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기에 인문학은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해야만 한다.
Pariticia Cohen

예일과 같은 엘리트 대학교들, 점차 늘어나는 위스콘신 대학교와 같은 공립 교육제도, 그리고 루이스 & 클라크 대학교와 같은 규모가 작은 사립 대학들이 수 세대 동안 공유했던 관념은, 전통적인 교양교육은 그 정의에 의하면 학생들이 특정한 직업을 갖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이 발달시키는 비판적 사유, 시민적 역사적 지식과 윤리적 추론은 다른 목적을 지향한다: 그것들은 직업 선택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성장하고 자유민주주의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실업률이 증가하고 대학 기부금이 줄어드는 이 새로운 시대에, 복잡하고 기술이 요구되는 세계에서 인문학이 과연 중요한가라는 의문들이 최근 다급하게 제기되었다. 과거의 경기 침체기에는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느슨하게 묶인 분과들 — 일반적으로 언어학, 문학, 예술학, 역사학, 문화 연구, 철학, 종교학을 포함하는 — 의 재학생 수가 줄어들었다. 이 분야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이번 경제 위기에 이 분과들이 가장 모진 타격을 받지 않을까 우려한다.

이미 학자들은 근심스러운 신호들을 지적하고 있다. 고등교육신문(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과 무디스(Moody’s Investors Services)가 2008년 12월에 고등교육기관 200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5%는 고용을 완전히 동결했고 43%는 일부 동결했다.

[Wikihost.org]의 채용 공고에 따르면, 지난 세 달 동안 적어도 24개 대학들이 종교와 철학 분과의 교수 구인을 취소하거나 늦추었다. 현대언어협회(Modern Language Association)의 연말 직업 목록을 보면 2008-09년에 영어, 문학, 외국어는 그 전 해와 비교해 21% 떨어졌는데, 이는 지난 34년 동안 가장 큰 하락이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미합중국 연구 책임자 앤드루 델반코(Andrew Delbanco)는 “인문학에 속한 사람들은 늘 인문학의 형편을 한탄해왔지만 자신들의 분야가 점차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전면적 추가 감축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연방정부가 교육에 경기부양 자금 수백만 달러를 쏟는다 할지라도, 인문학은 행정관, 정책 입안자, 학생과 부모에게 인문학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느끼고 있다. 기술 행정관들, 연구자들, 그리고 기업 지도자들은 훈련받은 엔지니어와 과학자를 충분히 배출하는 것이 미합중국의 경제적 활력과 국가 방어, 그리고 건강 관리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충실한 인문학 옹호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인문학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주장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이번 신용 위기는 오랫동안 인문학의 중심적이고 신성한 사명으로 간주되어왔던 것 —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 — 을 재평가하도록 부추겼다.

매사추세츠의 고등교육위원 리처드 프리랜드(Richard M. Freeland)는 20세기에 인문학 연구가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지적 발달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들이 세상에서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교양교육과 과학, 그리고 우리의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분리해왔던 것이다.”

프리랜드는 그가 “고등교육에서 교양교육과 과학 및 직업 프로그램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한 혁명적 움직임이라 부르는 것에 참여하고 있다. 전미대학연합(Association of American Colleges and Universities)이 최근에 발행한 보고서는 인문학이 “교양교육에 대한 구식 상아탑 견해”를 포기하고 그 대신 실제적 경제적 가치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달에 프리랜드와 전미대학연합은 매사추세츠의 우스터에 있는 클라크 대학교에서 바로 이 주제에 관한 회의를 주최한다. 국가 지도층은 고등교육에 관심이 많지만 교수들과 학과장들은 그러한 아이디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프리랜드는 말했다.

인문학 분야에 속한 몇몇은 인문학을 부정하게 팔아먹는 행위를 언짢아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고 고등교육에 관한 책을 몇 권 저술한 데릭 복(Derek Bok)은 “인문학은 학생들이 직업생활을 준비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글쓰기와 분석적 기법만이 아니라 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새로운 기술로 인해 제기된 윤리적 쟁점들까지 가리킨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교양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경제를 개량하는 것 말고도 훨씬 더 많다. 나는 이것이 정책 입안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것 말이다.”

예일 대학교의 법학 교수이자 <<교육의 종말: 우리의 대학은 왜 삶의 의미를 포기했는가(Education’s End: Why Our Colleges and Universities Have Given Up on the Meaning of Life)>>의 저자인 앤서니 크론먼(Anthony T. Kronman)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크론먼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탐구가 가져오는 이로움을 고갱이만 추려 요약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재정적 폭락으로 이어진 탐욕, 무책임, 기만에 대한 폭넓은 비난을 지적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나의 오래된 견해의 필요성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재검토할 시기인데, 인문학은 이 문제를 “제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델반코가 보기에 그 이로움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가장 탁월하게 해낸 사람은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포크너, 링컨과 두보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통령에 관해 “그는 학구적 인문주의자들이 근래에 잘하지 못했던 것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공동 기획, 우리 모두에게 속한, 비극과 희화화를 포함하는 역사, 미합중국인으로서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

20세기 후반기에 점점 더 많은 미합중국인들이 대학에 들어갈수록 그 학생들 중 점점 더 적은 비율만이 인문학에 전념했다. 미합중국예술과학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 Sciences )가 최근에 공개한 새로운 데이터베이스인 HIP(Humanities Indicators Prototype)에 따르면, 전체 대학 학위 가운데 인문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1950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의 전성기와 비교해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현재 인문학 학위를 받는 학생들은 약 8%(약 110,000명)인데, 이 수치는 십 년이 넘도록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인문학 학위 수치가 가장 낮았던 시기는 경기 침체가 극심했던 1980년대 초였다.

인문학은 엘리트 교양교육 학교들에서는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립 학교들과 다른 학교들 사이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president emeritus이자 윌리엄즈 대학의 관념사 교수인 프랜시스 오클리(Francis C. Oakley)는 몇몇 대규모 주립대학교들이 관례적으로 인문학 과정에 등록하려는 학생들을 물리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돈이 궁해질수록 인문학은 전체 인구 중 극소수만이 대학에 다녔던 지난 세기 시작 무렵의 상황으로 점점 더 되돌아갈 것이다. 부자들의 속주로 말이다.

그러한 사태는 불행하지만 피할 수 없다고 크론먼은 말했다. 인문학 교육의 본질 — 위대한 문학과 철학 작품들을 읽고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파악하는 것” — 은 “다수가 감당할 수 없는 값비싼 사치”가 될지도 모른다.

출처: The New York Times, 2009. 2. 25.

번역: 라티오 출판사

단테, <<천국>>편의 새로운 번역
 
Joan Acocella

<<천국>>은 우리의 생각을 구원으로 향하게 할 단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였으며, 그는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였다.

<<신곡>>을 아직까지 읽지 않았다면 — 자신을 잘 알 것이다 — 지금이야말로 읽을 때인데, 로버트 홀랜더(Robert Hollander)와 진 홀랜더(Jean Hollander)가 지금 막 이 경탄스러운 14세기의 시의 번역을 훌륭하게 끝마쳤기 때문이다. 홀랜더 부부의 <<지옥>>은 2000년에, <<연옥>>은 2003년에 출판되었고, 그들의 <<천국>> (Doubleday, $40)이 막 출간되었다. 이 번역판은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떤 영어판보다 관용어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동시에 평이하기 때문에 이 번역판은 더욱 고상하다. 시인인 진 홀랜더가 운문작업을 맡았고, 그의 남편인 로버트 홀랜더가 내용이 정확한지를 감수하였다. 42년 간 <<신곡>>을 가르친 프린스턴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단테 학자인 그가 주해를 달았다.
 
단테 시의 근사하며 영예로운 각운구성은 3운 구법terza rima — aba, bcb, cdc —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를 운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잔인할 정도로 어렵다. <<신곡>>을 영어로 된 3운 구법으로 다시 만들기 위해 계산을 해보면, 세 음절을 포함하는 각운이 대략 4천 5백 개 필요하다. 거의 모든 단어가 모음으로 끝나는 이탈리아어로는 이 정도의 음절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이것은 영어로는 거의 불가능하며, 3운 구법으로 번역하면 터무니 없이 억지로 만든 각운이 잦다고 생각 될 것이다. 일부 번역자들은 aba, cdc로 — 달리 말해서, 3개가 아닌 2개의 각운으로 — 절충하는데, 단테의 텍스트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진 홀랜더는 더 큰 타협을 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운이 없는 시 — 각운이 없는 약강 5보격의 시 — 를 선택한 것이다. 운을 맞추어야 하는 수고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는 오히려 단테의 표현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번역은 시이고, 시처럼 들린다. 로버트 홀랜더는 이 번역이 싱클레어(John D. Sinclair)의 1936-46년 산문 번역본(이 번역본이 내가 학생시절에 선택한 자습서이다)에 크게 빚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겸손해 하고 있다. <<천국>>의 도입부에 대한 싱클레어의 번역을 보자.
 
만물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영광이 우주에 스며들어서, 어떤 곳에서는 많이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는 적게 비춘다. 나는 그분의 빛을 가장 많이 받는 하늘에 있었고 그리고 그 위에서 내려오는 이라도 다시 말할 지식이나 능력이 없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지성은, 원하는 것에 가까이 갈수록, 너무 깊이 빠져 기억이 그것을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진 홀랜더의 번역이다.

만물을 움직이는 그분의 영광이
우주에 스며 들어가 비춘다
어느 부분에서는 많이, 또 다른 부분에서는 적게.
 
나는 그의 빛을 더 많이 받는 하늘에 있었으며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온 이는
그가 본 것을 알 수도 말 할 수도 없었으니,
 
이는 원하는 것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지성이 너무 깊게 빠져들어
기억이 그것을 좇아갈 수 없어서이다.
 
그가 선택한 단어들 대부분이 싱클레어의 단어를 되풀이하고 있지만 그의 영어가 더 읽기 쉽고 (그가 “나는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온 이를 보았다I saw things which he that descends”를 어떻게 풀어서 표현했는지 보면) 더 예술적이다. 그는 노래하고 있지만 싱클레어는 그렇지 않다.
 
<<천국>>편에서 이런 아첨이 기꺼이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신곡>>의 세 편 혹은 송가 중에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신곡>> 전편은 우화(allegory)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스콜라 철학자들이 중세 말에 성서와 초대 교회의 교부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뽑아내어 고도로 체계화한 신학의 상징적 재현이다. 그러나 <<천국>>편에서는 이러한 우화가 <<지옥>>편이나 <<연옥>>편보다 더 적나라하다. 단테의 시대에 그리고 그 후 수세기 동안 시를 읽는 독자들(학식 있는 자들로 대부분 성직자들)은 우화에 익숙하였고, 우화가 독자들을 생각하게끔 만들기 때문에 유익한 교육수단이라 생각했다. 보카치오가 그의 <<단테의 생애>>(1374)에서 “수고하여 얻은 것이 더 달콤하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18세기 초 이래 — 즉, 유럽인들이 단테의 주제였던 믿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이래 — <<신곡>>을 우화와 “시”의 “이중적”인 측면에서 논의하는 전통이 있었다. 여기에서 제안하는 것은 우화는 반(反)시적이며 수고로 얻은 것은 수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으로 가장 잘 알려진 현대의 글은 철학자 크로체(Benedetto Croce)가 1921년 쓴  <<단테의 시>>이다. 크로체는 상당한 정도로 <<신곡>>의 일부인 우화가 “시가 아니라”(non-poesia)고 단언했고, 이를 조롱하였다. 실제로 그는 신성시되는 <<지옥>>의 도입 행을 비웃었다. 그는 “우리는 숲이 아닌 숲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태양이 아닌 태양을 바라보며, 야생동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야생동물 세 마리를 만나며, 그 중 가장 사나운 것은 먹어 치우려는 탐욕으로 비쩍 말랐으며, 우리는 어떻게 하여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크로체가 간파했듯이 이는 우화이다: 상상이라는 용광로를 거치지 않은, 힘에 넘치는 형상이나 감성적 진실로 — 즉 시로 — 전환되지 못한 것이다. 시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지만, 우화는 주해를 보기 위해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런데 독자들, 특히 처음 읽는 독자들은 주해를 들춰 보지 말아야 한다. 크로체는 독자들은 우화를 그냥 무시하고,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 종교적 상징주의가 아닌 단테의 진정한 시적 재능인 힘참과 감정을 드러내는 “서정시들”의 모음으로 <<신곡>>을 즐겨야만 한다고 말했다.
 
크로체의 저서는 이탈리아 문학계에 떨어진 폭탄처럼 여겨졌고 — 피란델로(Luigi Pirandello)는 이 책에 대해 분노에 찬 서평을 썼다 — 몇몇 사람들에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책임한 글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20세기 초의 시론에 대한 어느 정도로 정확한 반영이다. (수사학이 이미지로 — “말하는 것”이 “보여주는 것”으로 — 대치된 것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엘리어트(T.S. Eliot)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주장한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신곡>>에 대한 후기 저술의 배후에서 팔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단테 비평가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는 1946년 그의 책 <<미메시스>>에서 <<지옥>>편의 피렌체 귀족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에 대한 묘사가 심리적으로 매우 강력하여 <<신곡>>의 신학 체계 내 (이교도의 실례로서) 파리나타의 위치가 별로 중요치 않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형상이 신의 형상을 무색하게 하였다.” 여기에 다시 또 이중성이 있게 되는데, 이는 우리는 아무런 신비감도 없이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우어바흐는 계속해서 <<신곡>>의 파리나타와 다른 위대한 이야기꾼들에게 “생의 충만함이 너무 풍부하고 강력하여 이의 표현이 독자들의 영혼이 어떤 해석에도 의지하지 않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1929년 단테에 관한 책 (뉴욕 서평New York Review Books에서 최근 재출간하였다)에서 유사한 지적을 하고 있다. ‘단테, 세속적 세계의 시인Dante, Poet of the Secular World‘이란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구체적인 것에 대한 동일한 선호도를 물려받은 현대의 독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송가인 이 <<지옥편을 좋아할 것이다. 또한 <<연옥>>편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연옥에서 순례자는 지옥에서만큼 감정을 자극하는 만남을 갖지 못하지만 몇몇 만남을 갖는다. (<<신곡>>의 주인공 — 지옥에서 천국으로 여행을 하고 이 여정을 이야기하는 사람 — 은 분명히 자서전적이지만 그가 시인과 동일한 사람은 아니다. 때때로 그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통상적으로 “단테”라기보다 “순례자”로 불린다.) 게다가 <<연옥>>편의 감정적인 세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자신들의 죄를 유감스러워하며 고통에 처해 있지만 — 그들은 화염 속이나 이와 유사한 곳을 걸어야만 한다 — 천국으로 가는 도정에 있으며 그들의 동료들도 그들과 같이 가고 있으므로 행복하다. 감정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우애 또는 세속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사랑과 지혜의 혼합이다. 이러한 부드러운 감정의 영역이 단테의 본령은 아니나 — 그는 고통과 환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 그러한 감정들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고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천국>>의 감정들은 이렇지 않다. 단테는 천국이 어떤지 몰랐으나 바로 그 정의에 의해 갈망이나 고통이 없을 것임을 알았다. <<지옥>>편을 읽노라면, 순례자가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데, 이는 바위의 경사와 틈새, 피바다, 빙산, 뜨거운 모래 위를 건너야 하는 너무나 어려운 여정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빛의 단계들을 통과하는 것이 그가 가는 여정의 전부이고 그는 이를 쉽게 건넌다. 지옥에서는 저주받은 이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한다. 한 영혼은 그에게 “나의 아들이 아직 살아있는가”를 묻는다. 다른 영혼은 “내게 로마냐가 전쟁 중에 있는지 평화로운지 말해주시오”라고 말한다. 그들이 새 소식을 원치 않는다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한다. 파리나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오디세우스, 우골리노 백작 그리고 다른 이들이 들려주는 매혹적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홀랜더의 표현처럼 <<신곡>>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겠지만 <<천국>>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 열한 사람이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며 이것 또한 짧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평균 열 네 줄이다. 지옥에서는 우골리노 혼자 일흔 두 줄에 걸쳐 이야기를 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들의 이야기가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 것인데, 이들은 아무런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서 영혼들은 울부짖으며 소리치고 신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다. 천국의 영혼들은 평온하다. 그들 중 한 명인 피카르다가 순례자에게 말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진 것 이외의 어느 것도 원치 않는다.
 
세상의 사악함에 대한 비난 외에 이 영혼들은 천국 밖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별 감흥이 없다. 우리는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게된다. <<지옥>>편의 앞 부분에서 순례자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이 어떻게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말해준다. 단테가 청년시절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 — 그가 학자들이 실존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라면 단테와 동갑이었던 그는 스물 다섯 살에 죽었다 — 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내려와서 (이교도였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단테를 자신에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였고, 베르길리우스는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베아트리체에게 천국의 평화에 익숙한 그가 지옥에 내려온 것이 두렵지 않았는지 물어본다. 그는 활기차게 “전혀”라 대답한다. 그가 천국에 갔기 때문에, 신은 그의 자비로움으로 저주받은 이들의 고통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그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순례자와 재회한 이후로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그의 관계 역시 대체로 (홀란드의 단어로) ‘개인을 넘어선 것'(post-personal)이다. 순례자를 천국과 연옥에 데리고 다닌 후 베르길리우스가 그를 베아트리체에게 넘겨 주고 다시 그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의 에피소드는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서글퍼한다. 그러나 베아트리체가 순례자를 천국의 정상에 데려간 후 그를 떠나는 시점의 장면은 그것의 삼분의 일 분량이고 이별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냉담해 보인다. 방금 전에 베아트리체는 순례자 옆에 있었는데 그는 이제 가 버린 것이다. 그가 위를 보니 축복받은 이들 중에 신을 우러러 보며 앉아 있는 그녀가 있는 것이다. 그는 베아트리체가 되돌아오길 원하여 그의 행복을 시기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다 괜찮다.
 
그러나 우리는 괜찮지 않다. 우리에게는 크로체가 쓴 것처럼, “슬픔에서 태어나 슬픔으로 되 돌아갈 운명인 실제의 기쁨 또는 일부는 어두움으로 어두움과 싸워야 하는, 그것을 정복하고 부분적으로 그것에 의해 정복되는 빛을 상상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즉 우리는 중간의 비극적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천국>>편 역시 그렇지 않다.
 
