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How Darwin won the evolution race

다윈은 어떻게 진화론 경쟁에서 승리했는가   
Robin McKie

다윈이 과학사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이라는 가장 획기적인 발견을 한지 150년이 지났다. 그러나 다윈의 독창적인 연구는 지구 반대편의 한 젊은 조류학자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로빈 맥키Robin McKie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에 감추어진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1858년 초, 말레이 제도 터네이트Ternate 섬에서 한 젊은 표본 채집가가 매우 잡기 어려운 이 섬의 극락조를 추적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이후에 그는, ‘매일 오한과 잇단 고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워서 내가 특별히 관심 갖고 있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머리 속은 돈이나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질병과 기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떻게 이것들이 인구를 제한하는지, 그리고 지구의 나이가 광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근의 발견들을 생각하였다. 그는 영겁의 시간 동안 되풀이되는 이 죽음의 물결이 어떤 영향을 미쳐 서로 다른 종들을 만들어 내는지가 궁금했다.

열이 내려가자 영감이 떠 올랐다. 그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변종들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 남아 마침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연선택 이론이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 중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열병처럼 떠 오른 것이다. 월리스는 그의 생각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그 당시 박물학자로 이미 유명했던 다윈에게 보냈다. 이 서신은 1858년 6월 18일 그러니까 150년 전 지난 주에 켄트의 다운Downe에 있는 다윈에게 전달되었다.

다윈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20년 동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해왔는데, 이제 다른 사람이, 오늘날 고생물학자인 굴드Stephen Jay Gould가 ‘자연사에 가장 위대한 이념 혁명’이라 부른, 또는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인간의 심상에 떠오른 가장 중요한 생각’이라고 말한 연구로 그 공적을 가로 챌 지도 모르게 된 것이었다. 고통 속에서 다윈은 친구인 식물학자 후커Joseph Hooker와 지질학자 라이엘Charles Lyell에게 편지를 썼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과학사에서 전설이 되었다.

후커와 라이엘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대한 주장을 보호해 주기 위해 피카딜리의 벌링톤 하우스Burlington House에서 린네 학회를 열어 두 사람의 연구물을 같이 살펴보았다. 7월 1일 학회 회원들이, 지금은 왕립 아카데미의 일부가 된 방에 역사상 다른 어떤 것보다 인류에게 모욕적이며 문제를 일으킨 이론에 대해 듣고자 모였다. 정확히 150년 전 다음 주, 마르크스의 생각보다 더 급진적인 개념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맨 처음에 다윈과 월리스가 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린네 학회 회원들의 환호에 맞추어 웅변적인 연설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측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월리스는 여전히 말레이 제도에 있었고 다윈은 집에서 그의 아내 엠마와 함께 6월 28일 성홍열로 죽은 19개월 된 아들 찰스때문에 비통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젠틀맨으로 구성된 청중들이 있었다. 다윈과 월리스의 노트와 논문, 서신들을 읽은 후 그들은 몇 시간 동안 학회업무의 몇몇 항목들을 가지고 심한 말다툼을 하였다. 역사가인 무디JWT Moody가 그 모임에 대한 1986년의 연구에서 묘사한 것처럼 회원들은 ‘새로운 개념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기보다 자신들에게 쏟아진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 채 결국 자리를 떴다. 인류가 창조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소식을 맞이한 것은 지루한 침묵이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아주 하찮은 지적인 대응도 없었다. 린네 학회장 벨Thomas Bell은 1858년에 대한 검토에서 ‘과학분과에 즉시 혁명을 일으킬 어떤 놀라운 발견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도화선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유전학자 존스Steve Jones는 ‘월리스의 편지가 다윈을 한 방 먹였다. 다윈은 20년 동안 얼버무리려 했고, 다른 사람이 유사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 다음 20년도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윈에게 1858년 여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결코 거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윈은 자신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왕립 학술원 금메달 수상자였고 말레이 제도에 있는 애송이 표본 채집자에게 굴복 당할 수는 없었다. 그의 긴 다리에 알맞은 집안에 있는 유일한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판을 놓고 지난 20년 간의 연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다윈 탄생 200주년과 더불어 출간 150주년을 내년에 맞이할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놀랍게도 이 글은 중요한 자연과학 논문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쓰여진 저서로 그 엇갈려 짜인 줄거리가 엘리어트George Eliot 혹은 디킨스Charles Dicken의 작품에 비교되어 온, 독창적인 은유가 풍부한 책이다. 다윈의 전기를 쓴 브라운Janet Browne은 ‘다윈은 영원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였다’고 말했다.

