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여지지 않은 철학] 역자후기

<<쓰여지지 않은 철학>> F. M. 콘퍼드, 이명훈, 라티오 (#ISBN9788996056119)

이 책의 저자인 F. M. 콘퍼드는 <<종교에서 철학으로>>(남경희 옮김)와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이종훈 옮김) 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희랍철학 연구의 대가이다. 앞의 두 저작과 달리 [[쓰여지지 않은 철학]]은 그동안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지 않았던 콘퍼드의 논문들을 모은 유고집이며, W.K.C 거스리가 회고문을 쓰고 편집하였다. 거스리는 이 저작에 실린 논문들 중 <쓰여지지 않은 철학>이 콘퍼드의 탐구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보아, 책의 제목을 ‘쓰여지지 않은 철학’으로 정했다.

콘퍼드의 제자이기도 한 거스리는 박종현 교수가 번역한 <<희랍철학입문>> (#ISBN9788930606127)의 원저자이자 아직 번역되지 않은 [[희랍철학사]]의 저자이다. [[희랍철학사]]는 거스리를 세계적인 학자로 알려지게 만든 총 6권의 대작으로서 희랍철학에 관한 방대하면서도 매우 엄정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희랍철학사]]는 아직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희랍철학입문]]은 서양고전, 특히 희랍철학이 낯설었던 때에 일찍이 우리에게 그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충당했으며, 고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는 지금도 필독서로 읽힌다.

거스리는 콘퍼드를 “새로운 탐구를 하는 데 전혀 피곤해 하지 않는” 학문적 열정을 지닌 학자로 회고한다. 이러한 열정적 태도를 가졌던 콘퍼드는 당대가 옹호하는 개념이나 견해에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근본적 가정을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았다. 어느 시대이고 어떤 쟁점에 대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벗어날 수 없었던 유산을 간직하고 있기에, 콘퍼드는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유산으로 전해져 오는 것들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서 철학으로]]에서 “명료한 철학적 진술에 이르는 사유의 양식은 이미 신화의 비추론적 직관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의 탐구가 내적으로 ‘선개념(先槪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다.

당대는 그 이전 시대와 ‘선개념’에 바탕을 두고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일관되고 기본적인 콘퍼드의 입장이다. 가령 [문학과 철학에 깃든 무의식적인 요소]라는 논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논문에서 콘퍼드는 역사가에 대해 비판을 가하려면 그가 이미 처음부터 취하고 있는 사유양식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즉 경제학이 태동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된 사유양식에 대해 먼저 살펴볼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과거도 없고 전통도 없는 인류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던 것이다. 철학이나 그 외의 학문들이 신화에서 곧장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통로를 거치되, 어느 한 개인과 무관하면서도 그들 각자가 무의식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무의식적인 상태를 동일한 원천으로 하여 각 학문의 영역이 일정한 통로를 거쳐 나아가게 된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2장에서 다루는 [천체의 음악]은 시작부터 아베크 족의 정서를 느끼게 한다. 달빛이 어려 있는 분위기에서 사랑하는 두 연인의 달콤한 속삭임이 이어진다. 매우 감상적이다. 그러나 주제는 엉뚱한 쪽으로 흘러간다. 살을 맞대고 몸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려할 텐데 이야기의 흐름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은 티끌이다. 그러니 한낱 부질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티끌이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조화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질서를 가진다는 것은 한계를 가지는 것인데, 그 한계지음이 무한에 대한 척도가 된다. 그리하여 무한과 어우러짐이 되는 것이다. 티끌과 같은 몸이 영혼의 불멸성과 어우러지지 않는 한, 몸은 그저 티끌일 뿐이다. 수학자들의 영혼을 넘치는 기쁨에 빠져들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 천체가 어떤 굉음소리를 낸다면 누군들 그 굉음소리를 듣지 못하겠는가? 그렇지만 천체의 음악은 소리 그 자체가 아니다. 물질로 된 어떤 전달체가 아니므로, 그것을 물질과 관련되어 있는 소리로 보는 한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연인들의 속삭임이 천체의 음악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서구사상사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2장의 논문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3장의 논문 [쓰여지지 않은 철학]은 콘퍼드의 철학적 탐구 자세를 보여준다. 우나무노(Unamuno)는 “철학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찾기 위해 철학적 탐구를 한다”고 말했다. 콘퍼드는 이 점을 거미와 그물의 비유로 설명한다. 거미가 짜 놓은 그물은 당대의 작품이다. 그러나 철학자인 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을 남긴 작가들 또는 철학자들은 거미처럼 그물 뒤편으로 몸을 숨긴다. 숨어있는 철학자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이 진정으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흔하게 받아들이는 개념들은 실상 각 시대마다 같을 수가 없는데, 자신들의 시대에서 취하고 있는 관점이나 개념이해를 기준으로 지난 시대의 저작을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탐구자세가 된다고 콘퍼드는 경고한다. 그 예로서 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시대마다 다르고 또 당대에는 이러한 추상적 개념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4장의 논문에서 다루는 플라톤의 [[국가]]는 그의 참스승인 소크라테스의 평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의 고민은 그의 스승이 겪은 생애에 있다. 한번도 다른 사람을 옭아매려고 한 적도 없는 소크라테스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터무니없이 옭아매여 죄를 뒤집어 쓰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다. 대화편을 통해 스승의 길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대립되는 인물은 칼리클레스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포기하고 일상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할 것”을 충고한다. 그런데 이런 칼리클레스는 결국 플라톤의 시각에서는 소크라테스와는 정반대로 “신의 친구도 인간의 친구도 될 수 없는 강도와 무법자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결국 알려진 바와 같이 플라톤은 철학적 소양을 갖춘 정치가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이 장에서는 플라톤이 경험한 현실과 고민 그리고 인간의 유형에 따라 어떤 공동체가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다.

