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and HistoriansHistory and Historians: A Historiographical Introduction

Author: Mark Gilderhus
Paperback: 160 pages
Publisher: Prentice Hall; 6th edition (March 12, 2006)
Language: English
ISBN-10: 0132286785
ISBN-13: 978-0132286787

MAIN TOPICS
목표와 목적
역사적 의식의 시작
중세의 역사적 의식
역사철학: 사변적 접근
역사철학: 분석적 접근
최근의 전문적 역사
문화전쟁, 포스트모더니즘, 그밖의 주제들
읽기, 쓰기, 그리고 연구

From the Back Cover
간명하면서 잘 팔리는 이 책은 고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서구의 역사적 사유에 대한 철저하고도 포괄적인 개관을 보여준다. 이 책은 역사론, 역사철학 그리고 역사적 방법론 등과 같은 영역의 중심 주제와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이 책은 다루는 범위의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으며, 해당 주제들이 모든 차원의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6판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현재 미합중국과 해외에서 역사가들이 제기하고 있는 논쟁적인 물음들까지도 다루고 있다. 또한 새로운 점은 읽기, 쓰기, 연구에 관한 챕터를 책 마지막에 배치하여 참고문헌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강유원, 라티오 (#ISBN9788996056102)

이 원고는 필자가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2007년 6월 8일부터 2007년 7월 27일까지 8회에 걸쳐 진행한 ‘서구 정치사상 고전 읽기’ 강좌를 다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고전은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로크의 [[통치론]]이다.

고전에 대한 해설 뿐만 아니라 고전을 읽는 태도와 방법, 보고서나 소논문 등을 쓰는 요령까지 포함하고 있다.

2008년 4월 출간 예정

Jesus Christ Jesus Christ: The Gospels

Editor: Terry Eagleton
Paperback: 160 pages
Publisher: Verso (October 15, 2007)
Language: English
ISBN-10: 1844671763
ISBN-13: 978-1844671762

Review: Laurence Phelan
Verso출판사의 “혁명Revolutions”시리즈는 Slavoj Zizek이 소개하는 마오쩌뚱, 로베스피에르, 트로츠키, Geoffrey Robertson이 소개하는 수평파 등에 이어 이제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에 의한 복음서의 개정표준판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 책에는 Terry Eagleton이 해설을 썼다. Eagleton은 우상타파주의자이고 지적으로 활발하며 유창한 사람의 좋은 사례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혁명적 신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도 이 책은 매우 흥미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는 마태오 복음 10장 34절에서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했으며, 그는 분명히 Eagleton이 말하는 “일군의 은밀한 정치적 집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반란 선동자로 알려졌다면 왜 사도들은 예수가 붙잡혀 처형당한 다음 체포되지 않았을까?

예수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표방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그가 사려깊게 만들어놓은 정의가 담긴 텍스트에는 일관된 의미가 있다.” 그가 신의 아들이라 주장한 것은 마르코 복음에서 단 한번 뿐이며, 이마저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게다가 그는 1세기 당시의 예루살렘에서는 일종의 전사왕戰士王으로 이해되었을 것인 메시아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Eagleton은 마구간에서 태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메시아에 관한 역겨운 농담”일 뿐이며, 그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온 것은 “풍자적인” 반메시아적 제스츄어라고 한다. 그는 아마 자신이 구약성서에 씌인 예언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 예언자의 도착은 신의 왕국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었다.

1세기초의 세계관에는 역사적 자기 결정의 여지는 없었으며, 이는 왜 예수가 이를테면 Lenin과 같은 의미에서의 혁명가가 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신의 왕국은 사람들이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고 있었다. 예수는 거기에서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준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원적으로 보나 그의 아주 독특한 행동과 가르침으로 보나 예수는 전위주의자avant-gardist라 불리는 것이 이해하기 수월할 것이며, 이는 Eagleton이 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출처: Independent Books

번역: 라티오 출판사

Before The DawnBefore the Dawn: Recovering the Lost History of Our Ancestors

Author: Nicholas Wade
Paperback: 320 pages
Publisher: Penguin (Non-Classics); Reprint edition (March 27, 2007)
Language: English
ISBN-10: 014303832X
ISBN-13: 978-0143038320