이번 8월에 BBC 채널 4에서 방영할 다윈 시리즈에서 도킨스는 이러한 칭송을 되풀이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종의 기원]]을 읽을 때 다윈이 몹시 이해 되길 원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윈은 그저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이 진리라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그가 그렇게 하려고 몹시 애썼기 때문에 이 책이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문장이 현대의 기준으로는 좀 지루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책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선택을 확신하는 이러한 서술이 이해되기 쉬웠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생생한 형태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다윈이 걱정했던 비통에 찬 격분에 찬 반응도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오래 전에 다윈을 가르친 선생 세지윅Adam Sedgwick는 그의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완전히 거짓이며 극도로 유해’하다고 말했다. 다윈을 보호하기 위한 후커, 라이엘, 헉슬리Thomas Huxley 등으로 이루어진 다윈 지지자들의 모임은 1860년 6월 옥스퍼드 영국 고등과학협회에서 벌어진 헉슬리와 윌버포스Wilberforce 주교간의 유명한 논쟁으로 정점에 오르게 된 싸움을 시작하였다. 헉슬리는 졸업생의 3분의 2가 성직자가 되는 기관에서 윌버포스를 이겨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헉슬리의 결정적인 ‘승리’의 본질이 지금 여러 역사가들에게 문제되고 있지만 형편없는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동점으로 비겼다고 평가했다. 다른 한편으로 변화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으며 [[종의 기원]]의 출간이 이 변화를 가속화시켰음은 분명하다. 그 때까지 자연세계에 대한 권한을 가진 교회는 그 토대를 잃어가고 있었으며 과학이 그 자리를 물려 받고 있었다.

‘그 다음 몇 십 년에 걸쳐 다윈의 옹호자들이 영국과 미합중국의 지성계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브라운은 기록하고 있다. ‘세기말에는 그들이 의회, 국교회, 대학, 정부처, 식민지의 관청, 귀족, 해군, 변호사들과 의사 등 영국과 해외 전역에 퍼졌다.’ 이들은 자연선택론이 지속되도록 지켰으며, 다윈이 1882년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히게 되는 사실 — 불가지론자라고 시인한 이에게는 과히 나쁘지 않은 — 에서도 이를 볼 수 있었다.

다윈의 초상이 10파운드 지폐에도 있듯이 그는 현재까지 숭배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월리스는 잊혀졌다. 그는 기꺼이 다윈과 그의 친구들이 자연선택론을 널리 알리게 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것이 제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명한 이를 알았고 그를 도왔다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혹이 막연하게나마 남아있다. 보잘것 없는 집안 출신으로 독학한 월리스는 성공한 의사였던 부친이나 대학교육 등과 같이 다윈에게 주어진 특권 중 그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는 견습 목수로서 자신의 길을 닦아야 했으며 저명한 박물학자가 되기 바로 전에는 토지 측량기사로 훈련 받았다. 그는 또한 초기 사회주의자였고 여성의 참정권 및 토지개혁 운동을 지지했으며 매우 숙련된 저술가였다. 콘라드Joseph Conrad는 월리스가 8년 간 그 지역에서 지내며 저술한 보고서인 [[말레이 제도The Malay Archipelago]]를 침대 곁에 두고 그의 작품들 —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로드 짐Lord Jim]]이다 — 을 쓰는데 이 책을 참조하였다.

그러나 월리스는 운도 없었고 성격도 형편없었다. 그의 최초의 원대한 표본 채집 탐험인 아마존 행은 영국으로 귀환하는 배에 화재가 나 그의 수입원이 될 수천 개의 표본과 함께 가라 앉음으로써 대실패로 끝났다. 월리스는 몇 권의 노트와 아마존에서 가져 온 앵무새만 지닌 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월리스는 충동적이었다. 다윈이 그의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여 이 이론이 그의 아내를 포함한 기독교 신자들을 당황케 할 것을 알고 출간을 유보했다면, 월리스는 돌진하여 기꺼이 사회를 뒤집어 놓으려 하였다. 작년에 [뉴욕커]에 월리스에 대한 글을 쓴 로젠Jonathan Rosen은 그가 그런 일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여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 그가 대중들의 의식으로부터 거의 잊혀진 여러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월리스는 (다윈과 그의 친구들이 경멸한) 심령술을 믿었고 나중에는 종두 반대운동을 벌였다. 어텐버로우David Attenborough는 ‘월리스는 감탄할 만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성인같았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그는 다윈에게 필적할 수 없었다. 월리스는 수 주 동안 말라리아 열에 들떠 자연선택에 관한 이론을 생각해 냈다. 다윈은 이론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엄청난 정보들을 모았다.’

