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도서 소개] Putting "culture" into context

“문화”를 맥락 속에 놓기
Penny Howard

Kate Crehan, Gramsci, Culture and Anthropology, Pluto, 2002.

그람시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가운데 <<그람시, 문화와 인류학(Gramsci, Culture and Anthropology)>>은 이에 대한 환영할 만한 기여이다. 명쾌하고 문체가 간명한 케이트 크리언(Kate Crehan)의 책은 그람시의 생애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시작하는데, 특히 그람시가 토리노에서 혁명적 정치에 개입한 것과 후일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투옥된 것을 강조한다. 크리언은 “그람시가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기획한 바를 이해하려면, <<옥중수고>>를 쓰는 계기가 되었던 그람시의 정치적 개입과 <<옥중수고>>를 구성하는 기간에 그람시가 처했던 환경 둘 다에 대한 시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옥중수고>>는 무엇보다 감방에 갇힌 그람시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개입 활동이었으며, 거기서 그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지배적인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억압당하는 자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투쟁을 근본적인 투쟁이라 보았다.”(p. 18)

크리언은 독자들이 그람시의 저술을 직접 접할 수 있도록 <<옥중수고>>를 폭넓게 인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옥중수고>>가 특정한 주제들에 관한 ‘노트’에서 인용한 것들로 채워져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옥중수고>>의 파편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크리언은 ‘문화’라는 술어의 인류학적 사용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사용법은 또한 ‘문화 차이’나 ‘문화 충돌’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란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유형화”되거나 “결속”된 전체라는 가정, 그리고 “전통과 근대성 사이에 기본적인 대립”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비판한다(p. 66). 그는 그러한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가정들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리언은 문화에 대한 그람시의 관심이 혁명적 변화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생활하는 방식이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실행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상상하는 능력을 필연적으로 모양 짓기” 때문이다(p. 71).

문화를 개별 구성원들의 행위를 설명하는 결속된 전체로 보는 대신, 그람시는 문화를 경제적 역사적 과정과, 특히 계급관계와 “유기적” 관련을 맺으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방식이라 보았다. 그람시를 폭넓게 인용하는 이 절은 문화와 경제적 관계, 헤게모니, “서발턴(subaltern)” 문화, 상식과 양식(良識), 지식인의 역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용하고 흥미로운 논의를 담고 있다. 크리언은 그람시에게는 인류학자들이 분명 가치 있게 여길 만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주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 절은 오늘날 인류학 내에서 그람시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특히 헤게모니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추적하고 비판하는데, 이 개념은 학계에서 크리언이 “헤게모니 아류(hegemony lite)”라 부르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그는 인류학에서 그람시가 대부분 문화사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와 인류학자 존 코머로프(John Comaroff)와 진 코머로프(Jean Comaroff)가 내린 해석에 따라 인용되어왔음을 추적한다. 불행히도 이 경우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와 동의어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람시 자신은 헤게모니를 서구 부르주아 민주정 내에서 권력이 국가와 그 다양한 제도들에 의해 행사되는 복합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이해했다.

또한 그람시는 헤게모니라는 술어를 혁명적 정당들이 투쟁들을 연계하고, 터득한 교훈들을 일반화하고, 마침내 사회를 변혁하는 데 필요한 신뢰할 만한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 운동과 실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람시에게 헤게모니란 사회적 관계, 실천적 행동, 동의, 힘과 관념이 복합적으로 혼합된 것이었다. 그런 다음 크리언은 그람시를 끌어들인 것으로 잘 알려진 인류학 저술 세 편에 이러한 비판을 적용하여 그람시에 대한 두루뭉술한 이해가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논증한다.

이 책은 인류학 내적인 “역사 쓰기” 단계를 넘어서 더욱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접근법으로 되돌아가려는, 현재 인류학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잠정적인 전환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개스턴 고딜로(Gaston Gordillo)의 <<악마의 경관: 아르헨티나 차코에서의 장소와 기억의 긴장 상태(Landscapes of Devils: Tensions of Place and Memory in the Argentine Chaco)>>(차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과이 3국에 걸친 아열대 대평원)는 명시적으로 그람시와 게오르그 루카치에 의거하여 현재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토바(Toba) 원주민에 대한 계급 착취와 국가 폭력의 영향을 이해하려 한다. 고딜로의 책은 영향력 있는 미민족학회(American Ethnological Society)로부터 “first book award”를 받았다.

미인류학협회(American Anthropology Association, AAA)의 2008년 연례 총회에는 전세계 각지에서 6천명 넘게 참석했는데, 이라크 점령과 미합중국 군대에 대한 인류학적 개입의 윤리에 관한 몇몇 모임들이 두드러졌다. 미인류학협회는 적법한 인류학 조사와 군대를 위한 간첩행위를 분명히 구별하도록 윤리 강령을 바꾸는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논쟁은 인류학에 폭넓은 충격을 가하고 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프라이스(David Price)가 미합중국 공군과 해군에 의한 인류학의 사용을 토론하는 미인류학협회 회합에서 주장했듯이, “인류학은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경제학에 속해 있다. 메타-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거부가 인류학계에서 지배적이었던 결과, 우리는 인류학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할 만한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

미인류학회의 회의에서 미합중국의 제국적 기획에 인류학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했던 자들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문화적 이해”의 힘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크리언의 그람시 해석에서 한 가지 취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진보 세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분리된 문화들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계급, 역사, 권력의 역학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출처: International Socalism, Issue 122

번역: 라티오 출판사

[미국법의 역사와 문화] 출간

원제: The Magic Mirror: Law in American History

지은이: 커미트 L. 홀 / 피터 카스텐
옮긴이: 손세정
판형: 신국판; 688페이지(38,000원)
발간일: 2009년 3월15일
ISBN: 9788996056140

<<미국법의 역사와 문화>>, 커미트 L. 홀 / 피터 카스텐, 손세정, 라티오 (#ISBN9788996056140)

도서안내
이 책은 미국 법률 문화와 실제에 있어서 법의 역사에 관한 것으로, 미국 법률문화에 있어서 주요한 발전과 더불어 오랫동안 있어 왔던 법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다룬 내용은 영국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착기부터 현재까지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적인 발전과 함께 미국 법률상의 변화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1973년에 초판이 나온 뒤에 1985년 일부 개정한 2판이 출간된 로렌스 프리드만(Lawrence M. Friedman)의 <<미국법의 역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미국법률문화사에 대한 요약을 대담하게 시도한 책이다. 이번에 출간된 커미트 홀의 책도 프리드만의 연구방법론을 따라 저술된 법과 사회에 관한 내용이지만, 프리드만의 책보다 미국 사학계의 주류에 훨씬 가깝고 20세기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체적으로는 엄격한 미국법사라기보다는 미국 역사에 있어서 법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또한 공법과 사법, 형벌 제도와 사회통제, 소수의 권리와 다수의 통제와 정치권력과 법률상의 합법성에 관한 주제를 명시적으로 통합해서 다루고 있다.

“미국에서는 역사적 판례를 존중하는 태도가 강하며, 그에 따라 ‘과거’는 권위의 주요 원천이자, 법률가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지시하는 이정표이다. 즉 법의 역사는 권위와 합법성의 원천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법사를 우선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반 역사가뿐만 아니라 법사학자들에게도, 역사의 특별한 교훈을 의미의 왜곡없이 축약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도, 이 책의 저자들은 공법과 사법의 역사로부터 주제를 종합하여, 초기 영국인의 정착 당시부터 2007년까지 미국사에서 법의 역할을 잘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라는 광범위한 맥락에서 20세기 미국법과 법제도들의 발전에 대한 학자들의 최근 성과도 반영하고 있다.”(역자 서문에서)

차례
1. 초기 미국법의 사회적 제도적 토대
2. 식민지 시대의 법, 사회, 경제
3. 혁명기에 있어서 법과, 법에 있어서 혁명
4. 법, 정치, 그리고 미국 법률제도의 출현
5. 적극적인 국가와 혼합경제: 1789~1861
6. 보통법, 법률가와 미국의 가치: 연속성과 변화, 1780~1880
7. 인종 문제와 19세기 신분법
8. 19세기 가족관계법
9. 위험한 계층과 19세기 형벌제도
10. 법, 산업화, 그리고 규제국가의 시작: 1860~1920
11. 법률문화의 전문화: 법관과 변호사, 1860~1920
12. 산업화에 대한 사법적 대응: 1860~1920
13. 문화적 다원주의, 총력전, 그리고 현대 법률문화의 형성: 1917~1945
14. 대공황과 자유주의 법률문화의 출현
15. 냉전 시기의 법과 사회, 1946~1990
16. 무소불위의 사법부와 오늘날의 사회적·문화적 변화

저자 소개
커미트 홀(Kermit L. Hall, 1944~2006)은 미국법사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특히 헌법과 사법제도의 역사에 관한 전문가였다. 알바니-뉴욕주립대학 총장으로 재직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The Magic Mirror : Law in American History(2nd ed., 2008), The Judicial Branch(2005), The Oxford Companion to the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2nd ed., rev., 2005), The Oxford Companion to American Law) (2003) 등 30여 권이 있다.

피터 카스텐(Peter Karsten, 1938~)은 현재 피츠버그대학교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군대, 문화, 법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Heart versus Head(1997), Military in America(1986) 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동국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위스콘신 법과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동국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외국 도서 소개] In Tough Times, the Humanities Must Justify Their Worth

고난의 시기에 인문학은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해야만 한다.
Pariticia Cohen

예일과 같은 엘리트 대학교들, 점차 늘어나는 위스콘신 대학교와 같은 공립 교육제도, 그리고 루이스 & 클라크 대학교와 같은 규모가 작은 사립 대학들이 수 세대 동안 공유했던 관념은, 전통적인 교양교육은 그 정의에 의하면 학생들이 특정한 직업을 갖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이 발달시키는 비판적 사유, 시민적 역사적 지식과 윤리적 추론은 다른 목적을 지향한다: 그것들은 직업 선택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성장하고 자유민주주의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실업률이 증가하고 대학 기부금이 줄어드는 이 새로운 시대에, 복잡하고 기술이 요구되는 세계에서 인문학이 과연 중요한가라는 의문들이 최근 다급하게 제기되었다. 과거의 경기 침체기에는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느슨하게 묶인 분과들 — 일반적으로 언어학, 문학, 예술학, 역사학, 문화 연구, 철학, 종교학을 포함하는 — 의 재학생 수가 줄어들었다. 이 분야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이번 경제 위기에 이 분과들이 가장 모진 타격을 받지 않을까 우려한다.

이미 학자들은 근심스러운 신호들을 지적하고 있다. 고등교육신문(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과 무디스(Moody’s Investors Services)가 2008년 12월에 고등교육기관 200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5%는 고용을 완전히 동결했고 43%는 일부 동결했다.

[Wikihost.org]의 채용 공고에 따르면, 지난 세 달 동안 적어도 24개 대학들이 종교와 철학 분과의 교수 구인을 취소하거나 늦추었다. 현대언어협회(Modern Language Association)의 연말 직업 목록을 보면 2008-09년에 영어, 문학, 외국어는 그 전 해와 비교해 21% 떨어졌는데, 이는 지난 34년 동안 가장 큰 하락이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미합중국 연구 책임자 앤드루 델반코(Andrew Delbanco)는 “인문학에 속한 사람들은 늘 인문학의 형편을 한탄해왔지만 자신들의 분야가 점차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전면적 추가 감축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연방정부가 교육에 경기부양 자금 수백만 달러를 쏟는다 할지라도, 인문학은 행정관, 정책 입안자, 학생과 부모에게 인문학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느끼고 있다. 기술 행정관들, 연구자들, 그리고 기업 지도자들은 훈련받은 엔지니어와 과학자를 충분히 배출하는 것이 미합중국의 경제적 활력과 국가 방어, 그리고 건강 관리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충실한 인문학 옹호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인문학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주장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이번 신용 위기는 오랫동안 인문학의 중심적이고 신성한 사명으로 간주되어왔던 것 —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 — 을 재평가하도록 부추겼다.

매사추세츠의 고등교육위원 리처드 프리랜드(Richard M. Freeland)는 20세기에 인문학 연구가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지적 발달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들이 세상에서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교양교육과 과학, 그리고 우리의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분리해왔던 것이다.”

프리랜드는 그가 “고등교육에서 교양교육과 과학 및 직업 프로그램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한 혁명적 움직임이라 부르는 것에 참여하고 있다. 전미대학연합(Association of American Colleges and Universities)이 최근에 발행한 보고서는 인문학이 “교양교육에 대한 구식 상아탑 견해”를 포기하고 그 대신 실제적 경제적 가치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달에 프리랜드와 전미대학연합은 매사추세츠의 우스터에 있는 클라크 대학교에서 바로 이 주제에 관한 회의를 주최한다. 국가 지도층은 고등교육에 관심이 많지만 교수들과 학과장들은 그러한 아이디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프리랜드는 말했다.

인문학 분야에 속한 몇몇은 인문학을 부정하게 팔아먹는 행위를 언짢아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고 고등교육에 관한 책을 몇 권 저술한 데릭 복(Derek Bok)은 “인문학은 학생들이 직업생활을 준비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글쓰기와 분석적 기법만이 아니라 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새로운 기술로 인해 제기된 윤리적 쟁점들까지 가리킨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교양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경제를 개량하는 것 말고도 훨씬 더 많다. 나는 이것이 정책 입안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것 말이다.”