From Publishers Weekly
과학자들은 선사시대를 연구하기 위해 DNA분석을 이용한다: 인간의 진화, 유럽과 근동에 널리 퍼져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인간의 관계, 아시사의 스텝지방에 있던 호모 에렉투스 등이 연구 대상이다. 중요하게도 유전학자들은 약 5만년 전에 동아시아에서 와서 홍해를 건넜던, 최소한 150명 이상의 일군의 인간 선조들의 이동을 추적할 수가 있다. 수천년 안에 그들의 후손인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것의 지배자가 되었고, 다른 인간 종은 사라져 버렸다. 뉴욕 타임즈 지의 과학 기자인 Wade에 따르면 이러한 DNA 분석은 진화가 머나먼 과거에 국한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아이슬란드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1천년밖에 안되었지만 주민들은 이미 구별되는 유전적 성향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Wade는 자신의 조사를 확장시켜 언어의 발전과 가축까지도 포괄한다. 과학에서는 “종”이라는 말이 더러운 말이지만,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챕터에서는 어떻게 인종적 차이가 유전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이것이 적어도 질병의 치료에 있어서는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DNA 분석이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게 하는지에 관심있는 독자에게 추천한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역사를 구출하기
Matt Perry

History and Revolution Marxist History Writing
Mike Haynes and Jim Wolfreys (eds), 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 Verso, 2007.
Chris Wickham (ed), Marxist History Writing for the 21st Century, Oxford University, 2007.

다음의 두 권은 시의적절하고 상호보완적이다. 둘은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의 끊임없는 생명력에 대한 징표이면서, 역사 서술에서의 몇몇 지배적인 경향에 대한 비판을 조명한다. 말하자면, 이 책들은 같은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Chris Wickam이 편집한 책이 진화하는 연구체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양상과 현재의 형세에 관련되어 있다면, [[역사와 혁명: 수정주의 반박하기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는 역사학에서 역사 변동에 관한 사회적 설명을 거부하는 논쟁의 전환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 서술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기여한 바를 평가하는 컨퍼런스에 토대를 둔 [[21세기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Marxist History Writing for the 21st Century]]은 마르크스주의 학자와 비마르크스주의 학자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견해를 한 데 모아 놓았다. 즉 공공연하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연구를 수행하는 Wickam이나 A. Callinicos같은 이들에서부터,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를 거부하지만, 풍부하고 도발적인 이론가로서 마르크스를 인식하고 그와의 대화를 계속하려는 W.G. Runciman과 같은 이들까지도 다루는 것이다. 어떻든 참가자들 모두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동안 역사 서술에 주목할만한 영향을 끼쳤던 마르크스주의가 이후 왜 명백한 쇠퇴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Wickam과 E. Hobsbawm에 의해 씌어진 서문의 핵심은 마르크스주의가 쇠퇴했다는 생각이 사실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 프랑스의 아날 학파와 같이 사회적으로 기원한 역사학 학파와 마찬가지로 — 20세기에 역사학을 근대화했다. 그들은 역사학을 전통적인 강박관념으로부터 떼어놓았다. 상층 정치사(왕, 여왕, 정치가와 장군), 객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료의 성질(대체로 국가의 문서보관소에서 제공되었던), 다른 지적인 규범과 같이 역사학에서의 불순물을 없애야 할 필요성 등이 바로 그러한 강박관념들이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역사가들은 인류 역사와 그 거대한 변형에 관한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파고 들었다. 많은 이들이 알게 모르게 이러한 관점을 여전히 고수한다. 그렇다해도 그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역사학 내부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것은 보편적 인권과 해방에 관한 계몽주의의 원리에 대한 거부, 그리고 그와 관련된 상대주의의 발흥 뿐만 아니라 정체성과 담론에 관한 탐구를 포기하고, 객관적 역사의 실재성에 대한 어떤 생각도 부정한 몇몇 역사가들의 경향에 기인했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경향들은 역사가가 과거를 의미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양식과 규칙을 설정할 다양한 가능성들을 잃게 만들었다. 그 결말은, 유에스의 역사 서술, 힌두교의 인도 그리고 베룰루스코니의 이탈리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 30년은 역사적 거짓과 신화에 의해 감정적으로 편향된 대중이 창조되었던 황금 시대였다”는 점에서, “공공의 위기”로 구성된 정체성에 기초한 역사였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묘사하는 데 “빈사 상태”보다 “수세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면, 현재의 침체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 즉 국면적인 설명과 내부적인 설명을 취한다. G.S. Jones는 후자의 경우이다. Jones에 의하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 무능한 이유는 그가 [[자본]]에만 천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Jones는 그것이 마르크스의 실제 의도였음을 입증하는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순환적이며 그 속성상 신자유주의적이다. Jones는 시장에 대한 대안은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그것의 대안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고 가정한다.

국면적인 설명은 역사적인 맥락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너무도 단순해서 베를린 장벽과 스탈린 체제의 붕괴를 지적하지 못한다. Wickam이 지적하듯이, 그 과정은 1989년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것이다. 1980년의 정치적 상황은, 마르크스주의가 학문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각 나라들에서도 1968년 이후의 신좌파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후기 구조주의라는 지적 경쟁자가 등장한 것 또한 이 때였다.

