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Their Struggle

그들의 투쟁
Niall Ferguson 
  
[[히틀러의 제국: 나치의 유럽 점령지 지배Hitler’s Empire: Nazi Rule in Occupied Europe]] by Mark Mazower, 726pp, Allen Lane £30 
  
[[히틀러Hitler]] by Ian Kershaw, 1,030pp, Allen Lane £30 
  
[[히틀러, 독일인과 최종해결책Hitler, The Germans and the Final Solution]] by Ian Kershaw, 394pp, Yale University Press £19.99 

1942년 9월 힘러Heinrich Himmler는 제국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20년 사이에 “게르만 인들”이 8천3백만 명에서 1억 2천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고, 이들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소련에서 탈취한 영토에 재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나아가 “잉게르만 지역Ingermanland” 처럼 멋들어진 이름을 가진 새로운 구역을 늘릴 수도 있었다. 아우토반과 고속철도가 돈, 볼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랄 지역까지를 “한 줄로 꿰어 놓은 진주” — 독일의 전초지를 강화하는 — 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힘러의 표현에 따르자면 독일의 “동부지역” 정복은 “세계가 영원히 지켜보게 될 가장 위대한 식민지 건설작업”일 수 있었다. 
  
사실상 나치 제국은 여태까지 가장 성공하지 못한 식민지 건설을 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독일의 1871년 국경선을 확장하려는 운동은 1938년 시작되어 1942년 말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때까지 제국은 유럽 대륙의 약 삼분의 일과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거의 절반 — 2억 4천4백만 명 — 을 포괄하였다. 그러나 적군이 동 프로이센으로 진군해 온 1944년 10월경에는 제국은 사라져버려 역사상 가장 단기간 존재했던 제국들 중의 하나이면서 최악의 제국이 되었다.  
  
나치 제국은 왜 이처럼 끔찍하게 실패하였을까? 너무 강력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 형편없어서?

마조워Mark Mazower는 자신이 [[히틀러의 제국]]이라 부른 새로운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에서 최근 들어 제3제국에 대해 상당히 종합적인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많은 역사가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버레이Michael Burleigh와 투즈Adam Tooze처럼, 마조워는 나치 체제가 전쟁과 정복에 있어서만 그 진정한 성향을 드러내었다는 사실에 매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체제는 단순히 변형된 국민국가 역시 아니었다. 나치 체제는 처음부터 제국이 되고자 하였다.  
  
마조워는 최초의 나치 식민지 — 분할된 체코슬라바키아를 대신하여 시작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대한 보호령” — 를 그 전에 프랑스가 튀니스와 모로코에 혹은 영국이 이집트와 이라크에 설립한 보호령과 비교하고 있다. 전시 포즈나니 지역의 주지사였던 뵈트케르Viktor Böttcher가 1914년 전에는 독일 카메룬의 관리였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수행하였던 건설작업을 이제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나치 관리들 중의 한 명이었다. 나치는 소련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을 항상 “식민지적 방식으로 경제적 착취”를 할 수 있는, “식민지적 관점에서” 중요시하였다.   
  
