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How to Understand Politics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Harvey C. Mansfield
2007 Jefferson Lecture in the Humanities

한동안 우리는 정치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대학 밖의 모든 사람에게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 정치학이 용기 있게 대학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좀더 소박하게 정치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아니라,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보여주려 한다. 여하간 내가 제안하는 이해는 실제로 대학이 아니라 실천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어느 정도 용기와 연관이 있다. 대학에서는 용기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하물며 대학에서 용기가 이해되는 일은 더욱 드물다.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을 실제로 그러한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책망할 수 있을까? 그는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는 얼마나 중요할까? 이것은 정치에서 핵심적인 질문이다. 정치란 누가 더 중요하게 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이념을 가진 어떤 정당의 어떤 지도자가 더 중요할까? 정치는 중요성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가정한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정치는 인간이 중요하다고 가정한다.

정치학은 오늘날 이런 질문을 회피한다. 이런 경향은 Harold D. Lasswell이 1935년에 펴낸 유명한 제목의 책 [[정치: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는가?]]로 고무되었다. 이 책은 당신이 얻는 이익 — 무엇을, 언제, 어떻게 — 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누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곧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이 얻은 것을 당연히 가질 수 있을 만큼 중요한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시인들(넓게 말해 모든 문인)과 철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고, 아니면 적어도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과학은 그렇지 않다. 정치학이 중요성에 관한 질문을 무시하는 이유는 진짜 과학인 자연과학의 방식을 따라 과학적이 되려는 야망 때문이다. 과학적 진실은 객관적이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정치학은 중요성에 대한 관심을 편견의 근원, 진실의 적으로 여긴다. 과학계에서 개인들은 보상을 요구할 수 있고 국민들은 그들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인정은 원리적으로 그리고 사실상 집단적이며 익명의 기획인 과학 외부의 일이다. 정치를 연구하여 중요성, 곧 중요성이 중요하다는 것에 민감해져야만 하는 정치학은 보편적인 명제들에 도달하기 위해 개별 자료에서 이름만 추상화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조사 연구가 그 한 예이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이 조직한 단체들은 항상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름을 통해 개별성을 유지한다. 개인들 사이의 차이, 그리고 사회나 여타 집단들 사이의 차이는 이름으로 구별되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차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름 없이도 추상적인 개인이나 사회에 관해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추상적 개인이 되거나 추상적 사회에서 살 수는 없다. 과학은 고유한 이름들에 무관심하며 스스로를 보통명사들에 한정시키지만, 모든 인간은 고유명사들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살아간다. 이름을 떨치라는 것은 중요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이름을 더럽히는 것, 평판에 흠집내는 것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 혹은 당신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할까? 분명 인간은 자신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아마도 인간이 책임감 있게 살려면 그렇게 생각해야만 할 텐데,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면 의무를 다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나는 오늘날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인문학에서 생겨난 두 가지 개선점을 제시하려 한다. 우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정(혹은 정념, thumos)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이 개념은 우리 자신을 중요하다고 주장하게끔 하는 영혼의 일부분을 일컫는다. 격정은 이 두 철학자가 착상한 학문의 술어로 엄밀히 말하면 심리학이나 생물학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이 술어가 인문학에 적절하다고 말하고자 하는데, 근대 과학에서 추방된 이 술어는 주목받지도 쓰이지도 못한 채 거부당한 과학의 박물관인 과학사를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개선점은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는 문학에는 고유하지만 과학에는 낯선 것이다. 문학은 이름을 가진 장소와 날짜를 가진 시간 속에 있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을 이야기한다. 과학은 이름을 무시하거나 발뺌하려 들지만, 문학은 이름을 사용하고 존중한다.

격정에 관한 기초적인 관찰로부터 시작하자. 정치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당신을 화나게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문제가 되긴 하지만 이는 주로 당신이 욕망을 충족시킬 만한 자격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 화를 내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불쌍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관해 불평하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그것들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당신이 불평하는 까닭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것이어야만 하는 것을 갖지 못해서 무시당하거나 모욕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특히 당신이 공평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근래의 민권운동과 여성운동이 명백한 사례이다. 이 운동들은 혜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등하게 공경받고 존중받기 위해 시작되었다. 우리는 부자들의 욕망과 그들의 불평등에 대한 요구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내에서 그러한 욕망은 잠재되고 억눌려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부자들을 위한 공간을 남겨 두고 원리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실제적으로는 불평등을 허용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부자들이 자신들의 민주적 권리들을 침해당하지 않았는데도 화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각 집단이 얼마나 많이 얻는가를 측정하려고 애쓰기보다 누가 어떤 이유로 화낼 수 있도록 허용되는가를 알아차림으로써 사회를 떠맡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들과 여성들은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평등에 대한 표상으로서 혜택받기를 원하였다. 힘(power)은 명예와 분리되면 지나치게 모호한 술어가 된다. 우리가 사람들이 권한을 부여받았다(empowered)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명예를 수반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권한이 없는 이들은 ‘멸시받는 사람(dissed)’ — 흑인들이 경멸당하는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말 — 들이다.