역사가인 엔더스비Jim Endersby도 이러한 지적을 뒷받침한다. ‘자연선택 이론은 놀라운 생각이었으나 그것이 믿을만 했던 것은 다윈이 제공한 증거의 양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윈을 자연선택 이론의 제일의 창시자로 기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31년에서 1836년까지 비글 호를 타고 세계일주 항해를 하면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공책을 그가 관찰한 것들,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의 각기 다른 섬에서 본 밀접하게 관련된 동물들에 대한 관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다운의 거대한 정원에서 난초를 교배하고 시계풀을 재배했으며 종종 지렁이가 진동에 어떤 반응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바순을 연주했다. 그는 자신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것을 입증하고자 동식물의 번식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러나 월리스는 이와 같은 것들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라해도 다윈과 그의 지지자들이 월리스를 망하게 하려고 더러운 책략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멈춘건 아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다윈은 그가 주장한 것보다 몇 주 전에 월리스의 서신을 타네이트로부터 받았고 그 내용을 슬쩍 훔쳐 자신의 것인양 [[종의 기원]]에 썼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20년 전에 미합중국에서 출간된 브랙만Arnold Brackman(A delicate arrangement: the strange case of Charles Darwin and Alfred Russel Wallace)과 브룩스John Langdon Brooks(Just before the origin: Alfred Russel Wallace’s theory of evolution)의 책들에서 약술되었는데, 이 책은 다윈을 파렴치한 기회주의자이며 지적 절도범으로 그렸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 모두 설득력이 없으며 그 후 학계의 대다수가 이들의 주장이 공평하지도 믿을만 하지도 않다고 결론내렸다.

Alfred Wallace월리스의 전기(Alfred Russel Wallace: A Life)를 쓴 래비Peter Raby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어떤 흥미로운 이론도 빈약한 증거 위에 세워질 수는 없다. 인간적인 요소로 보자면, 다윈의 생애에서 그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지적 사기를 칠 수 있었을 거라는 주장을 펼 어떠한 요인도 없다. 그가 특별히 자신의 이론에 대한 출처와 신세 진 부분에 대해 인정할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실상 역사가들은 다윈이 아니었다면 자연선택 이론이 매우 손상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윈이 자연선택 이론을 발전시킨 최초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월리스가 명성과 주목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이론은 매우 다른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결국 월리스는 더 높은 힘이 때때로 진화를 이끈다고 믿게 되었다’고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 판으로 곧 출간 될 [[종의 기원]]의 편집자 엔더스비는 덧붙인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이 인간정신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인류는 동물의 왕국 외부에서 다루어지는 힘에 의해 영향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위험하게도 현대 창조론자들이 내놓은 개념, 신이 진화의 과정을 지휘하였다는 지적인 설계 개념에 근접한다. 정반대로 다윈이 보는 상은 엄격하여 굴드가 서술한 것처럼, 인류는 ‘삶이라는 거대한 나무모양의 관목의 작은 나뭇가지에 불과하며, 이것이 종자로부터 다시 심어진다 해도 다시 이 나뭇가지로 자라날 수 없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을 암시했다. 다윈에 따르면 어디에도 인류를 위한 탈출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박테리아나 거북이처럼 자연선택의 법칙에 매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용서할 수 없는 이론의 근원지는 매우 인간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다윈의 삶과 경력은 꼭 맞물려 있었다. 그는 참으로 가정적인 인물이었고 1858년에는 아들 찰스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겨 있었다면 1851년에는 10살 난 그의 딸 애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고 다윈의 고손자인 케인즈Randal Keynes는 그의 책 [[애니의 상자: 찰스 다윈, 그의 딸과 인간진화Annie’s Box: Charles Darwin, his daughter and human evolution]]에서 밝히고 있다. Annie's Box겨자 습포, 브랜디, 표백분, 암모니아가 애니가 아프기 시작 할 당시 줄 수 있는 약의 전부였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애니가 1851년 4월 23일 ‘한 숨도 내쉬지 못할’ 때까지 겪은 구토와 정신착란을 낫게 하지 못했다. 다윈은 ‘노년의 나이를 위로하는 집안의 기쁨을 잃었다’고 회상했다.