이 어두움의 결핍이 시적으로는 천국의 감정적 삶에서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곳의 영혼들은 모두 다 자비롭다. 순례자가 화성천에 도착할 때 영혼들은 “아, 여기에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킬 자가 있다!”고 외친다. 금성, 화성, 그리고 목성천의 영혼들이 그를 보며 기뻐할수록 그리고 그들의 인사말들이 쌓일수록 우리는 지옥에서의 절규와 방귀가 조금 그리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순례자의 베아트리체와의 사제관계 역시 우리를 지치게 한다. 베아트리체는 “나의 오류가 없는 의견으로는” 이라고 말을 시작한다. 그는 “자… 되돌아가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겠는데” 라고 말을 잇는다. 순례자는 그의 오류가 없는 의견을 결코 의심치 않으며 단지 점점 더 커지는 존경심으로 그의 의견을 구할 뿐이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베아트리체는 스콜라 신학의 전 과정을 순례자에게, 그에따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천국>>편은 우리의 생각을 구원으로 향하게 할 단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였으며, 그는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였다. <<지옥>>편과 <<연옥>>편에서 그는 대부분 사례를 들어 우리를 가르쳤고 이 사례들은 천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죄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 그는 더 이상 우리를 아처럼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보조자들은 신학을 단도직입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미리 예정되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예수의 십자가 매달림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신의 손으로 창조된 것들이 그의 피조물들이 만들어 낸 것과 어떻게 다를까? 왜, 언제, 어떻게 신은 천사들을 만들었을까? 당신이 신에게 어떤 것을 바치기로 맹세했을 때,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있을까? 최후의 심판에서 천국의 영혼들은 자신들의 육신을 돌려 받을까? 설명이 때때로 은유로서 감화를 주나, 대부분의 설명들은 관념적이다. 교훈은 길게 느껴진다. 단테는 우리가 이를 어렵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아트리체가 이를 “먹기 어려운 음식”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확신을 가진 중세 기독교 신자였으며 위험에 처한 것은 우리의 불멸할 영혼들 — 우리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을 수도 천국에 있는 성자들과 합류할 수도 있다 — 이라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정보들을 열망할 것을 바랐다. 어느 시점에서 단테는 그가 지금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열망”의 상태로 내 팽개쳐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오늘 그 점에 대해 의사표시를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우리는 <<천국>>편을 읽어야만 한다. 이야기의 처음 삼분의 이를 읽고 어떻게 끝까지 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우리의 종교적 성향이 어떠하든 간에 가장 체계화 된 형태의 기독교에 대해 배우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니다.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는 스콜라철학적인 종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를 알지 못하고 유럽의 과거를 이해할 수는 없다.
 
<<천국>>편을 읽는 문학적 이유도 있다. 더 없는 기쁨은 천국이다. 단테는 불꽃과 장미, 강과 무지개 등 장엄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천국의 빛은 “모든 곳에 반짝이며, /화염에서 흘러 나오는 쇳물처럼” 보인다. 피조물은 “다른 항구들을 향해/대양의 광대함 위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의 독자들은 단테를 이러한 장엄함이 아니라 그 반대, 즉 간결함, 속악함, 활력과 같은 크로체가 칭송하고 있는 성향들 때문에 사랑하며, 우리는 <<천국>>에서도 여전히 그의 이러한 면을 본다. 단테는 어느 지점에서 인간이 화염 속에 있을지라도 베아트리체의 미소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경우에 영혼은 순례자에게 항상 진실을 말할 것을 조언하나, 사람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가려운 자가 긁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성의 주요한 원천은 은유이며 가장 훌륭한 예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신곡>>을 저술할 때 단테가 속한 당파가 패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고향인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때로는 베로나에서, 때로는 로마냐 혹은 라벤나에서 친구들과 지내야 했다. <<신곡>>은 그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기 2년 전인 1300년에 일어나는 이야기며, 천국에서 그의 고조부 카차구이다는 그의 추방을 예언한다. 카차구이다는 그가 다른 사람의 빵이 얼마나 짠지, 그리고 남의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길게만 여겨지는 계단, 이상한 맛의 빵보다 더 단순하며 구체적일 수 있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홀랜더는 오늘날까지도 피렌체의 제빵업자들이 빵을 구울 때 소금을 넣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비평가들은 얼마나 많은 세상사가 상상의 내세인 [[신곡]]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감탄한다. 천국에서 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눈이 내리고 태양이 새벽안개를 증발시켜 없애버린다. 시계가 종을 울려 시간을 알린다 (유럽문헌 중에 처음으로 기계장치로 된 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젖먹이가 젖을 먹고 돼지들과 개들은 본연의 일을 한다. 순례자는 사원 — 그가 여행하기로 서약한 장소 — 에 도착하여 그가 귀향한 순간 이웃들이 모든 것을 알고자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 안의 여기저기를 탐욕스럽게 쳐다본다. 이 결말은 이미지 이상이다. 그것은 작은 이야기이다.   
 
삶의 이러한 단편적 묘사들 중 일부는 태양이 안개 속에서 타오르는 것만큼 단순하거나 서정적이지는 않다. 그 대신 복잡한 정신적 과정과 연루되는데, 이는 단테가 우리를 데리고 통과해야만 하는 것으로 목소리를 낮추어야 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연옥>>편에 경탄할 만한 예가 있다. 연옥으로 가는 문에서 천사는 순례자의 이마에 일곱 개의 “P”자(일곱 개의 큰 죄를 가리키는 peccati)를 새긴다. 각 산의 선반에서 그는 죄를 하나씩 대리로서 속죄할 것이고 그러면 ‘P’자가 한 개씩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맨 처음 P자가 없어졌을 때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머리 위에 이고 가다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손을 올려 왜 그런지
찾아보고 알아냄으로써
눈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했다.
 
이빨에 시금치가 끼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단테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경험을 알아챌 것이지만, 나는 이런 방식이 이전의 유럽 시에서 사용되었던 적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며 읽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천국>>편에서 단테는 태양천의 영혼들이 어떻게 그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었는지 들려주며, 우리에게 여인들을 생각하라고 청한다: “여인들이 춤을 출 자세를 갖춘 채, /말없이, 멈추어 서서, 새로운 음악이/ 들릴 때까지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얼마나 어여쁜 광경인가: 파티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무도회장에서 다 함께 멈추어서 새로운 음악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 우리는 머리를 위로 쳐들고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것이다. 이들은 태양천의 영혼들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예는 단테가 어떤 진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준비하는 베아트리체를, 그녀의 어린 것들을 위해 나가서 음식을 구할 수 있게 태양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는 밤의 끝자락의 새에 비유한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밤이 새도록
그녀의 귀여운 새끼들의 보금자리에
앉아 있는 새처럼,
 
새끼들의 눈과 부리를 바라보기 위해
그들에게 먹일 먹이를 찾기 위해
힘겨우나 그녀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달가워
 
때 이르게 탁 트인 가지 위에서
열렬한 애정으로 태양을 기다리며,
새벽이 밝아 오기를 여념 없이 바라보는…
 
나는 위의 도입구절에 이어 베아트리체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잊어버렸으나, 태양을 가리는 잎사귀들을 피해 (이는 아주 중요한 세부묘사이다) 가지 밖으로 움직이는 어미 새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천국>>편에서는, 이런 탐색하는 은유들이 증가하는 것 같은데, 이는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단테의 불안 때문이다. 이미 서두의 구절에서 그는 자신이 천국에서 본 것은 표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 점을 거듭 지적한다. 그는 단테 학자들이 “화해하는 은유accommodative metaphors”라 부르는 것을 고안함으로써 이 문제를 그가 할 수 있는 한 해결하였는데, 이 은유는 그가 의도하는 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하면서 어떤 종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 의도에 적응하게 한다. 이런 예들은 세 번째 송가 전편에서 정신적 과정을 거치는 은유들과 중첩되면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사례들에는 <<천국>>편의 비애감이 놓여있다. 천국의 영혼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지 않으나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단테이다.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이 창작해내고 있는 것은 단지, 노련한 단테 학자인 프레체로(John Freccero)의 표현에 따르자면, “침묵을 결여한 타협”이라는 점을 매 순간 인식하고 있었다. 순례자가 엠피레오에 도착한 마지막 곡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나사가 꽉 죄어졌다. 천국의 더 낮은 곳을 묘사하기 어려웠다면 어떻게 그는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는 광경이 너무 눈이 부셔 기억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즉시 화해하는 은유를 시작한다: “꿈꾸는 사람들처럼, 그가 깨어 난 뒤에, /아직 꿈으로 인해 일어난 감정에 취하여/ 꿈의 나머지를 마음에 불러 올 수 없었다.” 그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여 태양처럼 매우 밝게 빛나는, 그러나 태양은 아니어서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되는 환영을 기억해 낸다. 사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이는 그에게 매우 큰 행복을 주었다. 그것은 우주의 뜻을 이해한 것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은유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사적인 것으로 그가 라벤나의 책상에서 막 끝낸 바로 그 책에 관한 것이었다. 빛의 심연에서 그는 “우주에 흩어져 있는 페이지들”이 사랑에 의해 한 권으로 묶이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이전에 느끼지 못했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시인이다. 그는 짧은 그리고 아마도 가장 근사한 또 다른 은유를 사용한다.
 
그 순간의 나의 기억은
아르고의 그림자를 포세이돈이 깜짝 놀라
바라본 위업 이후
25세기가 흐른 것보다 더 잊혀져 갔다.
 
그렇게 나의 온 마음을 빼앗긴 채,
응시하였다…
 
어떤 이미지를 서술하려고 했는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학자들은 여전히 이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이미지에만 주목하라.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용사들은 건조한 최초의 배를 타고 황금 양털을 가져와야 하는 위험한 임무를 띠고 대양을 항해하는 중이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해저에서 올려다 보았다. 측정할 수 없는 깊이를 뚫고 그는 그림자 — 배 — 를 보았고 그것에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는 신이었지만 이와 같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인해 우리는 단테가 자신이 하느님에게 다가갔을 때의 느꼈을 놀라움을 우리에게 알아달라고 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에 다른 어떤 것이 있는데, 단테는 그 자신이 놀라움에 대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점이다. 아르고처럼 순례자는 다른 어떤 이도 맡지 못했던 임무를 가지고 광대한 푸른 심원 (천국)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시인도 <<신곡>>이 재현하는 상상의 여행을 할 만큼 그리 야심적이지 못했다. 단테는 작은 배를 본 고대의 신처럼 기독교의 신이 시인의 항해를 보고 놀랐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신성모독 — 신은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으며, 모든 것의 운명을 정한다 — 이겠으나, 단테는 매우 자신만만한 예술가였다. 어쨌든 이것은 서양 시에서 경이로운 것에 대한 가장 놀라운 행위일 것이다.
 
시인은 이제 그가 신에 대한 기억으로 되돌아 간다. 그는 고귀한 빛 안에서 다른 색깔의 그러나 같은 크기의 세 개의 원을 본다. 현실적으로는 원이 같은 크기라면 가장 위에 있는 원의 색상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있지 않으며, 삼위일체 중 어떤 하나가 최고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또한 실망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원이 세 개란 말인가? 그렇게 쌓아 올린 후에? 단테는 그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오 말이란 얼마나 빈약한가”라며 호소한다. 그리고 나서 그의 빈약한 말로 더 높게 뛰어 올라 황홀경에 취한 세 구절에서 원들에 대한 환영보다 더욱 강력하게 자신을 감싸는 기적을 짜 맞춘다:
 
오, 영원한 빛이여, 홀로 당신 안에 있고,
홀로 깨달으며, 그리고, 스스로 이해되고
또한 스스로 이해하면서, 사랑하고 미소 짓는구나!
 
갑자기 그는 원안에서 어떤 것을 본다: “la nostra effige”, 우리의 모습 즉 인간의 얼굴이다. 이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한 예수이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얼굴이 원에 어울릴 수 있을까? 그는 이를 알아낼 수 없었으며, 그의 마지막 은유로서 우리의 주의를 기하학의 그 유명한 풀리지 않는 문제 — 원의 면적 구하기 — 로 돌리게 한다. 당신은 원을 측정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며, 인간의 모습을 신과 관련지어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 이 시에서 순례자가 신을 대면하면서 일어나는 바로 그 행위 —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인데, 그가 자신에게 해답을 주는 벼락을 갑작스레 맞지 않았었다면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은유를 들 수 없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그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의지와 욕망은,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다른 모든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지옥>>편과 <<연옥>>편에서처럼, <<천국>>편도 “별”이라는 단어로 끝난다. 순례자는 천체를 여행하면서 아직도 천국에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지구로 돌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세 구절은 음률과 표현이 부드럽다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 그가 잠이 들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시 엄청난 체험 후에 잠자리에 들 것 같은 기분이다.
 
<<천국>>편이 다 이렇지는 않지만 —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 — 일부는 이렇고, 여러분들은 결말을 보기 위해 나머지도 읽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로버트 홀랜더는 텍스트에 비해 거의 30배가 넘는 길이의 주해를 달아 놓았다. 이제 이 시를 읽기 위해 주해가 필요할 것이다. 단테는 성서와 라틴어로 된 문헌을 완벽하게 알았고 우리 역시 이 저서들을 잘 알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논리적 관련 없이 이 저서들을 인용하고 있다. 대부분 우리는 이 저서들을 잘 모르고, 따라서 베아트리체가 경솔한 서약 — “그가 처음 본 것을 바치겠다고 한 입다(Jephthah)”처럼 — 은 하지 말아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판관기] 11장에서 암몬인들을 쳐서 이길 수 있다면 그의 대문에서 나온 그가 처음 본 것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한 히브리 용사 입다에 대해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입다가 승리를 거둔 후 그의 집에서 처음으로 나온 것은 그의 외동딸이었으며 그는 신앙심 깊게 그녀를 죽여야만 했다. 이는 끔찍한 이야기이며, 경솔한 서약에 대한 적절한 경고이다. 이런 내용을 아는 것이 우리가 시를 음미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구절에 대한 홀랜더의 주해에서 매우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홀랜더는 단테가 딸을 살해하는 성서의 이야기와 아가멤논이 이피게니아를 희생시키는 고전의 이야기를 혼합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알기 바라며, 그는 시인이 이러한 성서/고전의 쌍을 다른 곳에서도 시도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가 입다의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는 “서약”이라는 단어가 이전의 세 개의 곡에서 몇 번 사용되었는지 (일곱 번이다) 말해주고 있다. 그는 “mancia” 혹은 “제물”이라는 단어가 “심한 공격”이란 뜻도 가지고 있음을 써 두었다. 존경 받을만한 동료로서 그는 가장 먼저 누가 이 단어를 말했는지를 — “보스코/레지오 Bosco/Reggio”(제5곡 66절) — 그리고 그들이 다른 것들도 말했는지, 예를 들어, 아퀴나스 역시 입다를 인용했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피게니아로 말하자면, 홀랜더는 그녀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단테가 입다의 불행한 딸의 이야기와 이피게니아의 이야기를 혼합시켰다는 점을 덧붙였다: “단테는 자신이 처녀로서 죽는 것에 대한 슬픔을 산에 가서 애곡하는 입다의 딸의 눈물을 (판관기 11:37-38) 이피게니아의 볼로 바꾸어 놓았다. Torraca를 보라 (제5곡 70-72절)”. 이러한 주해를 다 읽는 시점이면 우리는 입다의 서약이 무엇이었는지 알고자 했다는 점마저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거의 모든 시 구절이 이렇게 취급되고 있다. 홀랜더의 목적은 우리에게 <<신곡>>의 저술에 기여했을, 단테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무엇보다도 그가 읽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홀랜더는 단테가 선택한 단어에 관심이 있다. 그는 단어가 hapax (이 송가에서 단 한번 사용된) 혹은 3-hapax (<<신곡>>의 송가 한 편에서 한번만 사용된), 혹은 “완전한 hapax” (이탈리아 문헌에서 단 한번 사용된)로 사용되었을 때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단테가 실수를 한 때도 알려주고 있다. (<<천국>>편에서 1072년에 죽은 성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추기경으로 붉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추기경은 13세기가 되어서야 붉은 모자를 썼다.) 그는 시인이 정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나 있음을 환기시켜준다. 베아트리체가 서약을 지키기 위해 대리물을 바칠 수 있다고 했으나 그것은 서약한 제물의 반 정도의 가치를 지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1904년 단테가 가치를 올려놓았다고 지적한 학자를 인용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5분의 일만큼 그 가치가 증가하나, 단테는 이를 2분의 일로 올려놓았다.”
 
단테는 생전에도 유명했으며, <<신곡>>에 대한 주해작업은 그가 1321년 (라벤나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한 후 곧바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700년에 가까운 학문적 업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홀랜더가 중요한 연구자들을 다 인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것 같아 보인다. 이 주해 부분이 재미있어질 것이다. 역사적 시기와 상관없이 학자들 모두가 한 방에 모여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도용하고 있는 훌륭한 스카르타찌니(Scartazzini)가 있다. 저기에 홀랜더가 어려운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불려간 믿음직한 토쩌(Tozer)가 있다. 여기에 단테가 동성애자라고 생각한 최근의 덜링(Durling)이 있다. 저기에 성실한 다니엘로(Daniello)가 — 그는 커다란 종이와 함께 생각이 난다 — 단테의 엠피레오에서 축복받은 영혼들이 앉아 있었던 장미 모양의 공간의 면적을 계산해 내려고 하고 있다. 고상한 체 하는 여성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단테는 어떻게 성 베르나르두스가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 시 그녀의 “자궁”에 대해 말하게 했단 말인가? 그는 더 좋은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단 말인가?) 광신자들도 자신들의 말을 하고 있다. (엠피레오에 기독교도들보다 유대인들이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국가별 팀을 이룬다. 단테 사상에 있어 비정통적인 부분을 미국의 논평자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탈리아 논평자들은 이에 대해 근심한다. 싸움이 시작된다: “가브리엘(10절)이 최초로 누가의 관찰에 대해 다소 의문을 표명하였다. 롬바르디아는 심장에 못을 박았다.” 홀랜더는 때때로 논쟁자들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해석으로 가슴에 못을 박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어떤 학자는 “터무니없는 오독”을 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는 “어리석은 의견”을 내고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비호감인들로 부각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르디(Nardi)는 계속하여 실수를 지적 받는다. 싱글톤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경우에는 세심한 예의를 갖추어 인용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싱글톤(Charles S. Singleton)의 풍부한 주해를 단 <<신곡>> 번역판은 틈새 시장을 — 홀랜더 번역본의 대상인 고급과정에 있는 학생들 — 점령하였다. 홀랜더는 심지어 학생들의 글도 인용하고 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4년 전에 은퇴하였다. 이러한 주해들은 그의 선생으로서의 경력에 대한 집대성이자 고별사로 읽힌다.
 
이와 같은 주해는 그 범위가 너무 광대하여 단테에 대한 통일된 비판적 관점을 내놓을 수 없어 보이는데도, 홀랜더는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단테 비평가가 근본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한다. 한 부류는 낭만주의자들로 우화를 고려하지 않고 <<신곡>>을 자신들의 영감으로 읽을 수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다. 크로체가 가장 중요한 본보기일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에 반대되는 부류는 단테의 세계를 그가 보았듯이 보아야 한다는, 따라서 시를 우화에 일치시켜야 한다는 이들로, 홀랜더가 중요한 전형적 인물일 것이다. 그의 경력은 단테의 우화를 설명하고 방어하는데 바쳐졌다. 신학적 하부구조를 무시하는 이들은 이 시에 대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홀랜더는 크로체가 많은 독자들(나는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처럼 오디세우스를 영웅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크로체와 현대의 다수의 독자들은 요부 프란체스카 다 라미니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다. 홀랜더가 고통에 차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베아트리체보다 프란체스카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홀랜더는 이것은 매우 틀린 것으로 그의 주해에서 단테가 그의 이야기 구조에서 프란체스카와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명확한 죄를 지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사기꾼”이라고 주장한다.
 