정치학자들은 고유한 이름들을 추상화하고 회피하려는 정치학의 경향을 보이면서 명예를 추구하는 흑인들과 여성들의 운동을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으로 일반화해 왔다. 정체성과 의미에 이름이 수반되는데 어떻게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서 정체성 혹은 의미의 정치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Lyle Lovett의 노래 ‘You’re Not from Texas'(당신은 텍사스 출신이 아니야)는 이렇게 끝난다. “맞아, 당신은 텍사스 출신이 아니야. 그렇지만 어쨌든 텍사스는 당신을 원해.” Lyle는 우리에게 다문화주의의 핵심 문제를 가르쳐준다. 텍사스 출신인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어떻게 텍사스가 그 지역 출신도 아닌 당신을 원할 수 있는가? 우리 중 텍사스 출신이 아닌 이들은 그것을 수치스러워하며 살아야만 하고, 어쨌든 텍사스가 우리를 원한다는 것을 의심할 것이다. 명예는 불명예로 인한 수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명예는 또한 승리와 함께하는데, 그 과정에서 잃을 수도 있지만 명예는 계산과는 달리 경쟁을 통해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투자 계좌에서 볼 수 있는 이익과 손실의 등락 혹은 연이은 권력 추구가 아니다. 정치란 한쪽에게 승리인 것은 모두 다른 쪽에게는 패배인, 승리와 패배의 연쇄이다. 이러한 연쇄가 최종적인 승리와 함께 끝나는 일은 정말 드물다. 전쟁이 항상 그 다음 전쟁으로 돌아오고 스포츠가 항상 후년을 기약하는 것처럼 좌파는 결코 우파를 최종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정치는 승리와 패배로 중단되곤 하는데, 그중 다수는 일시적이지만 일부는 결정적이다. 전쟁과 스포츠처럼 정치에도 승자와 패자가 있으며, 이는 협상을 통한 권력의 일부 혹은 일반화된 자긍심을 낳는 것이 아니라 긍지와 낙담, 분노 혹은 수치를 낳는다.

일반화된 자긍심(generalized self-esteem)이나 자기만족(self-satisfaction) 또는 권력(power)은 근대적 개념인 ‘자아’에서 생겨나는데, 16세기부터 시작되는 이 개념의 역사를 여기서 설명하진 않겠다. 자아는 근대 과학인 심리학과 경제학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영혼 개념을 단순화한 것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텐데, 심리학과 경제학은 자신들이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당신이 행복해하길 바란다. 단순화된 근대적 자기이익에 맞서 나 역시 단순화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단순화할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근대적 사유에서 영혼은 자발적 행동의 가능성 — 당신을 행동하게 하는 것 — 과 사유의 가능성 — 당신을 멈추고 생각하게 하는, 아마도 당신 자신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것 — 으로부터 도출되었다. 이것은 복잡하며, 상반되는 실천의 요구조건과 이론의 요구조건 사이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언제 행동해야 하는가, 언제 숙고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 복잡함에 당신이 어떤 방향으로 행동하거나 무엇에 관해 사유하는 것이 선한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를 덧붙인다면, 과학은 그것을 불편해하고 빠져나갈 길을 찾을 것이다.

