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문학 古典 강의>

지은이: 강유원
출판사: 라티오
분야: 인문학/문학 일반/고전
발행일: 2017년 5월 15일
ISBN: 979-11-959288-1-1  03800
판형: 신국판
가격 및 쪽수: 27,000원/ 406쪽

<<문학 古典 강의>>(#ISBN9791195928811)

나의 삶을 지혜롭게 할, 우리 시대의 공통 교양 

강유원의 ‘고전 연속 강의’ 마지막 권 <문학 古典 강의> 출간

 

“이 책은 최초의 서사시부터 근대의 장편 소설까지 대표적인 서사 고전들을 통해, 
개인이 겪는 고난의 의미와 인간 도야의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자아는 세계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서사 또는 이야기는 자신의 겪음을 재구성하고 그러한 재구성을 통해 
자신이 사는 공동체, 더 나아가 세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라야 우리는 타자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될 것이며, 
개인으로서 구원의 길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40주 동안 공공도서관에서 고전을 강의해왔던 철학자 강유원의 ‘고전 연속 강의’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인문 古典 강의⟫(2010), ⟪역사 古典 강의⟫(2012), ⟪철학 古典 강의⟫(2016)에 이은 마지막 권은 ⟪문학 古典 강의⟫(2017)이다.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고전의 지식과 시대적 통찰을 전달하되 학문적 해석도 놓치지 않는 이 시리즈는 “자식을 넘어 손주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은 고전 강의 시리즈”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시리즈는 인문학의 세 영역에 각각 충실하면서도 세 영역들을 아우를 만한 연계성을 가지고 기획되어, ‘성찰’, ‘사유’[관조], ‘매개’[표현]라는 술어들로써 역사, 철학, 문학의 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정신 활동을 통일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문 古典 강의⟫가 세 영역의 공동 지식을 탐구하면서 삶과 시대의 의미를 새롭게 밝혀내는, 이 시리즈의 입문서라면, ⟪역사 古典 강의⟫는 고전으로서는 다소 덜 알려진 역사 분야의 고전들을 골라 세계 역사의 전진을 바라보는 인간의 성찰적 지식을 탐구한다. ⟪철학 古典 강의⟫는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 오로지 정신으로서 무한자에 이르려는 인간의 고투와 열망을 체계적 형이상학으로써 서술하고 있으며, ⟪문학 古典 강의⟫는 생 전체를 자기 안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체험,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다시금 타자에게 표현하는 서사[이야기]로서의 문학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사, 철학, 문학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분야들이며, 각각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균형 잡힌 사유와 종합적 시각을 얻으려면 이 세 분야의 고전 텍스트들을 고루 읽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문학 古典 강의⟫에서 다루는 문학 작품들은, 가장 오래된 문학 형식인 영웅 서사시(길가메쉬 서사시, 오뒷세이아)부터, 서사시의 새로운 형식이라 할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맥베스, 오셀로), 그리고 기존 서사시의 형식적 장점들이 집약된 현대 소설(모비딕)에 이르기까지, 문학 작품들의 원형이라 할 만한 서사 고전들이다. 구약 성서에 속하는 <욥기>나 파스칼의 단편 모음집인 ⟪팡세⟫가 이러한 서사 작품 목록에 들어가 있는 것이 의아할 수 있으나 인류의 가장 오래된 주제 의식을 문학적 형식으로 잘 다룬다는 점에서는 넓은 의미의 서사 고전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사 고전들이 갖는 형식적이면서도 내용적인 공통점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이 일련의 과정, 즉 자기를 찾기 위해서 우선 자기를 잃어버려야 하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같은 마음을 얻기 위해 타자를 겪는 것’, ‘불멸을 얻기 위해 세상과 부딪히는 것’, 그리고 ‘신에게 향하기 위해 고난을 극복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물론 각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황과 성격, 사건 전개 방식은 다 다르다.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는 주제에 있어서나 구조, 등장인물에 있어서 훗날 등장하는 영웅 서사시들의 원형과 같은 작품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는 장대한 모험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서 생겨나는 인간 삶의 미세한 국면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의 정교한 교합을 보여준다. <욥기>는 구약 성서에 들어 있는 사상서이지만 찬찬히 읽다보면 신앙과는 무관한 삶의 통찰들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다. 희랍 비극의 3대 작가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들 안에는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문학 작품들의 오래된 주제와 형식 요소들이 전부 들어 있다. 희랍 비극의 주인공들은 운명에 의해 이율배반의 가장 극적인 상황에 놓이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봄으로써 자신을 비극으로 몰고가는 장엄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도 드라마의 요소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데, 희랍의 작품들과의 차이점이라면 등장인물들 간의 성격 차이이다. 희랍 비극에서와는 달리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서 운명은 우연적 요소일 뿐이고 결말을 결정하는 것은 인물의 성격이다. 《팡세》가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의 유약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면, 《파우스트》는 낭만주의적 인간형을 통해 인간성의 최대 국면을 거침없이 보여주며, 《모비 딕》 역시 욥의 고래와 싸우는 이교도의 모습에서 인간 실존의 고뇌를 장대하게 묘사한다.