여러 기고문들은 특정한 역사적 연대에 마르크스주의가 기여한 바에 대한 매우 유용한 요약을 제공한다. Andrea Giardina는 로마사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를 개관한다. 1960년대의 반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와 고고학자에 의해서 이 영역에서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특히 로마 문화의 정치적 차원에 관하여 새로운 문제를 설정하는 데 유용한 출발점을 제시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Maurice Godelier의 인류학에 각별한 친화력을 보인 것처럼, 다른 학문 분과 간의 횡단을 통한 다양화를 허용함으로써 고고학이 기술의 영역에서 역사학의 분과로 부각되기를 노렸다. 그람시 연구소의 마르크스주의 로마 역사가들은 다학제적 연구와 이행, 위기, 계급, 사회구성체, 생산양식과 같은 마르크스의 핵심 개념을 이용하여 이 영역에서의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였다. Giardina는 고대 세계의 계급과 계급 갈등에 관한 G.S. Croix의 권위있는 연구를 고찰한다.

Wickam은 봉건제에 관한 광범위한 비교 연구를 통해 갖춰진, 중세의 연구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충돌을 고찰한다. Catherine Hall은 마르크스주의의 범주를, 인종과 젠더에 민감했던 1829년에서 1832년 사이 영국 치하의 세 대륙에서의 위기 국면에 대한 해석에서 구체화하고자 한다. 그의 연구는 마르크스가 강조하지 않았던 젠더의 요소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러한 정체성의 형식에 찬성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기 위한 근거로서 취해진 것은 아니다.

Wickam, Giardina, Robert Brenner, 그리고 Hall 모두는 마르크스주의가 저마다의 영역에 있어서 논쟁의 수준을 빈곤하게 해왔다는 사실을 도외시함을 지적한다. Callinicos는 Brenner, D. Harvey, G. Arrighi, Hobsbawm 그리고 Perry Anderson의 논의를 통해서 20세기에 틀지워진 자본주의의 동학을 이해하는데 마르크스주의 역사서의 유용성을 검토한다. Brenner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에로의 이행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수정한다.

Mike Haynes와 Jim Wolfrey의 신작인 [[역사와 혁명: 수정주의 반박하기]]는 혁명의 역사에서 얼른 보기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수정주의적 풍조에 대해 고찰한다. 역사학자들이 흔히 자신이 전공한 시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혁명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에 대한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Wickam의 저작이 마르크스주의로 표현되는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 시대 정신을 살피듯이, [[역사와 혁명]]은 혁명에 대한 해석과 그것에 연관되어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수용으로서 전체주의의 현대적 변형에 대해 추적한다.

지적 정세에서 보면, 시장을 대체할 것은 없다고 단언하는 좌파와 우파의 주류 정치가들과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자들 그리고 수정주의적 역사가들은 혁명을 폭력과 테러라는 정치적 술어와 그것의 비합리성으로 협소하게 정의함으로써 역사에 있어서 거대한 혁명의 영향력을 부인한다.

그리하여 Francois Furet는 프랑스 혁명이란 자유, 평등, 우애라는 혁명의 이념은 더 이상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Haynes와 Wolfrey는 당대의 정치적인 근시안과 역사가의 제한된 시야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도 기민하게 관찰한다. 1980년대 후반의 프랑스를 Furet는 “혁명 없는 혁명은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주의 없는 사회주의와 로카르 총리의 개혁 없는 개혁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다음의 두 가지 연관되는 요소들은 수정주의적 역사론에서 공통적인 것이다. 첫째, 역사에서 원인, 역동성, 그리고 결과의 제거는 역사를 장기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단기적으로 우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차원으로 옮겨놓았다. 둘째, 대중운동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혁명을 이해하는 이론적 틀로서 전체주의적 접근이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들은 수정주의적 저자들과 그들이 내놓은 것들에 중요한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영향력을 그들이 실제 가진 것보다 과장할 수 밖에 없었다.

Geoff Kennedy는 17세기 중반의 영국혁명에 대해 분석하면서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영국혁명에 대한 사회적 해석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평가한다. 1970년대 이후 혁명의 역사가 씌어져온 방식은 정치적 급진주의를 물질적인 불만의 직접적인 합리화로 돌리는 사회적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적 권력관계가 정치적 이념이나 사건을 만들어내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의문을 가진다. 수정주의자들은 사회적 해석의 중심영역에서 형성된 부르주아 혁명 모델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에로의 이행을 이해하는 데 토대가 되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사회적 해석의 귀환을 요구한다.

1789년에 시작되었던 프랑스 혁명은 두 편의 에세이에서 재고찰된다. Jim Wolfreys는 Furet의 논쟁적인 혁명 해석을 해체한다. 그 해석이란 자코뱅주의를 전체적인 테러를 동반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정의하는 정치적 해석에 찬성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해석을 무너뜨리고자 한 것을 말한다. Wolfrey는 프랑스 혁명을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필요한 새로운 법률적, 구조적 틀을 만들어낸 사회적 폭발로서 보는,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에 대해 논의한다. Florence Fauther도 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국면에서 일어났던 노예제도의 폐지와 인권의 문제들을 통해서 프랑스 혁명을 파악하는 새로운 정치사에 대해 분석한다.