케인즈는 애니의 죽음이 다윈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다. ‘생의 말기에 애니의 얼굴이 치명적인 병으로 수척해져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하는 것을 다윈은 지켜 보았다. 무자비한 자연의 힘에 매달려 본 사람만이 삶의 진정한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윈은 진화를 추동하는 용서 없는 과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몇 년 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기쁨에 차서 빛나는 자연의 얼굴을 본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하는 일 없이 지저귀는 새들이 곤충과 씨앗을 먹고 살며 따라서 삶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거나 잊어 버린다. 혹은 얼마나 많은 노래하는 새들이나 그들의 알들이나 그들의 갓 태어난 병아리들이 새들과 맹수에 의해 잡혀먹는지 잊어 버린다.’ 그가 다른 곳에 적었듯이 ‘모든 자연은 전쟁이다.’

맹목적인 계기가 생존투쟁과 진화과정에서 결정적 요인으로 강조되는 이와 같은 무자비한 생각은 근면과 자조를 굳게 믿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1세기 반 동안 관찰을 통해 옹호되어 왔고 지금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자연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것은 즐거운 과정이 아니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자연선택론은 과학이론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주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소수이나 사회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집단에 의해 주기적으로 거부당하고 공격받고 있다. 이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 빅뱅 이론,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별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나 인류가 나머지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다거나 원숭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생각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런던 대학의 유전학 교수 존스는 ’20년 전에는 이러한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요즘에 수 십 명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 때문에 진화에 대한 강의를 듣지 않겠다고 요청하고 있다. 심지어 이 학생들은 내가 자연선택이 객관적인 사실들로 입증된다고 말하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멘델의 유전 법칙을 믿는지 물어본다. 물론 그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DNA의 존재를 믿냐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인간과 침팬지가 DNA의 98퍼센트를 공유하고 있는 것을 믿냐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자연선택이 뭐가 잘못되었냐고 하면 그건 다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정말 모르겠다.’

도킨스도 이와 같은 당황스러움을 겪고 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이 만년도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규모의 질서에서 보면 틀린 것이다.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이다. 이들은 그냥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무지하다. 그러나 나는 상식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존스 역시 동의하고 있다. ‘지나가는 단계다. 20년 안에 이러한 터무니 없는 생각은 없어질 것이다.’ 존스는 자연선택은 너무 중요해서 이것 없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생태계의 문법이고 우리 지구상의 무수한 동식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을 생물학자들에게 제공한다. 어텐버로우도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그의 [지구상의 생명Life on Earth] 프로그램은 다윈주의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대자들은 자연 선택이 관찰이나 실험에 근거한 이론이 아니며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고 증명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글쎄, 그렇지 않다. 이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이론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1066년 일어난 헤이스팅스의 전투를 증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전투가 그 때 일어난 것을 알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구상의 진화의 과정이 다윈이 옳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음을 안다.’

다윈과 월리스의 이론: 4가지 핵심적인 부분
1. 동일한 종의 생물체는 유전된 방식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것은 변종으로 알려졌다. 다윈이 상세하게 연구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거대한 거북이 그 사례이다.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이 거북들 중에 일부는 다른 거북보다 긴 목을 갖게 될 수도 있다.

  1.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생물체들이 태어난다. 이것이 생존경쟁이다.

3. 동일한 종의 일부 생물체는 그 종의 다른 일부보다 생존과 번식을 더 잘 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갈라파고스 거북의 경우에 긴 목을 가진 거북은 풀을 먹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고 이 특성은 가뭄이 들어 먹을 풀이 없게 되었을 때 유용할 것이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1. 이 우세한 특성은 다음 세대로 전해져 쌓이게 된다. 오랜 기간 동안 새로운 생물체가 서서히 나타난다. 이것이 종들의 기원이다. 갈라파고스 제도 중 더 건조한 섬들에서 더 높은 가지까지 몸을 뻗칠 수 있는 거북이 나타난 것이 종의 기원이다.