⟪문학 古典 강의⟫를 통해 이러한 서사 고전들의 주제와 형식을 깊이 있게 파악한다면 철학적 역사적 문제들을 사유하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고전들의 모티프를 이어받은 오늘날의 다양한 서사 매체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차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첫 시간

 

점토서판 기록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제1강 불멸을 향해 나아간 인간의 귀결
제2강 도시를 세운 정치적 영웅, 길가메쉬
제3강 사적인 욕망을 함부로 충족시켰던 길가메쉬
제4강 엔키두와 함께 세속적 야망을 성취하려 했던 길가메쉬
제5강 친구의 죽음 이후 구도자의 여행을 떠났던 길가메쉬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6강 자기만의 것을 찾기 위한 겪음
제7강 고향을 떠나는 젊은 오뒷세우스, 텔레마코스
제8강 애타게 귀향을 원하는 오뒷세우스
제9강 고난과 불안을 감내하는 오뒷세우스
제10강 이야기로써 ‘같은 마음’을 갖게 된 페넬로페와 오뒷세우스

 

구약 성서 <욥기>
제11강 신의 전지전능과 인간 도덕의 한계
제12강 경건한 사람, 욥
제13강 인과불명의 고난에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는 욥
제14강 자신을 저주하다가 신에게 반항하는 욥
제15강 말의 잘못을 회개하고 신에게 무릎 꿇는 욥

 

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3부작》 :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
제16강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이율배반의 상황
제17강 자신의 선택 때문에 운명의 죽음을 맞게 된, 오레스테스의 아버지 아가멤논
제18강 자신의 재앙에 복수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운명에 빠져든 오레스테스
제19강 설득의 말과 신의 도움으로 이율배반을 벗어나는 오레스테스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제20강 운명에 수긍하면서도 자기를 굽히지 않는 인간
제21강 지혜와 권세로 오만해진 오이디푸스
제22강 자신에 대한 앎이 파멸로 귀착된 오이디푸스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제23강 배신으로 인해 분열된 자아의 처참한 복수극
제24강 증오를 위한 증오에 빠져든 메데이아
제25강 저주를 실현하고 허망하게 사라지는 메데이아

 

셰익스피어 《맥베스》
제26강 안정된 규범 없이 쟁투를 벌이는 인간들의 무대
제27강 자연적 힘과 초자연적 위력을 모두 동원하여 왕이 되려는 맥베스
제28강 권력욕의 끝에서 초자연적 힘에 의해 살해당하는 맥베스

 

셰익스피어 《오셀로》
제29강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제30강 자신의 아름다운 사랑을 과시하는 오셀로
제31강 의심으로 허구를 쌓아올려 살인과 파멸을 부르는 오셀로
파스칼 《팡세》
제32강 스스로 ‘불멸’에 이르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하는 개인의 고투
제33강 신으로부터 멀어져 본성이 타락하게 된 인간
제34강 《성서》를 통해 다시 신에게로 향하는 속죄자 인간
괴테 《파우스트》
제35강 삶과 앎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적 인간 편력
제36강 감각적 삶을 통해 감각을 초월하고자 노력하는 파우스트
제37강 심오하고 포괄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올라서는 파우스트

 

멜빌 《모비 딕》
제38강 겪음을 통해 앎에 이르는 충일한 인간의 삶
제39강 진리 닮은 환영을 보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선원 이슈메일
제40강 위엄 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은 선장 에이해브

 

마지막 시간

 