두 개의 장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해 분석한다. Hayens는 1917년 당대에 출간되었던 Orlando Figes와 Richard pipes의 수정주의적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러시아 혁명은 단순하게 이뤄진 사건이기는커녕 볼셰비키가 반대 정파와 권력 속에서 각각 선택하면서 사태의 결과를 조정한 것이었다. 실로 볼셰비키는 그들의 반대 정파보다 더 성공적이었는데, 그것은 볼셰비키가 그들의 경쟁자보다 더 민주적이었고 대중적 급진주의를 더 친밀하게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Haynes는 볼셰비키의 의식적인 결정보다는 일당 독재 국가의 형성에 기여했던, 러시아 혁명의 구조적 틀이 갖춰진 10월 혁명 이후 다른 좌익 정파들의 자포자기를 보여준다. Lars Lih는 잘못 이해되었던 트로츠키의 정책인, 내전 동안의 ‘노동의 군사화’에 대해 재검토한다. 공산주의적 환상에 이념적으로 경도된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가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서 트로츠키의 연설에 대한 매우 섬세한 분석은 국가적 위기에 대한 트로츠키의 냉철한 분석과 실용적인 처방을 보여준다.

이 책은 또한 전체주의의 개념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계급과 사회구조를 무시하는 전체주의적 접근법은 동학적인 분석보다는 정학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Marc Ferro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지적하듯이 전체주의적 접근법은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을 동등의 것으로 만들었고, 유럽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나치즘의 특성을 간과했다.

Enzo Traverso는 전체주의 이론의 부활이 새로운 반공산주의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상술한다. 신경질적인 새 비판은 Furet의 [[환상의 경과Passing of an Illusion]]와 [[공산주의의 비망록The Black Book of Communism]]과 같은 저작에까지 미친다. Geoff Eley가 참여한 [[역사와 혁명]]은 대중운동이 자동적으로 전체주의로 빠진다기 보다는 20세기 유럽의 민주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Daniel Bensald의 마지막 장과 Wolfrey와 Hayens의 서론 모두는 혁명이 당장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들지는 못한다고 보지만 그것 너머를 지적하기도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전쟁에 저항하는 대중운동에 뛰어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럴드 윈스탠리, 토머스 페인, 칼 마르크스, 레닌 그리고 체 게바라 등이 참여했던 과거의 거대한 혁명을 통해서 혁명을 재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이 두 저작은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의 쇄신을 위한 선언이자 진부한 것으로 일그러진 주류 역사학에 대한 도전장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변혁하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를 쓰기 위한 안내서이다.

번역: 라티오 출판사

HistoriographyHistoriography in the Twentieth Century: From Scientific Objectivity to the Postmodern Challenge

Author: Georg G. Iggers
Paperback: 208 pages
Publisher: Wesleyan; 2 edition (February 28, 2005)
Language: English
ISBN-10: 0819567663
ISBN-13: 978-0819567666

Book Description
이제 10개 언어로 출판된 이 책에서 탁월한 지적인 역사가는 역사와 역사서술의 본질에 관한 이념에 있어서의 심오한 변화를 검토한다. Georg G. Iggers는 역사적 연구와 서술이 기반을 두고 있는 근본 가정을 추적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사회과학들이 역사 서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서술한다. 역사서술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지난 20년 동안에 생겨났는데, 포스트모던 사상은 역사가에게 자신의 주제와의 관계를 재평가하게 했으며, 객관적 역사의 가능성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였다. Iggers는 현재의 역사학이 고전적인 거대역사적 접근에서 미시사적 접근, 문화사, 일상사로 이행하는 혼성이라고 본다. 저자가 쓴 새로운 에필로그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새로운 사회과학적 접근을 검토하고 있는데, 이 접근은 문화적 요인과 지구화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야만의 경제학
Donny Gluckstein

Hitlers Beneficiaries
Gotz Aly, Hitler’s Beneficiaries: Plunder, Racial War and the Nazi Welfare State, Verso, 2007, £19.99

고츠 앨리, [[히틀러의 수혜자들: 약탈, 인종 전쟁 그리고 나치의 복지국가]]

‘히틀러의 수혜자들Hitler’s Beneficiaries’은 나치즘과 홀로코스트 연구에 있어 중요하고도 획기적인 저서이다. 얼핏 보기에는 독일정부의 재정정책과 조세에 대한 이 책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러한 측면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놀라운 성과를 내었다.