우화에 대한 그의 주장은 오디세우스와 프란체스카를 넘어 서고 있다. 이것은 <<신곡>> 전편에 대한 어떤 태도, 즉 숭고한 태도가 된다. 이 시에서는 불안케 하는 그 어떤 것도 없고, 그는 아무 문제도 없고 아무런 긴장도 없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는 <<천국>>편의 많은 부분이 지루하다는 점을 대체로 인정한다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송가를 “시화된 신학”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독자들이 가장 “힘들고 달갑지 않게” 여길 곡이 어떤 곡(제2곡)인지에 대해 농담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그리고 우리가 <<천국>>편에서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들은 다 이유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베아트리체가 “교회학 박사처럼 들린다면” 이는 “바로 단테가 그녀에게 원하던” 바였기 때문이다. “천국에 다양함이 없다면” 이는 “축복받은 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주해를 읽는다면 역시 이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결국에는 홀랜더는 축복받은 이들처럼 말하고 있다. 그는 그가 가진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는다. <<신곡>>을 40여년 동안 가르친 후, 그는 단테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신을 좋아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피조물을 사랑으로 내려보는 신을 생각할 것을 청한다). 사실 그는 때때로 <<신곡>>이 허구의 작업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단테가 엠피레오에 도착했을 때 장미 계단의 착석 방식을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는데 — 히브리 어린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독교 어린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남성과 여성은 나누어서 혹은 같이 있을까? — 그는 거의 3 페이지 분량의 주해를 들어 문제점과 그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을 열거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시처럼 <<신곡>>도 다소 열린 결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편협한 시야는 우화를 옹호하는 입장의 깊은 뿌리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신곡>> 이후 7세기가 지난 우리가 단테의 관점이 어떠하였는지 명확히 말할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역사주의자로 보이나 이는 실상 비역사주의자로 모든 지식의 역사성,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항상 우리의 시대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를 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위하여 단테의 관점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상 우리의 가슴과 마음이 <<신곡>>을 읽기 충분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신곡>>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비평가인 카르네-로스(David Carne-Ross)의 표현에 의하자면, 독자들이 시에 대한 일종의 진지한 체험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이어야만 할 때 이들에게 “중세 기독교인의 화려한 드레스와 예복을 빌려 입고” 시를 읽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홀랜더의 주해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사실들보다 비전(秘傳)을 더 좋아하고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누려 하는 학자들과, 특히 대학원생들을 위한 것이다. 입다의 서약에 대한 그의 풍부한 주해에서 당신이 발견할 수 없는 단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으로, 입다의 서약이 무엇인가 이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보스코/레지오에 사로잡혀 홀랜더는 이를 언급해야 함을 잊어 버렸다. 다른 경우에도 그는 필요한 정보를 주는 것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홀랜더의 번역본은 현재 시중에서 가장 우수한 번역본이다. <<신곡>>을 읽으려 한다면 이 번역본을 사라. 그리고 키아르디(John Ciardi)의 번역본 (Signet에서 나온 페이퍼백) — 좋은 책이기는 하나 홀랜더의 책만큼 훌륭하지 않은 — 을 위해 22달러를 쓴 후 이 책의 훌륭하면서 비상식적이지 않은 주해를 이용하라. 키아르디는 입다의 서약이 무엇이었는지 알려 줄 것이다. 몇 개의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에서 그는 홀랜더의 주해에 동의하지 않는데, 홀랜더가 옳다고 해도, 단테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교황이 보니파티우스 8세였는지(키아르디) 혹은 요한 22세(홀랜더)였는지 신경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모든 구절을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베어울프>>를 제외하면 <<신곡>>은 당신이 언제까지라도 읽을 수 있는 기독교 시대의 가장 오래된 시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까지 쓰여진 시들 중 가장 야심적인 작품일 것이다. 성 바울로는 살아 생전 우리는 희미하게 볼 뿐이며 이후에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단테는 우리에게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려 하고 있다. 때로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출처: The New Yorker, 2007. 9. 3.

번역: 라티오 출판사

[[리바이어던]] 그때와 지금
Peter Berkowitz
 
현대에 있어서 홉스의 걸작이 갖는 중요성
 
비교적 최근까지 정치와 사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체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영어권의 탁월한 정치철학 저서로 여겼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사이 정치학과 철학과 교수들은 홉스의 이 걸작을 책꽂이 뒤쪽으로 대부분 밀어 넣고 있다. 이들은 기껏해야 [[리바이어던]]을 역사적 산물로 볼 뿐인데, 이는 권리에 근거한 진보적인 복지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칸트 철학에서 영감을 받은 이론들 — 그 전면에는 롤스 추종자와 하버마스 추종자가 있다 — 이 전개되는 과정 초기에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며, 이들이 학계의 교육과 연구를 장악하고 있다.

홉스의 걸작을 이렇게 격하시키는 것은 부당하며 [[리바이어던]]를 이해하는데도 방해가 된다. 이러한 격하는 오늘날의 정치사상 학자들에게는 일반적인 생각, 즉 혼돈과 실수의 천 년을 보낸 후 마침내 그들이 정치에 관한 완결적이며 적절한 — 혹은 곧 완결될 것이며 거의 적절한 — 이론적 연구방법을 만들어 내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또한 그들이 즉각적으로 관심을 갖는 쟁점들은 윤리적이며 정치적 중요성을 갖는 것인 반면 그들 이전의 사상가들을 사로잡았던 쟁점들은 기껏해야 골동품 수집상의 흥미 정도에 그친다는 믿음에 근거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수들이 조금이나마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관심을 갖는다면 — 다른 고전적인 정치철학서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면 물어보는 것처럼 — 그들은 게으르게도 이 저서가 어떻게 당대의 의제를 예측했는지 또는 예측하는데 실패했는지 물으려 한다.

오늘날의 방법론적 학설들과 도덕적 맹목에 의해 희미해진 대안은 [[리바이어던]]을 텍스트 자체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며, 이는 열린 마음으로 그 책의 가정과 논증에 다가가서 홉스의 의제가 마땅히 흥미로울 것이라는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홉스의 의제에 대한 관심이 [[리바이어던]]과 당대의 관련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이다. 홉스를 그의 관점에서 읽는 것은 도덕과 정치에 관한 오늘날의 관점에 선동적으로 대항하는 자, 즉 우리가 갖고 있는 권리의 근거에 대해 널리 공유되고 있던 가정들에 도전하고 피지배자의 동의를 토대로 한 사회의 정치적 권한의 범위에 대한 통상적인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동시에 자유주의적 국가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을 보완하는 입장과 조우하는 것으로, 이는 최상의 삶에 대한 각기 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해하는대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며 이성을 따르는 정치적 질서를 위해 명백하고 강력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상가를 그 자신의 관점에서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는 분명 논쟁의 여지가 있다. 홉스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하고 있는 소수의 학자들 중 대부분은 홉스가 살았던 그리고 저술했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옳은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홉스가 [[리바이어던]] 제1부와 제4부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에, 그리고 제3부에서 진정한 정치적 원리의 기원을 성서에서 이끌어 내고자 기울인 지적 노고에 당황할 수도 있는데, 이는 그가 매우 깊은 청교도적 정치적 문화권 속에 살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홉스가 이 지배적이었던 청교도적 믿음을 혁신적으로 해석하고 이들의 토대를 약화하는 자연세계와 인간본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해도 그는 이 믿음에 대해 복종해야만 했다. 홉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에서 그가 표적으로 삼은 대부분의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에 나오는 학설들이라기 보다 수세기 동안 잉글랜드의 대학에 만연했던 부패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 제46장에서 홉스가 조롱조로 “아리스토텔레스 학Aristotelity”이라 칭한 — 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면 그의 이 비판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영국의 의회파와 왕당파간의 내전 시 그가 왕당파의 옹호자였지만, 의회지상주의뿐만 아니라 신권 군주제도 비판함으로써 양측 모두에게서 반감을 사게 되어 위험에 처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면, 그가 인간본성, 정치 그리고 궁극적인 문제들에 대해 퉁명스러움과 신중함을 적절히 혼합하여 저술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말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에 대해 아는 것 역시 유용할 것이다. 토마스 홉스는 1588년에 태어났고 1679년에 사망했으며, 청년기에 희랍어와 라틴어를 습득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한 아주 가치있는 연구로 간주하여, 1629년 이 책을 최초로 희랍어 원본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다음의 사실들을 아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홉스는 자신이 살았던 시기에 일어난 철학과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근대혁명에 매혹되었고, 베이컨, 갈릴레오, 데카르트와 교제하였다. 근대 철학과 자연과학을 토대로 한 그의 합리주의는 고전적 이성주의 뿐만 아니라 보편적 원리가 인간사를 규율하고 있음을 부인하는 근대의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대안을 새로운 과학에 바탕을 두고 의도하고 있다. 그리고 [[리바이어던]]이 고전적 기여를 한 권리에 관한 용어들은 17세기 잉글랜드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의 사실들을 아는 것 역시 매우 의미 있을 것이다. 홉스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1640년 파리로 도망쳤고 질서가 회복되자 1651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리바이어던]]을 출간했으며 (영어로 재출간 하는 것을 왕이 금지하여 극미하나 뚜렷한 차이가 나는 라틴어 판으로 1688년 출간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그가 인간본성에 대해 지나치게 무자비한 이론을 퍼뜨리고 있으며 무신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래서 교황청은 [[리바이어던]]을 금하였고, 옥스퍼드 대학 역시 이 책을 비난하여 태워버렸다. 잉글랜드 의회는 이 책을 당시에는 감옥에 갇힐 수 있는 신성모독으로 선언하는 결의안을 거의 통과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 — 대부분 지성사와 정치사적 사실들 — 이 홉스의 정치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잘 아는 것과 이러한 맥락에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은 매우 다르다. 홉스가 살았던 시대의 신문, 정치 팜플렛, 강론, 학술적 논문에 대한 주도 면밀한 연구가 [[리바이어던]]의 구석구석에 빛을 비춰주리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곧 [[리바이어던]]의 연구에 손상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니 오히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학자들이 역사적 맥락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삼는 경향을 드러내면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복잡한 논증을 이해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17세기의 끝없이 복잡한 정치사와 지성사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른바 맥락주의적 접근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홉스가 저술했던 맥락으로 상황을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홉스는 영국 시민전쟁의 양 진영의 당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평화와 번영을 보증받기 위해 원리들을 명료하게 표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정치적 권한의 근원과 범위에 대한 왕당파와 의회파의 입장을 고찰해 보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그러나 홉스는 양측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러한 원리들이 보편적이어서 모든 지역의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는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매력적임이 밝혀졌다. 홉스는 그의 시대의 생각들을 반영하기 보다는 이에 대한 수정을 제안했다. 또한 그는 당대인들의 편협한 주장과 잉글랜드 내전의 불확실한 양상들에 맞서기보다 자연, 인간본성과 정치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주장들을 [[리바이어던]]의 많은 부분에서 펼쳤는데, 이는 그에게 고전 정치철학과 기독교적인 것을 의미했다. 보편적 원리가 도덕과 정치를 결정한다는 고전 정치철학과 기독교에 동의하면서도 그는 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이 두 선행자들이 결함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잘못된 원리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간단히 말해서 홉스가 잉글랜드의 정치에 대해 당대 사람들과 벌인 다툼은 [[리바이어던]]이 벌인 더 크고 주요한 싸움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었는데, 이 싸움은 한편으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키디데스와 다른 한편으로 성서적 신앙과 벌인 것이었다.  

이러한 예비적인 사항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잉글랜드 역사만이 아니라 고전 정치철학과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도 통달해야 할 것이라는,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이러한 결론은 오해에 불과하다. 실제로 홉스의 사상을 이해하여 상당한 진척을 거두는 데는 역사와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만 있으면 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공부하기 시작 단계에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열쇠는 그의 말을 숙고하여 읽고 그의 논쟁을 끈기 있게 풀어보는 것이다. 

이는 맥락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맥락도 중요하다. 다행히 수세기가 지났는데도 우리의 상황은 홉스 시대의 상황들과 실질적으로 겹치고 있다. 홉스는 분명 민주주의자가 아니고 기껏해야 초창기 자유주의자이겠지만, 모든 인류의 자연적 자유와 평등이 당연시 되는 정치적 사회, 즉 우리가 보기에 당연히 존재하며 우리에게 당연한 혜택을 주고 알아서 자신을 돌보아 유지되는 정치적 사회의 형태에 대한 지적 토대를 쌓는데 기여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의 사상에 즉각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홉스의 가정이나 논쟁들이 친숙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가 서술한 가장 큰 맥락은 인간의 조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광범위한 학적 탐구 없이도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논쟁은 이 조건의 변하지 않는 특징에 관한 것이므로 자연, 신, 선과 악, 정념, 이성, 권력, 권한, 자유, 정의, 법, 덕, 복종 그리고 주권에 대한 홉스의 견해들은 정치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이 주의 깊게 읽고 자신의 경험이라는 조건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홉스가 영구적인 논쟁에 기여한 점은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그의 논증 전체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전체를 거부하기 매우 어렵다 하더라도 그의 논증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들 중 하나는 홉스의 생각이 당대 사상에 의해 억압되었으나 지속적으로 우리의 세계를 특징짓는 모호함과 긴장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견해들 간의 관계일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서문을 검토해보자. 이 부분에 홉스의 유명한 코먼웰스(commonwealth) 혹은 국가와 인공적 인간에 대한 비교가 나오며, 그는 이 둘의 작동방식을 기계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홉스는 정치에 대한 자신의 추론이 자연과학적인 추정이며 엄격하기 때문에 그의 선행자들을 넘어서고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그는 자연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종류의 전제에서 시작하여 윤리, 정치, 종교에 대한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자신의 추론을 가능한 한 엄격하게 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서문에서 “생명은 사지(四肢)의 운동일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제46장에서는 “우주의 모든 부분은 물체(body)이며 물체가 아닌 것은 우주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유물론때문에 그는 육체가 없는 존재 — 즉 본질, 영혼, 정신 — 에 대한 생각을 무의미한 것으로 거부하였고 신을 육체가 있는 존재로 재해석하였다.
 
따라서 홉스의 기계론과 유물론은 고전 정치철학과 기독교적 신앙과의 뚜렷한 단절을 낳아놓았다. 세상은 운동 이상이라는 생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그리고 성서적 신앙 모두에 핵심적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이 실체가 없는 형태 혹은 구조를 가졌다고 주장했으며, 이 형태 혹은 구조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을 넘어서는 이성이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욕망이 영혼의 구조에 따라서 이성으로부터 명령 받는 위치에 있으며 영혼의 구조 혹은 영원한 형태에 일치하는 삶이 가장 좋은 것이라 말했다. 영혼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한 성서적 신앙 역시 신은 타락한 인간에게 명령하고, 벌을 가하고, 회개를 권하는 역사에서 형체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선행자들과의 이러한 극적 단절은 [[리바이어던]]의 일부 –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나- 일 뿐이다. 그의 기계론과 유물론이 환원적인 함의를 갖고 있기는 하나, 홉스는 서문에서 윤리와 정치를 물리학과 기하학의 관점으로 엄격히 제한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가 오늘날의 정치학자들이 정치를 자연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야망에 도전하고 있으며 홉스와 그의 전근대적 선행자들간에 중요한 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홉스는 서문에서 그의 정치 이론의 자연과학적인 면을 강조하나 인문주의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정치적 지식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아는 능력에 근원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본적으로 소크라테스 철학에 기원을 둔 것이다. 홉스는 정치학 연구자는 인류를 움직이는 보편적 정념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물론 한 문화권 내에서 또는 이 문화를 넘어서 남성과 여성은 욕망하는 대상은 다르다. 이것을 소유하거나 혹은 저 자산의 일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이러한 공적 명예를 원하거나 혹은 저 개인의 사랑을 원하거나, 이러한 것들에 헌신한 삶을 원하거나 혹은 저러한 신념에 헌신한 삶을 원하거나 한다. 그러나 홉스는 인간의 능력 — 지각력, 상상력, 기억력, 이해력, 판단력 — 뿐만 아니라 정념의 형태나 종류 — 공포, 자만, 시기, 분노, 정욕 등과 같은 감정 — 가 보편적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형태의 정치적 사회가 필요하며 적합한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정념과 능력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념과 능력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요구되는 중요한 수단은 엄격한 새로운 자연과학이 아니라 옛날 방식의 부정확한 자기 성찰과 관찰이다. 정치학이 기초를 두는 핵심적인 사실들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정념과 능력이 작동하는 바를 읽어내야 하며 이러한 이해로 얻은 지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정념과 능력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추론해야 한다고 홉스는 주장했다. 자기 성찰은 인간을 움직이는 정념과 인간을 인도하는 능력을 발견하고 검증해내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가장 얻기 힘든 지식이며 정치학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홉스는 선언한다. 서론의 결론부분에 따르면, 이것이 정치 과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마지막 시험이다. “내가 자신에 대해 읽은 것을 정연하고 명쾌하게 적어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같은 것이 있는지 아닌지 만을 찾아보는 노력만 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이론은 달리 입증할 방법이 없다.” 

[[리바이어던]]의 핵심적인 주장은 홉스의 물리학과 그가 자기성찰을 통해 얻은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들 간의 상호작용을 드러낸다. 이를 알기 위해서 제6장, “보통 정념이라고 불리는 자발적 운동의 내적 발단에 대하여, 또한 그것이 표현되는 화법에 대하여”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이를 만족시켜주는 근원에 대해 탐구한 제11장, “생활태도의 차이에 대하여” 그리고 홉스가 자연상태와 전쟁상태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제13장, “인간의 자연상태, 그 복됨과 비참함에 대하여”에 나오는 핵심적인 요소들을 검토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홉스는 제6장에서 정념은 욕구와 혐오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설명하면서, 선과 악 그 자체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라고 선언한다. 
 
“선한 것, 악한 것 그리고 경멸스러운 것들이라는 이러한 말들은 항상 이 말을 하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그렇다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과 악의 일반적인 법칙은 대상 그 자체의 본성에서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코먼웰스가 없는 곳에서는) 그 사람의 인격에서 이끌어내며 혹은 (코먼웰스에서는) 이를 대표하는 인격에서 혹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동의하여 중재자나 재판관에게 결정을 하게 할 경우에는 이들로부터 이러한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선과 악의 일반적인 법칙이 대상 그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은 자기 성찰에 따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념과 능력의 작용을 아무리 주의 깊게 읽는다 해도 도덕적 기준이 인간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을지 없을 지 증명될 수 없다. 결론은 홉스의 유물론적 형이상학에서 도출되는데, 이는 인간은 자신을 옹호하지도 적응시키지도 못하는 도덕적 정치적 기준 혹은 목적을 배제하는 것이고 우리의 욕망이 영원한 어떤 것도 가리키지 못함으로 이 욕망의 만족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홉스는 제11장에서 “이 세상에서의 복됨은 만족된 정신의 휴식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고전적 기독교적 세계와는 달리 홉스의 세계는 인간에게 완결된 혹은 완전한 형태를 허용치 않으며 이 세상에서의 완결성 혹은 완전함에 대한 모사물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홉스는 완결 혹은 완전함이 왜 헛된 꿈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래 전의 도덕철학자들의 책에 나오는 궁극적인 목적(Finis ultimus)이나 최고 선(Summum Bonum)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다 한 사람은 감각과 상상력이 정지된 사람처럼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복됨이란 욕망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이행하는 것이며, 앞의 것을 얻는 것은 다음 대상으로 이행하는 도정에 불과하다. 인간 욕망의 목적은 단 한번 혹은 한 순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미래의 욕망에의 길을 영원히 확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족된 생활을 획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확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자발적 행위이고 자연적인 성향이다. 단지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데, 이는 사람들마다 정념이 다르기 때문이고 또한 원하는 효과를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각기 다른 지식이나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정념은 궁극적인 목적과 최고 선이 없는 상태에 순응해야만 한다.  