  • 본문 중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혼백”이 예언한 것은 오뒷세우스의 일생이 휴식 없는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뒷세우스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뒷세우스의 모습이고,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입니다. 자기에게 끝없이 고난이 닥쳐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오뒷세우스는 불멸에 대한 욕심 자체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어떤 고난이 닥쳤을 때 ‘이걸 이겨내고 나면 그때부터는 행복이 계속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우리를 《오뒷세이아》로 끌어당기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런 환상도 없이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희랍의 정신을 일반적으로 ‘합리적 정신’이라는 말로 규정하곤 합니다. 비극 작품들을 읽어나가기 전에 희랍 사상이나 비극과 관련하여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이것은 희랍 세계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논의가 될 것입니다. 앞서 읽은 <욥기>를 떠올려보면서 비교를 해봅시다. 이 텍스트는 유대 문학인데 이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욥은 경건한 사람으로 규정되었는데, 그 경건함을 규정할 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윤리적인 술어들이라고 하는 것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욥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악에서 떠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 악에서 떠난 자인데도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 이 왜 그러한 고난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의 돈독함만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욥기>에서 사건의 전개는 사탄과 야훼의 ‘내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욥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욥이 알고 있는 차원이 있고, 야훼와 사탄이 일을 벌이는 차원이 있습니다. <욥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주제는 ‘신은 정의로운가’인데, 신과 사탄의 차원에서 해명되는 것과 욥과 그의 친구들 차원에서 해명되는 것이 달랐습니다. 따라서 신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정의와 인간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정의는 합치되지 않습니다. 신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다르다, 신은 인간을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그저 신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고 그것이 신앙이다, 이것이 <욥기> 가 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에 관한 일반론을 좀 살펴봅시다. 예술사에 관한 고전적 저작이라 할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저자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채 소화되지 않은 새 소재를 너무나 급격히 문학 영역에 투입”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소재는 기존의 비극 작가들이 다루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소재들 이 그의 작품에 “투입”되었는지는 《메데이아》를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와 비교하여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소재들이 “예술적으로 채 소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관련 있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하우저가 에우리피데스를 평가할 때에는 자신이 가진 ‘예술적 소화’ 의 기준이 있었을 것이며, 에우리피데스는 그것에 합치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메데이아》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일단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우리피데스가 그 소재를 다룬 방식이 반드시 예술적이지 않다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대의 작가들이 사용하지 않던 방식을 자기 스스로 고안하여 사용함으로써 그가 예술적 표현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해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사용한 방식에 결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혁신의 방식인지를 예단하지 말고 그 의 작품들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들은 관람석과 무대가 구별되어 있기는 했지만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한 공간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 상당수는 서기, 장인, 도제, 여자 등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숙련 노동자 일주일 임금이 6실링(30페니) 정도였고 입석 입장료는 1페니로 추정됩니다. 셰익스피어의 관객들은 듣기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텔레비전 같은 영상 매체를 보면서도 자막을 봅니다. 그만큼 읽기에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읽을 만한 것들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관객들이 듣기에 능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쓰인 영어는, 셰익스피어 당시의 수많은 관객들이 도대체 이 정도의 영어를 알아들었을까라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수준이 높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것을 알아들었습니다. 그의 영어는 관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희곡 작가이면서 극장주였기 때문에 당연히 관객들이 잘 들을 만한 이야기와 대사를 썼습니다. 이것도 아주 중요한 고려사항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는 이를테면 ‘대중 드라마’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랑’이라는 관념 아래 포섭되는 현상 형태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사랑은 무엇으로 시작되고 무엇으로 지속되겠습니까. 오셀로는 세상의 평판에 기대어 자신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그의 사랑 또한 그런 허위의식의 부속물로서 소유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질투에 사로잡히며 자신의 고귀함이 무너지려 하자 데스 데모나를 살해하였습니다. 이아고가 교활하고 악마적이기는 하나 오셀로가 합리적으로 대처했다면 그의 말들은 전혀 귀기울 필요가 없는 허언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데스데모나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순정한 사랑이라는 이상적인 모형에 자신을 맞춰가려고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셀로에게 답답하고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말과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브라반치오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강하게 밀고간 사랑은 오셀로의 의심 앞에서 너무도 어이없이 나약하였습니다. 이아고는 고귀한 관념으로서의 사랑 따위는 믿지 않았습니다. “지갑에 돈을 채워”라는 말을 반복하며, 관념적인 사랑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 앞에서 무너져버릴 것이라고 로드리고에게 단언합니다.

독일 낭만주의는 근대의 상황을 분열(Entzweiung) 또는 소외(Entfremdung)라 봅니다. 신과 인간의 분리, 자연과 인간의 분리, 인간과 낭만주의에서만 문제된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파스칼의 《팡세》의 출발점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상황에 대해 파스칼은 신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방식, 복음서의 방법이라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이는 인간이 신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 신은 숨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는 욥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어떤 형태든지 인간은 분열이라는 상황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통일하려는 시도가 독일 낭만주의라면,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겨서 아예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신과의 분리 자체를 문제상황이라 생각하지 않고 충일한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태도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읽을 《모비 딕》에 등장하는 에이해브 선장 같은 이가 후자의 태도를 잘 표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굳이 이름을 붙여주자면 ‘초인’( Uebermensch)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