Aly는 전전 나치시대(1933-39)에서 시작한다. 히틀러가 총리로 지명되었을 때 실업률은 40퍼센트 정도로 6백만 명이 실업자였다. 1937년에는 실업자 수가 160만으로 감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시 심각한 노동력 부족현상이 일어났고, 이는 부분적으로 나치의 전격전과 해외정복 정책에 동기를 제공하였다. 경제적 전환은 결국 전쟁과 파괴로 귀결된 거대한 재무장 프로그램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39년까지는 이러한 사실이 이전에 실업자였던 이들에게는 분명치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전쟁을 밀고 나가는데 필요한 자원은 독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나치는 향후 유럽 정복을 통해 얻게 될 투기성 이윤을 위해 경제를 저당 잡힌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독일 내에서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합병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정복으로 획득한 그 밖의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재산을 “아리안화”함으로써 단기간에 재정적 상승을 이룰 수 있었다. Aly가 거의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분명 이데올로기적인 동기도 존재하였다. 유대인 소수자들이 제멋대로 뽑혀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몰아부친 것 또한 재정적인 것이었다.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기획한 4개년 계획의 의장인 괴링은 유대인 사업체, 도매상들의 재고품, “뮌헨 또는 뉘른베르크, 슈트트가르트, 칼스루에 또는 함부르크의 예술작품들과 비품들”을 징발 후 판매하여 생긴 수익이 “전적으로 제국의 중앙 정부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4개년 계획과 독일 경제를 유지할 다른 방법을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전쟁 발발 후 제국은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부과될 경제적 부담을 피하려 하였고, 따라서 “나치 전쟁기구를 만들 자금에 대한 책임을 외국의 시민들에게 전가”하려 하였다. 1943년 무솔리니가 그의 인민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후 괴벨스는 “인민들은 우리가 그들의 공정하고도 관대한 통치자라는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라고 적었을 것이다.

나치가 “자금에 대한 책임감을 전가”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방법들은 터무니없을 만큼 다양하였다. Aly는 그 방법들의 역겨운 세부사항까지 가차없이 들추어 내고 있다. 문체의 관점에서 보면, 몇 개의 챕터는 매우 난해하고 기술적이어서 읽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증거량에 압도당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참고 읽을 가치가 있다.

정복된 지역은 독일국방군 주둔 경비를 지불해야만 하였다. 예를 들어 폴란드는 8만 명의 병사가 주둔했지만 4십만의 “병역”을 위하여 한 달에 천만 즐로티를 지불해야 했다. 제국이 확장됨에 따라 전 유럽에 걸쳐 유사한 방법으로 강탈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포위망에 걸린 적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루마니아는 동맹국인 나치의 재정적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혈을 짜내야만 했다.

독일군대가 어느 지역으로 진군할 때는 제국은행의 증권인 화폐가 부대원들에게 발행되었다. 독일 병사들이 가장 싼 값으로 외국의 물건들을 살 수 있도록 지역화폐에 대한 제국화폐의 환율이 인위적으로 고정되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은 만족했고, 다량의 식료품과 상품들을 고향에 우편으로 부치거나 가지고 갔다. 유럽 전역의 상점의 진열대가 비었고 결과적으로 (두 달 못 미치는 기간에 3십만 명이 죽은) 그리스와 같은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기아현상이 일어났다.

Aly는 우리에게 브레히트의 인용구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은행을 터는 것보다 하나 만드는 것이 사람들을 갈취하는데 더 수월하다는 것이다. 해외 주둔 “수당”이 제국은행 증권으로 광대한 지역의 독일주민들에게 뿌려졌다. 정부는 이를 유지하는데 열심이었다. 병사들이 밀수할 수 있는 수량 제한이 풀렸고, 괴링은 재무장관에게 “라인하르트씨, 세관검사를 단념하시죠… 차라리 상품이 무제한적으로 밀수입되는 게 나을 것 같소”라 말하였다.

동맹군의 폭격이 독일 내 주민들의 만족감을 흔들어 놓았다. 타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집을 비우게 하여 적어도 폭격을 맞은 일부 주민들에게 새로운 아파트를 주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은 홀로코스트가 구체적으로 계획된 1942년 1월 반제Wannsee 회의에서 분명해진 조항이었다.

1943년 러시아 전선에서 난제들이 쌓이자 절도행위의 규모 역시 커졌다. 예를 들어 벨기에는 전시에 국내에서 8백3십억 마르크를 소비했던 반면 독일 점령군은 천3백4십억 마르크를 짜 내었다. 약간씩 달랐지만 유사한 상황이 서유럽 전역에서 되풀이 되었다. 나치는 동부지역에서 더욱더 잔혹하게 주민들을 다루었다. 우크라이나의 제국 행정관은, “우크라이나는 독일이 부족한 모든 것의 공급을 요청 받고 있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사상자와 상관없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곡물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 과제를 고려한다면, 민간인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동시에 수백만의 소련 포로들이 굶어 죽어야 했다. 식료품의 목적지는 분명하였다. 괴링은 “우리의 전 군대를 점령지역의 산물로 먹여 살리고 있다”고 했으며, 국내의 식량배급량이 늘어날 것이라고 공포하였다. 이것은 “군사, 민생양립”이었는데 제국의 곡물 보급이 10퍼센트로, 육류 보급이 12퍼센트로 상승하였다.