그리고 홉스의 자기성찰과 관찰을 신뢰할 수 있다면 정념 역시 신뢰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 성향으로 죽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끝나는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제일 먼저 들겠다. 인간이 이미 얻은 것보다 더 강렬한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거나 보통 수준의 힘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잘 살기 위한 힘과 수단을 확보할 수 없으면 그가 현재 갖고 있는 힘이나 수단조차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자들 — 그리고 성직자와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 의 정념이 출신이나 교육으로 인해 평민들의 정념보다 고귀할 것이라는 귀족적인 개념을 거부하면서 홉스는 다음과 같은 민주주의적인 의제를 주창한다: 동일한 논리가 정치 사회의 모든 계층의 모든 인간의 정념에 똑같이 적용된다. 모든 인간은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이 안전하기만 한다면 더 많은 것을 지속적으로 획득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얻고자 해서 위험에 처하게 된다. “부, 명예, 지배 혹은 다른 힘에 대한 경쟁은 논란이나 반목 그리고 전쟁을 낳기 쉽다. 한 경쟁자가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경쟁자를 죽이거나, 정복하거나, 축출하거나 혹은 배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정치적 과제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념이 야기하는 안정을 허물어뜨리는 사실상 치명적인 경쟁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홉스는 먼저 인간의 극단적인 자연 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제13장에서 그는 유명한 가르침, 자연 상태는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는 것을 도입한다. 자연상태가 이렇게 비참하지만 근본적인 평등과 무제한의 자유가 있다. 홉스가 자연적 자유와 평등의 근거를 정의에 두지 않기 때문에 친숙하지 않기는 하나, 그는 이어서 정의는 정치적 사회 안에서만 적용 가능한 것이지 정치생활이 없는 곳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자연상태에서 각자는 비슷하게 상처 입기 쉬우며 다른 사람의 손에 폭력적으로 죽임을 당하기 쉽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평등은 인간을 움직이는 정념 — 경쟁, 소심함이나 불신 그리고 공명심 — 이 자신들이 자연상태에서 즐길 수 있는 무제한적인 자유와 결합하여 생긴 산물인데 이러한 자연 상태는 공통의 기준이나 권위가 없음을 반영한다. 선과 악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이나 최고선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의 각자는 다른 이의 목숨과 육체를 포함한 만물에 대해 무제한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개인에게 규칙을 지키게 하는 승인된 공통의 권위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각자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전적으로 행사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며 이는 항시 인간의 근본적인 명령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가장 약한 자도 가장 강한 자를 치명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인간 평등은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게 없다. 이러한 상태에 기초한 자연적 자유는 만물에 대해 동일하게 무제한적인 권리를 소유하는 타인들의 폭력에 대해 지속적인 공포를 보장할 뿐이므로 가치가 적다. 결과적으로 자연상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전쟁상태이며, “그리고 이러한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 

루소에서 시작된 홉스에 대한 비판가들은 자연상태에 대한 홉스의 설명이 사변적이며, 비역사적이고 인류학적으로 무지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홉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를 거의 내놓지 못하였고, 국가보다 앞선 그리고 국가의 전제조건이 되는 문화의 형태들과 사회 조직을 간과했으며,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나 실제로 포착되는 악덕을 자연상태의 개인의 탓으로 돌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쓸모가 없지는 않으나 이러한 지적에 연연해 하는 것은 홉스 설명의 더 큰 의미를 놓치는 것으로, 홉스는 코먼 웰스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모형을 제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홉스는 제13장에서 자연상태가 “정념으로부터 이끌어 낸 추론”이라고 단언한다. 추론의 목적은 자신을 억누르는 법적 정치적 제한이 없을때 정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법을 벗어나고 정치적 위계질서를 넘어서면 인간의 정념은 — 생동적이게 하고, 부와 재산을 획득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 눈에 명예 혹은 존경을 받는 — 겉으로 드러나 혼란을 낳는데, 이 혼란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합리적인 욕망, 무엇보다도 다른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인, 자신의 삶을 보존하려는 욕망을 좌절시킨다. 정념에서 이끌어 낸 추론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홉스는 역사가 아닌 당대의 현실에 호소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의 불신 속에서 사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친구들과 가족의 가까운 구성원으로부터 귀중한 자산이나 사적 자산을 보호하려는 우리의 사회적 경향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승인된 공통의 법적 정치적 권위가 없을때 — 이것이 바로 자연상태의 규정이다 — 생기는 결과를 예증하기 위해 시민 전쟁의 무자비한 현실을 거론한다.

자연상태의 비참함과 그 원인을 이해하면 — 메디슨(James Madison)이 이 문제를 연방주의자 논고 10번에 관련된 문맥에 넣은 것처럼 “인간 본성의 바탕에 뿌려진” — 평화가 갖고 있는 선함이 분명해진다. 평화는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이다. 평화는 최고의 선이 아니라 어떤 그리고 모든 선을 성취할 수 있는 상태이다. 평화는 인간이 자신이 얻은 것을 보존할 수 있게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하므로 번영을 낳아놓는다.

홉스는 자연과 인간본성의 핵심적인 특징과 평화가 바람직함을 입증한 후에 [[리바이어던]]의 주요 과제로 나아가는데, 이는 적절하게 수립된 코먼웰스의 원리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코먼웰스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 이성을 부여 받았으나 너무 편협하고 근시안적으로 보려는 자기 이해(self-interest)와 영원한 구원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로 인해 쉽사리 진로에서 이탈하는 정념과 자만의 피조물 — 받아들인다. [[리바이어던]]은 이성이 코먼웰스의 형성을 위해 내놓은 신념, 법칙, 제도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 코먼웰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폭넓고 장기적인 관점의 자기이해를 취함으로써 평화를 확보한다. 특히 홉스는 인간 자신들이 만물에 대해 가진 자연적으로 무제한적 권리의 상당부분을 절대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주권자 (홉스는 이 주권자가 한 명이거나 소수 혹은 다수가 될 수 있다 하였으나 한 명의 군주를 권하였다)에게 양도하기 위해 서로 신약(信約)을 맺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양도는 개인이 공적 문제에 대한 사적인 판단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주권자에게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며 분쟁을 해결하고 신민들 서로에 대해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통상적으로 보호할 계약을 강행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주권이 확립됨에 따라 자연적 자유의 상당 부분이 제한되는데, 홉스는 이 제한이 개인의 자유와 이성적인 자기 이해의 중요한 요구를 명시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홉스는 적절하게 수립된 코먼웰스의 윤곽을 묘사하면서 다양한 부수적인 과제들을 정리하고 있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에 있어서의 당대 논쟁의 특징은 자연적 자유와 평등의 토대에 관한 것이었는데, 홉스는 이것을 인간 상태의 비천함에서 밝히고 있으며, 그외에도 그는 자연법, 미덕 그리고 이들간의 밀접한 연관에 대한 분석, 그리고 주권의 원천과 범위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옹호자들은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자유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권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며 그 위에 놓는 재능이나 능력, 대개는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적 전통의 다른 이들은 더욱 단순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말한다. 그러나 고전적 자연권에 대한 19세기 자유주의적 전통의 가르침은 도덕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킨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도덕을 권력으로 환원시킨 니체주의자들에게 강력하게 비판 받는다. 자유주의적 전통은 이러한 비판에 통감하며 자연권의 합리성을 옹호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이러한 주저함이 자유주의적 상대주의에게 문을 열어 주는데, 이는 도덕과 정치에 관한 모든 관점은 동등하게 가치가 있으므로 다양성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출현하였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적 상대주의는 자신에서 변절해 나간 분파인 자유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길을 열어주게 되고 이 주의는 도덕과 정치에 대한 관점은 모두다 마찬가지로 가치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다양성의 가치를 받아들여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자유주의는 자연권에 대한 고전적 자유주의 교설의 유력한 경쟁자들이다. 그러나 홉스의 정치이론처럼 궁극적인 목적이나 최고선의 이념을 거부하는 이 두 자유주의 — 자유주의적 상대주의와 자유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 중 어느 것도 홉스가 자유와 평등의 근원을 인간 자연 상태의 무능력함과 굴욕에 두고 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홉스가 보여주는 또다른 측면은 도덕적 정치적 삶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가 없다 해서 도덕적 정치적 삶이 토대 없이 방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 점인데, 그는 이를 자연법을 도출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정념에서 인간의 자연적 상태나 자연상태를 추론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인간이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준수해야 할 19개의 자연법을 자연상태에서 추론하고 있다. 홉스는 제16장에서 개념들을 소개하고 바로 뒤이어 자연법은 법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찾아낸 계율 혹은 일반적 원칙을 말하는데, 이 자연법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나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을 박탈하는 행위는 금지되며 또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포기하는 것은 금지된다”라고 적었다. 

이러한 계율들 혹은 일반적인 원칙들은 인간에게 항상 평화를 추구하라고 명령하는 제1의 근본적인 자연법으로 시작한다. 제2의 자연법은 인간에게 어떻게 평화를 수립할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각자는 평화를 추구하는 타인들과 만물에 대한 그의 권리를 포기하는 신약을 맺어야만 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락한 만큼의 자유를 타인에 대해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제3의 자연법은 인간이 정의를 행할 것 혹은 그들의 신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주권은 순응을 강제하기 위해 수립되었음을 규정한다. 또한 자연법은 다음의 것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후회할 만한 이유를 결코 제공하지 않는 자신의 이익인 보은을,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는 자신의 이익인 공손, 미래에 용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쾌한 일을 저질렀을 때 용서하는 자신의 이익인 용서, 복수에 대한 현명한 처사로 겪을 악의 크기가 아니라 처벌로 인해 야기될 선의 크기를 고려해 응징하는 자기의 이익인 자비, 타인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이익인 오만불손의 금지, 자만의 금지로 타인이 나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신의 이익인 겸손, 타인에게 결코 허락할 수 없는 권리를 자신에게 허락해 달라고 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이익인 오만의 금지, 타인을 평등하게 판단해야 하는 자신의 이익인 공평이다. 19개의 자연법은 공유물과 사적 자산의 공정한 사용과 분배 그리고 분쟁에 대한 공식적인 재판에 있어서의 자신의 이익을 구체화하는 법칙들로 끝난다. 

홉스가 제15장에서 주장한 이러한 자연법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 기독교적 정치철학의 언어인데, 홉스가 분석한 자연법들은 고전적 혹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불변의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의 형이상학에 따르면 이 자연법들은 인간의 번영, 완전이나 구원의 보편적인 개념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홉스는 이 자연법들이 더 하위에 있는 것, 평화라는 세속적인 선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보편적인 사실들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에 순응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이성적으로 항상 바람직하므로 이것들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다. 또한 이것에 순응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평화나 시민 사회를 보장하며 보존하고 매우 다양한 인간욕망을 충족시키는 전제조건이므로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러한 자연법을 이행하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나 시민 사회의 토대가 위태롭게 되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초래된다. 

따라서 홉스는 자연법을 이성적이고 교화된 자기 이익의 형태로 재구상한다. 동시에 그는 제15장에서 자연법이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황금률에 해당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공식은 그가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복음 7장 12절)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약간이지만 의미심장하게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의 공식은 남에게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반면 예수는 남들에게 선한 일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를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공식의 결과는 일치한다. 부정적으로 말을 했건 긍정적으로 말을 했건, 이 세상의 평화와 안전이 목적이 되었건 저 세상에서 받을 궁극적인 구원이 목적이 되었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를 제어하는 만큼 우리도 우리의 행위를 제어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이성이 규정한 목적 — 한마디로 말해 덕 — 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념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덕은 홉스 정치 이론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다. 홉스의 이론은 당대의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의 지배적인 방식을 비난하였는데, 이 방식의 대부분은 법, 권리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적합한 설명이 덕의 주장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때에만 상술되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홉스의 정치철학이 중요하게는 고전적, 기독교적 가르침에서 벗어났지만 동시에 흥미롭게도 그것과 중첩되고 있다는 부가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제15장의 거의 끝에서 홉스는 자연법과 덕 간의 연관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평화가 선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평화에 이르는 길이나 수단(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정의, 보은, 겸손, 공평, 자비 그리고 나머지 자연법들) 역시 선(다시 말해, 도덕적 선)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반대는 악덕, 즉 악이다.”         

홉스는 덕과 관련된 것을 괄호 안에 넣어 놓았기에 자신이 덕에 부여한 중요성을 의심치 않도록 즉시 “덕과 악덕에 관한 학문은 도덕철학이고 따라서 자연법에 관한 진정한 학설이야말로 진정한 도덕철학”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덕과 악덕의 학문, 즉 도덕 철학과 자연법에 관한 학설은 홉스에게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이면서 동일한 탐구가 가진 다른 측면들이었다. 이는 자신의 이성적 자기 이익을 이해하는 것과 일단 이를 이해한 후 이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정념과 선입견을 가진 피조물에게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덕에 명시적으로 부여한 중요성과 그의 논증의 논리에 의해 덕에 부여된 중요성으로 보아 홉스가 독자들이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덕의 위치를 간과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덕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다고 오해할까 염려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제15장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사상가들이 “같은 덕과 악덕에 대해 알고 있어도” 이를 “평화로운, 사회적인, 안락한 삶의 수단”으로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대담함의 원인이 투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가 투지를 만드는 것이며 증여의 원인이 관대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양이 관대함을 만드는 것처럼) 정념의 중용에 덕과 악을 놓고 있다”고 애써 지적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 본래 이론에서 이러한 설명은 거의 식별되지 않으며, 이로인해 홉스의 가르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수렴되고 벗어나는 지점이 모호해진다.

홉스 시대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참으로 어떠했건 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정념의 보통 혹은 중간정도를 의미한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덕을 원인이나 목적과 분리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따르면 도덕적 선은 결함이 있는 극단이나 악덕 사이에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의미한다. 고전적인 사례는 투지나 용기이다. 이는 너무 비겁한 행동이나 죽음에 대한 지나치게 큰 공포를 막아주며 무모함이나 지나치게 적은 공포를 피하게 하여 전투에서 명예롭게 죽음에 대처할 수 있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용기는 대담함의 양이 아니라 덕의 목적 — 잘 사는 혹은 탁월한 삶 — 에 의해 결정되는 대담함의 정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홉스의 차이는 도덕적 선이 이바지하는 정당한 목적 혹은 목적들에 관한 것이었다. 홉스에게 도덕적 선의 유일하게 정당한 목적은 안전한 정치사회의 창출과 보존을 통한 개인의 자기보존이다. 따라서 홉스에게 용기는 저항을 통해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희망이다. 그것은 고결함이나 다른 어떤 높은 목표와 관련이 없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다른 도덕적 선들과 함께) 용기는 정치사회의 보존에 기여하면서 고귀한 성품과 완벽한 영혼에 단단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당대의 정념과 통상적인 선입관에 뿌리 박힌 여러 오해들로 인해 학자들은 홉스의 사상과 우리시대의 정치 모두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덕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이 선하고 악한지 결정하는 권리를 애써 지키려하고 정치이론의 유일한 과제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다양한 개인들의 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추상적이고 불완전한 법칙들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칙이나 법의 도덕, 다시 말하자면 이성적인 자기 이해에 근거한 공리주의적 도덕과 덕의 도덕 사이에는 단호한 대립이 있어 어떤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쪽을 배제한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들은 덕이라는 바로 그 개념이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획일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수반한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덕의 도덕적 정치적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가 이를 가르쳐야 함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홉스의 덕에 관한 가르침을 연구하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오늘날의 도덕적 정치적 도전에 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본적으로 단절했다해 당대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대인들과 근대인들은 정치적 사회가 의존하고 있는 규칙들과 행위들을 고수하려면 정신과 기질의 어떤 특정한 성질들이 요구된다는데 동의하였는데, 이 성질들은 그대로 두면 자발적으로 개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반드시 필요한 덕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인간의 완전함과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양립해야 한다. 도덕과 정치가 덕에 의존하나 국가가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이러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홉스는 사회에서 덕의 형식적인 필요성이 인간의 자연적 자유와 평등에 근거함을 입증하고 있지만 자기 이해가 어떻게 계몽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꼭 필요한 덕이 어떻게 쌓이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적 전통에 있는 그의 후계자들 — 로크, 칸트, 밀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 — 은 지나치게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자유가 의존하고 있는 덕을 조성하는 다양한 신념, 실천, 제도들을 탐구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 자유로운 사회가 양산하기 쉬운 악덕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쇄 수단을 연구하는 과제는 자유주의적 전통의 더 보수적인 사상가들 — 스미스, 버크, 토크빌 — 의 것이 되었다. 자유주의적 전통에 이러한 원천이 있는데도 근래의 학계 정치철학은 자유에 대한 덕의 공헌과 악덕에 대한 자유의 기여를 좀처럼 평가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원칙과 일치하는 자유로운 사회가 어떻게 덕을 획득하고 악덕을 개량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데 관심이 없다. 

자연법과 덕에 대한 설명에서와 같이 홉스의 주권 분석도 근래의 도덕과 정치에 대한 교훈과 관련이 있다. 그 하나는 근대의 자연권 이론에서 자유의 향유가 의무의 이행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매우 편협하게 이해하고, 주권은 매우 광범위하게 이해한 [[리바이어던]]에서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홉스에게 기본적인 자연권은 표현이나 종교의 결사의 자유가 아니라 필요한 수단이 무엇이 되었건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목숨과 사지를 보존하는 기초적인 권리였다. 공권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수단이든 필요하고 이는 자유를 파괴한다. 홉스는 절대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의 수립이 보존의 최고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만물에 대한 무제한적인 자연적 자유를 가진 개인이 어떻게 주권자에게 복종할 수 있으며, 어떻게 절대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주권자만이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원칙을 결정하여 인간의 견해를 통제할 정도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홉스의 답은 복종 — 덕과 마찬가지로 — 역시 계몽되었거나 이성적인 자기 이해에 근거하지만 그것은 정념을 통해 효력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제13장에서 홉스는 공포가 “의지되는 정념”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신민(臣民)들이 계약을 이행하고 법을 지키며 그들의 의무를 다하게 보장하는 주권자의 무기이다. 순응의 원인과 의무의 논리는 별개의 것이다. 의무는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 일부를 주권자에게 양도하겠다는 이성적인 결정에 근거한다고 홉스는 주장했다. 개인은 이러한 개인적 판단에 의해 공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자제할 것을 동의하는데, 이 사회의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을 이성적으로 제약한다. 스스로 부과한 제약 —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시도된 결정이든 공권력에 대한 암묵적인 인정에서 생겨났든 — 역시 자유의 표현이라고 홉스는 주장한다. 주권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게 인정함으로써, 개인은 주권자의 모든 결정을 — 얼마 안있어 그 결정이 동의할 수 없는 것이거나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해도 —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홉스의 관점으로 보자면 강력한 주권은 인간의 자연상태의 비참함을 피하기 위해 이성이 처방한 유일한 수단이므로 자유는 증대된 것이다. 

