 생존율을 높였기 때문에 — 영양실조에 걸리긴 했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 인구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Constant Battles수렵-채집인들의 이야기로 되돌아와서, 르브랑은 (그의 [[끊임 없는 전쟁]]에서) 인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도 잘 살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직립원인은 그러지 않았던 수많은 생태계 혼란을 야기시켰다. 3만년 이전의 호주와 1만 천년 전 북아메리카의 대형동물을 멸종시킨 원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매머드와 거대한 캥거루는 인내심이 강한 주자의 가차없는 추적과 끝을 돌로 처리한 창을 가진 인간의 매복에 대항할 승산이 없었다.

이것은 유라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만2천년 전 남부 프랑스의 쇼베의 가장 위대한 동굴화가 중 최초의 화가는 코뿔소에 집착하였다. 만5천년 후 라스코 동굴에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주로 들소, 황소, 말을 — 코뿔소는 그 때 거의 멸종직전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 묘사하였다. 처음에 지중해 부근의 근대적 인류는 육류 섭취를 거의 거대 포유동물에 의존하였다. 그들은 작은 사냥감들이 천천히 움직였을 때만 잡아 먹었으며, 거북이와 삿갓 조개류가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나서 중동지역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그리고 가차없이 더 작은 동물로 사냥감을 바꾸어 나갔는데 특별히 더운 피 동물로 빨리 번식하는 토끼, 자고새 그리고 더 작은 가젤 양과 같은 종류였다. 고고학적 기록은 이스라엘, 터키, 이탈리아와 같은 지역도 이와 유사했음을 보여준다.

아리조나 대학의 스티너Mary Stiner와 쿤Steven Kuhn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원인을 거북이, 말, 코뿔소처럼 천천히 번식하는 먹이감들에 비해 인구 밀도가 현저하게 상승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빨리 번식하는 토끼, 자고새, 가젤 양과 같은 동물만이 이러한 사냥에 대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이 약 만5천년 전에 지중해 지역의 식단에서 큰 사냥감과 거북이를 — 인간의 수탈로 인해 멸종 직전에 까지 이르게 되어 — 급격히 사라지게 하였다.

먹이감이 부족해 진 시대에는 다른 육식동물처럼 직립 원인도 지역의 먹이감 멸종으로 인해 몹시 고통 받아야 했다. 이 새로운 인류는 이 문제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발명할 수 있었다. 그들의 틈새를 변경할 수 있었다. 인구의 압력에 대응하여 더 작고 빠른 먹이감을 포획할 수 있는 무기를 발명하였고, 비록 수많은 크고 천천히 번식하는 먹이감들이 멸종하는 희생을 치렀지만, 그 결과로 더 높은 인구밀도에서도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원리 하에 만8천년 전에 창 발사기가 발명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좋은 생각 같아서가 아니라 맬서스주의적 위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수렵과 채집 중간에 불가에서 잡담을 나눌 수 있는 많은 시간과 더불어 수렵-채집인들의 유명한 “풍요로운 사회”는 일종의 신화이거나 근대적 삶의 유물이 되었다. 쿵인이 음식을 마련하는데 드는 시간의 측정에서는 식품 가공처리 시간과 이동 시간이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 인류학자들이 그들을 차로 태워주고 음식을 가공 처리할 수 있는 금속 나이프를 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농업은 인구의 압력에 대한 또 다른 응답으로 추측된다. 만3천여 년 전에 소건조기로 알려진 천년 간의 건조하고 추운 “기후의 급변”기 동안에 기아라는 새로운 습격은 레반트 지역의 일부 수렵-채집인들을 채식주의자로 만들었다. 곧 야생초의 씨를 거두어 들이는 것이 파종과 작물 수확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사람들의 단백질과 비타민의 섭취를 줄였으나 넉넉한 칼로리, 생존과 다산을 가져왔다.

이와 유사한 일이 향후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의 역사에서 — 아시아와 뉴기니아 그리고 미대륙에서 적어도 세 지역, 아프리카의 한 지역에서 — 여섯 번 이상 일어났다는 사실은 발명이라는 개념이 인구의 압력으로 인해 생겨났음을 입증하고 있다. 각각의 상황에 처한 초창기의 농부들이 작고 병들었고 예속되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살아 남아 자식을 낳았고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자신들의 대륙에 잔존하는 수렵-채집인들을 제압하였다.

우리가 수렵-채집인으로 남아 있었으면 더 잘 살았을가를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 살아갈 틈새를 변경한 종으로 우리는 다음 단계로 옮겨가야만 했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인류는 5만년 전에 필요에 의한 발명으로부터 습성이 지속적으로 변화되면서 “진보”라는 길을 걸어왔다. 심지어 4만년 전에, 특히 유라시아의 서부지역에서 기술과 생활양식은 지속적인 변화 상태에 놓여 있었다. 3만 4천년 전까지 인류는 뼈로 창 끝을 만들었고 2만6천년 전까지는 바늘을 만들었다. 만8천년 전에 뼈로 만든 창 발사기가 발명된 것처럼 작살과 다른 낚시 도구가 출현하였다. 그 당시 노끈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물과 덫 말고 어떻게 토끼를 잡았겠는가?

이러한 탁월한 기량은 실용적인 것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펜던트로 사용되어 반들반들 닮아 있는 매모스 상아로 조각된 말은 3만2천년 전 독일에서부터 발로한다. 숭기르 시대에 모스크바 북동부지역의 블라디미르 시 근처의 야외 정착지에, 공들여서 조각한 수천 개의 상아 구슬과 작은 바퀴 모양의 뼈로 만든 장신구들이 사체들과 같이 묻혀 있었다.

끊임없는 발명은 인간의 특성이다. 농업, 동물의 가축화와 작물재배는 이러한 진보적인 변화의 맥락에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또 다른 한 단계였다: 수렵-채집인들은 8만년 전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뿌리가 달린 식물의 재배를 장려하기 위해 불을 사용했을 것 같다. 만5천년 전에 인류는 최초로 다른 종 — 늑대 (주도권을 쥔 쪽은 늑대였을 테지만)를 사육하기 시작했다. 만2천년 전에 수확이 이루어졌다. 모호하게 말하자면 5만년 전 인터넷과 휴대폰이 궁극적으로 출현할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는 근대적인 교훈이 있다. 우리는 우리자신과 거주지에 대한 생태적 위기를 수만년 동안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위기를 해결해왔다. 비관론자들은 각각의 해결책은 다만 우리를 다음의 위기에 직면케 한다고 말할 것이고, 낙관론자들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위기는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대형동물의 멸종으로부터 다시 일어섰으며, 최초로 토끼를 그리고 야생초의 씨앗을 먹기 시작한 후 셀 수 없을 만큼 된 것처럼, 20세기 초 인구가 10억이 되어 비료의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화학질소와 유전적으로 높은 산출량을 낼 작물과 트랙터를 사용하여 더 적은 땅에서 10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생각한다. 마침내 우리가 이산화탄소내의 축적물을 전환시키는 지점에서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출처: The Economist, 2007. 12. 19.

번역: 라티오 출판사

|국내 관련 도서|
브라이언 페이건(지음), 이희준(옮김), [[인류의 선사문화 World Prehistory: A Brief History]], 사회평론,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