예일 대학교의 법학 교수이자 <<교육의 종말: 우리의 대학은 왜 삶의 의미를 포기했는가(Education’s End: Why Our Colleges and Universities Have Given Up on the Meaning of Life)>>의 저자인 앤서니 크론먼(Anthony T. Kronman)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크론먼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탐구가 가져오는 이로움을 고갱이만 추려 요약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재정적 폭락으로 이어진 탐욕, 무책임, 기만에 대한 폭넓은 비난을 지적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나의 오래된 견해의 필요성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재검토할 시기인데, 인문학은 이 문제를 “제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델반코가 보기에 그 이로움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가장 탁월하게 해낸 사람은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포크너, 링컨과 두보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통령에 관해 “그는 학구적 인문주의자들이 근래에 잘하지 못했던 것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공동 기획, 우리 모두에게 속한, 비극과 희화화를 포함하는 역사, 미합중국인으로서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

20세기 후반기에 점점 더 많은 미합중국인들이 대학에 들어갈수록 그 학생들 중 점점 더 적은 비율만이 인문학에 전념했다. 미합중국예술과학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 Sciences )가 최근에 공개한 새로운 데이터베이스인 HIP(Humanities Indicators Prototype)에 따르면, 전체 대학 학위 가운데 인문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1950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의 전성기와 비교해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현재 인문학 학위를 받는 학생들은 약 8%(약 110,000명)인데, 이 수치는 십 년이 넘도록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인문학 학위 수치가 가장 낮았던 시기는 경기 침체가 극심했던 1980년대 초였다.

인문학은 엘리트 교양교육 학교들에서는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립 학교들과 다른 학교들 사이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president emeritus이자 윌리엄즈 대학의 관념사 교수인 프랜시스 오클리(Francis C. Oakley)는 몇몇 대규모 주립대학교들이 관례적으로 인문학 과정에 등록하려는 학생들을 물리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돈이 궁해질수록 인문학은 전체 인구 중 극소수만이 대학에 다녔던 지난 세기 시작 무렵의 상황으로 점점 더 되돌아갈 것이다. 부자들의 속주로 말이다.

그러한 사태는 불행하지만 피할 수 없다고 크론먼은 말했다. 인문학 교육의 본질 — 위대한 문학과 철학 작품들을 읽고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파악하는 것” — 은 “다수가 감당할 수 없는 값비싼 사치”가 될지도 모른다.

출처: The New York Times, 2009. 2. 25.

번역: 라티오 출판사

[인문학 스터디] 소개글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전혀 신선하지 않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라는 말만 되풀이하다보니 ‘위기를 위한 위기’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이다. 어쨌든 아주 오래 전부터 위기가 진행되어 왔으니 아주 당연하게도 인문학 공부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한국의 대학에는 초보자가 인문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장치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는 학교탓만 할 일도 아니다. 학벌을 중시하는데다 대학을 안정된 고소득 직장을 얻기 위한 준비 기관으로만 간주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결코 인문학 정신이 자리잡고 현실화될 수 없다. 몇몇 사람이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해도 모든 것을 취직과 출세로 환원시켜버리는 무섭고도 거대한 흐름에 저항하기는 더욱 어렵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큰 불만 중의 하나는 마땅한 종합적 안내서가 없다는 것이다. 대학에는 학회나 동아리 등에서 전해지던 이른바 ‘족보’들이 사라진지 오래다.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 사정도 크게 나을 것이 없다. 여기저기서 열리는 아카데미 강좌들도 수강해보고, 인터넷 사이트 검색 등을 통해 도서목록을 구해 책도 들여다보고, 관심사가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스터디도 해보지만, 늘 어딘가 허전하고 미심쩍은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우선은 과연 우리가 제대로 범위를 잡아서 잘 해나가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있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도대체 어떤 수준의 책들을 어느 정도 읽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있는 것이다.

<<인문학 스터디>>는 바로 이러한 의심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본래 미국의 <대학연구소>에서 여러 대학의 강좌들을 조사하고 다양한 전공 분야의 유명한 학자들의 자문을 받은 다음, 8개의 과정으로 핵심을 압축하여 펴낸 것이다. 그래서 원제가 ‘학생들을 위한 핵심 커리큘럼 안내 A Student’s Guide to the Core Curriculum’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미국에서는 타당하다해도 한국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 서구 인문학이 보편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한국에서의 공부는 강조점이 다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편역자들은 원서의 핵심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라는 상황에 걸맞도록 재편집을 시도하였다.

우선 원서와 달리 문학.예술학/ 철학.정치학/ 역사학/ 기독교의 최상위 범주를 설정하였다. 한국에서는 인문학을 ‘문사철文史哲’의 통합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고 편역자들도 그런 견해에 동의하였으므로 이러한 항목이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원서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거나 상대적으로 아주 간략하게 언급되었던 부분들을 새로 써넣거나 보완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철학 입문, 미국 헌법해석, 경제사상사, 고대 로마사, 과학의 역사 등의 세부 항목이 그런 부분에 해당한다. 이 책을 가지고 공부의 안내를 삼으려는 이들은 이 범주들 중에서 자신이 관심가는 부분부터 참조하면 될 것이다. 먼저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 그 영역이 왜 중요한지, 그 영역에서 제기되는 주요한 논제들은 무엇이 있는지 등을 파악하여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세부적인 영역을 정하면 되리라 본다.

편역자들이 만들어넣은 또다른 영역은 ‘읽어야 할 도서목록’이다. 원서에도 각 항목 마지막에 원저자의 추천 도서목록이 붙어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어로 된 것이어서 구하기도 읽기도 수월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편역자들은 해당 영역에서 읽어야 할 책들을 골라서 각 장 말미에 덧붙였다. 이 목록은 크게 ‘원전’과 ‘참고도서’로 나뉜다. ‘원전’은 국내에 번역된 주요 저자의 핵심 저서를 시대순으로 소개하였다. ‘참고도서’는 해당 영역 전체를 개괄하는 입문서, 해당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역사책, 세부적인 주제에 관한 입문서와 연구서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사람은 원전 목록에서 해당 고전들을 확인하여 곧바로 도전하면 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될 수 있으면 참고도서 목록의 순서, 즉 전체에 대한 개괄, 시대를 읽는 역사책, 세부 주제로 공부 해나가면 적절할 것이다.

이 책은 작은 판형의 150쪽 남짓한 얇은 책이다. 그런데 편역에 참여한 이가 여럿이다. 그것은 인문학의 특성상 어느 한 사람이 책 내용 전체를 검토하고 번역하며 수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편역자들은 각자가 담당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면서도 서로의 초고를 함께 검토했으며 도서목록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힘을 합하였다. 이처럼 다학제적인 협동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 책의 또다른 장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 스터디] 출간

종이책 절판, e북 출간 예정

원제: A Student’s Guide to the Core Curriculum

지은이: 마크 C. 헨리
편역자: 강유원 외
판형: 188*128mm (B6); 160페이지(8,000원)
발간일: 2009년 1월 15일
ISBN: 9788996056133

<<인문학 스터디>> 마크 C. 헨리, 강유원 외, 라티오 (#ISBN9788996056133)

도서안내
미국의 권위있는 대학연구소 ISI에서 미국 명문대학 교양교육 과정을 종합하고, 각 분야 한국 소장 학자들이 한국 인문학 공부의 현실을 반영하여 만든 교양공부 핵심안내서이다. 한국 인문학 교육의 제도적 한계를 느끼는 사람, 보편성을 매개하는 순수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 미국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사람, 어떤 이유에서든 교양공부를 해야하는데 그 시작이 막연한 사람 등이 각자의 수준과 목적에 따라서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흔히 한국에서도 인문학은 여러 학문의 기본이요, 그에 따라 각 학문 분과에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는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막상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인문학에 해당하는 학문분과는 어떻게 나뉘며, 각 학문 분과의 핵심지식과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할 만한 방법적 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에 비교적 고등교육 커리큘럼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오고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는 미국대학들을 본보기로 삼아, 한국 소장학자들이 한국의 현실과 입장을 반영하여 체계적인 인문학 공부 안내서를 만들었다. 이 안내서에 나오는 핵심 교양교육 과정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미국 대학에서 개설된 교과목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과목들을 종합 정리한 것이며, 여기에 한국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다. 이러한 커리큘럼은 좀더 전문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포괄적인 공부 체계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교양공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도록 기본체계도 제공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학생들을 위한 핵심 커리큘럼 안내'(A Student’s Guide to the Core Curriculum)이다. 저자는 미국의 일반대학에서도 고전과 서구문명을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직시하고 학생들이 교과과정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려고 이 책을 썼다. 이를 위해 ‘대학연구소'(Intercollegiate Studies Institute)는 미국의 모든 공사립 대학의 강좌들을 조사하고 다양한 전공분야에서 유명한 학자들의 자문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저자는 미국의 대학들에 개설되어 있는 8개의 과정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을 살펴보고 한국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의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않음을 발견하였다. 그에 따라 원서의 내용과 순서를 지금의 목차에서처럼 재배열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내용 또한 다시 편집하였으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실정에만 해당하는 내용을 정리하고 한국의 상황에 걸맞도록 수정 보완하였다. 또한 원저자가 추천하는 각 과정별 도서목록들이 영어원서로만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본문에 그대로 두되, 한국어로 된 고전 번역본과 참고도서들을 따로 정리해서 독자들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게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는 제도적인 도움을 받는 일이 어렵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가장 주요한 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기본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가, 즉 그 범위에 해당하는 어려움이다. 이 책은 우선 그 점을 고려하여 문학.예술학/ 철학.정치학/ 역사학/ 기독교 사상의 큰 범주들을 두었다. 이 책을 가지고 공부의 안내를 삼으려는 이들은 이 범주들 중에서 자신이 관심가는 부분부터 참조하면 될 것이다. 먼저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 그 영역이 왜 중요한지, 그 영역에서 제기되는 주요한 논제들은 무엇이 있는지 등을 파악하여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세부적인 영역을 정하면 되리라 본다. 그런 다음 그에 해당하는 고전들은 무엇인지를 ‘원전 번역서’ 목록에서 확인하여 곧바로 고전읽기에 도전하거나 ‘참고도서’ 읽기에 착수하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참고도서는 개괄이 잘된 입문서에서 세부적인 주제를 다루는 책 순서로 나열되어 있으므로, 초심자라면 위쪽에 거론된 책들을, 어느 정도 기본지식과 소양이 갖추어진 이라면 아래쪽에 들어있는 책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차례
I 문학ᆞ예술
1. 고전문학 혹은 고전학
2. 근대 문학
3. 예술학
읽어야 할 도서 목록

II 철학ᆞ정치
1. 고대 철학 입문
2. 근대 철학
3. 법과 경제
읽어야 할 도서 목록

III 역사학
1. 고대 로마사
2. 1865년 이전의 미국 역사
3. 19세기 유럽 지성사
4. 과학의 역사
읽어야 할 도서 목록

IV 기독교 사상
1. 성서
2. 1500년 이전의 기독교 사상
읽어야 할 도서 목록

저자 소개
마크 C. 헨리(Mark C. Henrie)는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과 하버드 대학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현재 Modern Age: A Quarterly Review 수석 편집자이며 ISI(Intercollegiate Studies Institute) 연구소의 부소장이다.

편역자 소개
강유원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헤겔의 사회역사철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전 독해와 사상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

서민우는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18세기 영국 과학기술사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다.

손세정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지적 재산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적 현실과 법적 제도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양유성은 대학에서 응용화학을 공부하고 고분자 물리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관련 분야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명훈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 고전들의 현대적 재해석이 관심사이다.

지주형은 한국과 영국에서 영문학, 사회학,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사상과 경제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외국 도서 소개] Cloud Nine

단테, <<천국>>편의 새로운 번역
 
Joan Acocella

<<천국>>은 우리의 생각을 구원으로 향하게 할 단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였으며, 그는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였다.

<<신곡>>을 아직까지 읽지 않았다면 — 자신을 잘 알 것이다 — 지금이야말로 읽을 때인데, 로버트 홀랜더(Robert Hollander)와 진 홀랜더(Jean Hollander)가 지금 막 이 경탄스러운 14세기의 시의 번역을 훌륭하게 끝마쳤기 때문이다. 홀랜더 부부의 <<지옥>>은 2000년에, <<연옥>>은 2003년에 출판되었고, 그들의 <<천국>> (Doubleday, $40)이 막 출간되었다. 이 번역판은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떤 영어판보다 관용어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동시에 평이하기 때문에 이 번역판은 더욱 고상하다. 시인인 진 홀랜더가 운문작업을 맡았고, 그의 남편인 로버트 홀랜더가 내용이 정확한지를 감수하였다. 42년 간 <<신곡>>을 가르친 프린스턴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단테 학자인 그가 주해를 달았다.
 
단테 시의 근사하며 영예로운 각운구성은 3운 구법terza rima — aba, bcb, cdc —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를 운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잔인할 정도로 어렵다. <<신곡>>을 영어로 된 3운 구법으로 다시 만들기 위해 계산을 해보면, 세 음절을 포함하는 각운이 대략 4천 5백 개 필요하다. 거의 모든 단어가 모음으로 끝나는 이탈리아어로는 이 정도의 음절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이것은 영어로는 거의 불가능하며, 3운 구법으로 번역하면 터무니 없이 억지로 만든 각운이 잦다고 생각 될 것이다. 일부 번역자들은 aba, cdc로 — 달리 말해서, 3개가 아닌 2개의 각운으로 — 절충하는데, 단테의 텍스트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진 홀랜더는 더 큰 타협을 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운이 없는 시 — 각운이 없는 약강 5보격의 시 — 를 선택한 것이다. 운을 맞추어야 하는 수고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는 오히려 단테의 표현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번역은 시이고, 시처럼 들린다. 로버트 홀랜더는 이 번역이 싱클레어(John D. Sinclair)의 1936-46년 산문 번역본(이 번역본이 내가 학생시절에 선택한 자습서이다)에 크게 빚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겸손해 하고 있다. <<천국>>의 도입부에 대한 싱클레어의 번역을 보자.
 