Aly의 발견은 폭넓은 의미가 있다. Aly가 거의 제목을 따온 듯한 형편없는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의 베스트셀러 ‘히틀러의 자발적 집행인Hitler’s Willing Executioners’과 ‘히틀러의 수혜자들’을 단순히 비교해보자. 골드하겐은 그의 책에서 핵심적인 주장을 두 가지 하고 있다. 첫 번째는 홀로코스트가 광범위한 나치정책에서 분리되어 특별히 다루어져야 할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홀로코스트 창출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모든 주민들이 역사상 가장 큰 범죄의 적극적인 공모자가 되었다는 것을 독일인의 정신에 매우 깊게 스며들어가게 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Aly는 홀로코스트를 가스실, 유럽의 군사적 점령, 독일내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 모두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더 큰 그림의 한 가지 요소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필수적이다. 홀로코스트가 역사적 배경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다면 적절하게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비합리성과 같은 비역사적 또는 심리적인 범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런 방식을 따른 것은 골드하겐만이 아니었다. ([[인종주의 국가: 독일 1933-1945 The Racial State: Germany 1933-1945]]를 쓴 버레이Michael Burleigh와 휘퍼만Wolfgang Wippermann처럼) 매우 현명한 역사가들 사이에도 이러한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은 종합적인 이해를 포기하며 나치즘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려 하였다.

이것은 특별한 한 사건이 매우 예외적이어서 다른 모든 것에 앞서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상부구조를 토대 위에 올려놓는 특권을 줌으로써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 엎은 것이다. 전쟁에서 사망한 5천5백만 명이 홀로코스트를 위한 배경의 엑스트라가 되고 이 와중에 정치, 계급, 자본주의와 같은 근본적인 요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골드하겐과 달리 Aly는 병리학보다 독일의 정치와 역사에서 나치의 핵심적인 추동요인을 찾고 있다. 핵심적인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였다. 1918년 11월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마침내 황제를 폐위시켰다. 히틀러는 바로 이틀 후에 군이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인정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독일은 전쟁터에서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도 패배하였다. 나치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더 나빴던 것은 독일 혁명이 온 나라를 볼셰비즘의 편으로 끌어들일 뻔한 운동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이, 패배와 혁명의 결과를 원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 그의 필생의 과업이었다.

1918년 11월의 그림자가 나치즘의 역사 전반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궤멸함으로써 쫓아 버리려 했던 유령은 쉽게 회생하였다. 그는 1939년 9월 3일, 6년 동안 나치 군사주의라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던 대중들이 전쟁의 발발을 음산한 적의로 맞이하자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반응은 히틀러에게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후방”을 강화해야겠다는 확신을 굳히게 하였으며, 그날 그는 “1918년 11월은 독일 역사 상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골드하겐에 반대하여 Aly는 독재자가 독일 대중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장악한 것이 서구 민주주의에서 보다 훨씬 더 약세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처칠Winston Churchill이 “피, 노고, 눈물과 땀”의 연설을 행하였으며, 루즈벨트처럼, 전면전으로 인한 위험과 비용을 히틀러보다 더 공공연하게 요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두 서방의 지도자들은 전투의 재정을 처리하기 위해 나치즘이라는 악을 섬멸하는데 필요하다고 그들의 대중들을 설득함으로써 전쟁채권에서 수십억을 모금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이와 같은 설득을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감히 할 수 없었다. Aly가 밝혔듯이, “더 인기가 높았고 전능해보이는 지도자Führer는 그의 인민들에게 그들의 저금을 자신에게 맡길 것을 공공연히 요청하는 입장을 결코 취할 수 없었다.”

자기희생을 요구(그리고 거절을 각오할 것을)하는 대신 나치는 독일 대중을 달래려 하였다. Aly와 골드하겐 둘 다 독일 인민이 나치즘에 물들었다고 간주하나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이 지점에서 거듭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Aly에게 유대인들의 운명에 대한 대규모 무관심은 이데올로기의 결과가 아닌 물질적 타락에 의한 결과였다.