과학은 왜 불편해하는가? DNA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과학은 실천과 이론 사이의 불일치를 극복함으로써 이론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과학이 무언가에 의존하는 것, 일반적으로 수학에 의존하는 것은 응용이라는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과학은 과학의 열매를 원하지만, 그 열매가 과연 선한 것인지 집요하게 의심하는 것에는 관대하지 못하다. 당신이 DNA의 사용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당신 사정일 뿐이다. DNA의 아버지가 반드시 밝혀져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은 과학이 알 바 아니다.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제조를 꺼림칙하게 여겼고 이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의심이 그들의 과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며 하물며 그들의 과학으로 뒷받침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복잡함과 의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선(善)을 신체와 밀접한 쾌락으로, 신체에 유익한 효용성으로 환원하는 것이거나 쾌락과 유용성을 결합하여 선을 힘으로, 신체의 에너지로 환원하는 것이다. 신체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로 간주되므로 일반화를 위한 손쉬운 토대이다. 반면 신체로 인해 우리가 개인으로 분리되는 경향은 간과된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선만큼이나 과학에 이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선이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환원될수록 한 사람의 정체성은 더 모호하지만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로 격상된다.

신체를 가진 자아는 단순화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자기이익이다. 자기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고결하진 못하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한 시간에 50센트를 받던 나라를 떠나 10달러를 받는 나라로 가는 것이다. 아무도 당신이 유혹에 넘어갔다고 비난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자기이익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나라도 당신처럼 할 것이다. 나는 명백히 좋은 것에 이끌리거나 내가 명백히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이끌릴 것이다. 자기이익이 명백한 것이라면, 그것은 진짜 당신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위적으로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학은 온통 자기이익의 충돌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정치는 그렇지 않다.

이와 대조적으로 격정은 그 본성상 복잡하다. 때로 힘참(spiritedness)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격정은 자기 자신을 선과 연결하는 영혼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격정은, 동물이 위협이나 잠재적 위협을 직면했을 때 털을 곤두세우는 반응을 일컫는, 자신의 동물적 신체의 특성을 힘차게 방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일 때는 공격할지도 모르지만, 격정은 무엇보다 달려들려는 열망이라기보다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 반응이다. 동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총력을 다해 공격할 경우 그 반응은 종종 과도하게 나타난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격정의 패러독스이며 명백한 모순이다. 여러분은 인간적 동물로서 자신의 삶조차 비난할 수 있고 유감스러우며 부끄럽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수치심은 격정 때문이다.

여러분은 수치심에 관심이 있는가?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그만큼 어렵다. 분명히 여러분은 자신의 자아 위에 자아를 가지고 있는데, 때때로 이것이 여러분의 자아에 비판적이고 여러분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것을 영혼이라 부르자. 격정적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얼마간 그렇지 않은가?

격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동물성을 보는데, 인간들(특히 남자들)은 종종 개가 짖어대고 뱀이 쉿쉿 소리를 내고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인간적 동물의 인간성을 본다. 인간은 위협에 직면해 털을 곤두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화도 내는데 이는 어떤 근거, 심지어 어떤 원리, 어떤 원인 때문에 반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화를 낸다. 여러분이 분통을 터뜨릴 때 여러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근거를 찾는다. 여러분은 부당하다고 느낀 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근거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근거 –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좋게 여겨지는 것이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건 – 없이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 없다.

이제 그러한 근거를 만들어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아킬레우스는 통치자 아가멤논이 그의 노예 소녀를 갈취하자 어떻게 했던가? 그는 목숨을 걸었다. 그는 여자를 빼앗긴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릇된 부류의 인간이 희랍인들을 통치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아가멤논처럼 자신들의 가문을 주로 천거받는 데 이용하고 그럼으로써 아킬레우스와 같은 남자들이 받아 마땅한 명예를 주지 않는 왜소한 존재들보다는 영웅들 혹은 적어도 아킬레우스와 같은 남자들이 책임져야만 했다. 아킬레우스는 사적인 권리의 침해에 대한 시민의 불평을 체제의 변화에 대한 요구, 정치에서의 혁명으로 격상시켰다.

확실히 모든 불평이 그렇게까지 멀리 나아가진 않는다. 그러나 모든 불평은 그러한 방향으로, 곧 분노와 근거에서 정치로 나아간다. 아킬레우스가 주장하는 근거는 자기이익처럼 모두가 인정할 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아가멤논의 통치에 반대하고 현상유지에 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두고 경쟁이 벌어지리라 짐작할 수 있다. 불의에 관해 불평하는 것은 암묵적으로는 통치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통치자들에게 그들의 통치를 당신에게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단지 개인적인 호의가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의 한 사례로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통치자는 이미 자신의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원리를 위한 길을 닦기 위해 그것을 제거하길 원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변화에 관한 것 혹은 솔직히 말하자면 — 크든 작든, 적극적이든 잠재적이든 — 혁명에 관한 것이다. 정치는 안정성이나 평형에 관한 것이 아니며, 이런 것들은 오늘날 정치학이 시장으로부터 빌려오는 목표이다.