주권자의 무력에 대한 공포조차도 이성적이거나 계몽된 자기 이해를 근거로 행동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모든 것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해도 이러 저러한 불편한 법을 어기려는 지속적인 유혹이 있기 때문에, 홉스는 제18장에서 의무가 정념의 훈련과 관계있다고 강조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중요한 확대경을 (하나는 정념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애이다) 가지고 있는데 이 확대경을 통해 작은 희생을 크게 불평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희생 없이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비참함이 닥쳐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망원경(즉 도덕과학과 시민과학)으로 볼 줄은 모른다.” 
 
도덕과학과 시민과학 혹은 덕과 악덕의 학문은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만 하는지 혹은 자기 이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를 보여준다. 도덕과학과 시민과학에 대한 복잡한 문제는 홉스가 서문에서 주장한 것으로 그에 따르면 도덕철학과 정치 과학은 소크라테스적인 자기-앎 또는 덕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권에 대한 홉스의 분석은 또한 국가가 집단학살, 전쟁 범죄, 그리고 자신의 지도자에 의해 가해진 다른 반인도적 범죄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적 참사로부터 — 자신의 국민들이나 다른 나라의 국민들 — 시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에 관한 근래의 논쟁에 있어서도 중요한 함축성을 갖고 있다. 350년이 넘게 국제적인 질서를 뒷받침하고 있는 표준적인 견해는 유럽의 종교전쟁을 종결시키고 근대의 국민국가 시대를 시작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공식화되었다. 국가는 자신의 시민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신념에도 관용이 베풀어져야 하며, 국가의 주권은 자신의 경계 내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계속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한 주권 국가가 다른 국가 내부의 일들에 대해 간섭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표준적인 견해가 국제 질서에 적용될 때 — 공통적으로 인정된 강제력이 없을 때 국가는 서로 전쟁상태로 관련되어 있다 — 홉스의 자연상태에 관한 가르침과 주권은 절대적이며 분리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과 연관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과 국제연합의 창설은 이 표준적인 견해를 서서히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국제 인권 변호사들과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자연재해와 통치자들에 의한 극단적인 범죄로부터 — 자신의 국민들이나 다른 나라의 국민들 — 시민들을 보호할 보편적인 책임이 국가에 존재한다는 관점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국가는 일반적으로 보호의 책임을 진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이 홉스와 관련있는 표준적인 견해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났다고 추정한다. 

사실상 홉스의 정치이론은 주권이 고유한 영역에서는 절대적이며 분리될 수 없지만 결국에는 이를 존재하게 하고 유지하는 권력, 즉 각 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한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의해 제한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제한은 국가가 국가 주권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갖고 있는 적절한 이유들과 지배자가 그의 인민들을 통치하는 권리를 포기하였을 시 다른 국가가 자유롭게 중재할 수 있는 조건 모두를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홉스의 정치이론에서 개인이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주권의 수립을 정당화하며 동시에 이를 단호하게 제한하기도 한다. 절대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합의된 주권만이 서로로부터 그리고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신민을 보호할 수 있다고 홉스는 주장한다. 그렇지만 결국 복종해야만 하는 신민의 의무는 주권의 보호 능력을 벗어나서는 유효하지 않다. 홉스가 신민의 의무를 광범위하게 이해한 것은 분명하다. 세금과 도로 공사에 관해 주권자와의 의견차이는 주권의 행위나 무위가 자신의 생활권을 침해하고 따라서 자신의 자기보존을 위협한다고 생각해도 저항할 근거로 적절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논란이 홉스의 시대에 불복종을 정당화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다해도 그리고 성서가 영원한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홉스가 이해한 것처럼 주권을 무효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14장에서 그가 명확히 말한 것처럼 생명과 사지를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 상해 투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양도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피하는 것이 권리를 포기하는 유일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폭력에 저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신의계약은 무효로서 어떠한 권리의 이전도 없으며 어떠한 채무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제21장에서 홉스는 주권에 복종해야만 하는 신민들의 의무가 면제될 수 있는 극단적인 조건들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주권에 대한 신민들의 의무는 주권자가 신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력을 유지하는 한 그리고 유지되는 동안에만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보호해 줄 그 어느 누구도 없을 때 자기보존의 자연적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신의계약으로도 양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권은 코먼웰스의 영혼이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후에는 육체의 각 부분은 혼으로부터 운동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 복종의 목적은 보호이며 보호를 어떻게 얻든, 그의 무기로 얻는, 타인의 무기로 얻든,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에 복종하게 하고 인간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주권은 이를 수립하는 사람들의 의도로 보면 불멸이지만 그 자신의 본성으로 보면 외국과의 전쟁에서 폭력으로 죽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무지와 정념으로 인하여 수립 당시부터 내재한 내분으로 자연사 할 수도 있다.”
 
주권자의 필멸성에 대한 홉스의 설명은 주권자는 전쟁과 정치적 분쟁뿐만이 아니라 자연적 참사로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민들이 자신을 각자 그리고 주권자와 관련 지어, 자연상태 혹은 법을 집행하고 삶을 보존해주는 승인된 어떤 권력도 없는 상태에서 발견할 시 주권은 사멸하기 때문에, 주권을 소멸하는 원인들 즉 내전만큼이나 심각한 무질서와 피해 그리고 인명손실을 가져오는 지진과 해일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을 배제할 어떤 근거도 없다. 
 
홉스에게 주권은 적절한 영역에서만 불가침의 절대적인 것으로 그 영역 넘어서는 효력이 없는 것이다. 주권의 범위와 삶은 제한되어 있고, 주권자는 주권을 잃을 수 있고 함부로 쓸 수도 있으며 폐기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홉스의 관점으로 보면 (19개의 자연법과 같은) 의무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합리적인 계산을 하여 정치적 질서를 안정되게 보존하려는 개인의 이해에서 유래한다. 
 
우리의 지구화된 세계는 이러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 지구화된 세계에서 국가경제는 점증적으로 서로 뒤얽히며, 파국을 초래하는 능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무기들이 너무나도 쉽게 국경을 넘어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 결과로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국가의 개인들의 안전은 안정된 국제질서에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속박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국제질서에 대한 위협이 심상치 않으며 무위, 무능력, 혹은 정부가 자신들의 인민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무효화되어 주권이 박탈당하는 곳에서, 국가가 인도주의적 참사를 저지하거나 반인도적 범죄를 막기 위해 국외로부터의 중재에 국가적 관심을 합리적으로 가질 수 있다. 사실상 21세기 정치의 맥락에서 이러한 중재는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의무의 수위를 높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무는 사심이 전혀 없는 근대의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해관계에 근거할 것임은 분명하지만,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의무는 모두 동일할 것이다. 
 
정치철학의 모든 걸작들처럼 [[리바이어던]]은 모호함이 가득하며 긴장감으로 터질 듯하다. 홉스는 자연권에 관한 도덕과 정치가 인간의 하찮은 기원에서 유래하였다는데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의 자연 상태의 냉혹함을 묘사했다. 이러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형이상학적 토대를 빼앗긴 채 외롭고 그의 이익을 잘못 이해할 수 있으며 폭력적으로 충돌하기 쉽고 무지와 공포로 인해 미신을 믿게 되지만, 인간은 그의 정념을 넘어설 수 있으며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자연법을 따름으로써, 그 중에서도 특히 절대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주권을 승인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홉스의 적절하게 수립된 국가는 인간의 자연적 자유와 평등을 반영하며 이성을 표현하고 기독교적 부르주아적 도덕과 현저하게 겹치는 도덕적 선에 의지하고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며 홉스가 추론을 이끌어내지는 않았으나 운송과 통신 혁명에 의해 작아진 세계를 수용할 수 있고 죄 없는 이들의 고통과 학살을 끝내기 위해 외국의 중재를 정당화 할 수 있다. 정치철학의 모든 걸작들처럼 [[리바이어던]]이 함축하고 있는 모호함과 긴장은 저자가 도덕과 정치에 대해 명확히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호함으로 가득찬 그리고 긴장으로 터질듯한 우리의 세계를 통해 사고를 이끌어 낸 그 명쾌함에서 유래한 것이다. 
 
Peter Berkowitz는 스탠포드 대학 후버 연구소의 Tad and Dianne Taube Senior Fellow이다. 그의 글들은 www.PeterBerkowitz.com에 올려져 있다. 이 글은 Regnery사에서 앞으로 출간할 [리바이어던]]의 Gateway판을 소개하는 에세이다.      
 
출처: Policy Review, October & November, 2008

번역: 라티오 출판사

The Cambridge Companion to Hegel and Nineteenth-Century Philosophy

Editor: Frederick C. Beiser
Paperback: 472 pages
Publish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 edition (November 17, 2008)
ISBN-10: 0521539382
ISBN-13: 978-0521539388

Product Description
The Cambridge Companion to Hegel and Nineteenth-Century Philosophy는 헤겔을 그의 폭넓은 역사적 철학적 맥락에서 검토한다. 헤겔 철학에서 주요한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이 책은 그의 논리학, 인식론, 정신철학, 사회정치철학, 자연철학, 미학에 관한 입문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에는 또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헤겔 연구자들의 글이 담겨있다. 이 책은 헤겔의 생애에 관한 개관을 펴낸 바 있는 Terry Pinkard([[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의 글로 시작한다. 또한 헤겔 연구에서 무시되었던 많은 새로운 주제들을 탐색한다: 해석학과 신비주의에 대한 헤겔의 관계. 헤겔을 공부하려는 학생과 연구자들을 대상 독자로 하고 있는 이 책은 19세기 철학에 관심을 가진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책이 될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영어권에서 나온 문헌 목록도 들어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독일의 재정위기가 몰려오자 독자들은 칼마르크스로 돌아간다
Kate Connolly

칼 마르크스가 돌아왔다. 적어도 독일의 출판사와 서점들의 말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인기가 올라간 것은 현재 경제 위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독일어로 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내놓는 베를린의 출판사 Karl-Dietz의 매니저 Jörn Schütrumpf는 “마르크스가 다시 유행이 되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상황인데 이 수요는 올해말이 되기 전에 급속하게 늘어날 것이다.”

마르크스의 가장 인기있는 대표 저작은 자본론(Das Kapital)이다. Schütrumpf는 마르크스의 독자들이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행복에 대한 약속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음을 깨달은 전형적인 젊은 교양세대”라고 말했다.

독일의 서점들은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쏟아지는 인기에 대해 앞선 언급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매출이 300 %정도 증가했다고 말했다(그런데 실제 매출액수를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판매는 그리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책이 출간되고 사라지는 경향은 항상 얄팍한 상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다. “시장의 신들이 곤경에 빠지고 이 신들의 사탕발림같은 마법은 사라졌다”라는 적절한 문구가 있는 시, The Gods of the Copybook Heading이 다시 유행한다면 이 시를 쓴 Rudyard Kipling이 기뻐할 것처럼, 경제위기가 다시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는 것을 안다면 마르크스도 기뻐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기뻐하는 것이 그가 살아있으면서 앞으로 몇 달 동안 그가 먹고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줄 늘어난 인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과도한 탐욕은 결국 자신을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버린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되뇌이는 것이 유행이 된 이 시점에서 점차 많은 숫자의 독일인들은 기꺼이 마르크스의 팬이 되려는 듯하다. 독일의 떠오르는 좌익정당 Die Linke의 수장인 Oskar Lafontaine가 국가의 부와 일부 에너지 부문을 국유화 하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강령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포함한다고 이야기 했을 때, 일간지 Bild는 그를 “구상을 잃어버린” “미친 좌파”라고 불렀다. 그러나 최근 몇 주 사이에 (경제위기로) 분명 밤잠을 설쳤을 재정부 장관 Peer Steinbrück은 지금 자신이 마르크스의 팬이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 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이론의 몇몇 부분들은 사실상 괜찮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해야한다”고 Steinbrück은 조심스럽게 Spiegel지에서 이야기했다.

Ralf Dorschel는 “최근들어 마르크스는 판돈이 많이 걸린 내기에서 연승을 하고 있다”고 Hamburger Abendblatt지에 언급했다.

그러나 아직도 마르크스의 이론에 빠져들 준비가 안된 사람들에게 이전의 미국 경제 위기에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서한은 좀 더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미국의 몰락은 보기 좋은 구경거리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1857년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지금 급박하고 완벽한 미국의 Wall Street 붕괴를 확실히 예고하고 있다.

출처: Guardian, 2008. 10. 15.

번역: 라티오 출판사

피렌체 사람: 통치자들에게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가르친 사람
Claudia Roth Pierpont

The Prince, The Essential Writings of Machiavelli by Niccolò Machiavelli, trans. by Peter Constantine, Modern Library, 2008.

찬란했던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의 감옥에서 사용하였던 고문 방법 중의 하나는 스트라파도strappado라는 것인데, 이는 죄수의 손을 뒤로 하여 로프로 묶은 후 공중으로 들어올려 자백을 받을 때까지 여러 번 그를 바닥으로 갑자기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대개 어깨의 관절을 탈구시키고 근육을 파열하며 한 팔이나 양팔을 못쓰게 만들기 때문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 “투하”를 6번이나 당한 후 펜과 종이를 요청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키아벨리는 아무것도 자백할 것이 없었다. 그의 이름이 범죄자 리스트에서 발견되었지만, 최근 귀환한 메디치가의 통치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음모에 그가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표적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 였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형인 지오반니 추기경Cardinal Giovanni이라고 말했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 2월 거의 두 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필사적으로 사면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비애감과 대담함,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재치가 뒤섞인 몇 편의 소네트를 써 “위대한 줄리아노”에게 바쳤다. 그는 “줄리아노, 내 다리는 족쇄로 채워져 있소”로 시작하여, 그가 갇힌 감옥 벽 위에 이들은 나비만큼이나 크고 열쇠와 자물쇠의 소리는 제우스의 번개처럼 큰 소리를 낸다고 적었다. 그의 시가 감동을 주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 그는 자신이 부른 뮤즈가 미치광이처럼 사슬에 묶인 남자에게 영감을 주느니 차라리 그 얼굴을 갈길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가문의 후계자에게 그는 “이게 시인을 대우하는 방식인가”라고 분에 찬 불만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특별히 시로 알려진 것은 아니었고, 그를 메디치가의 후원을 요청하는 사람이라고 여길 이도 거의 없었다. 그의 가문은 유명하였지만 부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명백히 공화주의자들과 교제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사촌들 중 두 사람은 1434년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좀 더 잘 보호하기 위해 역사적 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끝낸 왕조의 창시자,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를 반대하다 목이 잘렸다. 마키아벨리가 청년기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 인들이 피지배자로서의 부끄러움이나 날카로운 공격을 느끼지 않게 수 십 년간 피렌체를 다스리며 널리 사랑 받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측근의 학자 모임에 마키아벨리가 발 들여 놓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로렌초는 1492년에 죽었고, 2년 후 메디치가는 시에서 추방당했다. 그때 마키아벨리는 25살이었으며 로렌초의 막내 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15살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뒤를 이은 도미니크회 설교가 사보나롤라Savonarola — 마키아벨리는 설교가의 공화주의적인 개혁은 높이 평가했지만 종교적인 “거짓말들”을 경멸했다 — 의 종교적인 체제 하에서 아무 것도 할 게 없었으나 자신의 구세주를 적대시한 그 자신의 도시로 왔고, 사보나롤라는 (14번의 스트라파도 수난을 당한 후) 목이 매달렸다. 신과 사보나롤라의 후원자들이 정부의 요직을 잃은 1498년, 마키아벨리는 직업을 구했다. 이후 14년 동안, 그는 공화정 체제로 복귀한 이 독립 도시국가를 위해 긍지를 가지고 일했으나, 이제 피렌체의 경계에서 숨어 기다리는 메디치가 세력 혹은 다른 부유한 가문들이 취할 수 있는 위협에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보강작업을 해야 했다.  시의 자유를 위한 최고 안전장치는 도시의회였다. 이 의회는 약 5천명의 피렌체 인구 중 3천명이 넘는 시민들로 구성된 행정기구로, 그 시대의 가장 광범위한 대표정부였다.

마키아벨리는 29살에 시의 문서와 기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제2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엄청난 육체적 그리고 지적 에너지 (그는 이따금 “희랍어,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고 칼데아어”로 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그가 한 달 내에 10인의 전쟁위원회의 서기로 추가 임명된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주로 임박한 위기에 닥쳤을 때 하찮은 외교적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전쟁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서로 계속 다투고 있는 힘없는 이탈리아의 국가들에 자신들의 강력한 군대를 보내 경쟁적인 주장을 하며 전쟁을 하던 시기였고, 밀라노, 제노바, 피렌체, 베니스, 나폴리 그리고 여러 작은 공국, 후작령, 공화국들은 통일된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방어하기조차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세력들은 더 좋은 조건이 나오면 곧바로 계약을 새로 맺는 오늘날의 메이저 리그의 야구선수들보다 더 쉽게 편을 바꾸는 용병에 의지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긴급한 문제와 대혼란을 타고 성공하였는데, 피렌체 사건을 논하기 위해 안낭鞍囊에 책을 가득 넣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가 돌아와 그가 발견한 것들을 보고하였다. 한 보고에서 그는 자신의 의무가 통치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가 진심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그를 앞서 나가게 하고 혹은 뒤로 물러서게 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협상과 일어난 일들을 통해 미래를 추측”해야 한다고 적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가 심리학자의 재능을 예언자의 임무로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되었던 것 같다.

그는 그 일을 잘 해냈다.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대사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 공식적으로 일개 외교사절인 그는 매우 당당하게 자신을 피렌체의 서기라고 불렀다 — 그는 자신의 동요치 않는 판단으로 인해 공화국의 최고 관리였던 소데리니Piero Soderini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 교황 율리우스 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궁전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고, 그 곳에서 줄곧 그에게 보여지는 다른 정부형태와 기질들에 대해 연구하였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처럼 마키아벨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궁금해했다. 그런데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만큼 그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없었다. 보르지아는 스페인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그가 권력의 절정에 오른 1502년 우르비노 공작성에서 — 전하는 바에 따르면 검은 옷을 차려 입고 촛불을 밝힌 채 — 마키아벨리를 맞이했는데 당시 이미 극적으로 위험한 인물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보르지아는 근래에 중앙 이탈리아의 광대한 지역과 더불어 우르비노를 대담함, 신속함 그리고 반역으로 정복하였다 (마키아벨리는 특별히 보르지아가 우르비노 공작에게 가까이 있는 마을을 점령하겠다고 대포를 빌린 후 그 마을 대신 무방비 상태의 공작령을 친 책략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보르지아가 보인 놀라운 효율성을 대중적 합의의 필요성이 가진 덕뿐만 아니라 결함을 드러내고 있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느리고 신중한 피렌체 공화국과 비교할 수 밖에 없었고, 흥분하여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그의 상관들에게 이 위엄 있는 적이 보여준 교훈을 적어 보냈다. 그는 이 무자비한 젊은 전사에게서 유력한 영웅, 외국군대를 추방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시적인 이탈리아를 현실적인 실체로 변환시킬 지도자를 본 것이었다.