평범한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사실상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지속되고 있다. 골드하겐의 논지를 위해서는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전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고 따라서 자각적인 공모자여야만 한다. Aly에게 이러한 것은 핵심적이지 않고, 이 문제를 무시한다. 그의 논지는 다수의 독일인들이 정복한 지역에서의 착취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천2백만 명에 이르는 외국노예 노동자들이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무관심은 다수의 독일인들이 정복을 통해 갈취한 전리품에 매수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Aly는 말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는 Aly의 시도가 얼마나 독창적인지 지금쯤은 명확해졌을 것이다. 유럽 전 지역에 걸쳐 행해진 이러한 소름 끼치는 강탈의 현장에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른 이들은 가장 취약한 지역의 주민들이었고 나치의 반유대주의로 인해 그 대상은 유대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Aly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 추상적인 술어가 아닌 항목별로 세심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로도스 섬의 유대인 1,767명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독일 국방군이 소련군을 막기 위해 독일의 중심부로 후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전쟁의 후반기에 일어났다. 겉으로 보기에 무의미하며 잔인한 이 계획을 위해 화물선과 기차가 방향을 선회했는데 이는 “나치의 총체적인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서술된다.

Aly는 이 특정한 단계에서 그리스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급하게 재정적인 도움, 특히 금이 필요했으며 이는 나치의 약탈로 인해 그 지역의 화폐가치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 나치당원은 “신선한 보급품의 배달이… 위기에 처했고, 섬의 방어를 위해 금과 화폐를 가차없이 몰수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로도스 섬의 유대인들은 이러한 신속한 재정적 해결을 제공해야 할 운명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극단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밑바닥까지 떨어짐Plumbing the Depths” (www.isj.org.uk/index.php4?s=resrources) 라는 논문에서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는 정확하게 “홀로코스트의 관료주의적 기구가 아무리 도구적으로 합리적이었다 해도 이윤에 대한 고려나 군 작전에 대한 고려 그 어느 것도 이 범죄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라고 경고한다. 로도스 섬의 유대인 재산의 압수를 위해 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거나 가스실에서 절멸시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이 불가피하다.

Aly는 [[히틀러의 수혜자]]의 목적이 단지 홀로코스트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의 특정한 역할을 무시한 것이라 변론한다. 그러나 이 책은 프랑스의 생활수준, 러시아의 대규모 기아사태, 폴란드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절멸 등이 뒤엉키면서 얼마나 다양한 동기와 추동요인들이 독일 내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결합되었는지에 대한 새롭고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증거가 확정되어 있고 아주 세심하게 주의해볼 가치가 있다면 이 증거에 수반되는 분석적 틀에 대해서는 똑같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Aly는 골드하겐과 같은 이들보다 높은 차원에 있다. 그러나 Aly의 책 제목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의 의도는 평범한 독일인들, 특별히 노동계급이 나치즘의 수혜를 받았으며 그리고 이러한 함축으로 인해 이들이 나치즘의 범죄에 공모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나치가 전시 혁명적인 대 변동을 두려워하였으며 따라서 불만을 막아야만 했다는 점을 논의해야 한다. 또 다른 사항은 정부의 약탈과 살인행위에 대한 죄가 사람들에게 씌워졌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너무 미묘하거나 혹은 너무 의미를 가지고 있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으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독일 노동계급이 유럽에서의 약탈과 유태인 학살에 물질적인 이해관계를 가졌다면, 히틀러와 그 일당과 함께 그들은 모든 비독일인들과 유대인의 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치폭정의 희생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수의 나치들보다 적은 비용을 치렀다 해도). 이 입장의 논리는 나치 정부와 독일 인민들이 히틀러가 주장했던 바로 그 인종적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Aly는 거의 이렇게 주장하며 몇몇 터무니없는 진술을 했다. 나치즘 하에 “더 큰 평등이 성취되었으며”, 민족사회주의가 “계급의 차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 엘리트적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는 1936년 말 “만성 알코올 중독과 전문 범죄자들을 포함해 4천7백61명만이 구금된” 자선 단체처럼 여겨지고 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주입된 강한 엘리트적 사고가 이 지점에서 드러날 여지가 없지만 일부 사실적인 사례들은 인용할 만하다. 히틀러의 “반 엘리트주의적” 독일에서 2십만 명은 전쟁 전에도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목표는 “생식하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20퍼센트였다. 정책이 1935년 도입된 후 3만5천명이 낙태를 강요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 사이 7만 명의 독일인들이 (주로 장애가 있는 어린이들) T4 결정에 의해 가스실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속되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해 강제수용된 정치범 수는 16만 3천 명에 이르렀다. 이 체제는 평등이나 자비심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다른 “인종들”간 뿐만 아니라 같은 “인종”내에서도 철두철미하게 엘리트적이었다.

Aly의 접근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유럽의 다른 지역의 나치 희생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잘 살았다는 이유로 독일 노동계급이 착취당하지 않았으며 사실 착취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Aly 자신은 이러한 것이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증거를 댄다. 1928년 히틀러의 집권 이전 독일에서 지불된 총 임금은 4천260억 마르크였다. 1935년에는 3천180억 마르크에 이른다. 아마도 독일에서 폴란드로 유대인들을 처음 이송한 것(그리고 결국 절멸한 것)은 다른 독일인들을 위해 본토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과 그로 인한 영국공군의 공습 폭격으로 인해 독일인들은 거주지를 잃게 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20%의 주택이 아무도 살 수 없게 되었다.