만물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영광이 우주에 스며들어서, 어떤 곳에서는 많이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는 적게 비춘다. 나는 그분의 빛을 가장 많이 받는 하늘에 있었고 그리고 그 위에서 내려오는 이라도 다시 말할 지식이나 능력이 없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지성은, 원하는 것에 가까이 갈수록, 너무 깊이 빠져 기억이 그것을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진 홀랜더의 번역이다.

만물을 움직이는 그분의 영광이
우주에 스며 들어가 비춘다
어느 부분에서는 많이, 또 다른 부분에서는 적게.
 
나는 그의 빛을 더 많이 받는 하늘에 있었으며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온 이는
그가 본 것을 알 수도 말 할 수도 없었으니,
 
이는 원하는 것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지성이 너무 깊게 빠져들어
기억이 그것을 좇아갈 수 없어서이다.
 
그가 선택한 단어들 대부분이 싱클레어의 단어를 되풀이하고 있지만 그의 영어가 더 읽기 쉽고 (그가 “나는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온 이를 보았다I saw things which he that descends”를 어떻게 풀어서 표현했는지 보면) 더 예술적이다. 그는 노래하고 있지만 싱클레어는 그렇지 않다.
 
<<천국>>편에서 이런 아첨이 기꺼이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신곡>>의 세 편 혹은 송가 중에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신곡>> 전편은 우화(allegory)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스콜라 철학자들이 중세 말에 성서와 초대 교회의 교부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뽑아내어 고도로 체계화한 신학의 상징적 재현이다. 그러나 <<천국>>편에서는 이러한 우화가 <<지옥>>편이나 <<연옥>>편보다 더 적나라하다. 단테의 시대에 그리고 그 후 수세기 동안 시를 읽는 독자들(학식 있는 자들로 대부분 성직자들)은 우화에 익숙하였고, 우화가 독자들을 생각하게끔 만들기 때문에 유익한 교육수단이라 생각했다. 보카치오가 그의 <<단테의 생애>>(1374)에서 “수고하여 얻은 것이 더 달콤하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18세기 초 이래 — 즉, 유럽인들이 단테의 주제였던 믿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이래 — <<신곡>>을 우화와 “시”의 “이중적”인 측면에서 논의하는 전통이 있었다. 여기에서 제안하는 것은 우화는 반(反)시적이며 수고로 얻은 것은 수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으로 가장 잘 알려진 현대의 글은 철학자 크로체(Benedetto Croce)가 1921년 쓴  <<단테의 시>>이다. 크로체는 상당한 정도로 <<신곡>>의 일부인 우화가 “시가 아니라”(non-poesia)고 단언했고, 이를 조롱하였다. 실제로 그는 신성시되는 <<지옥>>의 도입 행을 비웃었다. 그는 “우리는 숲이 아닌 숲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태양이 아닌 태양을 바라보며, 야생동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야생동물 세 마리를 만나며, 그 중 가장 사나운 것은 먹어 치우려는 탐욕으로 비쩍 말랐으며, 우리는 어떻게 하여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크로체가 간파했듯이 이는 우화이다: 상상이라는 용광로를 거치지 않은, 힘에 넘치는 형상이나 감성적 진실로 — 즉 시로 — 전환되지 못한 것이다. 시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지만, 우화는 주해를 보기 위해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런데 독자들, 특히 처음 읽는 독자들은 주해를 들춰 보지 말아야 한다. 크로체는 독자들은 우화를 그냥 무시하고,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 종교적 상징주의가 아닌 단테의 진정한 시적 재능인 힘참과 감정을 드러내는 “서정시들”의 모음으로 <<신곡>>을 즐겨야만 한다고 말했다.
 
크로체의 저서는 이탈리아 문학계에 떨어진 폭탄처럼 여겨졌고 — 피란델로(Luigi Pirandello)는 이 책에 대해 분노에 찬 서평을 썼다 — 몇몇 사람들에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책임한 글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20세기 초의 시론에 대한 어느 정도로 정확한 반영이다. (수사학이 이미지로 — “말하는 것”이 “보여주는 것”으로 — 대치된 것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엘리어트(T.S. Eliot)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주장한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신곡>>에 대한 후기 저술의 배후에서 팔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단테 비평가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는 1946년 그의 책 <<미메시스>>에서 <<지옥>>편의 피렌체 귀족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에 대한 묘사가 심리적으로 매우 강력하여 <<신곡>>의 신학 체계 내 (이교도의 실례로서) 파리나타의 위치가 별로 중요치 않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형상이 신의 형상을 무색하게 하였다.” 여기에 다시 또 이중성이 있게 되는데, 이는 우리는 아무런 신비감도 없이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우어바흐는 계속해서 <<신곡>>의 파리나타와 다른 위대한 이야기꾼들에게 “생의 충만함이 너무 풍부하고 강력하여 이의 표현이 독자들의 영혼이 어떤 해석에도 의지하지 않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1929년 단테에 관한 책 (뉴욕 서평New York Review Books에서 최근 재출간하였다)에서 유사한 지적을 하고 있다. ‘단테, 세속적 세계의 시인Dante, Poet of the Secular World‘이란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구체적인 것에 대한 동일한 선호도를 물려받은 현대의 독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송가인 이 <<지옥편을 좋아할 것이다. 또한 <<연옥>>편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연옥에서 순례자는 지옥에서만큼 감정을 자극하는 만남을 갖지 못하지만 몇몇 만남을 갖는다. (<<신곡>>의 주인공 — 지옥에서 천국으로 여행을 하고 이 여정을 이야기하는 사람 — 은 분명히 자서전적이지만 그가 시인과 동일한 사람은 아니다. 때때로 그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통상적으로 “단테”라기보다 “순례자”로 불린다.) 게다가 <<연옥>>편의 감정적인 세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자신들의 죄를 유감스러워하며 고통에 처해 있지만 — 그들은 화염 속이나 이와 유사한 곳을 걸어야만 한다 — 천국으로 가는 도정에 있으며 그들의 동료들도 그들과 같이 가고 있으므로 행복하다. 감정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우애 또는 세속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사랑과 지혜의 혼합이다. 이러한 부드러운 감정의 영역이 단테의 본령은 아니나 — 그는 고통과 환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 그러한 감정들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고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천국>>의 감정들은 이렇지 않다. 단테는 천국이 어떤지 몰랐으나 바로 그 정의에 의해 갈망이나 고통이 없을 것임을 알았다. <<지옥>>편을 읽노라면, 순례자가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데, 이는 바위의 경사와 틈새, 피바다, 빙산, 뜨거운 모래 위를 건너야 하는 너무나 어려운 여정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빛의 단계들을 통과하는 것이 그가 가는 여정의 전부이고 그는 이를 쉽게 건넌다. 지옥에서는 저주받은 이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한다. 한 영혼은 그에게 “나의 아들이 아직 살아있는가”를 묻는다. 다른 영혼은 “내게 로마냐가 전쟁 중에 있는지 평화로운지 말해주시오”라고 말한다. 그들이 새 소식을 원치 않는다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한다. 파리나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오디세우스, 우골리노 백작 그리고 다른 이들이 들려주는 매혹적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홀랜더의 표현처럼 <<신곡>>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겠지만 <<천국>>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 열한 사람이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며 이것 또한 짧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평균 열 네 줄이다. 지옥에서는 우골리노 혼자 일흔 두 줄에 걸쳐 이야기를 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들의 이야기가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 것인데, 이들은 아무런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서 영혼들은 울부짖으며 소리치고 신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다. 천국의 영혼들은 평온하다. 그들 중 한 명인 피카르다가 순례자에게 말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진 것 이외의 어느 것도 원치 않는다.
 
세상의 사악함에 대한 비난 외에 이 영혼들은 천국 밖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별 감흥이 없다. 우리는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게된다. <<지옥>>편의 앞 부분에서 순례자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이 어떻게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말해준다. 단테가 청년시절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 — 그가 학자들이 실존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라면 단테와 동갑이었던 그는 스물 다섯 살에 죽었다 — 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내려와서 (이교도였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단테를 자신에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였고, 베르길리우스는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베아트리체에게 천국의 평화에 익숙한 그가 지옥에 내려온 것이 두렵지 않았는지 물어본다. 그는 활기차게 “전혀”라 대답한다. 그가 천국에 갔기 때문에, 신은 그의 자비로움으로 저주받은 이들의 고통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그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순례자와 재회한 이후로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그의 관계 역시 대체로 (홀란드의 단어로) ‘개인을 넘어선 것'(post-personal)이다. 순례자를 천국과 연옥에 데리고 다닌 후 베르길리우스가 그를 베아트리체에게 넘겨 주고 다시 그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의 에피소드는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서글퍼한다. 그러나 베아트리체가 순례자를 천국의 정상에 데려간 후 그를 떠나는 시점의 장면은 그것의 삼분의 일 분량이고 이별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냉담해 보인다. 방금 전에 베아트리체는 순례자 옆에 있었는데 그는 이제 가 버린 것이다. 그가 위를 보니 축복받은 이들 중에 신을 우러러 보며 앉아 있는 그녀가 있는 것이다. 그는 베아트리체가 되돌아오길 원하여 그의 행복을 시기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다 괜찮다.
 
그러나 우리는 괜찮지 않다. 우리에게는 크로체가 쓴 것처럼, “슬픔에서 태어나 슬픔으로 되 돌아갈 운명인 실제의 기쁨 또는 일부는 어두움으로 어두움과 싸워야 하는, 그것을 정복하고 부분적으로 그것에 의해 정복되는 빛을 상상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즉 우리는 중간의 비극적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천국>>편 역시 그렇지 않다.
 
이 어두움의 결핍이 시적으로는 천국의 감정적 삶에서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곳의 영혼들은 모두 다 자비롭다. 순례자가 화성천에 도착할 때 영혼들은 “아, 여기에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킬 자가 있다!”고 외친다. 금성, 화성, 그리고 목성천의 영혼들이 그를 보며 기뻐할수록 그리고 그들의 인사말들이 쌓일수록 우리는 지옥에서의 절규와 방귀가 조금 그리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순례자의 베아트리체와의 사제관계 역시 우리를 지치게 한다. 베아트리체는 “나의 오류가 없는 의견으로는” 이라고 말을 시작한다. 그는 “자… 되돌아가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겠는데” 라고 말을 잇는다. 순례자는 그의 오류가 없는 의견을 결코 의심치 않으며 단지 점점 더 커지는 존경심으로 그의 의견을 구할 뿐이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베아트리체는 스콜라 신학의 전 과정을 순례자에게, 그에따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천국>>편은 우리의 생각을 구원으로 향하게 할 단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였으며, 그는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였다. <<지옥>>편과 <<연옥>>편에서 그는 대부분 사례를 들어 우리를 가르쳤고 이 사례들은 천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죄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 그는 더 이상 우리를 아처럼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보조자들은 신학을 단도직입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미리 예정되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예수의 십자가 매달림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신의 손으로 창조된 것들이 그의 피조물들이 만들어 낸 것과 어떻게 다를까? 왜, 언제, 어떻게 신은 천사들을 만들었을까? 당신이 신에게 어떤 것을 바치기로 맹세했을 때,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있을까? 최후의 심판에서 천국의 영혼들은 자신들의 육신을 돌려 받을까? 설명이 때때로 은유로서 감화를 주나, 대부분의 설명들은 관념적이다. 교훈은 길게 느껴진다. 단테는 우리가 이를 어렵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아트리체가 이를 “먹기 어려운 음식”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확신을 가진 중세 기독교 신자였으며 위험에 처한 것은 우리의 불멸할 영혼들 — 우리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을 수도 천국에 있는 성자들과 합류할 수도 있다 — 이라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정보들을 열망할 것을 바랐다. 어느 시점에서 단테는 그가 지금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열망”의 상태로 내 팽개쳐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오늘 그 점에 대해 의사표시를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우리는 <<천국>>편을 읽어야만 한다. 이야기의 처음 삼분의 이를 읽고 어떻게 끝까지 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우리의 종교적 성향이 어떠하든 간에 가장 체계화 된 형태의 기독교에 대해 배우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니다.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는 스콜라철학적인 종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를 알지 못하고 유럽의 과거를 이해할 수는 없다.
 
<<천국>>편을 읽는 문학적 이유도 있다. 더 없는 기쁨은 천국이다. 단테는 불꽃과 장미, 강과 무지개 등 장엄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천국의 빛은 “모든 곳에 반짝이며, /화염에서 흘러 나오는 쇳물처럼” 보인다. 피조물은 “다른 항구들을 향해/대양의 광대함 위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의 독자들은 단테를 이러한 장엄함이 아니라 그 반대, 즉 간결함, 속악함, 활력과 같은 크로체가 칭송하고 있는 성향들 때문에 사랑하며, 우리는 <<천국>>에서도 여전히 그의 이러한 면을 본다. 단테는 어느 지점에서 인간이 화염 속에 있을지라도 베아트리체의 미소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경우에 영혼은 순례자에게 항상 진실을 말할 것을 조언하나, 사람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가려운 자가 긁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성의 주요한 원천은 은유이며 가장 훌륭한 예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신곡>>을 저술할 때 단테가 속한 당파가 패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고향인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때로는 베로나에서, 때로는 로마냐 혹은 라벤나에서 친구들과 지내야 했다. <<신곡>>은 그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기 2년 전인 1300년에 일어나는 이야기며, 천국에서 그의 고조부 카차구이다는 그의 추방을 예언한다. 카차구이다는 그가 다른 사람의 빵이 얼마나 짠지, 그리고 남의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길게만 여겨지는 계단, 이상한 맛의 빵보다 더 단순하며 구체적일 수 있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홀랜더는 오늘날까지도 피렌체의 제빵업자들이 빵을 구울 때 소금을 넣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비평가들은 얼마나 많은 세상사가 상상의 내세인 [[신곡]]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감탄한다. 천국에서 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눈이 내리고 태양이 새벽안개를 증발시켜 없애버린다. 시계가 종을 울려 시간을 알린다 (유럽문헌 중에 처음으로 기계장치로 된 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젖먹이가 젖을 먹고 돼지들과 개들은 본연의 일을 한다. 순례자는 사원 — 그가 여행하기로 서약한 장소 — 에 도착하여 그가 귀향한 순간 이웃들이 모든 것을 알고자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 안의 여기저기를 탐욕스럽게 쳐다본다. 이 결말은 이미지 이상이다. 그것은 작은 이야기이다.   
 