마조워가 언급한 것처럼, 동시대인을 놀라게 한 다른 점은 동부 유럽에서 피식민자가 식민자와 피부색이 같다는 것이었다. 나치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초기 해설가 중 한 명인 에드리Eugene Erdely는 1941년에 “백인종에 속하는 어떤 민족도 이러한 조건을 이전에 강요 받은 적이 없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나치는 자신들의 비틀린 교묘한 인종 이론 덕분에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힘러에게 슬라브 인종 모두는 동부지역에 새로운 “금발의 주”를 창출하기 위해 “아리안 인종”으로 대치되어야 할 “몽골 유형”이었다. 히틀러에게 러시아 인들은 “북미 인디언들”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나치 제국의 존속기간이 짧았던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제3제국이 대영제국뿐만 아니라 소련 그리고 미합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된 이후로 제국은 분명하게 파멸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마조워의 책은 제국으로서 제3 제국의 실패를 이차적인, 내생적인 설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단순한 인구통계로 볼 때, 8천만 명의 독일인들에게 유럽 대륙을 떠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론적으로, 영국이 우타르 프라데시를 지배한 것보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는 것이 더 수월했어야만 했다. 우선 첫째로, 칸푸르와 런던 사이의 거리보다 키예프와 베를린이 더 가까웠다. 둘째로, 독일인은 1941년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에서 해방군으로서 진심으로 환영 받았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뿐만이 아니었다. 1930년대 스탈린은 소련의 서부지역 전역을 인종적 소수자로 혐의를 두고 폭력적으로 다루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의 지배가 더 나을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마조워가 보여주듯이, 독일인들은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살리는데 실패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4단어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함, 냉담함, 잔인함, 어리석음이 그것들이다. 물론 모든 제국은 이러한 악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치제국은 이러한 악을 극한으로 몰고가 지배를 지속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애 버렸다. 제국은 후반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신경을 썼다. 나치 제국은 무정한데다 무심했다.     

장식이 많은 군복을 입고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거만한 제국 독일인들”은 심지어 외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주장하는 같은 인종의 독일인들조차 소외시켰다. 게다가 이들은 새로이 지배 받게 된 민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였다.  
  
제국의원 코흐Erich Koch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책임을 맡을 당시 “나는 이 나라에서 마지막 모든 한 방울까지 짜낼 것이다”, “나는 이곳에 행복을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했다. 
  
괴링Hermann Göring 은 독일인이 아닌 자들이 “굶주림으로 쓰러진다” 해도 “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떠벌렸다. 
  
예를 들어, 바르바로사 작전 후 적군 포로 3백9십만 명이 생포되어 1942년 2월에는 겨우 1백1십만 명만이 살아남아있을 정도로 극도로 무관심한 대우를 받았다. 철조망으로 둘러싼 영창에 가두어 진 채, 그들은 영양실조와 질병에 방치되었다.  
  
나치가 피정복자들을 굶기는데에만 만족한 것도 아니었다. 나치는 (히틀러 식 경례를 하지 못했거나 혹은 주제넘게 했거나 입맛에 따라 행해질 수 있는) 즉흥적인 구타에서 산업화된 대량살육까지 모든 방식으로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즐겼다.  
  
마조워가 지적한 바와 같이 소수의 독일인만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인식했다. 1944년 2월 프라우엔펠트Gauleiter Alfred Frauenfeld의 표현에 의하자면, “무자비한 만행의 원칙, 지난 수세기 동안 유색인종 노예들에게 사용한 방식과 관점에 따라 이 나라[우크라이나]를 취급한 것…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을 대우하는 본능이 완전히 결여되었음을 입증하며, 이에 대한 결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참담함이었다.”  
  
동부지역 담당부서의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의 동료들 중 한 사람이 말한 바처럼, “부적당한 처우의 대표작… 완벽하게 친독일적이었고 우리를 해방자로서 기쁘게 맞이하였던 열렬한 지지자들을 일년 안에 숲과 늪지로 몰아넣었다.” 
  
오만함에 더해 냉담함과 잔인함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일찍이 1938년 한 독일 국방군 참모 장교는 새로이 획득한 주데텐 지방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국가의 터무니없는 무능력의 정도”에 대해 논평하였다. 로젠베르크의 동부 지역 부서(Ost-Ministerium)는 곧 “혼란 부서”(Cha-Ost-Ministerium)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친위대는 제국을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집중된 힘을 확립하길 열망하였다. 그러나 마조워는 힘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8십만 명의 독일 인종의 재정착을 어떻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오렌도르프Otto Ohlendorf — 게슈타포 출동부대의 충실한 사령관으로 수만 명의 소련의 유대인들을 대량 살해한 데 책임이 있는 — 는 힘러의 특기가 “무질서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통탄하였다. 그러나 나치 제국의 기능장애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로젠베르크나 힘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인에게 있었다. 결국 제3제국의 책임자는 히틀러였다. 6백50개의 주요한 입법 명령이 전시에 내려졌는데, 72개를 제외하고 전부가 그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이거나 공포된 법령이었다.  
소련의 침공 바로 직후, “동부 점령 지역의 광대한 규모로 보아 이 지역에서 치안을 확립할 수 있는 군사력은 재판소에서 판결을 내려 저항세력을 벌주는 대신 점령군이 주민들 중 저항하려는 모든 의지를 궤멸시킬만한 테러를 확산시킬 때에만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이는 히틀러였다. 점령지역을 진압하는 방법으로 “여하간 의심스러워 보이는 모든 자를 쏠” 것을 선호했던 이는 히틀러였다.  
  