5장의 논문에서 다루는 주제는 ‘에로스’이다. 넓게 보면 열정이고 좁게 말하면 욕구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모든 형태의 욕구가 지닌 충동”을 가리킨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흐름이 어떤 곳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거기서 얻는 즐거움도 달라진다. 지식을 향해 있을 때는 영혼이 간직한 즐거움을 향해 간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치닫는 욕망으로서의 에로스도 있게 마련이다. 위로 향해 나아가려는 욕망은 각 단계마다 날아가기 위해 날개가 자란다. 그것은 프시케가 에로스에게서 받는 날개이다. 그렇게 해서 날개를 달고 날아가서 도달하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4장에서 본 칼리클레스와의 대조를 통해 인간의 영혼이 어떤 곳을 향해 가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 편에서 철학자는 ‘왕 중의 왕으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다. 칼리클레스는 힘과 권력으로 다스리기는 하겠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왕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칼리클레스는 태양과도 같은 신을 보고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물을 수조차 없다. 이런 물음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명실상부하게 왕 중의 왕으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할 것이다.

6장의 논문에서는 고대의 자연철학과 근대의 자연과학을 비교한다. 고대의 자연학은 ‘사물의 본성에 관한 탐구’이다. 세계는 생명체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진화형과 창조형으로 나뉘게 된다. 진화형은 데모크리토스에서 볼 수 있고, 창조형은 플라톤이 추구하는 도덕적 철학적 유형의 자연철학이다. 어느 것이 되었든 당대로서는 관찰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원초적 무질서의 상태를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질서가 원초적 무질서에서 생겨나고 생명이 태어났는지를 본 적도 없다. 그리하여 고대의 자연철학과 근대의 자연과학을 방법과 목적에 따라 구별해서 다룬다. 자연철학은 “무엇이 실제로 궁극적으로 있는가?”에 대한 탐구라면, 근대의 자연과학은 “세계의 만물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탐구이다. 이런 주제들이 왜 탐구의 목표가 되는가에 따라 콘퍼드의 논의를 따라가면 그가 지닌 탐구의 열정도 함께 느끼게 된다.