경쟁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호언장담하고 떠벌리는 식으로 근거를 단언하는데, 이는 그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반대자나 적이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근거를 입증할 수는 없다. 한쪽은 확신하지만 다른 쪽은 그렇지 않는 근거들로 정치판이 넘쳐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언이란 주장자가 결코 중립을 지킬 수 없는 결론을 포함하는 열정적인 진술이다. 소크라테스는 논쟁이 어디로 향하건 그리고 얼마나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건 상관없이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을 추론이라 하였다. 이것은 감정에 지배되지 않는 학문의 정신이다. 그러나 정치에서 사람들은 통제하거나 방향을 돌리기 위해 단언하고, 논쟁은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물론 때로는 논쟁이 방향을 선회하여 도리어 당신을 해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소리 높여 제왕적 대통령직을 공격한 이후에 당신이 속한 당파가 대통령직을 차지한 경우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만한 정치적 언명에 대한 논리의 저항을 본다. 그러나 신중히 근거를 추론하는 인간의 독창적인 능력을 과소평가하진 말자.

정치는 흥정하는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교환이 아닌데, 이 교환에서는 자기이익이 분명하고 구매하거나 말거나 상관없기 때문에 소란스러울 일이 없다. 공교롭게도 자기이익은 상업적 거래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속았다고 느끼면 화를 내거나 판매원의 상술에 넘어가는 것은 자아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자신의 이해타산을 자랑스레 여기는 사람들의 행동에 침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이익이 절정에 달하면 냉정하고 차분해진다. 이와 달리 격정은 당신을 들뜨게 하고 흥분시킨다. 상업에서처럼 정치에서도 흥정을 하지만 더 큰 정도의 자기중요성을 가지고 한다. 사람들은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움을 걸기 위해 정치에 들어선다. 자기이익은 평화를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우리의 영혼 안에서 자기이익이 격정을 대체할 수 있다면 보편적인 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무언가를 편들고 싶어 하며, 이는 다른 무언가를 편드는 이들과 대립한다는 뜻이다. 대립하는 와중에 그들은, 결코 여러분의 관심사는 아니겠지만,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종종 모욕하고 비방할 것이다.

더 나아가 격정 개념은 정치가 쟁취가 아니라 주로 보호에 관한 것임을 말해준다. 당신이 방어하기 위해 단언하는 근거가 당신을 보호하며 더불어 당신이 내세우는 주장에 공감하는 당신과 비슷한 사람들 역시 보호한다. 단언적인 정치적 논쟁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완벽하게 옳다고 가정한다. 당신은 자신의 자아와 정신을 위해 사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당신 외부에 있으며,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사고나 잘못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자기만족에 머물면서 보호받길 원한다. 보호받기 위해 쟁취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야심적이고 사악한 제국주의자들조차 아리안족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지키기 위해 세계를 정복하려 했다. 반대로 당신이 수치심을 느낀다면 잘못이 당신에게 있다고 믿게 되고, 당신의 단언성은 약해지고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반응이 어땠는지, 미합중국의 민감한 남성들이 여성운동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려 보라.

정치와 마찬가지로 격정은 자기 자신과 선에 관한 것이다. 정치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현실주의)이나 단순히 선을 전진시키는 것(이상주의)이 아니듯, 격정은 단지 이것 아니면 저것인 것이 아니다. 격정은 둘 모두에 관한 것이며 이 둘은 긴장관계에 있다. 자기 자신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정당화할 근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근거는 자기 자신을 그와 유사한 것으로 일반화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한 부류로 묶는다. 근거가 사회화되고 정치화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부류에 속해 있다면 당신은 전체의 일부가 된다. 당신 자신은 선, 곧 공동선의 일부이다. 당신의 현실주의는 이상주의로 바뀐다. 가장 자기중심적인 자유주의자조차 모든 사람이 철저히 이기적이기만 하다면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되리라 믿기에 모두가 자유주의자가 되길 바란다.