삶의 이러한 단편적 묘사들 중 일부는 태양이 안개 속에서 타오르는 것만큼 단순하거나 서정적이지는 않다. 그 대신 복잡한 정신적 과정과 연루되는데, 이는 단테가 우리를 데리고 통과해야만 하는 것으로 목소리를 낮추어야 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연옥>>편에 경탄할 만한 예가 있다. 연옥으로 가는 문에서 천사는 순례자의 이마에 일곱 개의 “P”자(일곱 개의 큰 죄를 가리키는 peccati)를 새긴다. 각 산의 선반에서 그는 죄를 하나씩 대리로서 속죄할 것이고 그러면 ‘P’자가 한 개씩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맨 처음 P자가 없어졌을 때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머리 위에 이고 가다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손을 올려 왜 그런지
찾아보고 알아냄으로써
눈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했다.
 
이빨에 시금치가 끼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단테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경험을 알아챌 것이지만, 나는 이런 방식이 이전의 유럽 시에서 사용되었던 적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며 읽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천국>>편에서 단테는 태양천의 영혼들이 어떻게 그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었는지 들려주며, 우리에게 여인들을 생각하라고 청한다: “여인들이 춤을 출 자세를 갖춘 채, /말없이, 멈추어 서서, 새로운 음악이/ 들릴 때까지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얼마나 어여쁜 광경인가: 파티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무도회장에서 다 함께 멈추어서 새로운 음악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 우리는 머리를 위로 쳐들고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것이다. 이들은 태양천의 영혼들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예는 단테가 어떤 진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준비하는 베아트리체를, 그녀의 어린 것들을 위해 나가서 음식을 구할 수 있게 태양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는 밤의 끝자락의 새에 비유한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밤이 새도록
그녀의 귀여운 새끼들의 보금자리에
앉아 있는 새처럼,
 
새끼들의 눈과 부리를 바라보기 위해
그들에게 먹일 먹이를 찾기 위해
힘겨우나 그녀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달가워
 
때 이르게 탁 트인 가지 위에서
열렬한 애정으로 태양을 기다리며,
새벽이 밝아 오기를 여념 없이 바라보는…
 
나는 위의 도입구절에 이어 베아트리체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잊어버렸으나, 태양을 가리는 잎사귀들을 피해 (이는 아주 중요한 세부묘사이다) 가지 밖으로 움직이는 어미 새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천국>>편에서는, 이런 탐색하는 은유들이 증가하는 것 같은데, 이는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단테의 불안 때문이다. 이미 서두의 구절에서 그는 자신이 천국에서 본 것은 표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 점을 거듭 지적한다. 그는 단테 학자들이 “화해하는 은유accommodative metaphors”라 부르는 것을 고안함으로써 이 문제를 그가 할 수 있는 한 해결하였는데, 이 은유는 그가 의도하는 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하면서 어떤 종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 의도에 적응하게 한다. 이런 예들은 세 번째 송가 전편에서 정신적 과정을 거치는 은유들과 중첩되면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사례들에는 <<천국>>편의 비애감이 놓여있다. 천국의 영혼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지 않으나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단테이다.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이 창작해내고 있는 것은 단지, 노련한 단테 학자인 프레체로(John Freccero)의 표현에 따르자면, “침묵을 결여한 타협”이라는 점을 매 순간 인식하고 있었다. 순례자가 엠피레오에 도착한 마지막 곡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나사가 꽉 죄어졌다. 천국의 더 낮은 곳을 묘사하기 어려웠다면 어떻게 그는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는 광경이 너무 눈이 부셔 기억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즉시 화해하는 은유를 시작한다: “꿈꾸는 사람들처럼, 그가 깨어 난 뒤에, /아직 꿈으로 인해 일어난 감정에 취하여/ 꿈의 나머지를 마음에 불러 올 수 없었다.” 그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여 태양처럼 매우 밝게 빛나는, 그러나 태양은 아니어서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되는 환영을 기억해 낸다. 사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이는 그에게 매우 큰 행복을 주었다. 그것은 우주의 뜻을 이해한 것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은유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사적인 것으로 그가 라벤나의 책상에서 막 끝낸 바로 그 책에 관한 것이었다. 빛의 심연에서 그는 “우주에 흩어져 있는 페이지들”이 사랑에 의해 한 권으로 묶이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이전에 느끼지 못했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시인이다. 그는 짧은 그리고 아마도 가장 근사한 또 다른 은유를 사용한다.
 
그 순간의 나의 기억은
아르고의 그림자를 포세이돈이 깜짝 놀라
바라본 위업 이후
25세기가 흐른 것보다 더 잊혀져 갔다.
 
그렇게 나의 온 마음을 빼앗긴 채,
응시하였다…
 
어떤 이미지를 서술하려고 했는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학자들은 여전히 이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이미지에만 주목하라.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용사들은 건조한 최초의 배를 타고 황금 양털을 가져와야 하는 위험한 임무를 띠고 대양을 항해하는 중이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해저에서 올려다 보았다. 측정할 수 없는 깊이를 뚫고 그는 그림자 — 배 — 를 보았고 그것에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는 신이었지만 이와 같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인해 우리는 단테가 자신이 하느님에게 다가갔을 때의 느꼈을 놀라움을 우리에게 알아달라고 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에 다른 어떤 것이 있는데, 단테는 그 자신이 놀라움에 대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점이다. 아르고처럼 순례자는 다른 어떤 이도 맡지 못했던 임무를 가지고 광대한 푸른 심원 (천국)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시인도 <<신곡>>이 재현하는 상상의 여행을 할 만큼 그리 야심적이지 못했다. 단테는 작은 배를 본 고대의 신처럼 기독교의 신이 시인의 항해를 보고 놀랐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신성모독 — 신은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으며, 모든 것의 운명을 정한다 — 이겠으나, 단테는 매우 자신만만한 예술가였다. 어쨌든 이것은 서양 시에서 경이로운 것에 대한 가장 놀라운 행위일 것이다.
 
시인은 이제 그가 신에 대한 기억으로 되돌아 간다. 그는 고귀한 빛 안에서 다른 색깔의 그러나 같은 크기의 세 개의 원을 본다. 현실적으로는 원이 같은 크기라면 가장 위에 있는 원의 색상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있지 않으며, 삼위일체 중 어떤 하나가 최고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또한 실망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원이 세 개란 말인가? 그렇게 쌓아 올린 후에? 단테는 그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오 말이란 얼마나 빈약한가”라며 호소한다. 그리고 나서 그의 빈약한 말로 더 높게 뛰어 올라 황홀경에 취한 세 구절에서 원들에 대한 환영보다 더욱 강력하게 자신을 감싸는 기적을 짜 맞춘다:
 
오, 영원한 빛이여, 홀로 당신 안에 있고,
홀로 깨달으며, 그리고, 스스로 이해되고
또한 스스로 이해하면서, 사랑하고 미소 짓는구나!
 
갑자기 그는 원안에서 어떤 것을 본다: “la nostra effige”, 우리의 모습 즉 인간의 얼굴이다. 이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한 예수이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얼굴이 원에 어울릴 수 있을까? 그는 이를 알아낼 수 없었으며, 그의 마지막 은유로서 우리의 주의를 기하학의 그 유명한 풀리지 않는 문제 — 원의 면적 구하기 — 로 돌리게 한다. 당신은 원을 측정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며, 인간의 모습을 신과 관련지어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 이 시에서 순례자가 신을 대면하면서 일어나는 바로 그 행위 —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인데, 그가 자신에게 해답을 주는 벼락을 갑작스레 맞지 않았었다면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은유를 들 수 없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그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의지와 욕망은,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다른 모든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지옥>>편과 <<연옥>>편에서처럼, <<천국>>편도 “별”이라는 단어로 끝난다. 순례자는 천체를 여행하면서 아직도 천국에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지구로 돌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세 구절은 음률과 표현이 부드럽다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 그가 잠이 들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시 엄청난 체험 후에 잠자리에 들 것 같은 기분이다.
 
<<천국>>편이 다 이렇지는 않지만 —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 — 일부는 이렇고, 여러분들은 결말을 보기 위해 나머지도 읽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로버트 홀랜더는 텍스트에 비해 거의 30배가 넘는 길이의 주해를 달아 놓았다. 이제 이 시를 읽기 위해 주해가 필요할 것이다. 단테는 성서와 라틴어로 된 문헌을 완벽하게 알았고 우리 역시 이 저서들을 잘 알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논리적 관련 없이 이 저서들을 인용하고 있다. 대부분 우리는 이 저서들을 잘 모르고, 따라서 베아트리체가 경솔한 서약 — “그가 처음 본 것을 바치겠다고 한 입다(Jephthah)”처럼 — 은 하지 말아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판관기] 11장에서 암몬인들을 쳐서 이길 수 있다면 그의 대문에서 나온 그가 처음 본 것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한 히브리 용사 입다에 대해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입다가 승리를 거둔 후 그의 집에서 처음으로 나온 것은 그의 외동딸이었으며 그는 신앙심 깊게 그녀를 죽여야만 했다. 이는 끔찍한 이야기이며, 경솔한 서약에 대한 적절한 경고이다. 이런 내용을 아는 것이 우리가 시를 음미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구절에 대한 홀랜더의 주해에서 매우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홀랜더는 단테가 딸을 살해하는 성서의 이야기와 아가멤논이 이피게니아를 희생시키는 고전의 이야기를 혼합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알기 바라며, 그는 시인이 이러한 성서/고전의 쌍을 다른 곳에서도 시도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가 입다의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는 “서약”이라는 단어가 이전의 세 개의 곡에서 몇 번 사용되었는지 (일곱 번이다) 말해주고 있다. 그는 “mancia” 혹은 “제물”이라는 단어가 “심한 공격”이란 뜻도 가지고 있음을 써 두었다. 존경 받을만한 동료로서 그는 가장 먼저 누가 이 단어를 말했는지를 — “보스코/레지오 Bosco/Reggio”(제5곡 66절) — 그리고 그들이 다른 것들도 말했는지, 예를 들어, 아퀴나스 역시 입다를 인용했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피게니아로 말하자면, 홀랜더는 그녀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단테가 입다의 불행한 딸의 이야기와 이피게니아의 이야기를 혼합시켰다는 점을 덧붙였다: “단테는 자신이 처녀로서 죽는 것에 대한 슬픔을 산에 가서 애곡하는 입다의 딸의 눈물을 (판관기 11:37-38) 이피게니아의 볼로 바꾸어 놓았다. Torraca를 보라 (제5곡 70-72절)”. 이러한 주해를 다 읽는 시점이면 우리는 입다의 서약이 무엇이었는지 알고자 했다는 점마저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거의 모든 시 구절이 이렇게 취급되고 있다. 홀랜더의 목적은 우리에게 <<신곡>>의 저술에 기여했을, 단테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무엇보다도 그가 읽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홀랜더는 단테가 선택한 단어에 관심이 있다. 그는 단어가 hapax (이 송가에서 단 한번 사용된) 혹은 3-hapax (<<신곡>>의 송가 한 편에서 한번만 사용된), 혹은 “완전한 hapax” (이탈리아 문헌에서 단 한번 사용된)로 사용되었을 때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단테가 실수를 한 때도 알려주고 있다. (<<천국>>편에서 1072년에 죽은 성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추기경으로 붉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추기경은 13세기가 되어서야 붉은 모자를 썼다.) 그는 시인이 정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나 있음을 환기시켜준다. 베아트리체가 서약을 지키기 위해 대리물을 바칠 수 있다고 했으나 그것은 서약한 제물의 반 정도의 가치를 지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1904년 단테가 가치를 올려놓았다고 지적한 학자를 인용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5분의 일만큼 그 가치가 증가하나, 단테는 이를 2분의 일로 올려놓았다.”
 