Aly는 “나치 사회주의”에 은혜를 입은 노동자들에 비해 상층계급이 상승한 전시 과세의 “가장 큰 몫을 어떻게 지불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장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그의 증거는 “중간-소득” 독일인들이 전시의 부가적 세금 부담의 10퍼센트만 (부자들이 20퍼센트를 유대인과 강제노역자들이 70퍼센트를 부담한 데 비해) 떠 맡았다는 것이다 . 이것이 사회주의에 대한 근거라면 나폴레옹 전쟁 시 영국에 도입된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소득세가 200년 전 사회주의 사회의 도래를 알렸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전쟁에서 사회의 자원은 전투를 지원하는데 투입되고 그래서 가장 부유한 이들- 착취자들-이 가난한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자금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식량보급과 국가통제 때문에 처칠이 사회주의자나 “반-엘리트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Aly의 조세 수치가 올바르다 하더라도 여전히 히틀러의 전쟁범죄의 결과로 가난한 이들의 부담이 늘어난 것이 문제이다.

사실상 노동자들이 나치즘으로부터 수혜를 입었다는 전체적인 논지의 근거가 미약하다. 전쟁 전 매 해 임금으로 나가는 국가의 소득의 몫이 줄어 들었음을 볼 수 있다. 해외주둔 병사들은 집에 전리품을 보낼 수 있었겠으나 그들의 생활수준이 IG Farben, AEG와 Krupps와 같은 기업의 이윤이 오른 것처럼 두 배 또는 세 배로 상승하지는 않았다. 사회주의자에게 체제로부터 수혜를 입는 것과 단지 착취의 경미한 부담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것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산업혁명기에 영국의 섬유 노동자들의 소득은 미국의 대농장의 노예들보다 높았을 것이나 둘 다 착취당했고 이들은 미국의 남북전쟁기에 남부연합의 봉쇄를 후원한 영국의 노동조합과 협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태도와 활동에 미치는 차이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할통치는 지배자들의 가장 오래된 책략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착취당한 모든 이들의 근본적인 단결에 비해 분할은 피상적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Aly의 일부 분석은 중대한 허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뛰어난 연구물이다. 수 십 년 동안 숙고하여 온 21세기 역사의 한 측면에 대해 놀랄만큼 신선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고 있다. [[히틀러의 수혜자들]]은 조심스럽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

출처: International Socalism, Issue 117

번역: 라티오 출판사

We Have Never been Modern
We Have Never Been Modern

Author: Bruno Latour
Translator: Catherine Porter
Paperback: 168 pages
Publisher: Harvard University Press (April 18, 2007)
Language: English
ISBN-10: 0674948394
ISBN-13: 978-0674948396

Book Description
우리 근대인들은 과학의 등장과 함께 원시적이고 전근대적인 조상들과 영원히 결별하였고,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브루노 라투어는 이렇게 마음편한 확신을 밀고 나간다고 할때 세계가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묻는다. 과학의 인류학이라 할 그의 책은 근대성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는 신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연 ‘근대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학적 방법론이 낳아놓는 차이는 무엇인가? 라투어의 설명에 따르면 그 차이는 우리가 자연과 사회, 인간과 사물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는 것에 있는데, 그 차이는 연금술, 점성술, 골상학의 세계에 살던, 무지몽매했던 우리의 조상들이 결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를 규정하는 이러한 깔끔한 관습 곁에는 정반대되는 것들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 과학, 기술, 자연을 뒤섞는 체계의 구축이다. 라투어의 분석에 따르면 오존을 둘러싼 논쟁은 물론 지구 온난화, 삼림의 황폐화, 심지어 블랙홀에 관한 생각까지도 그러한 잡종 혼합물의 사례이다. 이러한 잡종 혼합물이 확산됨에 따라 인간의 정신 속에서 자연과 문화를 구별해야 한다는 전망이 점점더 압도적인 것이 되었다. 라투어는 이제 우리가 그 구별을 다시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근대성 그 자체의 정의와 구축도 다시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 그의 책은 결국 자연과 문화의 연관 — 그에따라 우리의 문화와 다른 문화, 과거와 현재의 연관 — 을 인식하는 것에 관한 새로운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의 정신적 지평을 재구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을 모든 측면에서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의 경계선을 지우고 있다. 과학에 대한 가장 영향력있고 도발적인 해석 중의 하나를 집약한 것이라 할 이 책은 근대에 있어 좋고 가치있는 것을 보존하고 다른 나머지 것들은 더 폭넓고 공정하고 깔끔한 가능성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이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참조: 최무영, “협동현상과 떠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