그럼에도 선 역시 보이는 것처럼 독립적이진 못하다. 선이 실제적인 것이 되려면 반드시 사회 안에서 확립되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대립하고 있는 기존의 선 개념에 맞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치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치에 있어 당신은 결코 무(無)에서 시작하지 않으며, 항상 당신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기는 선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지배적인 선을 패배시키기 위해 당신은 당신이 지향하는 선을 지지해야 하고 그것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의 동기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고, 당신의 이상주의는 현실주의로 얼룩진다. 비인격적인 선이 받아들여지려면 지지를 모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당파적인 선이 되고 그것의 비인격성을 잃어버린다.

오늘날 정치학 — 실은 모든 사회과학 — 에서 사용하는 단순화된 자기이익 개념은 자기 자신과 선 사이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는데, 그러한 긴장이 인간의 행위를 예측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개인의 사적인 사고를 꿰뚫어볼 수 없으며, 서로 다른 선 개념들에 대해 판결을 내릴 명확한 방법도 없다. 따라서 그러한 긴장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은 자기 자신과 선을 결합하여 이 둘 모두를 그대로 두지 않으려 한다. 과학은 자기 자신을 평균적인 사람의 이익, 더 정확히는 정량화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예상 가능한 개인으로 일반화해서 사회과학자가 쉽게 연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같은 목적으로 과학은 우리의 영혼에서 숭고한 것과 위대한 것(저열하고 사악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을 제거하고 고귀함과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개인적인 선호로 탈바꿈시켜서 과학으로서는 그 가치를 인식할 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 선을 세속화한다.

우리 인간의 격정은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신체를 가진 동물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근거를 이용해 우리 자신을 방어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가 영혼을 향해 열린 신체와 만물을 향해 열린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한다. 우리의 영혼 가운데 신체와 가장 밀접히 관련된 부분이야말로 신체를 넘어설 수 있는 매개물이다. 우리가 화를 내는 근거를 만들어내야만 할 때, 우리는 사실상 우리가 방어하는 것이 단지 우리의 신체뿐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그러한 — 이 지점에서는 명분이라 불리는 — 근거를 위해 목숨을 걸 때, 거기에는 우리를 우리의 신체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오히려 우리야말로 우리가 얻으려고 애쓰는 대의이다. 우리의 신체는 형체를 잃어 왔다. 클린턴 대통령은 싫어하겠지만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다(is)’의 의미가 형체를 잃는 것이다.

현대 생물학과는 달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은 영혼, 곧 인간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을 설명한다. 현대 생물학은 생명을 구하지만 고대 생물학이 생명을 더 잘 이해한다. 격정 개념은 우리의 동물성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동물들을 관찰할 때 육안으로 동물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은 현미경을 사용하여 화학적 신경학적으로 격정에 대응되는 것들을 발견하였는데, 그것들은 실제로는 행위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육안으로 수행하는 구식 과학만큼 신중하게 관찰하는 데 실패한다.

사회생물학은 영역권(turf) 개념을 생각해냈는데, 오늘날 자기 자신을 구획짓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이 개념은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격정 개념을 참고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영역권은 자신의 가족, 당, 국가, 원칙이다. 사회생물학은 어떻게 동물이 인간이 되는가를 관찰하는 대신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킨다.

격정은 우리가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혼을 제거해버린 현대 과학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측면 —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체의 능력 — 을 이해하지 못한다. 현대 생물학, 특히 진화론은 모든 생물의 생존에 최우선적 관심을 두며 이것이 현대 생물학의 토대이다. 이는 인간의 삶에 관한 한 확실히 잘못이다. 당신이 주위를 둘러볼 수 없고 원시적 취향에 몰두해야겠다면, 폐허가 된 고대인들의 유적을 방문하여 그들이 부의 얼마만큼을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종교에,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한 감각에 바쳤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기만 하면 된다.

종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특정하고 개별적인 영역에 이른 것이다. 인간의 중요성만큼 과학과 종교가 대립하는 영역은 없다. 종교는 인간의 중요성을 표명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려 한다.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아니지만 신은 인간의 몸으로 인간들에게 왔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세상에서 유일한 창조물이다. 기독교인은 겸허하지만 그의 겸허함에는 자긍심이 있다.