단테는 생전에도 유명했으며, <<신곡>>에 대한 주해작업은 그가 1321년 (라벤나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한 후 곧바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700년에 가까운 학문적 업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홀랜더가 중요한 연구자들을 다 인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것 같아 보인다. 이 주해 부분이 재미있어질 것이다. 역사적 시기와 상관없이 학자들 모두가 한 방에 모여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도용하고 있는 훌륭한 스카르타찌니(Scartazzini)가 있다. 저기에 홀랜더가 어려운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불려간 믿음직한 토쩌(Tozer)가 있다. 여기에 단테가 동성애자라고 생각한 최근의 덜링(Durling)이 있다. 저기에 성실한 다니엘로(Daniello)가 — 그는 커다란 종이와 함께 생각이 난다 — 단테의 엠피레오에서 축복받은 영혼들이 앉아 있었던 장미 모양의 공간의 면적을 계산해 내려고 하고 있다. 고상한 체 하는 여성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단테는 어떻게 성 베르나르두스가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 시 그녀의 “자궁”에 대해 말하게 했단 말인가? 그는 더 좋은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단 말인가?) 광신자들도 자신들의 말을 하고 있다. (엠피레오에 기독교도들보다 유대인들이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국가별 팀을 이룬다. 단테 사상에 있어 비정통적인 부분을 미국의 논평자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탈리아 논평자들은 이에 대해 근심한다. 싸움이 시작된다: “가브리엘(10절)이 최초로 누가의 관찰에 대해 다소 의문을 표명하였다. 롬바르디아는 심장에 못을 박았다.” 홀랜더는 때때로 논쟁자들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해석으로 가슴에 못을 박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어떤 학자는 “터무니없는 오독”을 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는 “어리석은 의견”을 내고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비호감인들로 부각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르디(Nardi)는 계속하여 실수를 지적 받는다. 싱글톤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경우에는 세심한 예의를 갖추어 인용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싱글톤(Charles S. Singleton)의 풍부한 주해를 단 <<신곡>> 번역판은 틈새 시장을 — 홀랜더 번역본의 대상인 고급과정에 있는 학생들 — 점령하였다. 홀랜더는 심지어 학생들의 글도 인용하고 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4년 전에 은퇴하였다. 이러한 주해들은 그의 선생으로서의 경력에 대한 집대성이자 고별사로 읽힌다.
 
이와 같은 주해는 그 범위가 너무 광대하여 단테에 대한 통일된 비판적 관점을 내놓을 수 없어 보이는데도, 홀랜더는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단테 비평가가 근본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한다. 한 부류는 낭만주의자들로 우화를 고려하지 않고 <<신곡>>을 자신들의 영감으로 읽을 수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다. 크로체가 가장 중요한 본보기일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에 반대되는 부류는 단테의 세계를 그가 보았듯이 보아야 한다는, 따라서 시를 우화에 일치시켜야 한다는 이들로, 홀랜더가 중요한 전형적 인물일 것이다. 그의 경력은 단테의 우화를 설명하고 방어하는데 바쳐졌다. 신학적 하부구조를 무시하는 이들은 이 시에 대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홀랜더는 크로체가 많은 독자들(나는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처럼 오디세우스를 영웅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크로체와 현대의 다수의 독자들은 요부 프란체스카 다 라미니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다. 홀랜더가 고통에 차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베아트리체보다 프란체스카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홀랜더는 이것은 매우 틀린 것으로 그의 주해에서 단테가 그의 이야기 구조에서 프란체스카와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명확한 죄를 지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사기꾼”이라고 주장한다.
 
우화에 대한 그의 주장은 오디세우스와 프란체스카를 넘어 서고 있다. 이것은 <<신곡>> 전편에 대한 어떤 태도, 즉 숭고한 태도가 된다. 이 시에서는 불안케 하는 그 어떤 것도 없고, 그는 아무 문제도 없고 아무런 긴장도 없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는 <<천국>>편의 많은 부분이 지루하다는 점을 대체로 인정한다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송가를 “시화된 신학”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독자들이 가장 “힘들고 달갑지 않게” 여길 곡이 어떤 곡(제2곡)인지에 대해 농담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그리고 우리가 <<천국>>편에서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들은 다 이유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베아트리체가 “교회학 박사처럼 들린다면” 이는 “바로 단테가 그녀에게 원하던” 바였기 때문이다. “천국에 다양함이 없다면” 이는 “축복받은 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주해를 읽는다면 역시 이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결국에는 홀랜더는 축복받은 이들처럼 말하고 있다. 그는 그가 가진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는다. <<신곡>>을 40여년 동안 가르친 후, 그는 단테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신을 좋아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피조물을 사랑으로 내려보는 신을 생각할 것을 청한다). 사실 그는 때때로 <<신곡>>이 허구의 작업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단테가 엠피레오에 도착했을 때 장미 계단의 착석 방식을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는데 — 히브리 어린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독교 어린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남성과 여성은 나누어서 혹은 같이 있을까? — 그는 거의 3 페이지 분량의 주해를 들어 문제점과 그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을 열거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시처럼 <<신곡>>도 다소 열린 결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편협한 시야는 우화를 옹호하는 입장의 깊은 뿌리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신곡>> 이후 7세기가 지난 우리가 단테의 관점이 어떠하였는지 명확히 말할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역사주의자로 보이나 이는 실상 비역사주의자로 모든 지식의 역사성,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항상 우리의 시대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를 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위하여 단테의 관점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상 우리의 가슴과 마음이 <<신곡>>을 읽기 충분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신곡>>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비평가인 카르네-로스(David Carne-Ross)의 표현에 의하자면, 독자들이 시에 대한 일종의 진지한 체험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이어야만 할 때 이들에게 “중세 기독교인의 화려한 드레스와 예복을 빌려 입고” 시를 읽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홀랜더의 주해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사실들보다 비전(秘傳)을 더 좋아하고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누려 하는 학자들과, 특히 대학원생들을 위한 것이다. 입다의 서약에 대한 그의 풍부한 주해에서 당신이 발견할 수 없는 단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으로, 입다의 서약이 무엇인가 이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보스코/레지오에 사로잡혀 홀랜더는 이를 언급해야 함을 잊어 버렸다. 다른 경우에도 그는 필요한 정보를 주는 것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홀랜더의 번역본은 현재 시중에서 가장 우수한 번역본이다. <<신곡>>을 읽으려 한다면 이 번역본을 사라. 그리고 키아르디(John Ciardi)의 번역본 (Signet에서 나온 페이퍼백) — 좋은 책이기는 하나 홀랜더의 책만큼 훌륭하지 않은 — 을 위해 22달러를 쓴 후 이 책의 훌륭하면서 비상식적이지 않은 주해를 이용하라. 키아르디는 입다의 서약이 무엇이었는지 알려 줄 것이다. 몇 개의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에서 그는 홀랜더의 주해에 동의하지 않는데, 홀랜더가 옳다고 해도, 단테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교황이 보니파티우스 8세였는지(키아르디) 혹은 요한 22세(홀랜더)였는지 신경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모든 구절을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베어울프>>를 제외하면 <<신곡>>은 당신이 언제까지라도 읽을 수 있는 기독교 시대의 가장 오래된 시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까지 쓰여진 시들 중 가장 야심적인 작품일 것이다. 성 바울로는 살아 생전 우리는 희미하게 볼 뿐이며 이후에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단테는 우리에게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려 하고 있다. 때로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출처: The New Yorker, 2007. 9. 3.

번역: 라티오 출판사

[인문학 스터디] 편집 착수

Mark C. Henrie, A Student’s Guide To the Core Curriculum: Core Curriculum Guide, Intercollegiate Studies Institute, 2000.

‘대학연구소'(Intercollegiate Studies Institute)가 미국의 모든 공사립 대학의 강좌들을 조사하고 다양한 전공분야에서 유명한 학자들의 자문을 받은 뒤, 미국의 대학들에 개설되어 있는 8개의 과정을 정리하여 소개한 책을 한국의 사정에 맞추어 편역하였다.

문학/예술, 철학/정치, 역사학, 기독교 사상 등의 영역에서 공부해야 할 핵심 내용을 소개하고 한국어로 번역된 원전과 참고도서 목록을 수록하였다.

강유원 외 편역

2009년 1월 출간 예정

[외국 도서 소개] Leviathan Then And Now

[[리바이어던]] 그때와 지금
Peter Berkowitz
 
현대에 있어서 홉스의 걸작이 갖는 중요성
 
비교적 최근까지 정치와 사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체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영어권의 탁월한 정치철학 저서로 여겼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사이 정치학과 철학과 교수들은 홉스의 이 걸작을 책꽂이 뒤쪽으로 대부분 밀어 넣고 있다. 이들은 기껏해야 [[리바이어던]]을 역사적 산물로 볼 뿐인데, 이는 권리에 근거한 진보적인 복지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칸트 철학에서 영감을 받은 이론들 — 그 전면에는 롤스 추종자와 하버마스 추종자가 있다 — 이 전개되는 과정 초기에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며, 이들이 학계의 교육과 연구를 장악하고 있다.

홉스의 걸작을 이렇게 격하시키는 것은 부당하며 [[리바이어던]]를 이해하는데도 방해가 된다. 이러한 격하는 오늘날의 정치사상 학자들에게는 일반적인 생각, 즉 혼돈과 실수의 천 년을 보낸 후 마침내 그들이 정치에 관한 완결적이며 적절한 — 혹은 곧 완결될 것이며 거의 적절한 — 이론적 연구방법을 만들어 내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또한 그들이 즉각적으로 관심을 갖는 쟁점들은 윤리적이며 정치적 중요성을 갖는 것인 반면 그들 이전의 사상가들을 사로잡았던 쟁점들은 기껏해야 골동품 수집상의 흥미 정도에 그친다는 믿음에 근거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수들이 조금이나마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관심을 갖는다면 — 다른 고전적인 정치철학서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면 물어보는 것처럼 — 그들은 게으르게도 이 저서가 어떻게 당대의 의제를 예측했는지 또는 예측하는데 실패했는지 물으려 한다.

오늘날의 방법론적 학설들과 도덕적 맹목에 의해 희미해진 대안은 [[리바이어던]]을 텍스트 자체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며, 이는 열린 마음으로 그 책의 가정과 논증에 다가가서 홉스의 의제가 마땅히 흥미로울 것이라는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홉스의 의제에 대한 관심이 [[리바이어던]]과 당대의 관련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이다. 홉스를 그의 관점에서 읽는 것은 도덕과 정치에 관한 오늘날의 관점에 선동적으로 대항하는 자, 즉 우리가 갖고 있는 권리의 근거에 대해 널리 공유되고 있던 가정들에 도전하고 피지배자의 동의를 토대로 한 사회의 정치적 권한의 범위에 대한 통상적인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동시에 자유주의적 국가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을 보완하는 입장과 조우하는 것으로, 이는 최상의 삶에 대한 각기 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해하는대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며 이성을 따르는 정치적 질서를 위해 명백하고 강력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상가를 그 자신의 관점에서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는 분명 논쟁의 여지가 있다. 홉스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하고 있는 소수의 학자들 중 대부분은 홉스가 살았던 그리고 저술했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옳은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홉스가 [[리바이어던]] 제1부와 제4부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에, 그리고 제3부에서 진정한 정치적 원리의 기원을 성서에서 이끌어 내고자 기울인 지적 노고에 당황할 수도 있는데, 이는 그가 매우 깊은 청교도적 정치적 문화권 속에 살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홉스가 이 지배적이었던 청교도적 믿음을 혁신적으로 해석하고 이들의 토대를 약화하는 자연세계와 인간본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해도 그는 이 믿음에 대해 복종해야만 했다. 홉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에서 그가 표적으로 삼은 대부분의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에 나오는 학설들이라기 보다 수세기 동안 잉글랜드의 대학에 만연했던 부패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 제46장에서 홉스가 조롱조로 “아리스토텔레스 학Aristotelity”이라 칭한 — 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면 그의 이 비판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영국의 의회파와 왕당파간의 내전 시 그가 왕당파의 옹호자였지만, 의회지상주의뿐만 아니라 신권 군주제도 비판함으로써 양측 모두에게서 반감을 사게 되어 위험에 처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면, 그가 인간본성, 정치 그리고 궁극적인 문제들에 대해 퉁명스러움과 신중함을 적절히 혼합하여 저술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말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에 대해 아는 것 역시 유용할 것이다. 토마스 홉스는 1588년에 태어났고 1679년에 사망했으며, 청년기에 희랍어와 라틴어를 습득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한 아주 가치있는 연구로 간주하여, 1629년 이 책을 최초로 희랍어 원본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다음의 사실들을 아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홉스는 자신이 살았던 시기에 일어난 철학과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근대혁명에 매혹되었고, 베이컨, 갈릴레오, 데카르트와 교제하였다. 근대 철학과 자연과학을 토대로 한 그의 합리주의는 고전적 이성주의 뿐만 아니라 보편적 원리가 인간사를 규율하고 있음을 부인하는 근대의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대안을 새로운 과학에 바탕을 두고 의도하고 있다. 그리고 [[리바이어던]]이 고전적 기여를 한 권리에 관한 용어들은 17세기 잉글랜드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의 사실들을 아는 것 역시 매우 의미 있을 것이다. 홉스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1640년 파리로 도망쳤고 질서가 회복되자 1651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리바이어던]]을 출간했으며 (영어로 재출간 하는 것을 왕이 금지하여 극미하나 뚜렷한 차이가 나는 라틴어 판으로 1688년 출간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그가 인간본성에 대해 지나치게 무자비한 이론을 퍼뜨리고 있으며 무신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래서 교황청은 [[리바이어던]]을 금하였고, 옥스퍼드 대학 역시 이 책을 비난하여 태워버렸다. 잉글랜드 의회는 이 책을 당시에는 감옥에 갇힐 수 있는 신성모독으로 선언하는 결의안을 거의 통과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 — 대부분 지성사와 정치사적 사실들 — 이 홉스의 정치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잘 아는 것과 이러한 맥락에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은 매우 다르다. 홉스가 살았던 시대의 신문, 정치 팜플렛, 강론, 학술적 논문에 대한 주도 면밀한 연구가 [[리바이어던]]의 구석구석에 빛을 비춰주리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곧 [[리바이어던]]의 연구에 손상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니 오히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학자들이 역사적 맥락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삼는 경향을 드러내면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복잡한 논증을 이해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17세기의 끝없이 복잡한 정치사와 지성사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른바 맥락주의적 접근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홉스가 저술했던 맥락으로 상황을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홉스는 영국 시민전쟁의 양 진영의 당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평화와 번영을 보증받기 위해 원리들을 명료하게 표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정치적 권한의 근원과 범위에 대한 왕당파와 의회파의 입장을 고찰해 보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그러나 홉스는 양측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러한 원리들이 보편적이어서 모든 지역의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는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매력적임이 밝혀졌다. 홉스는 그의 시대의 생각들을 반영하기 보다는 이에 대한 수정을 제안했다. 또한 그는 당대인들의 편협한 주장과 잉글랜드 내전의 불확실한 양상들에 맞서기보다 자연, 인간본성과 정치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주장들을 [[리바이어던]]의 많은 부분에서 펼쳤는데, 이는 그에게 고전 정치철학과 기독교적인 것을 의미했다. 보편적 원리가 도덕과 정치를 결정한다는 고전 정치철학과 기독교에 동의하면서도 그는 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이 두 선행자들이 결함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잘못된 원리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간단히 말해서 홉스가 잉글랜드의 정치에 대해 당대 사람들과 벌인 다툼은 [[리바이어던]]이 벌인 더 크고 주요한 싸움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었는데, 이 싸움은 한편으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키디데스와 다른 한편으로 성서적 신앙과 벌인 것이었다.  