제국주의적 통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제정신으로 생각했던 제3제국에 드문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베스트Werner Best의 눈에 히틀러는 당대의 칭기즈칸 — 자신의 제국마저 유지시킬 수 없는 파괴의 전문가 — 이었다. 스탈린 체제가 1941년 무너졌거나 (거의 일어날 뻔했던) 혹은 미합중국이 태평양 지역 우선 작전을 채택했다면 이 제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탱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마조워는 이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이번에 펭귄출판사에서 한 권으로 (주를 빼고) 재출판 된 커쇼 경Sir Ian Kershaw의 기념비적인 히틀러 전기 독자들에게 놀랍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에 대단했던 역사편찬 논쟁에서 그를 “목적론자intentionalist들”보다 “구조주의자들”과 유사한 태도를 취하게 한 커쇼의 초기 저서는 제3제국에 대한 대중적 태도에 맞추어졌었다. 그러나 그의 전기가 진전됨에 따라 히틀러의 중심적 역할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가장 최근의 소논문들을 단행집으로 펴낸 [[히틀러, 독일인들과 최종 해결책]]에서 커쇼가 쓴 것처럼, “히틀러가 없었다면, 친위대-경찰 국가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1930년대 후반기까지 유럽의 전면적인 전쟁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소련에 대한 침공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홀로코스트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이 히틀러가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의 구체적인 모든 사항까지 명백하게 명령을 내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나치당원들 — 나치 제국의 “점증적인 과격화”에 책임이 있는 자들 — 은 자신들을 다소 애매하게 “총통을 지향하여 노력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없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취했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히틀러의 제국은 1945년에 그 역사적 유효기간이 다한 개념을 원칙적으로 무리하게 적용한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부유해 지는 길은 외국인들과 그 땅의 착취를 거쳐야한다고 그럴 듯하게 말해왔다. 생활권Lebensraum 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제국은 정착할 새로운 땅과 세금을 물릴 새로운 인민을 위해 싸워왔다. 그러나 20세기 동안, 선진 산업경제는 식민지 없이도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명백해졌다. 참으로, 식민지는 불필요한 짐과 같은 것일 수 있다.  
  
1942년에 경제학자 슈베르트Helmut Schubert는 독일의 진정한 미래는 “영구적인 그리고 증가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존하여 “거대한 산업 지구”가 되는 것에 있다고 적었다.  
  
동부 지역의 독일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일의 동부화는 농업에서 산업으로 노동의 세속적인 이동이 지속됨에 따라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전시 경제의 급박한 상황이 이러한 관점을 정당화하였다. 1944년 말까지 약 5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구 제국의 광산과 공장에서의 노동에 징집당했다. 재미있는 아이러니로 인해 인종적으로 순수한 절대적 통치권에 대한 꿈이 독일 자신을 다인종 노예국가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물론 의도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을 때 의도하지 못한 결과가 가장 잘 일어날 수 있다. 히틀러의 해석자는 후에 “나치는 끊임없이 천년 제국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5분 앞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논평했다. 그들 제국의 존속 기간이 그렇게 짧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6년조차도 매우 매우 길었다.
  
Niall Ferguson은 The Financial Times의 기고 편집자이다.  
 
출처: Financial Times, 2008. 9. 13.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