누구나 나처럼 종교에 관해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종교는 항상 특정한 종교이다. 종교의 기능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은 종교를 지나치게 일반화함으로써 그 기능을 잘못 서술한다. 모든 종교는 우리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고 인간의 중요성에 대한 특정한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인간들을 특별하게 돌보는 인격신 혹은 신들에 대한 특유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18세기 철학자들은 종교에 회의적이었으나 그 권한은 기꺼이 인정하였고, 인간을 돌보지 않고 우주를 돌보는 신 없는 신 개념인 이신론(理神論)을 창출하였다. 진정한 종교는 개별 인간들에게 말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종교에 대한 연구와 인간생물학에 대한 연구는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 항상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만 동시에 항상 자신을 넘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야만적인 격정의 본성에서, 바로 인간 신체의 동물성에서 종교를 발견할 수 있다. 주인을 보호하려는 개처럼, 격정은 그것 자체를 방어하면서 그보다 높은 것을 방어한다. 우리 안의 낮은 것이 우리 안의 높은 것을 방어할 때 그것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자신의 편협성,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함이다. 그렇지만 그 이점은 우리 각자가 자신을 위해 방어하면서 인류의 중요성을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격정 내의 자기방어는 우리 안의 낮은 것과 높은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 사이의 결속을 보증한다. 그 결속은 상호적이며, 신이 개개의 개인과 각각의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고는 인간성의 보편적인 목표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연결을 보증한다.

과학은 나름대로 인간을 포함한 어떤 대상도 특별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하며, 진화론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차이를 서서히 없애 왔다. 영장류에 대한 연구는 특정한 기호를 가지고 이러한 목적을 추구한다. 인간과 침팬지의 새로운 유사성을 전달하는 숨막힐 듯한 과학 논문이 언론에 발표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다.

그러나 침팬지의 종교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까지 없다. 침팬지들은 차분하게 인간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을 뿐 스스로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 이런 것들이 진보하는 침팬지 문명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항목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위대한 승리는 과학의 성취가 될 것이다. 과학에 따르면 과학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과학은 환경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통제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종교와 상반되는 것으로서의 과학은 인간의 외부와 내부 어디에서도 신성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은 집합적으로는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단언, 분명 중요성과 지배에 대한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반면 과학자들은 개별적으로는 과학적 기획에서 익명의 요소들이고 각자는 다른 이들로 대체될 수 있다. 과학이 우려하는 것들을 피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번호로 매겨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름을 부여할 관대함을 인문학에서 불러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타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자신만의 이름을 갖고 있다(존스와 킴이 많다는 것은 예외로 하자). 이 사실은 우리가 모든 인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반드시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중요성은 우리가 개별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판단된다. 개인들은 집단이나 계급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레드 삭스 네이션(Red Sox Nation)이나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처럼 그들의 개별성을 가리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특히 우리가 격정의 성질 내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개별성에 대해 특정한 주장을 하려면, 반드시 이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름을 단지 억압되고 잊혀진 것으로부터 추상화된 당혹스러운 것으로, 요점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으로, 곧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법칙들, 우리가 법칙들을 확립할 수 없을 때 의지하는 일반론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특이성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중요성이 중요하다는 것과 어떻게 그것이 우리를 개인으로 만드는가를 염두에 두고 이제 과학과 문학을 비교해보자. 나는 문학과 과학이 진실을 발견하고 말하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하는 바이다. 그러나 분명 문학은 즐거움도 추구한다. 위대한 과학 저술들 가운데 일부는 훌륭하게 쓰였지만, 과학은 훌륭한 이야기의 매력이 아니라 수학에서 그 우아함을 발견한다. 사회과학은 특히 곤경에 처해 있는데, 문학과 동일한 인간 행위의 영역을 다루기 때문이다. 과학으로서 사회과학은 상식적인 편견과 미신을 능가한다고 주장해야만 하며, 따라서 암시와 풍자로 가득한 상식적인 언어를 편견이나 어떠한 미묘함도 없는, 나무랄 데 없는 과학적 산문으로 재진술해야만 한다.

상식은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에 전문용어라는 이름을 붙인다. 과학은 원칙적으로 모두에게 반복해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과학은 직접적으로 아무런 숨김 없이 말하며, 가능한 한 수학을 이용해서 말한다. 불행히도 실상은 대중은 수학이 부족하고 과학자들은 의사소통 기술(예를 들자면 전문용어)이 부족하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과학자들은 대중들과 과학이 발견한 정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비과학자인 홍보전문가들에게 의지해야만 한다. 이 홍보전문가들은 대개 다른 속셈이 있어서 과학은 사소한 인간의 당파성을 넘어서려는 고귀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도 종종 당파성과 연루된다.