이러한 예비적인 사항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잉글랜드 역사만이 아니라 고전 정치철학과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도 통달해야 할 것이라는,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이러한 결론은 오해에 불과하다. 실제로 홉스의 사상을 이해하여 상당한 진척을 거두는 데는 역사와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만 있으면 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공부하기 시작 단계에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열쇠는 그의 말을 숙고하여 읽고 그의 논쟁을 끈기 있게 풀어보는 것이다. 

이는 맥락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맥락도 중요하다. 다행히 수세기가 지났는데도 우리의 상황은 홉스 시대의 상황들과 실질적으로 겹치고 있다. 홉스는 분명 민주주의자가 아니고 기껏해야 초창기 자유주의자이겠지만, 모든 인류의 자연적 자유와 평등이 당연시 되는 정치적 사회, 즉 우리가 보기에 당연히 존재하며 우리에게 당연한 혜택을 주고 알아서 자신을 돌보아 유지되는 정치적 사회의 형태에 대한 지적 토대를 쌓는데 기여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의 사상에 즉각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홉스의 가정이나 논쟁들이 친숙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가 서술한 가장 큰 맥락은 인간의 조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광범위한 학적 탐구 없이도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논쟁은 이 조건의 변하지 않는 특징에 관한 것이므로 자연, 신, 선과 악, 정념, 이성, 권력, 권한, 자유, 정의, 법, 덕, 복종 그리고 주권에 대한 홉스의 견해들은 정치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이 주의 깊게 읽고 자신의 경험이라는 조건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홉스가 영구적인 논쟁에 기여한 점은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그의 논증 전체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전체를 거부하기 매우 어렵다 하더라도 그의 논증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들 중 하나는 홉스의 생각이 당대 사상에 의해 억압되었으나 지속적으로 우리의 세계를 특징짓는 모호함과 긴장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견해들 간의 관계일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서문을 검토해보자. 이 부분에 홉스의 유명한 코먼웰스(commonwealth) 혹은 국가와 인공적 인간에 대한 비교가 나오며, 그는 이 둘의 작동방식을 기계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홉스는 정치에 대한 자신의 추론이 자연과학적인 추정이며 엄격하기 때문에 그의 선행자들을 넘어서고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그는 자연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종류의 전제에서 시작하여 윤리, 정치, 종교에 대한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자신의 추론을 가능한 한 엄격하게 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서문에서 “생명은 사지(四肢)의 운동일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제46장에서는 “우주의 모든 부분은 물체(body)이며 물체가 아닌 것은 우주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유물론때문에 그는 육체가 없는 존재 — 즉 본질, 영혼, 정신 — 에 대한 생각을 무의미한 것으로 거부하였고 신을 육체가 있는 존재로 재해석하였다.
 
따라서 홉스의 기계론과 유물론은 고전 정치철학과 기독교적 신앙과의 뚜렷한 단절을 낳아놓았다. 세상은 운동 이상이라는 생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그리고 성서적 신앙 모두에 핵심적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이 실체가 없는 형태 혹은 구조를 가졌다고 주장했으며, 이 형태 혹은 구조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을 넘어서는 이성이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욕망이 영혼의 구조에 따라서 이성으로부터 명령 받는 위치에 있으며 영혼의 구조 혹은 영원한 형태에 일치하는 삶이 가장 좋은 것이라 말했다. 영혼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한 성서적 신앙 역시 신은 타락한 인간에게 명령하고, 벌을 가하고, 회개를 권하는 역사에서 형체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선행자들과의 이러한 극적 단절은 [[리바이어던]]의 일부 –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나- 일 뿐이다. 그의 기계론과 유물론이 환원적인 함의를 갖고 있기는 하나, 홉스는 서문에서 윤리와 정치를 물리학과 기하학의 관점으로 엄격히 제한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가 오늘날의 정치학자들이 정치를 자연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야망에 도전하고 있으며 홉스와 그의 전근대적 선행자들간에 중요한 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홉스는 서문에서 그의 정치 이론의 자연과학적인 면을 강조하나 인문주의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정치적 지식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아는 능력에 근원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본적으로 소크라테스 철학에 기원을 둔 것이다. 홉스는 정치학 연구자는 인류를 움직이는 보편적 정념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물론 한 문화권 내에서 또는 이 문화를 넘어서 남성과 여성은 욕망하는 대상은 다르다. 이것을 소유하거나 혹은 저 자산의 일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이러한 공적 명예를 원하거나 혹은 저 개인의 사랑을 원하거나, 이러한 것들에 헌신한 삶을 원하거나 혹은 저러한 신념에 헌신한 삶을 원하거나 한다. 그러나 홉스는 인간의 능력 — 지각력, 상상력, 기억력, 이해력, 판단력 — 뿐만 아니라 정념의 형태나 종류 — 공포, 자만, 시기, 분노, 정욕 등과 같은 감정 — 가 보편적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형태의 정치적 사회가 필요하며 적합한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정념과 능력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념과 능력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요구되는 중요한 수단은 엄격한 새로운 자연과학이 아니라 옛날 방식의 부정확한 자기 성찰과 관찰이다. 정치학이 기초를 두는 핵심적인 사실들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정념과 능력이 작동하는 바를 읽어내야 하며 이러한 이해로 얻은 지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정념과 능력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추론해야 한다고 홉스는 주장했다. 자기 성찰은 인간을 움직이는 정념과 인간을 인도하는 능력을 발견하고 검증해내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가장 얻기 힘든 지식이며 정치학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홉스는 선언한다. 서론의 결론부분에 따르면, 이것이 정치 과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마지막 시험이다. “내가 자신에 대해 읽은 것을 정연하고 명쾌하게 적어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같은 것이 있는지 아닌지 만을 찾아보는 노력만 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이론은 달리 입증할 방법이 없다.” 

[[리바이어던]]의 핵심적인 주장은 홉스의 물리학과 그가 자기성찰을 통해 얻은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들 간의 상호작용을 드러낸다. 이를 알기 위해서 제6장, “보통 정념이라고 불리는 자발적 운동의 내적 발단에 대하여, 또한 그것이 표현되는 화법에 대하여”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이를 만족시켜주는 근원에 대해 탐구한 제11장, “생활태도의 차이에 대하여” 그리고 홉스가 자연상태와 전쟁상태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제13장, “인간의 자연상태, 그 복됨과 비참함에 대하여”에 나오는 핵심적인 요소들을 검토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홉스는 제6장에서 정념은 욕구와 혐오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설명하면서, 선과 악 그 자체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라고 선언한다. 
 
“선한 것, 악한 것 그리고 경멸스러운 것들이라는 이러한 말들은 항상 이 말을 하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그렇다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과 악의 일반적인 법칙은 대상 그 자체의 본성에서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코먼웰스가 없는 곳에서는) 그 사람의 인격에서 이끌어내며 혹은 (코먼웰스에서는) 이를 대표하는 인격에서 혹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동의하여 중재자나 재판관에게 결정을 하게 할 경우에는 이들로부터 이러한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선과 악의 일반적인 법칙이 대상 그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은 자기 성찰에 따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념과 능력의 작용을 아무리 주의 깊게 읽는다 해도 도덕적 기준이 인간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을지 없을 지 증명될 수 없다. 결론은 홉스의 유물론적 형이상학에서 도출되는데, 이는 인간은 자신을 옹호하지도 적응시키지도 못하는 도덕적 정치적 기준 혹은 목적을 배제하는 것이고 우리의 욕망이 영원한 어떤 것도 가리키지 못함으로 이 욕망의 만족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홉스는 제11장에서 “이 세상에서의 복됨은 만족된 정신의 휴식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고전적 기독교적 세계와는 달리 홉스의 세계는 인간에게 완결된 혹은 완전한 형태를 허용치 않으며 이 세상에서의 완결성 혹은 완전함에 대한 모사물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홉스는 완결 혹은 완전함이 왜 헛된 꿈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래 전의 도덕철학자들의 책에 나오는 궁극적인 목적(Finis ultimus)이나 최고 선(Summum Bonum)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다 한 사람은 감각과 상상력이 정지된 사람처럼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복됨이란 욕망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이행하는 것이며, 앞의 것을 얻는 것은 다음 대상으로 이행하는 도정에 불과하다. 인간 욕망의 목적은 단 한번 혹은 한 순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미래의 욕망에의 길을 영원히 확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족된 생활을 획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확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자발적 행위이고 자연적인 성향이다. 단지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데, 이는 사람들마다 정념이 다르기 때문이고 또한 원하는 효과를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각기 다른 지식이나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정념은 궁극적인 목적과 최고 선이 없는 상태에 순응해야만 한다.  

그리고 홉스의 자기성찰과 관찰을 신뢰할 수 있다면 정념 역시 신뢰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 성향으로 죽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끝나는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제일 먼저 들겠다. 인간이 이미 얻은 것보다 더 강렬한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거나 보통 수준의 힘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잘 살기 위한 힘과 수단을 확보할 수 없으면 그가 현재 갖고 있는 힘이나 수단조차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자들 — 그리고 성직자와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 의 정념이 출신이나 교육으로 인해 평민들의 정념보다 고귀할 것이라는 귀족적인 개념을 거부하면서 홉스는 다음과 같은 민주주의적인 의제를 주창한다: 동일한 논리가 정치 사회의 모든 계층의 모든 인간의 정념에 똑같이 적용된다. 모든 인간은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이 안전하기만 한다면 더 많은 것을 지속적으로 획득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얻고자 해서 위험에 처하게 된다. “부, 명예, 지배 혹은 다른 힘에 대한 경쟁은 논란이나 반목 그리고 전쟁을 낳기 쉽다. 한 경쟁자가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경쟁자를 죽이거나, 정복하거나, 축출하거나 혹은 배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정치적 과제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념이 야기하는 안정을 허물어뜨리는 사실상 치명적인 경쟁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홉스는 먼저 인간의 극단적인 자연 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제13장에서 그는 유명한 가르침, 자연 상태는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는 것을 도입한다. 자연상태가 이렇게 비참하지만 근본적인 평등과 무제한의 자유가 있다. 홉스가 자연적 자유와 평등의 근거를 정의에 두지 않기 때문에 친숙하지 않기는 하나, 그는 이어서 정의는 정치적 사회 안에서만 적용 가능한 것이지 정치생활이 없는 곳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자연상태에서 각자는 비슷하게 상처 입기 쉬우며 다른 사람의 손에 폭력적으로 죽임을 당하기 쉽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평등은 인간을 움직이는 정념 — 경쟁, 소심함이나 불신 그리고 공명심 — 이 자신들이 자연상태에서 즐길 수 있는 무제한적인 자유와 결합하여 생긴 산물인데 이러한 자연 상태는 공통의 기준이나 권위가 없음을 반영한다. 선과 악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이나 최고선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의 각자는 다른 이의 목숨과 육체를 포함한 만물에 대해 무제한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개인에게 규칙을 지키게 하는 승인된 공통의 권위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각자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전적으로 행사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며 이는 항시 인간의 근본적인 명령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가장 약한 자도 가장 강한 자를 치명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인간 평등은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게 없다. 이러한 상태에 기초한 자연적 자유는 만물에 대해 동일하게 무제한적인 권리를 소유하는 타인들의 폭력에 대해 지속적인 공포를 보장할 뿐이므로 가치가 적다. 결과적으로 자연상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전쟁상태이며, “그리고 이러한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 

루소에서 시작된 홉스에 대한 비판가들은 자연상태에 대한 홉스의 설명이 사변적이며, 비역사적이고 인류학적으로 무지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홉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를 거의 내놓지 못하였고, 국가보다 앞선 그리고 국가의 전제조건이 되는 문화의 형태들과 사회 조직을 간과했으며,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나 실제로 포착되는 악덕을 자연상태의 개인의 탓으로 돌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쓸모가 없지는 않으나 이러한 지적에 연연해 하는 것은 홉스 설명의 더 큰 의미를 놓치는 것으로, 홉스는 코먼 웰스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모형을 제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홉스는 제13장에서 자연상태가 “정념으로부터 이끌어 낸 추론”이라고 단언한다. 추론의 목적은 자신을 억누르는 법적 정치적 제한이 없을때 정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법을 벗어나고 정치적 위계질서를 넘어서면 인간의 정념은 — 생동적이게 하고, 부와 재산을 획득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 눈에 명예 혹은 존경을 받는 — 겉으로 드러나 혼란을 낳는데, 이 혼란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합리적인 욕망, 무엇보다도 다른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인, 자신의 삶을 보존하려는 욕망을 좌절시킨다. 정념에서 이끌어 낸 추론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홉스는 역사가 아닌 당대의 현실에 호소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의 불신 속에서 사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친구들과 가족의 가까운 구성원으로부터 귀중한 자산이나 사적 자산을 보호하려는 우리의 사회적 경향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승인된 공통의 법적 정치적 권위가 없을때 — 이것이 바로 자연상태의 규정이다 — 생기는 결과를 예증하기 위해 시민 전쟁의 무자비한 현실을 거론한다.