놀란 외교사절이 보르지아에게 얻은 가장 현실적인 교훈은 시민군의 배치였다. 보르지아가 고용한 용병들이 반역의 음모를 꾸민 후, 그는 작전 중 어느 시점에 자신의 점령지에서 농부들을 징병할 수밖에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피렌체의 용병들이 피사와의 전쟁에서 상황이 너무 거칠어지자 비열하게 도망쳤을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이런 방식의 장점을 알아차렸다. 결국 그 누가 한 움큼(특히 공화국이 지불하는 아주 적은 한 움큼)의 플로린 은화를 위해 기꺼이 죽길 원하겠는가? 반면 누가 자신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지 않겠는가? 1505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시민군에 대한 논거를 주장했고, 1506년 2월 어느 상쾌한 날 수 백만의 토스카나 농부들이 흰 모자에 붉고 흰 바지들을 입은 채 시뇨리아 광장을 재빠르게 행진하였다. 이탈리아 즉흥 가면극적commedia-dell’arte 분위기였으나, 바로 3년 후 마키아벨리는 최근 15년간 진행되는 피사 공격에 1천명의 시민군대를 이끌었고 — 놀랍게도 — 피렌체가 승리를 거두었다.

마키아벨리의 군대는 프라토 근방의 마을을 스페인 군대로부터 방어하다 대오를 이탈하여 대부분의 비겁한 용병들만큼이나 비열하게 도망친 1512년까지 높은 명성을 유지하였다. 더 안 좋았던 것은 이 패배로 인해 피렌체가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과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연합군 간의 더 큰 싸움에서 진 편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피렌체가 취약해지자 오랫동안 분개에 차 있던 친메디치 일파는 기회를 잡아 공화정을 뒤엎어 버렸다. 1512년 9월, 메디치가는 18년 만에 피렌체로 되돌아왔다. 며칠 안에 마키아벨리의 군대와 시민의회는 해산되었다.

곧 마키아벨리는 서기로서 직위를 잃었으나, 메디치가가 복귀하기 전날 탈출을 도왔던 소데리니를 대신하여 공식탄원서를 쓴 것을 보면 그는 일정 정도의 권한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피터 콘스탄틴이 번역, 편집하고 모던 라이브러리에서 출간한) [[마키아벨리의 주요저서]] 에 “메디치가에 보내는 경고A Caution to the Medici”로 영어로는 처음 출간된 이 이례적인 서신은 계속해서 소데리니에게 오명을 씌우는 메디치 분파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친구와 피렌체 인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로 보이는 정치적 근거(“메디치 정부는 망명생활을 하고 있고, 그런 까닭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바로 그 행위로 인해 결국은 약해질 수 있다”)를 그의 이름으로 제시했다. 물론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환상은 감옥에 갇혀 스트라파도를 당하게 되는 몇 달 후인 1513년 2월에 깨졌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그에게 바친 소네트를 읽었는지 아닌지는 논쟁거리이나 그의 중재는 결국 요청되지 않았다. 감옥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마키아벨리는 추기경 지반니 데 메디치가 레오 10세Leo X로 최초의 메디치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베푼 사면 덕분에 석방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신이 우리에게 교황의 직분을 베푸셨으니 우리 모두 이를 즐기자”고 추기경이 줄리아노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흘 동안 피렌체는 넘쳐나는 교황의 금고에서 나올 선물에 대한 성급한 기대와 긍지로 빛났다. 집으로 가는 길의 지친 전前 서기를 맞이한 것은 불꽃놀이, 모닥불, 종소리, 연속포격이 전부였다.

심지어 이 때에도 마키아벨리는 “우리들의 새 주인들”이 그를 써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경험자였고, (43세에) 매우 정력적이었으며 그가 공직에서 있었던 수 년 동안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었다. 그는 친구에게 “나의 가난이 나의 충실함과 덕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절실하게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 해 봄, 여전히 일자리가 없는 그는 시뇨리나 광장의 탑이 조롱하는 광경 속에 도시에서 떠나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살기 위해 산 카시아노San Casciano 근처의 가족 농장으로 물러났다. 그곳은 볼품없이 뻗어있는 황폐한 곳이었다. 그는 카드놀이를 하든지 새를 잡든지 하면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슬프게 지냈고, 그의 세속적인 친구들은 닭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그는 진흙이 묻은 옷을 벗고 대사의 복장을 갖추고 서재에 들어갔다. 르네상스 시대 가장 유명한 서신들 중 한 서신에서, 그는 “나는 의복을 잘 갖추고서 고대의 숭엄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은  부끄러움 없이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대한 동기를 물어보는, 그러면 그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친절함에서 발로한 대답들을 나에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는 리비우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의 대답들을 써내려 갔고 자신이 목격한 역사에 대한 관찰을 덧붙여 1513년 말경 국가통치술에 대한 작은 책 — 군대와 요새에 대해 다루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방법과 같은 엄밀하게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한 책 — 을 완성했다. 이 책은 인민과 그들의 행위들을 “상상된 것으로서가 아닌 실제적인 사실들로” 논의하였으므로, 그가 쓸모 있음을 줄리아노에게 단호히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진실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명확히 증명한 작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통치자를 위한 실용 안내서인 [[군주론]]은, 콘스탄틴의 새 번역판(모던 라이브러리 $8, [[마키아벨리의 주요저서]]에도 포함된)에 서문을 쓴 애스콜리Albert Russell Ascoli를 인용하자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로 서구정치사상과 실제가 공포와 매혹에 휩싸여 주시해 온 세간에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되어버렸다. 이 책은 수 년 동안 필사본으로 유통되다 마키아벨리가 사망한 지 거의 5년이 지난 1532년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십 년 안에 영국의 추기경으로부터 저자는 “인류의 적”이라는 최초의 주목할만한 비판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왕위를 위해 교회의 권력을 빼앗는데 영감을 주었다고 비난 받았다. 약 30년 후 이 책은 프랑스 왕비 카테리느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가 반란을 일으킨 2천명의 프로테스탄트의 대학살을 명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녀의 가계를 제외하고 마키아벨리와 연관이 있다는 근거는 거의 없어 보였다). 그의 악명은 “악마의 책략”과 유사한 제명 하에 이 불쾌감을 주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보다 책이 유발하는 다수의 선정적이고 종종 왜곡된 공격을 통해서 더 높아졌다. 주권자가 교회나 귀족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곳 어디서나, 허세를 부리는 속임수나 살의적인 폭력이 사용되는 곳 어디서나, 올리브 숲 속 한가운데 놓인 그의 책상에서 너무 강력해서 유럽의 권력 구조를 위협하는 독약에 담겨 있는 펜으로 휘갈겨 쓰고 있는 마키아벨리가 은밀하게 탐구되었다.

격렬한 반응을 야기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의 공격자들에게 친숙한 방법인) 전후 관계를 무시하고 끝과 끝을 이어 놓는 방식으로 마키아벨리의 가장 주목할만한 그리고 사악한 요점들 일부를 적어보겠다. “군주는, 특히 신생 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처신할 수 없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주는 종종 무자비하게, 신의 없이, 비인도적으로, 부도덕하게, 비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말이 불리하게 작용할 때는 이를 지킬 수 없으며 지켜서도 안 된다”, “인간은 칭찬해주거나 혹은 무시되어야 하는데, 이는 인간이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쉽게 복수하지만 매우 심각한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을 재산을 잃는 것보다 더 빨리 잊는다”. 그리고 이 검은 양조주를 증류하여 얻은 기는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보다 잃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들이 얼마나 충격적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의식적으로 작업했던 장르의 예들과 이 견해들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젊은 혹은 최근에 군림한 군주들에게 조언하는 일종의 전문 안내서인 [[군주의 거울Mirros of Princes]]은 군주의 판단력과 이를 토대로 국가의 미래를 형성하고자 했다. 철학자는 이와 같은 책을 저술하는 것보다 인류의 운명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바랄 수 없었다. 혹은 현실적으로 말하면 왕실 업무의 평판을 높이는 것을 바랄 수 없었다. 마키아벨리가 책을 저술한지 2년 후, [[기독교 군주의 교육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을 쓴 에라스무스Erasmus는 — 그는 이 논문을 아라곤의 찰스에게 처음 증정하였으나 원하던 재정적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이후 헨리8세에게 증정하였다 — “군주의 마음 속에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깊이 새겨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가능한 최선을 다해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경건한 조언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보르지아의 방식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이해하는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개선되지 않을 지라도 충분히 복잡한 그리고 격언을 즐겨 인용하는 마키아벨리의 노련한 솜씨에서 보면 쉽게 간과되는 맥락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사악함을 서술하였다 해서 그것을 발명하지 않았음은 킨제이가 섹스를 발명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사실이나, 이런 것이 통치자가 (혹은 다른 이들이) 종종 처신하는 방식이라는 핑계에 의지하고자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역의 유명했던 모든 예술가들처럼 — 국가통치술은 르네상스시대의 기예 중의 하나였다 — 마키아벨리는 고대의 이교도 모델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화가는 마돈나를 그 기독교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도 고전적 주랑 현관portico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적 사유에 도달하기 위해 고전 형식의 표면 아래를 깊이 파고 드는 작업들은 — 문학, 철학, 정치학의 연구 — 이교도적 이상과 그리스도교적 이상 간의 충돌 — 권능 대 겸손, 지상의 삶 대 사후의 삶, 영웅 대 성자 — 을 알아차려만 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선택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로마공화정은 그에게 명백한 황금기였다. [[군주론]]을 쓰기 전에 그는 이미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주석을 쓰기 시작했는데 로마의 자유 제도를 면밀히 분석하였고 그가 마음 깊숙히 공화주의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도시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특정선이 아니라 일반선이다. 이러한 일반선이 공화국에서만 준수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 경건함은 정부의 이러한 영웅적 형태를 소생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힘을 점차로 약화시켰다. 자유를 위임받은 인간이 그것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 시대의 위대한 공화국은 실패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친구 소데리니가 적들이 궁극적으로 그를 반대하기 위해 사용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즉 인간의 누그러뜨릴 수 없는 사악함과 남을 샘내 계획한 음모를 극복할 수 있는 선함과 품위를 믿음으로 인해 피렌체를 잃게 되는 것을 보았다.

보르지아는 이러한 약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도덕에 관한 문제를 꼭 고려해야 한다면, 자신을 위해 만든 명성보다 실제로 행한 선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잔인하다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보르지아는 너무 약해서 약탈과 살인이 자신들의 영지에 만연했던 하찮은 여러 통치자들을 평화와 질서가 확립될 때까지 — “몇몇 경고성 처형을 시행하면서” — 축출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명성을 보호하고자 자신들의 권력으로 파벌들 간의 싸움을 중재하기보다 이 싸움 속에서 피스토이아의 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그냥 놔둔 피렌체인들보다 보르지아가 더 진정한 관대함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한 바가 꼭 그대로의 의미는 아닌 기억하기 쉬운 사악한 격언들 중 하나인, “그러므로 군주는 잔인하다고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라 말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죽여야만 하는 문제에 대해, 토마스 모어도 [[유토피아Utopia]]에서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데, [[군주론]]이 저술된 지 3년 후에 나온 이 책은 책제목이 정치적 이상주의라는 개념이 되면서 그 후 내내 [[군주론]]과는 도덕적으로 반대되는 지점에 서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에게 이례적이고 잔인한 조치는 어쩔 수 없는, 빨리 결말지어야 하는 그리고 결과적으로 군주의 백성들이 혜택(안전, 치안, 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혹은 과도하게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는 통치자는 —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왕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을 약탈한 후 자신의 나라에서 내쫓았다 — 어떠한 성과를 거두든지 간에 비난받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권력에 이를 수 있다”고 마키아벨리는 확언했지만 그의 유명한 현실정치적 조언에서 벗어나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영광에 이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사실 도덕주의자인가? 아니면 당치 않지만 성인인가? 마키아벨리는 매우 꼼꼼한 작가여서 문체가 아주 명확해질 때까지 자신의 원고를 계속해서 수정하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멋들어지게 꾸미기 위해 사용하는 불필요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자랑하며, 그는 단순한 단어와 표현에 의지하여 (중요한 저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학문적인 라틴어가 아니라) 자신의 토스카나 지방의 변형된 이탈리아어로 책을 썼다. 마키아벨리가 그의 독자들에게 내놓은 수수께끼들 중 하나는 이 언어의 명료성이 모호한 의미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체홉Chekhov, 토마스 만Thomas Mann, 볼테르Voltaire 그리고 소포클레스Sophocles 등 아찔할 정도로 여러 나라 말로 된 작품을 번역하여 많은 상을 받은 콘스탄틴은 마키아벨리를 “일류문장가, 아름다운 산문의 작가”의 지위에 오르게 할 목적을 가지고 [[군주론]]을 번역하였다고 밝혔다. 사실 마키아벨리가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때 “일류 문장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는 않는다. [[군주론]]만큼 자주 번역된 책은 — 현재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책만해도 여섯 종이 넘는다 — 얼마간의 새로운 주장이 기대된다. 그러나 면밀히 비교해보면 문체상 가장 우아한 [[군주론]] 번역본은 대략 50년 된 조지 불George Bull의 번역으로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공화주의적 산문체를 정확하게 그리고 거의 헤밍웨이 작품의 설명처럼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실례: 콘스탄틴은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문장들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군주는 짐승의 본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법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 모두를 닮아야만 하는데, 사자는 함정을 물리칠 수 없는 반면 여우는 늑대의 무리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함정을 물리치다니defy a snare? 불의 간결한 번역이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어가 갖고 있는 박력을 더 매끄러운 영어로 더 잘 흉내 내고 있다. “군주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법을 알아야만 하므로 여우와 사자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사자가 함정에 무방비상태defenceless이고 여우가 늑대에 무방비상태이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작업은 논의나 해설 없이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게 명쾌해야만 한다. 그러나 단어의 선택이 생각을 의미심장하게 부연할 수 있다. 콘스탄틴이 가장 재치 있는 문필의 마키아벨리를 제공할 수 없다 해도, [[군주론]]의 앞부분에 “당신이 국가를 침략하길 원한다면,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해도 인민들의 지지가 필요하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를 올바른 정치적 방향으로 밀고 있다. 이 문장의 다른 어떤 번역본도, 침략의 성공여부가 거주민의 호의favore de’ provinciali에 달렸다고 쓴 마키아벨리 원문도, “거주민의 호의the goodwill of the inhabitants”라고 번역한 불의 문구도, 비교적 평범한 방식으로 대체로 비슷하게 번역한 다른 이들의 문구도, 이처럼 민주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인민의 지지라는 개념 혹은 근접한 변형 — “인민들의 호의el popolo amico”, “la benivolenzia populare” — 이 마키아벨리의 작은 책에 등장하는데 군주가 반드시 소유해만 하는 것으로 그 중요성의 무게가 천천히 무거워진다. 콘스탄틴이 이점을 강조한 것은 옳다. 다음의 소견은 — “마키아벨리주의”로 결코 간주될 수 없는 — 작가의 보다 잘 알려져 있는 화려한 조언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군주는 인민을 자신의 편에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운한 시기에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군주는 인민들이 자신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을 때 음모에 대해 과도하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적으로 미워한다면, 군주는 모든 것을 그리고 모두를 두려워해야만 한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직설적인 지점은 “군주를 위한 가장 훌륭한 요새는 그의 인민들의 사랑이다” 일 것이다. 자기 보존적 현실정치라는 책의 메세지를 구성하는 또다른 요소로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끊임없이 선전하고 있는 교훈, 즉 군주는 그의 백성을 잘 대우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군주가 사자건 여우건, [[군주론]]은 군주가 자신의 백성인 양(羊)과의 관계에서 복종해야 하는 덫을 놓았다.

마키아벨리는 종종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문구에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그가 꼭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이 개념은 사실 희랍 비극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묵시적인 윤리적 상대주의가 그의 저서의 핵심이다.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군주론]]이 의도했던 바를 보면, 이 책은 실패작이었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이 책을 읽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고, 마키아벨리가 책을 헌납한 피렌체의 후계자, 줄리아노의 독재적인 조카 로렌초는 선물로 한 쌍의 사냥개들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여하튼 군주는 작가에게 일자리를 주기로 결정하지도 않았다. 책의 구성으로 보면 마지막 장은 너무 중요해서 — 이탈리아 국가들의 통일 — 이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어떠한 수단뿐만 아니라 이를 서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떠한 언어도 정당화되는 결말을 그리고 있다. 문장이 갑자기 과장되기 시작하고 감상적으로 흐르는데, 우승기가 휘날리며 트럼펫이 울리는 등 결정적으로 선동적으로 변한다.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정당화를 하거나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주에게 목표를 향해 돌진하라고 충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개인적 권력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그렇게 많은 해가 지난 후 자신을 해방시킬 사람을 환영해야만 한다”고 그는 선언하고 있다. “외국군대의 범람으로 고난을 겪던 이탈리아가 얼마나 많은 흠모의 정을 가지고 그를 맞이할 것인가, 복수에 대한 그들의 갈망, 강철같은 그들의 충성심, 그들의 헌신과 눈물은 끝이 없을 것이리라. 모든 문이 활짝 열릴 것이리라. 이러한 지도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이러한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판단해도 [[군주론]]은 실패작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민족주의적 희망들이 널리 퍼진 게 된 것은 3백5십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들 중 많은 부분이 매우 급진적으로 새로워서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을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위대한 탐험의 시대 —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사촌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Agostino Vespucci가 그가 피렌체의 대법관에서 일할 시 그의 조수였다 — 에 산 마키아벨리는 미지의 바다와 대륙을 찾아 다니는 것만큼 위험한 임무를 지녔기에 자신을 그들의 동료라고 여겼다.