문학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 외에도 즐거움을 추구한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재주를 타고나서 조용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문학이 과학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인간이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이러한 근본적인 사실을 과학자들에게 알리지 않으며, 과학자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과학에 헌신적이어서 과학 밖의 다른 영역, 이를테면 상식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진실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은 진실의 이미지인 허구를 활용한다. 허구를 이해하려면 해석이 필요한데, 문학은 이러한 조작을 반기지만 과학은 같은 이유 — 해석자들이 의견을 달리한다는 것 — 로 그것을 혐오한다.

문학은 어린아이부터 철학자까지 이해의 정도를 달리하는 것에 열려 있지만 어쨌든 모두를 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반면, 과학은 수사 없이 단조롭게 말함으로써 보편성을 달성하고 오로지 동료 과학자들에게만 말하는 데 성공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명백한 혜택을 제공하지 않고는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에 도달하지 못한다.

문학은 과학이 무시하는 인간의 삶에 관한 커다란 질문 — 예를 들면, 지루해하는 남편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을 던진다. 과학은 아주 작은 것과 아주 큰 것, 과학이 개발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드라마를 위한 자료를 연구하는데,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작고 큰 것의 측정은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작가의 관찰로부터, 무엇보다 위대한 작가의 판단으로부터 통찰력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이러한 통찰력은 한 과학자가 보내는 것이 다른 과학자가 받는 것과 동일하다는 과학적 방법의 보증 없이도 독자들의 역량에 따라 반복될 수 있다. 과학은 과학자들 간의 동의를 지향하지만, 철학에서처럼 문학에서는 위대한 이름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

위대한 이름들, 이것이 정치 이해하기에 대한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 중요성의 높이이며 거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시험받는다. 위대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 나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는 정치 이해하기에 대한 조언 제시를 거부할 것이다 — 그 자신과 그가 좋아하는 독자들을 “자유와 인간 위대함의 진정한 친구들”이라고 하였다. 여하튼 자유와 인간의 위대함은 병행하며, 이는 자연이 인간만을 염려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에 의해, 격정으로 인해 촉발된 단언성에 의해 그 위대함이 드러나도록 남겨둔다는 것에 대한 단서이다. 위대해지기 위해 여러분은 위대해져야만 하며, 이는 야망이라는 노력을 요구한다.

모두가 그러한 야망을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종신재직권을 가진 교수처럼 안전한 지위의 적당한 경력에 만족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작으나마 나름대로 야망을 느낀다. 더구나 우리는 위대한 야망에 경탄하면서 그것에 관한 무언가를 알게 된다.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 시대의 정치학은 거의 전적으로 야망을 무시한다. 예를 들어 정치학은 시민계약에 대한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걱정하지만, 대개는 무엇이 대다수 사람들을 투표하도록 추동하는지, 곧 정치학이 참여라는 모호한 술어로 부르는 것에 주목한다.

야망은 위대함과 엇비슷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학을 당혹스럽게 한다. 야망은 개별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따라서 위대함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과학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평균적이지 않다. 심지어 ‘위대한’이라는 단어는 잘난 체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잘난 체하는 동물이다.

나의 직업은 시야를 넓히고 교과과정에 문학과 역사의 도움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무엇이 과학에 의해 무시되는지 그리고 무엇이 과학의 승인을 받지 못할 것인지를 숙고하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인문학 — 흔히 나약한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인문학 교수들 — 또한 개별적인 것에 대한 신념과 그것을 방어할 용기를 회복해야 한다. 격정은 단지 이론적인 것만이 아니다. 격정을 배우면 여러분의 사고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 또한 개선될 것이다.

여러분의 삶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그것을 개선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지만, 격정의 본성을 숙고한 후에야 여러분이 더 잘 알게 될 것들을 내가 요약하겠다. 그것은 분노와 쟁취 사이의 대립, 승리에 대한 주장, 보호의 기능, 당파성의 고집스러움, 단언성의 역할, 자기 자신의 영원한 현존, 종교의 과제, 개별성의 결과, 위대함의 야망이다. 요컨대 격정은 신체를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에 얽매어 있지는 않은 인문 과학을 위한, 영혼을 가졌으며 훌륭하게 해석된 시를 통해 배우는 학문을 위한 하나의 토대이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내가 사랑을 빠뜨리지 않았는가?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지금으로선 사랑은 더욱 복잡한 문제이다.

출처: 2007 Jefferson Lecture in the Humanities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