자연상태의 비참함과 그 원인을 이해하면 — 메디슨(James Madison)이 이 문제를 연방주의자 논고 10번에 관련된 문맥에 넣은 것처럼 “인간 본성의 바탕에 뿌려진” — 평화가 갖고 있는 선함이 분명해진다. 평화는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이다. 평화는 최고의 선이 아니라 어떤 그리고 모든 선을 성취할 수 있는 상태이다. 평화는 인간이 자신이 얻은 것을 보존할 수 있게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하므로 번영을 낳아놓는다.

홉스는 자연과 인간본성의 핵심적인 특징과 평화가 바람직함을 입증한 후에 [[리바이어던]]의 주요 과제로 나아가는데, 이는 적절하게 수립된 코먼웰스의 원리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코먼웰스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 이성을 부여 받았으나 너무 편협하고 근시안적으로 보려는 자기 이해(self-interest)와 영원한 구원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로 인해 쉽사리 진로에서 이탈하는 정념과 자만의 피조물 — 받아들인다. [[리바이어던]]은 이성이 코먼웰스의 형성을 위해 내놓은 신념, 법칙, 제도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 코먼웰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폭넓고 장기적인 관점의 자기이해를 취함으로써 평화를 확보한다. 특히 홉스는 인간 자신들이 만물에 대해 가진 자연적으로 무제한적 권리의 상당부분을 절대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주권자 (홉스는 이 주권자가 한 명이거나 소수 혹은 다수가 될 수 있다 하였으나 한 명의 군주를 권하였다)에게 양도하기 위해 서로 신약(信約)을 맺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양도는 개인이 공적 문제에 대한 사적인 판단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주권자에게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며 분쟁을 해결하고 신민들 서로에 대해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통상적으로 보호할 계약을 강행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주권이 확립됨에 따라 자연적 자유의 상당 부분이 제한되는데, 홉스는 이 제한이 개인의 자유와 이성적인 자기 이해의 중요한 요구를 명시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홉스는 적절하게 수립된 코먼웰스의 윤곽을 묘사하면서 다양한 부수적인 과제들을 정리하고 있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에 있어서의 당대 논쟁의 특징은 자연적 자유와 평등의 토대에 관한 것이었는데, 홉스는 이것을 인간 상태의 비천함에서 밝히고 있으며, 그외에도 그는 자연법, 미덕 그리고 이들간의 밀접한 연관에 대한 분석, 그리고 주권의 원천과 범위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옹호자들은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자유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권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며 그 위에 놓는 재능이나 능력, 대개는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적 전통의 다른 이들은 더욱 단순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말한다. 그러나 고전적 자연권에 대한 19세기 자유주의적 전통의 가르침은 도덕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킨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도덕을 권력으로 환원시킨 니체주의자들에게 강력하게 비판 받는다. 자유주의적 전통은 이러한 비판에 통감하며 자연권의 합리성을 옹호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이러한 주저함이 자유주의적 상대주의에게 문을 열어 주는데, 이는 도덕과 정치에 관한 모든 관점은 동등하게 가치가 있으므로 다양성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출현하였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적 상대주의는 자신에서 변절해 나간 분파인 자유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길을 열어주게 되고 이 주의는 도덕과 정치에 대한 관점은 모두다 마찬가지로 가치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다양성의 가치를 받아들여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자유주의는 자연권에 대한 고전적 자유주의 교설의 유력한 경쟁자들이다. 그러나 홉스의 정치이론처럼 궁극적인 목적이나 최고선의 이념을 거부하는 이 두 자유주의 — 자유주의적 상대주의와 자유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 중 어느 것도 홉스가 자유와 평등의 근원을 인간 자연 상태의 무능력함과 굴욕에 두고 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홉스가 보여주는 또다른 측면은 도덕적 정치적 삶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가 없다 해서 도덕적 정치적 삶이 토대 없이 방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 점인데, 그는 이를 자연법을 도출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정념에서 인간의 자연적 상태나 자연상태를 추론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인간이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준수해야 할 19개의 자연법을 자연상태에서 추론하고 있다. 홉스는 제16장에서 개념들을 소개하고 바로 뒤이어 자연법은 법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찾아낸 계율 혹은 일반적 원칙을 말하는데, 이 자연법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나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을 박탈하는 행위는 금지되며 또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포기하는 것은 금지된다”라고 적었다. 

이러한 계율들 혹은 일반적인 원칙들은 인간에게 항상 평화를 추구하라고 명령하는 제1의 근본적인 자연법으로 시작한다. 제2의 자연법은 인간에게 어떻게 평화를 수립할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각자는 평화를 추구하는 타인들과 만물에 대한 그의 권리를 포기하는 신약을 맺어야만 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락한 만큼의 자유를 타인에 대해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제3의 자연법은 인간이 정의를 행할 것 혹은 그들의 신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주권은 순응을 강제하기 위해 수립되었음을 규정한다. 또한 자연법은 다음의 것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후회할 만한 이유를 결코 제공하지 않는 자신의 이익인 보은을,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는 자신의 이익인 공손, 미래에 용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쾌한 일을 저질렀을 때 용서하는 자신의 이익인 용서, 복수에 대한 현명한 처사로 겪을 악의 크기가 아니라 처벌로 인해 야기될 선의 크기를 고려해 응징하는 자기의 이익인 자비, 타인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이익인 오만불손의 금지, 자만의 금지로 타인이 나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신의 이익인 겸손, 타인에게 결코 허락할 수 없는 권리를 자신에게 허락해 달라고 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이익인 오만의 금지, 타인을 평등하게 판단해야 하는 자신의 이익인 공평이다. 19개의 자연법은 공유물과 사적 자산의 공정한 사용과 분배 그리고 분쟁에 대한 공식적인 재판에 있어서의 자신의 이익을 구체화하는 법칙들로 끝난다. 

홉스가 제15장에서 주장한 이러한 자연법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 기독교적 정치철학의 언어인데, 홉스가 분석한 자연법들은 고전적 혹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불변의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의 형이상학에 따르면 이 자연법들은 인간의 번영, 완전이나 구원의 보편적인 개념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홉스는 이 자연법들이 더 하위에 있는 것, 평화라는 세속적인 선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보편적인 사실들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에 순응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이성적으로 항상 바람직하므로 이것들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다. 또한 이것에 순응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평화나 시민 사회를 보장하며 보존하고 매우 다양한 인간욕망을 충족시키는 전제조건이므로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러한 자연법을 이행하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나 시민 사회의 토대가 위태롭게 되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초래된다. 

따라서 홉스는 자연법을 이성적이고 교화된 자기 이익의 형태로 재구상한다. 동시에 그는 제15장에서 자연법이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황금률에 해당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공식은 그가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복음 7장 12절)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약간이지만 의미심장하게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의 공식은 남에게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반면 예수는 남들에게 선한 일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를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공식의 결과는 일치한다. 부정적으로 말을 했건 긍정적으로 말을 했건, 이 세상의 평화와 안전이 목적이 되었건 저 세상에서 받을 궁극적인 구원이 목적이 되었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를 제어하는 만큼 우리도 우리의 행위를 제어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이성이 규정한 목적 — 한마디로 말해 덕 — 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념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덕은 홉스 정치 이론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다. 홉스의 이론은 당대의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의 지배적인 방식을 비난하였는데, 이 방식의 대부분은 법, 권리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적합한 설명이 덕의 주장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때에만 상술되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홉스의 정치철학이 중요하게는 고전적, 기독교적 가르침에서 벗어났지만 동시에 흥미롭게도 그것과 중첩되고 있다는 부가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제15장의 거의 끝에서 홉스는 자연법과 덕 간의 연관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평화가 선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평화에 이르는 길이나 수단(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정의, 보은, 겸손, 공평, 자비 그리고 나머지 자연법들) 역시 선(다시 말해, 도덕적 선)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반대는 악덕, 즉 악이다.”         

홉스는 덕과 관련된 것을 괄호 안에 넣어 놓았기에 자신이 덕에 부여한 중요성을 의심치 않도록 즉시 “덕과 악덕에 관한 학문은 도덕철학이고 따라서 자연법에 관한 진정한 학설이야말로 진정한 도덕철학”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덕과 악덕의 학문, 즉 도덕 철학과 자연법에 관한 학설은 홉스에게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이면서 동일한 탐구가 가진 다른 측면들이었다. 이는 자신의 이성적 자기 이익을 이해하는 것과 일단 이를 이해한 후 이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정념과 선입견을 가진 피조물에게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덕에 명시적으로 부여한 중요성과 그의 논증의 논리에 의해 덕에 부여된 중요성으로 보아 홉스가 독자들이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덕의 위치를 간과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덕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다고 오해할까 염려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제15장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사상가들이 “같은 덕과 악덕에 대해 알고 있어도” 이를 “평화로운, 사회적인, 안락한 삶의 수단”으로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대담함의 원인이 투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가 투지를 만드는 것이며 증여의 원인이 관대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양이 관대함을 만드는 것처럼) 정념의 중용에 덕과 악을 놓고 있다”고 애써 지적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 본래 이론에서 이러한 설명은 거의 식별되지 않으며, 이로인해 홉스의 가르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수렴되고 벗어나는 지점이 모호해진다.

홉스 시대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참으로 어떠했건 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정념의 보통 혹은 중간정도를 의미한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덕을 원인이나 목적과 분리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따르면 도덕적 선은 결함이 있는 극단이나 악덕 사이에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의미한다. 고전적인 사례는 투지나 용기이다. 이는 너무 비겁한 행동이나 죽음에 대한 지나치게 큰 공포를 막아주며 무모함이나 지나치게 적은 공포를 피하게 하여 전투에서 명예롭게 죽음에 대처할 수 있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용기는 대담함의 양이 아니라 덕의 목적 — 잘 사는 혹은 탁월한 삶 — 에 의해 결정되는 대담함의 정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홉스의 차이는 도덕적 선이 이바지하는 정당한 목적 혹은 목적들에 관한 것이었다. 홉스에게 도덕적 선의 유일하게 정당한 목적은 안전한 정치사회의 창출과 보존을 통한 개인의 자기보존이다. 따라서 홉스에게 용기는 저항을 통해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희망이다. 그것은 고결함이나 다른 어떤 높은 목표와 관련이 없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다른 도덕적 선들과 함께) 용기는 정치사회의 보존에 기여하면서 고귀한 성품과 완벽한 영혼에 단단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당대의 정념과 통상적인 선입관에 뿌리 박힌 여러 오해들로 인해 학자들은 홉스의 사상과 우리시대의 정치 모두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덕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이 선하고 악한지 결정하는 권리를 애써 지키려하고 정치이론의 유일한 과제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다양한 개인들의 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추상적이고 불완전한 법칙들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칙이나 법의 도덕, 다시 말하자면 이성적인 자기 이해에 근거한 공리주의적 도덕과 덕의 도덕 사이에는 단호한 대립이 있어 어떤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쪽을 배제한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들은 덕이라는 바로 그 개념이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획일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수반한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덕의 도덕적 정치적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가 이를 가르쳐야 함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홉스의 덕에 관한 가르침을 연구하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오늘날의 도덕적 정치적 도전에 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본적으로 단절했다해 당대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대인들과 근대인들은 정치적 사회가 의존하고 있는 규칙들과 행위들을 고수하려면 정신과 기질의 어떤 특정한 성질들이 요구된다는데 동의하였는데, 이 성질들은 그대로 두면 자발적으로 개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반드시 필요한 덕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인간의 완전함과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양립해야 한다. 도덕과 정치가 덕에 의존하나 국가가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이러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홉스는 사회에서 덕의 형식적인 필요성이 인간의 자연적 자유와 평등에 근거함을 입증하고 있지만 자기 이해가 어떻게 계몽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꼭 필요한 덕이 어떻게 쌓이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적 전통에 있는 그의 후계자들 — 로크, 칸트, 밀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 — 은 지나치게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자유가 의존하고 있는 덕을 조성하는 다양한 신념, 실천, 제도들을 탐구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 자유로운 사회가 양산하기 쉬운 악덕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쇄 수단을 연구하는 과제는 자유주의적 전통의 더 보수적인 사상가들 — 스미스, 버크, 토크빌 — 의 것이 되었다. 자유주의적 전통에 이러한 원천이 있는데도 근래의 학계 정치철학은 자유에 대한 덕의 공헌과 악덕에 대한 자유의 기여를 좀처럼 평가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원칙과 일치하는 자유로운 사회가 어떻게 덕을 획득하고 악덕을 개량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데 관심이 없다. 