문화 전반에 걸쳐 위험했던 게 사실이었다. [[군주론]]은 우리가 아직도 살고 있는 기독교적 국가에 최초로 크나큰 세속적인 충격을 주었다. 다윈이 등장하기 훨씬 전, 마키아벨리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는 확실한 세계, “해야 한다”가 아닌 “이다”의 세계, 그리고 인간이 짐승들과 결부되어 냉정하게 고찰되고 지상의 정부가 우리의 자연적 곤경을 개선시켜 줄 유일한 희망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여기저기에서 지지를 이끌어내었지만 — 17세기에는 영국의 군주정치 반대자들, 19세기에는 독일의 민족주의자들 –, 학자들이 그의 저주받은 명성에서 그를 분리하기 시작한 것은 현대에 들어 와서였다. 1954년 리돌피Roberto Ridolfi의 획기적인 전기는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적 온후한 기질을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몇 년 후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마키아벨리의 도리에 어긋난 진술 대부분이 단지 그가 깜짝 놀래키고 즐겁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라찌아Sebastian de Grazia의1989년 퓰리처 수상작인 [[지옥의 마키아벨리Machiavelli in Hell]]는 지난 날의 사악한 인간을 대단히 기독교적인 사상가로 논하며 그를 완벽하게 구제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마키아벨리를 지적 자유의 투사, 자유의 표본을 고대에서 근대세계로 전달한 사람으로 보는 정치철학 학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놀라운 것은 사악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교정하고자 하는 전문가들의 열망이 아니라 그 인물을 가장 자극적으로 천박한 형태로 만든 것이다. [[마피아 관리인: 마키아벨리 기업에 대한 안내서]], [[왕녀: 여성을 위한 마키아벨리]], 그리고 유쾌하게 제목을 붙인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할까? 목적이 비열함을 정당화한다]]와 같은 책들은 현재 가장 잘 팔리는 문학장르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업계와 사교계에서 그는 — 어떻게 해서든지 — 이기는 게 전부라는 주의를 대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그는 역사상 최초의 문화적 영웅이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는 마키아벨리가 감옥에서 출소한 후 그의 지위를 다시 얻는데 실패하고 권력의 밖에서 쇠약해지는 시기를 가리키는 문구였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통탄하면서 메디치 가의 호의를 계속 얻으려 하는 동안에도 그는 매우 열광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써 내려갔다. 그는 공화주의적 이상에 대한 학문적 송가인 [[로마사논고]]를 완성하였으며 — 존 아담스John Adams는 이 책을 매우 좋아하였다 — 루첼라이 궁의 정원에 모였던, 점점 증가하고 있는 반-메디치 모임의 친구들에게 이 책을 소리 높여 읽어주었던 것 같다. 그는 단테 풍의 3운구법으로 고전적인 주제의 시를 짓는데 전념하였고 연극에 대한 재능도 발견하였다. 매우 놀랍게도 이 어두운 시기의 한 가운데서 그는 희극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내를 두려워하는 악당에 대한 이야기,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Terence의 작품을 개작한 이야기 그리고 야심만만한 연인, 멍청한 남편, 타락한 성직자 3인 모두가 르네상스 시대의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을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풍자적이고 음탕하며 종종 분변을 언급하는 익살극인 [[만드라골라]]가 있다. 이 작품은 마키아벨리의 경력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작품의 연대가 불확실하나 — “이곳 피렌체에서 당신이 여당편이 아니라면… 개조차 당신에게 짖지 않는다”라고 장기간의 곤경을 서술하고 있다 — 희극이 1520년 초연되었으며 공연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교황 레오 10세가 그 다음 해에 교황의 궁전에서 어전공연을 명령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7년이 되던 해 불륜과 성직자의 수상쩍은 윤리를 유쾌하게 거래하는 공연을 즐거워한 교황 덕분에 — 레오 10세가 마르틴 루터를 파문한 바로 그 해였다 —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메디치가의 호의를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대체로 다시 찾았다.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인간은 적응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군주론]]의 핵심교훈이고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보인다. 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공화주의자로, 군주가 통치할 때는 그의 충실한 종으로, “시대에 맞게 행동하는 자는 성공할 것이다”. 이제 마키아벨리는 레오 10세와 그의 사촌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 — 피렌체의 대주교와 경멸 당했던 로렌초의 죽음 이후로 피렌체의 사실상 통치자 — 에게서 공식적으로 [[피렌체 사]]를 저술할 것을 의뢰받는다. 이 임무는 그를 저명한 문학집단에 속하게 하였고 그에게 보수가 두둑한 다른 일거리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모순되기는 하지만 [[군주론]]의 부수적인 교훈은 아무리 그가 애써도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메디치가에서 의뢰 받은 역사서를 쓰면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였고, 그 결과는 결코 아첨꾼의 그것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르고자 하는” 가문의 욕망이 살의적인 음모와 계획 이외에는 어떤 대안도 다른 분파들에게 남기지 않은 채 모든 정치적 적수의 진압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상술하면서, 그는 메디치 체제에서 “자유는 피렌체에서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기탄없이 결론짓고 있다.

음모에 관해서는 1522년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살해하려는 계획이 루첼라이궁 정원의 학자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모임은 해산되었고 마키아벨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추방당하거나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는 — 10년 전에 있었던 메디치가 음모와는 매우 다르게 — 체포되지도 연루되지도 않았다.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피렌체 당국의 의견과 그가 역사적으로 너무 수상쩍은 인물이어서 그의 친구들에게 그의 가담은 위험스러운 것이었다는 생각에 동의해왔다. 그러나 로스 킹Ross King은 그에 대한 개략적인 전기 [[마키아벨리: 권력의 철학자 Machiavelli: Philosopher of Power]]에서 마키아벨리가 매우 이상하게도 자주 정치적 음모에 대해 썼고, 공공연한 동정심을 가지고 음모자들을 서술하였으며, 그가 작성한 [[피렌체 사]]의 1522년 부분에서 그는 밀라노의 폭군 스포르차Sforza 살해음모의 15세기 주모자들을 로마공화정 영웅이 받을만한 존경심으로 대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적어도 마키아벨리가 이 사건들에 대해 결백하였는지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522년 그에게 불리한 증거는 아주 사소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513년 그를 사건에 연루하게 만든 아주 작은 것이 마키아벨리를 음모자들이 준수했어야만 했던 규칙들 —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신뢰해서는 안되며, 복수를 할 수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살려두어서는 안되고 그 무엇보다도 어떤 것도 글로 적어놓아서는 안 된다 — 에 대해 매우 심각한 생각을 하게 했을 수도 있다.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가 클레멘트 7세Clement VII로 교황에 오른 1523년 군사적 기회마저 되살아났다. 외국으로부터의 압력의 수위가 높아지던 시기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의 요새를 지키라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는 그의 임무를 열정적으로 — 심지어는 도취해서 — 수행했고 잘 해냈다. 1527년 봄, 황제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통해 남쪽으로 요란스럽게 진군해왔고 벽과 요새가 돌파하기 너무 어려울 거라 판단하여 겁에 질린 도시를 우회하였다. 대신에 성이 나있고 굶주린, 반은 스페인인이고 반은 루터교도인 이 통제가 안 되는 군대는 곧바로 로마로 진군하여, 병사들이 벽을 뚫고 들어가 잔혹하게 도시를 약탈하였다. 약탈, 강간, 살해, 파괴가 여러 날 지속되었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클레멘트 교황이 탈출하도록 도왔다. 그는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사랑한 피렌체를 위해 그리고 적게는 자신을 위해 이 일을 한 것이었다. 잇따른 혼란 속에서 피렌체의 메디치 통치가 전복되었고, 공화정이 복원되었으며 시민의회가 부활되었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반대편에 섰을 때조차 기원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 체제에 뛰어나게 적응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았다. 메디치가의 지지자로서 그는 다시 한번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되었고, 메디치가가 처음 복귀했을 때 받았던 유사한 종류의 정치적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58세의 나이로 더 이상 새로 시작할 능력이 없었다. 불가사의한 위장병 증세가 나타나 눕게 만들었고 공화정이 복구된 지 몇 주 안에 마키아벨리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충성스러운 친구들 그리고 성직자가 참석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승리에 관한 전문가가 그렇게 많은 것을 잃어버려야 했다는 게, 그리고 또 다시 잃어버렸다는 게 이상하다. 소문에 의하면 [[군주론]]에서 가르침을 받은 헨리 8세가 왕국의 권력을 강탈하는 것을 묵과하길 거부하여 목이 달아난 — 결국에는 성자의 반열에 오른 — 토마스 모어 못지않게, 뒤틀어진 방식이기는 하나, 마키아벨리도 자신의 신념을 따른 순교자였다. 물론 모어는 그 시대의 윤리적 경향의 반대지점에 설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그의 시대였다. 그는 정치적 관습들과 무언의 원칙들에 불변의 형태와 힘을 주었다. 근대 정치를 시작한 것은 마키아벨리라고 종종 이야기되나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회피한다. 이 나라가 여태까지 보아 온 군주들의 조언자 중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마키아벨리주의자”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그가 무엇이든지 피렌체의 서기에게서 배웠다는 암시에 “우리가 현시대에 사용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의 방법이라고는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 뒷걸음질쳤다. (이 영역에서 키신저의 유일한 적수인 칼 로브Karl Rove는 [[마키아벨리의 그림자Machiavelli’s Shadow]]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온 전기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무시할 수 없게 만든 정치와 윤리 사이 — 사생활과 공생활, 개인의 윤리와 현실정치 — 의 틈 속에서 계속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은 모범적이며 (점점 더 많은 수가) 신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지만 그리 강제적이지 않은 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이리 되었단 말인가? 정말로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상향Utopia을 악평하는 —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집단학살을 저지른 다른 군주들이 자신들은 더 우월한 세계를 건설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리고 수단은 절멸이고 목적은 환상이었던 — 세기에서 출현하였기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를 씁쓸하게도 여전히 논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속된 결과가 어떤 것이든 — 개인으로서, 국가로서 — 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예의식 (혹은 양심, 혹은 밤에는 잘 수 있는 능력)과 같은 행위들이 없단 말인가?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고문을 사용하는 것을 심지어 그 자신이 피해자가 된 이후에도 묻지 않았다. 그는 [[로마사 논고]]에 “나라의 전적인 안전이 결의에 달려 있을 때, 정의인가 아니면 부정인가, 인간다움인가 아니면 잔인함인가, 명예로운 것인가 아니면 명예롭지 않은 것인가에 관한 어떤 생각들도 팽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적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정부들이 암묵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했음은 의심할 바 없다. 지금 우리 정부의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부통령 체니Cheney는 테러용의자들과 대처할 때는 “악한 측면”으로 갈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고 법무장관 무카세이Mukasey는 “강화된” 심문의 어떤 방법에 고문을 넣을 것인가를 결정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사용되었던 방법 스트라파도 — 오늘날 “팔레스타인 교살”로 알려져 있는 — 에 대해서는 질문의 여지가 없다. 이 방법은 2003년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의 미 중앙정보부에 수감되어 있던 이라크 정치범의 사망원인으로, 팔이 등 뒤로 수갑에 채워진 채 매달려 있던 죄수가 질식으로 죽은 것이었다. 나라가 강력하고 안전할 때에는 사적 윤리가 다시금 우세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위안을 주는 사람들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그런 때가 올 가능성을 없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나는 나 자신의 영혼보다 내 나라를 더욱 사랑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적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충분하게 그의 연구를 평가한다해도 나라를 더 사랑하겠다는 그의 결정이 결코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로서 그것은 끔찍한 선택이다.

출처: The New Yorker, 2008. 9. 15.

번역: 라티오 출판사

Democracy

Author: Paul Ginsborg
Paperback: 224 pages
Publisher: Profile Books Ltd (April 17, 2008)
ISBN-10: 184668093X
ISBN-13: 978-1846680939

Paul Ginsborg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유엔에 가입한 국가들 중에서 “넓은 의미에서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의 수(2000년에 192개국 중 120개국)가 늘어났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질은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정치의 본질은 변화하였다. 마르크스와 존 스튜어트 밀의 저작들을 배경으로 삼은 이 책은 사람들이 역동적이고 참여적인 정치적 과정에 더많이 동조한 사람일수록 박탈감을 느낀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인가? Ginsborg는 아주 신랄하게 세부적인 것들을 찾아낸다. 새로운 시장과 이윤을 찾아 “지구를 사냥”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자산을 재빨리 이전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삶은 영원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우리의 사회조직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기업만이 아닌데, 다른 한편으로 정치권의 로비스트들은 자신들의 주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려고 끊임없이 로비를 하고 있으며, 이것 역시 훨씬 미세하게 영향을 끼친다. 가족에 대한 “가장 크고 단일한 문화적 영향”은 텔레비전인데, 이 서비스는 비견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텔레비전 회사들은 비즈니스 제국이 경영하고 있으며, 그들이 방송하는 메세지는 결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여기서의 논증은 상상력의 산물이고, 세심하지만 재치있는 것이다. Ginsborg는 처음에는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간주하면서 시작하나 현재의 위기의 원인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경제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젠더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의 재발견과 재활성화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은 직감과 확신이 혼합된 것이고, 정치가들이 할 수 있을만한 것들을 담고 있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7. 27.

번역: 라티오 출판사

그들의 투쟁
Niall Ferguson 
  
[[히틀러의 제국: 나치의 유럽 점령지 지배Hitler’s Empire: Nazi Rule in Occupied Europe]] by Mark Mazower, 726pp, Allen Lane £30 
  
[[히틀러Hitler]] by Ian Kershaw, 1,030pp, Allen Lane £30 
  
[[히틀러, 독일인과 최종해결책Hitler, The Germans and the Final Solution]] by Ian Kershaw, 394pp, Yale University Press £19.99 

1942년 9월 힘러Heinrich Himmler는 제국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20년 사이에 “게르만 인들”이 8천3백만 명에서 1억 2천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고, 이들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소련에서 탈취한 영토에 재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나아가 “잉게르만 지역Ingermanland” 처럼 멋들어진 이름을 가진 새로운 구역을 늘릴 수도 있었다. 아우토반과 고속철도가 돈, 볼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랄 지역까지를 “한 줄로 꿰어 놓은 진주” — 독일의 전초지를 강화하는 — 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힘러의 표현에 따르자면 독일의 “동부지역” 정복은 “세계가 영원히 지켜보게 될 가장 위대한 식민지 건설작업”일 수 있었다. 
  
사실상 나치 제국은 여태까지 가장 성공하지 못한 식민지 건설을 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독일의 1871년 국경선을 확장하려는 운동은 1938년 시작되어 1942년 말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때까지 제국은 유럽 대륙의 약 삼분의 일과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거의 절반 — 2억 4천4백만 명 — 을 포괄하였다. 그러나 적군이 동 프로이센으로 진군해 온 1944년 10월경에는 제국은 사라져버려 역사상 가장 단기간 존재했던 제국들 중의 하나이면서 최악의 제국이 되었다.  
  
나치 제국은 왜 이처럼 끔찍하게 실패하였을까? 너무 강력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 형편없어서?

마조워Mark Mazower는 자신이 [[히틀러의 제국]]이라 부른 새로운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에서 최근 들어 제3제국에 대해 상당히 종합적인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많은 역사가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버레이Michael Burleigh와 투즈Adam Tooze처럼, 마조워는 나치 체제가 전쟁과 정복에 있어서만 그 진정한 성향을 드러내었다는 사실에 매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체제는 단순히 변형된 국민국가 역시 아니었다. 나치 체제는 처음부터 제국이 되고자 하였다.  
  
마조워는 최초의 나치 식민지 — 분할된 체코슬라바키아를 대신하여 시작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대한 보호령” — 를 그 전에 프랑스가 튀니스와 모로코에 혹은 영국이 이집트와 이라크에 설립한 보호령과 비교하고 있다. 전시 포즈나니 지역의 주지사였던 뵈트케르Viktor Böttcher가 1914년 전에는 독일 카메룬의 관리였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수행하였던 건설작업을 이제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나치 관리들 중의 한 명이었다. 나치는 소련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을 항상 “식민지적 방식으로 경제적 착취”를 할 수 있는, “식민지적 관점에서” 중요시하였다.   
  
마조워가 언급한 것처럼, 동시대인을 놀라게 한 다른 점은 동부 유럽에서 피식민자가 식민자와 피부색이 같다는 것이었다. 나치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초기 해설가 중 한 명인 에드리Eugene Erdely는 1941년에 “백인종에 속하는 어떤 민족도 이러한 조건을 이전에 강요 받은 적이 없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나치는 자신들의 비틀린 교묘한 인종 이론 덕분에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힘러에게 슬라브 인종 모두는 동부지역에 새로운 “금발의 주”를 창출하기 위해 “아리안 인종”으로 대치되어야 할 “몽골 유형”이었다. 히틀러에게 러시아 인들은 “북미 인디언들”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나치 제국의 존속기간이 짧았던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제3제국이 대영제국뿐만 아니라 소련 그리고 미합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된 이후로 제국은 분명하게 파멸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마조워의 책은 제국으로서 제3 제국의 실패를 이차적인, 내생적인 설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단순한 인구통계로 볼 때, 8천만 명의 독일인들에게 유럽 대륙을 떠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론적으로, 영국이 우타르 프라데시를 지배한 것보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는 것이 더 수월했어야만 했다. 우선 첫째로, 칸푸르와 런던 사이의 거리보다 키예프와 베를린이 더 가까웠다. 둘째로, 독일인은 1941년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에서 해방군으로서 진심으로 환영 받았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뿐만이 아니었다. 1930년대 스탈린은 소련의 서부지역 전역을 인종적 소수자로 혐의를 두고 폭력적으로 다루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의 지배가 더 나을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마조워가 보여주듯이, 독일인들은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살리는데 실패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4단어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함, 냉담함, 잔인함, 어리석음이 그것들이다. 물론 모든 제국은 이러한 악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치제국은 이러한 악을 극한으로 몰고가 지배를 지속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애 버렸다. 제국은 후반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신경을 썼다. 나치 제국은 무정한데다 무심했다.     

장식이 많은 군복을 입고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거만한 제국 독일인들”은 심지어 외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주장하는 같은 인종의 독일인들조차 소외시켰다. 게다가 이들은 새로이 지배 받게 된 민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였다.  
  
제국의원 코흐Erich Koch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책임을 맡을 당시 “나는 이 나라에서 마지막 모든 한 방울까지 짜낼 것이다”, “나는 이곳에 행복을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했다. 
  
괴링Hermann Göring 은 독일인이 아닌 자들이 “굶주림으로 쓰러진다” 해도 “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떠벌렸다. 
  
예를 들어, 바르바로사 작전 후 적군 포로 3백9십만 명이 생포되어 1942년 2월에는 겨우 1백1십만 명만이 살아남아있을 정도로 극도로 무관심한 대우를 받았다. 철조망으로 둘러싼 영창에 가두어 진 채, 그들은 영양실조와 질병에 방치되었다.  
  
나치가 피정복자들을 굶기는데에만 만족한 것도 아니었다. 나치는 (히틀러 식 경례를 하지 못했거나 혹은 주제넘게 했거나 입맛에 따라 행해질 수 있는) 즉흥적인 구타에서 산업화된 대량살육까지 모든 방식으로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즐겼다.  
  
마조워가 지적한 바와 같이 소수의 독일인만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인식했다. 1944년 2월 프라우엔펠트Gauleiter Alfred Frauenfeld의 표현에 의하자면, “무자비한 만행의 원칙, 지난 수세기 동안 유색인종 노예들에게 사용한 방식과 관점에 따라 이 나라[우크라이나]를 취급한 것…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을 대우하는 본능이 완전히 결여되었음을 입증하며, 이에 대한 결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참담함이었다.”  
  
동부지역 담당부서의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의 동료들 중 한 사람이 말한 바처럼, “부적당한 처우의 대표작… 완벽하게 친독일적이었고 우리를 해방자로서 기쁘게 맞이하였던 열렬한 지지자들을 일년 안에 숲과 늪지로 몰아넣었다.” 
  