7장의 논문은 헤시오도스의 계획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다룬다. 우선, 신들의 여러 세대를 구분한다. 그리고 우주생성론으로서 질서의 형성과 인류의 탄생에 주목한다. 셋째는 최고통치자로서 제우스를 논의의 중심에 놓는다. 신들의 계보에 따른 각종 일화는 서로 별개로 되어 있는 조각들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 연결되는 이야기라는 점을 콘퍼드는 입증한다. 그렇게 해서 [창세기]는 마르두크 신화에 대한 야훼의 반성이듯이, 헤시오도스의 우주생성론은 제우스의 신화적 찬미에 대한 합리적 반성이 된다. 야훼가 리바이어던을 살해하고 마르두크가 티아마트를 살해하는 것은 ‘기묘한 환상’도 아니고 근거 없는 사유도 아니다. 별개로 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므로 배경이 없었던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논문에서 콘퍼드는 최근의 두 저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을 고대철학에 적용해서 살펴보고 있다. 당시 역사개념은 노동계급의 운동이라는 ‘새로운 사실’에 의해 바뀌게 된다. 엥겔스는 적대계급의 탄생은 당대의 경제적 지위의 산물이며 이것이 실질적인 기반을 이루며, 이를 토대로 각 시대의 종교적·철학적 및 그 외의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정치적인 제도의 전반적인 상부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진술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콘퍼드는 이런 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적어도 일부 철학적 개념이 어떤 점에서는 매우 애매한 구절로 된 사회적인 기원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파링톤과 톰슨의 두 저서를 검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우선 파링톤이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지지하는 세 가지 이유를 검토한다. 즉 원자론이 과학적 참이고, 물질적 진보에 공헌하고 나아가 박애주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지지를 보낸다. 이런 이유에 적합하기 때문에 원자론은 대중의 철학으로서 플라톤의 철학과 대립을 이루게 된다. 플라톤의 철학은 ‘선전활동’이고 ‘고상한 거짓말’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리가 아닌 것을 참지 않으려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거짓을 증오’하는 철학으로서 플라톤이 참스승으로 모신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수난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철학을 물질론적인 기준에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 콘퍼드가 취하는 입장이다. 지혜에 이르는 길이 좁고 설령 그 길을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진리의 문에서 그것을 통과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점이 플라톤의 입장임을 강조한다. 상대성 이론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듯이 지혜에 이르는 길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래서 지혜의 길은 소수정예만을 위해 마련된 길도 아니다. 나아가 지혜는 ‘지배계급’이 비밀리에 거래하는 것일 수 없으니 결코 고상한 거짓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시대가 가진 시각에서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당대 저작을 그 작가의 정신에서 읽는다는 것은 고전읽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콘퍼드의 [[쓰여지지 않은 철학]]은 희랍철학뿐 아니라 나아가 고전학을 대하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한 콘퍼드의 이 글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대답을 암시해주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한번 생각해보자. ‘운동의 비운동, 비운동의 운동.’ 이 말은 고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콘퍼드의 [[쓰여지지 않은 철학]]을 읽으며 나는 다소 엉뚱하게도 이런 고상한 언표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저 문장에 한두 글자를 보태서 ‘운동권의 비운동적 삶, 비운동권의 운동적 삶’이라고 해 보자. 자극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 학문과 사회의 괴리,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있었다. 이런 괴리와 갈등양상을 보며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질을 묻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통찰했다. 콘퍼드도 그 통찰을 알았기에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업적을 기리거나 철학적 탐구가 인간의 활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개인에게는 위로 가는 길과 아래로 가는 길이 열려 있기 마련인데, 공동체를 위한다고 해서 그것이 위로 가는 길이요, 개인을 위한다고 해서 아래로 가는 길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만이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가졌으며, 이 영혼은 자신이 본래 있던 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영혼이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이 있다. 아래로 가는 길은 영혼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 영혼 바깥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끌려가는 길이다. 그것이 권력과 금력일 수도 있지만, 다수가 받아들이는 믿음일 수도 있다. 어떤 믿음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영혼이 제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성, 그것은 영혼이 처음부터 있었고 나중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그런 영혼으로 사는 삶이 ‘영혼불멸의 삶’이 되겠다. 그렇다면 불멸하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자는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자라야 하지 않겠는가. 콘퍼드의 이 글들이 그러한 통찰과 결단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7월
이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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