우연한 발견: 다윈의 행운
찰스 다윈의 이름은 자연 선택과 돌이킬 수 없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론에 연루된 것은 미리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비글호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였는데 곧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게다가 그가 배 위에서 수행한 직책에는 기원이 있었다. 박물학자 자리는 비글호의 함장인 피츠로이Robert Fitzroy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댄 것이었다. 피츠로이는 타고난 뱃사람이었지만 토리 당원으로 1822년 8월 12일 자신의 목을 그어 죽은 외삼촌 카슬레이 자작의 자살에 사로잡힌 우울한 사람이었다. 피츠로이는 자신도 동일한 자살 성향을 물려받아 항해 중 어느 때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5년의 여행기간 동안 의기소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동반자, 즉 다윈에게 돈을 지불한 것이었다. 다윈은 피츠로이의 ‘의기소침’이 어느 때는 정신이상에 가까웠다고 회상했다. 따라서 다윈의 장기간의 여행은 한 사람의 유전적 정신이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보수당 정부의 원로의원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의 조카는 가문의 광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테고 그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도와 줄 박식한 동반자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사도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다윈주의라는 용어는 알려지지 않았을 터이고 오늘날 우리는 자연선택을 이야기 할 때마다 월리스주의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윈의 존재는 유익했었던 것 같다. 피츠로이는 무사히 돌아왔고 후에 기상청이 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해상기상예보 지역) 기구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살에 대한 공포는 빗나가지 않았다. 1865년 4월 30일 우울한 나머지 그는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했다.

간략한 진화론의 역사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그들이 말한 것

서기전 6세기
종이 변할 수 있고 다른 종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윈과 월리스가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하기 전에 존재했다. 예를 들면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초보적인 진화 개념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생각이 심각하게 논의된 것은 식물학과 지질학이 발전한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박물학자에게 문제는 단순했다. 신이 모든 유형의 생물체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떤 한 유형의 동물 혹은 식물이 다른 유형으로 변화한 것일까? 어떤 과정이 진화를 추동 한 것일까?

1800
최초로 제안된 작동기제 중 하나는 프랑스 박물학자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동물이 사는 동안 획득한 형질을 다음세대에게 물려준다고 주장했다. 근육이나 긴 목을 발달시킨 동물은 이 형질을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진화론을 유도해 낸 최초의 적절한 시도였다. 라마르크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이론은 과학의 엄밀한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꼬리가 잘려 나간 고양이들의 일족이 꼬리가 없는 고양이들로 진화하지는 않는다. 이 생각이 20세기까지 중요한 과학적 개념으로 존속하였지만,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1830-1833
종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작동기제의 발전에 주요한 또 다른 사건은 1830년에서 1833년까지 3권으로 출간된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였다. 라이엘은 지구의 역사는 단기간의 격렬한 변환이나 대이변이 아닌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일어난 점증적인 변화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지구가 영겁의 시간 동안 일어난 부식, 퇴적물의 형성, 바람의 영향 그리고 다른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 작은 변화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런 통찰력이 박물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1858
월리스와 다윈의 이론들이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읽혀졌다. 지구 상의 야생 생물에 대한 관찰이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다윈은 비글 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동안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 책은 갈라파고스와 다른 지역의 동식물에 대한 다윈의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월리스의 경우에는 아마존과 말레이 제도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1865
1859년 출간된 [[종의 기원]]에는 유전학에 대한 이해라는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이 결핍되어 있다. 이 지식은 멘델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는 1865년 식물을 연구하여 유전학의 법칙들을 발전시켰다. 유전학의 기본단위는 유전자로 이는 자연선택을 강제하는 힘이다. 그러나 멘델의 법칙은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주류 자연과학계에서 간과되었고,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연선택을 입증하는 유전학적 작동기제가 이해되었다.

1953
크릭Francis Crick과 왓슨James Watson은 개미에서 고래까지 모든 생물체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질인 DNA(디옥시리보핵산)의 2중 나선구조를 풀었다. 이 발견으로 과학자들이 자연선택이 분자 단위에서 벌어지는 영향을 상세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출처: The Observer, 2008. 6. 22.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