오만함에 더해 냉담함과 잔인함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일찍이 1938년 한 독일 국방군 참모 장교는 새로이 획득한 주데텐 지방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국가의 터무니없는 무능력의 정도”에 대해 논평하였다. 로젠베르크의 동부 지역 부서(Ost-Ministerium)는 곧 “혼란 부서”(Cha-Ost-Ministerium)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친위대는 제국을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집중된 힘을 확립하길 열망하였다. 그러나 마조워는 힘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8십만 명의 독일 인종의 재정착을 어떻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오렌도르프Otto Ohlendorf — 게슈타포 출동부대의 충실한 사령관으로 수만 명의 소련의 유대인들을 대량 살해한 데 책임이 있는 — 는 힘러의 특기가 “무질서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통탄하였다. 그러나 나치 제국의 기능장애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로젠베르크나 힘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인에게 있었다. 결국 제3제국의 책임자는 히틀러였다. 6백50개의 주요한 입법 명령이 전시에 내려졌는데, 72개를 제외하고 전부가 그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이거나 공포된 법령이었다.  
소련의 침공 바로 직후, “동부 점령 지역의 광대한 규모로 보아 이 지역에서 치안을 확립할 수 있는 군사력은 재판소에서 판결을 내려 저항세력을 벌주는 대신 점령군이 주민들 중 저항하려는 모든 의지를 궤멸시킬만한 테러를 확산시킬 때에만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이는 히틀러였다. 점령지역을 진압하는 방법으로 “여하간 의심스러워 보이는 모든 자를 쏠” 것을 선호했던 이는 히틀러였다.  
  
제국주의적 통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제정신으로 생각했던 제3제국에 드문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베스트Werner Best의 눈에 히틀러는 당대의 칭기즈칸 — 자신의 제국마저 유지시킬 수 없는 파괴의 전문가 — 이었다. 스탈린 체제가 1941년 무너졌거나 (거의 일어날 뻔했던) 혹은 미합중국이 태평양 지역 우선 작전을 채택했다면 이 제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탱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마조워는 이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이번에 펭귄출판사에서 한 권으로 (주를 빼고) 재출판 된 커쇼 경Sir Ian Kershaw의 기념비적인 히틀러 전기 독자들에게 놀랍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에 대단했던 역사편찬 논쟁에서 그를 “목적론자intentionalist들”보다 “구조주의자들”과 유사한 태도를 취하게 한 커쇼의 초기 저서는 제3제국에 대한 대중적 태도에 맞추어졌었다. 그러나 그의 전기가 진전됨에 따라 히틀러의 중심적 역할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가장 최근의 소논문들을 단행집으로 펴낸 [[히틀러, 독일인들과 최종 해결책]]에서 커쇼가 쓴 것처럼, “히틀러가 없었다면, 친위대-경찰 국가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1930년대 후반기까지 유럽의 전면적인 전쟁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소련에 대한 침공도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홀로코스트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이 히틀러가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의 구체적인 모든 사항까지 명백하게 명령을 내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나치당원들 — 나치 제국의 “점증적인 과격화”에 책임이 있는 자들 — 은 자신들을 다소 애매하게 “총통을 지향하여 노력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없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취했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히틀러의 제국은 1945년에 그 역사적 유효기간이 다한 개념을 원칙적으로 무리하게 적용한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부유해 지는 길은 외국인들과 그 땅의 착취를 거쳐야한다고 그럴 듯하게 말해왔다. 생활권Lebensraum 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제국은 정착할 새로운 땅과 세금을 물릴 새로운 인민을 위해 싸워왔다. 그러나 20세기 동안, 선진 산업경제는 식민지 없이도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명백해졌다. 참으로, 식민지는 불필요한 짐과 같은 것일 수 있다.  
  
1942년에 경제학자 슈베르트Helmut Schubert는 독일의 진정한 미래는 “영구적인 그리고 증가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존하여 “거대한 산업 지구”가 되는 것에 있다고 적었다.  
  
동부 지역의 독일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일의 동부화는 농업에서 산업으로 노동의 세속적인 이동이 지속됨에 따라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전시 경제의 급박한 상황이 이러한 관점을 정당화하였다. 1944년 말까지 약 5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구 제국의 광산과 공장에서의 노동에 징집당했다. 재미있는 아이러니로 인해 인종적으로 순수한 절대적 통치권에 대한 꿈이 독일 자신을 다인종 노예국가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물론 의도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을 때 의도하지 못한 결과가 가장 잘 일어날 수 있다. 히틀러의 해석자는 후에 “나치는 끊임없이 천년 제국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5분 앞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논평했다. 그들 제국의 존속 기간이 그렇게 짧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6년조차도 매우 매우 길었다.
  
Niall Ferguson은 The Financial Times의 기고 편집자이다.  
 
출처: Financial Times, 2008. 9. 13.

번역: 라티오 출판사

The Cunning of Unreason: Making Sense of Politics

Author: John Dunn
Paperback: 416 pages
Publisher: Basic Books (August 21, 2001)
Language: English
ISBN-10: 0465017487
ISBN-13: 978-0465017485

Product Description
John Dunn은 논증과 사상의 형성과 해석에 있어 역사적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접근법을 정치이론에 도입한 Cambridge 학파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The Cunning of Unreason은 현재의 정치적 환경에 대한 이 학파의 접근법을 적용한 강력한 사례이다. Dunn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위대한 정치사상가들 사이의 지속적인 연관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 부패, 세계화, 보수주의에 관한 최근의 경향 등에 관한 당대의 논의를 검토한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Francis Beckett

거의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네 권의 책에서 고통스럽고 격렬한 제1차 세계대전을 본다.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말하지 못한 세계대전 이야기(We Will Not Fight: The Untold Story of World War One’s Conscientious Objectors)]]by Will Ellsworth-Jones, 320pp, Aurum, £18.99

[[왕과 조국을 위해 — 제1차 세계대전의 목소리(For King and Country – Voices from the First World War)]]by Brian MacArthur, 480pp, Little, Brown, £20

[[사상자들: 다섯 남자는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았나(Casualty Figures: How Five Men Survived the First World War)]] by Michèle Barrett, 224pp, Verso, £14.99

[[솜 진흙탕: 한 보병의 프랑스에서의 경험 1916-1919(Somme Mud: The Experiences of an Infantryman in France 1916-1919)]] by E.P.F. Lynch, edited by Will Davies, 368pp, Doubleday, £17.99

2008년 11월 11일은 휴전 90주년 기념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시대를 살아오진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여전히 생생하고 쓰라린 기억이다. 작가와 역사가들은 더 이상 뽑아낼 만한 것이 없을 때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수없이 다루어왔다. 우리는 키치너(Kitchener)와 헤이그(Haig), 애스키스(Asquith)와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클레망소(Clemenceau)와 카이저(Kaiser) 황제에 관해 읽기 원하는 것은 모두 읽어왔고, 현명하게도 올해 출간된 책들은 그런 부류가 아니다.

그 전쟁이 특별히 생생한 이유는 한 세대 전체에게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 대부분이 알 수 있을 만큼 그들과 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여전히 내가 방금 끝마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싸웠던 남자들에 관한 이 네 권의 책을 연달아 읽은 후에(물론 태평한 주말을 위한 사전준비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나는 상자에서 얇고 누런 편지들을 꺼내 나의 할아버지가 경험했던 것을 다시 상상했다.

그는 세 명의 어린 딸이 있어서 징병을 면제받았고, 1914년에 지원병을 신청했지만 근시여서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가 1916년에 사무실에서 런던 남부에 있는 집으로 가는 도중에 한 여성이 그에게 흰 깃(겁쟁이의 상징)을 건넸다. 그는 다음날 입대했다. 그들에게는 근시가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포탄을 멈추게 할 신체를 원했고, 라이플총병 제임스 컷모어(James Cutnore)는 1918년 2월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다가 3월 28일에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때 나의 어머니는 9살이었고 평생 그 사건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때 총명했던 그녀는 말년인 1980년대에 치매로 뇌가 크게 손상받아 자식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무섭고 오래 지속되고 헛된 할아버지의 죽음만은 여전히 기억했다. 그녀는 여전히 할아버지의 마지막에 관해 말할 수 있었는데, 그때 그는 탄환 충격을 크게 입어 거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할머니는 이(louse)를 잡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매일 할아버지의 군복을 다림질했다. 할머니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가 전선에서 쓴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사망한 그의 형제들 및 사촌들에 관한 정보를 보관했다.

할머니는 정치인들을 비난했다. 할머니는 그를 전쟁터로 보낸 세대를 비난했다. 할머니는 키플링(Kipling)의 말에 공감하였다: “누군가 우리가 왜 죽었는지 묻는다면 /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오.” 할머니는 사슨(Sassoon)에게도 공감하였다: “내가 난폭하고, 대머리이고, 숨을 헐떡인다면 / 기지에서 육군 소령들과 함께 지낼 텐데 / 그리고 시무룩한 영웅들을 점점 더 빠르게 사선으로 보낼 텐데…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젊은이들이 죽었을 때 / 나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죽을 텐데.”

그러나 할머니는 무엇보다 할아버지에게 흰 깃을 건넨 불명의 여성과 전국에서 그와 똑같은 짓을 했던 인정머리 없고 독선적인 수천 명의 여성들을 비난했다. 윌 엘즈워스-존스가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에서 일군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흡입력 있고 사려 깊은 설명을 통해 명확히 밝혔듯이, 실제로 그런 여성들이 수천 명 있었다. 전후에 버지니아 울프는 흰 깃을 건넨 사람이 50-60명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엘즈워스-존스의 성실한 연구가 보여주듯 이는 허튼소리이다.

엘즈워스-존스의 이야기들 중 일부는 여전히 독자를 화나게 할 힘을 가지고 있다. 15살 먹은 한 소년이 1914년에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그는 열병에 걸려 집으로 보내지기 전에 몽스(Mons)에서의 후퇴, 마른(Marne) 전투, 첫 번째 이프르(Ypres) 전투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가 푸트니(Putney)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소녀 네 명이 그에게 흰 깃을 건넸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군대에 있다가 제대했으며 이제 겨우 16살이라고 설명했다. 몇몇이 소녀들 주위에 몰려들어 킬킬거렸다. 나는 안절부절 못했고 몹시 당황했고… 매우 수치스러웠다.” 그는 곧장 가장 가까운 신병 모집소로 가서 다시 입대했다.

이어서 엘즈워스-존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 버트 브로클스비(Bert Brocklesby)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다른 아들 두 명이 전선에 있었는데도 우편으로 흰 깃을 받았다고 한다. 영국에서 그는 수감될 수 있었을 뿐이지만, 군은 그를 포함한 수감자 16명을 군사법정의 관할 아래 있는, 명령에 불응하면 총살당할 수 있는 프랑스로 보내버렸다. 그들 16명은 자신들에 대한 판결이 마지막 순간에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된 이유를 까맣게 몰랐지만, 엘즈워스-존스의 성실한 연구는 최초로 그 이유를 밝혀낸다. 그것은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군대에 대한 흡입력 있고 놀라운 이야기다.

브로클스비는 기독교 평화주의자였지만, 이 책들에 나오는 기독교는 호전적이고 위선적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교회의 입장은 모든 남자는 신에게서 싸워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었다 — 성직자들은 예외인데, 캔터베리 대주교가 병역이 서품과 모순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은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다.

하원 의장을 돕는 사제인 부주교 바실 윌버포스(Basil Wilberforce)는 “독일인을 죽이는 것은 성서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는 성스러운 일입니다”라고 설교했다. 불로뉴(Boulogne)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더러운 감방에 갇혀있던 브로클스비는 악취에 코를 틀어막은 한 사제의 방문을 받았다. “네 종교가 무엇이냐?” 그 사제가 물었다. “저는 감리교도입니다.” “오, 이런, 너를 도울 수 없겠구나 — 나는 영국 국교도다.” 그 사제가 사형집행이 연기된 브로클스비를 방문해 그를 “인류에 대한 치욕”이라고 부른 후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사제들이 동틀녘에 총살을 선고받은 300명의 남자들에게 보내졌을 때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브라이언 맥아더는 [[왕과 조국을 위해서]]에서 한 군목의 설명을 통해 이 사형수 감방을 보여준다. “내가 어떻게 그의 영혼에 닿을 수 있을까요? 나는 성서를 꺼내 그에게 복음서 한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 관심이 없었고, 읽은 구절에 관해 조금이나마 대화하려는 나의 시도에 냉담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결국 그들은 함께 찬송가를 불렀고 사형을 선고받은 그 불쌍한 군인은 그로부터 약간의 위로를 받은 듯 보였다. 나는 어떤 시끄러운 노래도 그를 위로할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맥아더의 책은 전쟁으로 삶이 갈갈이 찢긴 남성들과 여성들의 편지와 일기를 선별해 묶은 것으로, 그는 참고할 만한 글을 거의 제공하지 않고 또한 거의 아무런 편집도 하지 않은 채 편지와 일기가 스스로 말하도록 한다. 이것이 한 세대에게 상처를 입힌 공포에 독자를 더 가까이 데려간다.

여기 1916년에 동생에게 화를 내며 편지를 쓰고 있는 군인이 있다: “머저리처럼 지원하다니… 너는 여기로 와서 뒈지는 것이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할 거야. 일단 기다려. 너는 죽음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속 태우고 있어.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일단 기다리고, 그 다음에 맨 앞으로 나서기 전까지 기다리면서 네 동료들이 기관총에 맞아 고꾸라지는 걸 본 후에, 그러고 나서 그것이 영광스러운 행동인지 생각해봐… 어머니는 누군가의 생명이 여기서는 0.5펜스의 값어치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나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찢으며 슬퍼하고 계셔. 너는 그걸 보지 못한 거야? 그런데도 자원해서 어머니의 슬픔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거야?”

죽음의 비참함은 미셸 바렛의 [[사상자들]]에서 모든 페이지에 걸쳐 나온다. 한 예로 갈리폴리 전투(Gallipoli campaign)를 치르는 동안 한 군인이 쓴 글을 보자: “터키인들은 이 참호들을 쌓을 때 분명 모래자루가 부족해서 그 대신 여기저기 널린 터키인 시체들 한가운데에서 작업하곤 했다… 그 시체들은 터키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속이는 데 적합했는데, 자신을 존중하는 모래자루라면 결코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참호 사이를 뛰어다닌 군인이 전달한 노트를 보자: “선생님, 오늘밤 구덩이를 파고 심하게 부패한 프랑스인을 다시 묻어야 하는 뚱뚱한 네 녀석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럼주를 약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건 정말이지 야만적인 일이어서 불쌍한 악마들은 그 대가로 무언가를 받을 만하고 게다가 저는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썩어가는 시체들이 내뿜는 엄청난 악취 한가운데에서 시체들은 장비와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었고, 군인들은 삐져나온 라이플총의 총신을 무덤 속으로 집어넣고 시체들의 이름을 개머리판에 적고 있었다. 전장의 규율은 사라졌다: “병기와 장비가 부족해지자 이 관례는 금지되었다.”

바렛의 짧고 흡입력 있는 책은 참전했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생존자 다섯 남자의 회고록이다. 그녀의 강조점은 생존자들이 전사한 그들의 전우들만큼이나 심한 충격을 받은 사상자들이라는 것으로, 그녀는 전쟁 중과 전후 그들의 궤적을 쫓는다.

1917년 6월 8일, 그들 중 한 사람인 포병 로널드 스커스(Ronald Skirth)는 모든 전우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았다. 사방이 피범벅이었지만 그의 악몽에 나오는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은 독일인이었다. 그 독일인은 소년이었고 작은 언덕에 앉아 있었다. 그 소년은 분명 지갑 속에 있던 부모님과 여자친구 사진을 보다가 죽었는데, 그 여자는 훗날 아내가 된 스커스의 여자친구와 매우 닮아 보였다. 그 여자의 사진에는 “나의 한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한스를 죽였는가? “내가 쏜 포탄이 그를 죽였을 리 없다. 그랬다면 그의 몸은 다른 이들, 다른 것들처럼 부풀어올라 터져버렸을 것이다. 그는 탄환 충격으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라고 스커스는 썼다. 스커스는 포탄을 쏘고 있었다.

또 다른 생존자 E.P.F. 린치는 젊은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1921년 연습장 20권에 연필로 놀랍도록 생생한 전쟁 회고록을 썼지만, 시장(market)이 장군과 정치인의 자기정당화를 요구하고 실제 전쟁 기억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쓰라렸던 기간에는 출간되지 않았다. 린치가 죽고 20년이 흐른 뒤인 2002년 그의 손자는 린치의 회고록을 영화제작자이자 군사 전문 역사가인 윌 데이비스(Will Davies)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그것을 편집해 [[솜 진흙탕]]으로 출간했다.

데이비스는 소개글에서 자신은 린치의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르지 못한 언급과 인종적 서술”을 완화하려는 유혹을 거부했다고 썼는데, 독자는 그것 때문에 처음 몇 쪽만을 읽고도 곧바로 역겨움을 느끼겠지만 나는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고 본다. 린치를 실은 군수송선이 케이프타운(Capetown)으로 가는 도중에 멈춰 섰을 때 “깜둥이들은 고함을 질렀고 우리를 불렀다.” 그들은 페니를 원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몇 페니를 던져주고 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군가 1실링을 내보이며 거구인 깜둥이 두 명에게 다시 싸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고 다시 한 번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에 싫증이 나자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동전을 빨갛게 될 때까지 달궈서 던졌고 그 결과를 보며 박장대소했다. 기껏해야 몇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이 괴이한 에피소드에 관한 서술과 같은 것이야말로 전쟁에 관한 린치의 솔직하고 호소력 있는 글이 가진 힘이며, 우리는 점차 그와 그의 동료들을 걱정하면서 그들이 보았던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진흙탕에 빠진 한 남자를 구하려고 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그는 “난도질 당해 엉망이 된 시체”였다. 그는 깨끗하게 반으로 절단되어 있었고 가슴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피투성이에 석고처럼 굳은 그의 육체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젊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의 회고는 대다수 영국인의 서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바로 쓰라리고 격한 환멸을 결여하고 있다.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을 목격하고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입은 영국 군대는 슬픔을 안고 귀국했다. 그들 중 일부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조국이 그들의 희생을 존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 역시 방식은 달랐지만 똑같이 상처 입은 삶을 살았다. 어머니, 아내, 여자형제, 연인들은 죽은 자들을 애도했고, 자신들이 지킨 소수의 낯설고 상처 입은 남자들을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전쟁만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떤 전쟁도 제1차 세계대전처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했다. 1920년대 초만 하더라도 혁명은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나이든 남자들이 다시 권리를 주장하면서 혁명은 점차 시들어갔지만, 1945년 이후 전쟁과 싸운 세대가 마침내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적 합의와 복지국가는 애틀리(Attlee)와 맥밀런(Macmillan)에 의해 수행되었고, 발을 질질 끄는 것으로 유명한 맥밀런의 걸음걸이 — 1960년대 풍자작가들에게는 큰 선물이었던 — 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역사가들에게 그 전쟁은 여전히 균형 잡힌 시각으로 되돌아보면서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과 우리 사이에는 학문적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네 권의 책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여전히 그 전쟁을 고통과 열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1914년 수상 애스키스(Asquith)는 말했다: “전쟁은 언제나 폭도들에게 인기가 좋다.” 당시에는 그 말이 사실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결코 그렇지 않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우리에게 쓰라리고 실제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출처: The Guardian, 2008. 5. 17.

번역: 라티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