자연법과 덕에 대한 설명에서와 같이 홉스의 주권 분석도 근래의 도덕과 정치에 대한 교훈과 관련이 있다. 그 하나는 근대의 자연권 이론에서 자유의 향유가 의무의 이행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매우 편협하게 이해하고, 주권은 매우 광범위하게 이해한 [[리바이어던]]에서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홉스에게 기본적인 자연권은 표현이나 종교의 결사의 자유가 아니라 필요한 수단이 무엇이 되었건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목숨과 사지를 보존하는 기초적인 권리였다. 공권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수단이든 필요하고 이는 자유를 파괴한다. 홉스는 절대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의 수립이 보존의 최고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만물에 대한 무제한적인 자연적 자유를 가진 개인이 어떻게 주권자에게 복종할 수 있으며, 어떻게 절대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주권자만이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원칙을 결정하여 인간의 견해를 통제할 정도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홉스의 답은 복종 — 덕과 마찬가지로 — 역시 계몽되었거나 이성적인 자기 이해에 근거하지만 그것은 정념을 통해 효력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제13장에서 홉스는 공포가 “의지되는 정념”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신민(臣民)들이 계약을 이행하고 법을 지키며 그들의 의무를 다하게 보장하는 주권자의 무기이다. 순응의 원인과 의무의 논리는 별개의 것이다. 의무는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 일부를 주권자에게 양도하겠다는 이성적인 결정에 근거한다고 홉스는 주장했다. 개인은 이러한 개인적 판단에 의해 공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자제할 것을 동의하는데, 이 사회의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을 이성적으로 제약한다. 스스로 부과한 제약 —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시도된 결정이든 공권력에 대한 암묵적인 인정에서 생겨났든 — 역시 자유의 표현이라고 홉스는 주장한다. 주권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게 인정함으로써, 개인은 주권자의 모든 결정을 — 얼마 안있어 그 결정이 동의할 수 없는 것이거나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해도 —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홉스의 관점으로 보자면 강력한 주권은 인간의 자연상태의 비참함을 피하기 위해 이성이 처방한 유일한 수단이므로 자유는 증대된 것이다. 

주권자의 무력에 대한 공포조차도 이성적이거나 계몽된 자기 이해를 근거로 행동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모든 것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해도 이러 저러한 불편한 법을 어기려는 지속적인 유혹이 있기 때문에, 홉스는 제18장에서 의무가 정념의 훈련과 관계있다고 강조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중요한 확대경을 (하나는 정념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애이다) 가지고 있는데 이 확대경을 통해 작은 희생을 크게 불평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희생 없이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비참함이 닥쳐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망원경(즉 도덕과학과 시민과학)으로 볼 줄은 모른다.” 
 
도덕과학과 시민과학 혹은 덕과 악덕의 학문은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만 하는지 혹은 자기 이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를 보여준다. 도덕과학과 시민과학에 대한 복잡한 문제는 홉스가 서문에서 주장한 것으로 그에 따르면 도덕철학과 정치 과학은 소크라테스적인 자기-앎 또는 덕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권에 대한 홉스의 분석은 또한 국가가 집단학살, 전쟁 범죄, 그리고 자신의 지도자에 의해 가해진 다른 반인도적 범죄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적 참사로부터 — 자신의 국민들이나 다른 나라의 국민들 — 시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에 관한 근래의 논쟁에 있어서도 중요한 함축성을 갖고 있다. 350년이 넘게 국제적인 질서를 뒷받침하고 있는 표준적인 견해는 유럽의 종교전쟁을 종결시키고 근대의 국민국가 시대를 시작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공식화되었다. 국가는 자신의 시민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신념에도 관용이 베풀어져야 하며, 국가의 주권은 자신의 경계 내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계속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한 주권 국가가 다른 국가 내부의 일들에 대해 간섭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표준적인 견해가 국제 질서에 적용될 때 — 공통적으로 인정된 강제력이 없을 때 국가는 서로 전쟁상태로 관련되어 있다 — 홉스의 자연상태에 관한 가르침과 주권은 절대적이며 분리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과 연관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과 국제연합의 창설은 이 표준적인 견해를 서서히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국제 인권 변호사들과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자연재해와 통치자들에 의한 극단적인 범죄로부터 — 자신의 국민들이나 다른 나라의 국민들 — 시민들을 보호할 보편적인 책임이 국가에 존재한다는 관점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국가는 일반적으로 보호의 책임을 진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이 홉스와 관련있는 표준적인 견해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났다고 추정한다. 

사실상 홉스의 정치이론은 주권이 고유한 영역에서는 절대적이며 분리될 수 없지만 결국에는 이를 존재하게 하고 유지하는 권력, 즉 각 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한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의해 제한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제한은 국가가 국가 주권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갖고 있는 적절한 이유들과 지배자가 그의 인민들을 통치하는 권리를 포기하였을 시 다른 국가가 자유롭게 중재할 수 있는 조건 모두를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홉스의 정치이론에서 개인이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주권의 수립을 정당화하며 동시에 이를 단호하게 제한하기도 한다. 절대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합의된 주권만이 서로로부터 그리고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신민을 보호할 수 있다고 홉스는 주장한다. 그렇지만 결국 복종해야만 하는 신민의 의무는 주권의 보호 능력을 벗어나서는 유효하지 않다. 홉스가 신민의 의무를 광범위하게 이해한 것은 분명하다. 세금과 도로 공사에 관해 주권자와의 의견차이는 주권의 행위나 무위가 자신의 생활권을 침해하고 따라서 자신의 자기보존을 위협한다고 생각해도 저항할 근거로 적절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논란이 홉스의 시대에 불복종을 정당화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다해도 그리고 성서가 영원한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홉스가 이해한 것처럼 주권을 무효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14장에서 그가 명확히 말한 것처럼 생명과 사지를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 상해 투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양도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피하는 것이 권리를 포기하는 유일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폭력에 저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신의계약은 무효로서 어떠한 권리의 이전도 없으며 어떠한 채무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제21장에서 홉스는 주권에 복종해야만 하는 신민들의 의무가 면제될 수 있는 극단적인 조건들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주권에 대한 신민들의 의무는 주권자가 신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력을 유지하는 한 그리고 유지되는 동안에만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보호해 줄 그 어느 누구도 없을 때 자기보존의 자연적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신의계약으로도 양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권은 코먼웰스의 영혼이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후에는 육체의 각 부분은 혼으로부터 운동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 복종의 목적은 보호이며 보호를 어떻게 얻든, 그의 무기로 얻는, 타인의 무기로 얻든,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에 복종하게 하고 인간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주권은 이를 수립하는 사람들의 의도로 보면 불멸이지만 그 자신의 본성으로 보면 외국과의 전쟁에서 폭력으로 죽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무지와 정념으로 인하여 수립 당시부터 내재한 내분으로 자연사 할 수도 있다.”
 
주권자의 필멸성에 대한 홉스의 설명은 주권자는 전쟁과 정치적 분쟁뿐만이 아니라 자연적 참사로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민들이 자신을 각자 그리고 주권자와 관련 지어, 자연상태 혹은 법을 집행하고 삶을 보존해주는 승인된 어떤 권력도 없는 상태에서 발견할 시 주권은 사멸하기 때문에, 주권을 소멸하는 원인들 즉 내전만큼이나 심각한 무질서와 피해 그리고 인명손실을 가져오는 지진과 해일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을 배제할 어떤 근거도 없다. 
 
홉스에게 주권은 적절한 영역에서만 불가침의 절대적인 것으로 그 영역 넘어서는 효력이 없는 것이다. 주권의 범위와 삶은 제한되어 있고, 주권자는 주권을 잃을 수 있고 함부로 쓸 수도 있으며 폐기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홉스의 관점으로 보면 (19개의 자연법과 같은) 의무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합리적인 계산을 하여 정치적 질서를 안정되게 보존하려는 개인의 이해에서 유래한다. 
 
우리의 지구화된 세계는 이러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 지구화된 세계에서 국가경제는 점증적으로 서로 뒤얽히며, 파국을 초래하는 능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무기들이 너무나도 쉽게 국경을 넘어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 결과로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국가의 개인들의 안전은 안정된 국제질서에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속박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국제질서에 대한 위협이 심상치 않으며 무위, 무능력, 혹은 정부가 자신들의 인민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무효화되어 주권이 박탈당하는 곳에서, 국가가 인도주의적 참사를 저지하거나 반인도적 범죄를 막기 위해 국외로부터의 중재에 국가적 관심을 합리적으로 가질 수 있다. 사실상 21세기 정치의 맥락에서 이러한 중재는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의무의 수위를 높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무는 사심이 전혀 없는 근대의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해관계에 근거할 것임은 분명하지만,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의무는 모두 동일할 것이다. 
 
정치철학의 모든 걸작들처럼 [[리바이어던]]은 모호함이 가득하며 긴장감으로 터질 듯하다. 홉스는 자연권에 관한 도덕과 정치가 인간의 하찮은 기원에서 유래하였다는데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의 자연 상태의 냉혹함을 묘사했다. 이러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형이상학적 토대를 빼앗긴 채 외롭고 그의 이익을 잘못 이해할 수 있으며 폭력적으로 충돌하기 쉽고 무지와 공포로 인해 미신을 믿게 되지만, 인간은 그의 정념을 넘어설 수 있으며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자연법을 따름으로써, 그 중에서도 특히 절대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주권을 승인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홉스의 적절하게 수립된 국가는 인간의 자연적 자유와 평등을 반영하며 이성을 표현하고 기독교적 부르주아적 도덕과 현저하게 겹치는 도덕적 선에 의지하고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며 홉스가 추론을 이끌어내지는 않았으나 운송과 통신 혁명에 의해 작아진 세계를 수용할 수 있고 죄 없는 이들의 고통과 학살을 끝내기 위해 외국의 중재를 정당화 할 수 있다. 정치철학의 모든 걸작들처럼 [[리바이어던]]이 함축하고 있는 모호함과 긴장은 저자가 도덕과 정치에 대해 명확히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호함으로 가득찬 그리고 긴장으로 터질듯한 우리의 세계를 통해 사고를 이끌어 낸 그 명쾌함에서 유래한 것이다. 
 
Peter Berkowitz는 스탠포드 대학 후버 연구소의 Tad and Dianne Taube Senior Fellow이다. 그의 글들은 www.PeterBerkowitz.com에 올려져 있다. 이 글은 Regnery사에서 앞으로 출간할 [리바이어던]]의 Gateway판을 소개하는 에세이다.      
 
출처: Policy Review, October & November, 2008

번역: 라티오 출판사

[외국 도서 소개] Hegel and Nineteenth-Century Philosophy

The Cambridge Companion to Hegel and Nineteenth-Century Philosophy

Editor: Frederick C. Beiser
Paperback: 472 pages
Publish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 edition (November 17, 2008)
ISBN-10: 0521539382
ISBN-13: 978-0521539388

Product Description
The Cambridge Companion to Hegel and Nineteenth-Century Philosophy는 헤겔을 그의 폭넓은 역사적 철학적 맥락에서 검토한다. 헤겔 철학에서 주요한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이 책은 그의 논리학, 인식론, 정신철학, 사회정치철학, 자연철학, 미학에 관한 입문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에는 또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헤겔 연구자들의 글이 담겨있다. 이 책은 헤겔의 생애에 관한 개관을 펴낸 바 있는 Terry Pinkard([[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의 글로 시작한다. 또한 헤겔 연구에서 무시되었던 많은 새로운 주제들을 탐색한다: 해석학과 신비주의에 대한 헤겔의 관계. 헤겔을 공부하려는 학생과 연구자들을 대상 독자로 하고 있는 이 책은 19세기 철학에 관심을 가진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책이 될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영어권에서 나온 문헌 목록도 들어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외국 도서 소개] Booklovers turn to Karl Marx as financial crisis bites in Germany

독일의 재정위기가 몰려오자 독자들은 칼마르크스로 돌아간다
Kate Connolly

칼 마르크스가 돌아왔다. 적어도 독일의 출판사와 서점들의 말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인기가 올라간 것은 현재 경제 위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독일어로 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내놓는 베를린의 출판사 Karl-Dietz의 매니저 Jörn Schütrumpf는 “마르크스가 다시 유행이 되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상황인데 이 수요는 올해말이 되기 전에 급속하게 늘어날 것이다.”

마르크스의 가장 인기있는 대표 저작은 자본론(Das Kapital)이다. Schütrumpf는 마르크스의 독자들이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행복에 대한 약속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음을 깨달은 전형적인 젊은 교양세대”라고 말했다.

독일의 서점들은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쏟아지는 인기에 대해 앞선 언급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매출이 300 %정도 증가했다고 말했다(그런데 실제 매출액수를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판매는 그리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책이 출간되고 사라지는 경향은 항상 얄팍한 상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다. “시장의 신들이 곤경에 빠지고 이 신들의 사탕발림같은 마법은 사라졌다”라는 적절한 문구가 있는 시, The Gods of the Copybook Heading이 다시 유행한다면 이 시를 쓴 Rudyard Kipling이 기뻐할 것처럼, 경제위기가 다시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는 것을 안다면 마르크스도 기뻐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기뻐하는 것이 그가 살아있으면서 앞으로 몇 달 동안 그가 먹고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줄 늘어난 인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과도한 탐욕은 결국 자신을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버린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되뇌이는 것이 유행이 된 이 시점에서 점차 많은 숫자의 독일인들은 기꺼이 마르크스의 팬이 되려는 듯하다. 독일의 떠오르는 좌익정당 Die Linke의 수장인 Oskar Lafontaine가 국가의 부와 일부 에너지 부문을 국유화 하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강령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포함한다고 이야기 했을 때, 일간지 Bild는 그를 “구상을 잃어버린” “미친 좌파”라고 불렀다. 그러나 최근 몇 주 사이에 (경제위기로) 분명 밤잠을 설쳤을 재정부 장관 Peer Steinbrück은 지금 자신이 마르크스의 팬이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 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이론의 몇몇 부분들은 사실상 괜찮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해야한다”고 Steinbrück은 조심스럽게 Spiegel지에서 이야기했다.

Ralf Dorschel는 “최근들어 마르크스는 판돈이 많이 걸린 내기에서 연승을 하고 있다”고 Hamburger Abendblatt지에 언급했다.

그러나 아직도 마르크스의 이론에 빠져들 준비가 안된 사람들에게 이전의 미국 경제 위기에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서한은 좀 더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미국의 몰락은 보기 좋은 구경거리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1857년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지금 급박하고 완벽한 미국의 Wall Street 붕괴를 확실히 예고하고 있다.

출처: Guardian, 2008. 10. 15.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