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 뒤의 여인
Eamon Duffy

John Guy, A Daughter’s Love: Thomas and Margaret More, Fourth Estate, 2008.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가장 사랑받았지만 동시에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잉글랜드 정치가라는 점에서 처칠에 견주어지곤 한다. 그를 연구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에게서 천재와 영웅 둘 다를 발견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인 모어는 1516년에 출간한 [[유토피아(Utopia)]]에서 서구 문화의 위대한 우화들 가운데 하나를 창조했다. 모어는 변호사들 가운데는 드물게 정치가였으며, 전제적인 왕이 강요하는 그릇된 서약을 묵인하기보다는 참수당하는 편을 선택할 만큼 흔들림 없는 청렴한 인물이었다. 가톨릭교도들에게 그는 교회 통합을 위해 희생된 결연한 순교자였다. 로버트 볼트(Robert Bolt)와 같은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는 “사계절의 사나이“, 이데올로기에 맞선 개인적 양심의 주창자였다.

그러나 이와 명백히 모순되는 또 다른 모어가 있다. 이 인물은 1529-1533년에 점차 높아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파도에 맞서 백오십만 자에 달하는, 때로는 신랄한 논증을 퍼붓고, 이교도들에 대한 추적과 처형을 열정적으로 정당화한 논쟁적인 저술가였다. 모어는 대법관이 되기 전에도 금서들을 찾아내기 위한 단속에 앞장섰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로 의심되는 자들을 심문하는 일에 관여했고, 대법관 임기 중에는 이단 혐의를 받은 여섯 명 중 세 명에 대한 화형을 집행하겠다는 영장에 개인적으로 서명했다. 이러한 모어는 그를 찬양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튜더 왕조 시대의 가톨릭 전기작가들은 그의 경력 가운데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는 쪽을 택한 반면 프로테스탄트 저술가들은 존 폭스(John Foxe) 이래로 그를 고문가이자 광신자라고 비난했다.

존 가이는 지난 50년 동안 대다수 다른 잉글랜드 역사가들보다 모어의 위대함을 학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 모어의 공적 경력에 대한 그의 1980년 연구(The Public Career of Sir Thomas More는 십여년 동안 모어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저서였다. 가이는 튜더 왕조의 혼란스러운 초기 정치에서 모어가 수행한 역할을 밝혀내고, 계몽적이고 혁신적인 대법관으로서의 토머스 경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전에는 경시되었던 많은 문헌을 이용했다. 모어의 삶과 평판에 대한 그의 2000년 연구(Thomas More)는 여전히 최선의 입문서이다.

가이의 새 책은 이러한 저술들의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을 포함하지만 그 호소력은 매우 다르다. [[딸의 사랑(A Daughter’s Love)]]은 모어와 그의 맏딸 마가렛(Margaret)에 대한 이중 전기이다. 모어는 여자아이도 남자아이만큼 교육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한참 앞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이 아들들과 똑같은 교양 교육을 받도록 했다.
신동이었던 마가렛은 라틴어와 희랍어에 숙달해 당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아버지의 친구인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텍스트들을 교정할 수 있었다. 1524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시행하게 될 검열법에 저항하여 에라스무스가 쓴 [[주의 기도에 대한 성찰(Meditations on the Lord’s Prayer]]의 뛰어난 번역본을 출간했다. 모어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상담자가 되어 그의 사유를 공유했으며 은밀히 아버지가 입었던 참회의 마모직(馬毛織) 상의를 빨았다.

그는 모어가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마지막이자 가장 적합한 위안 상대였다. 모어가 자신의 독방에서 썼던, 일부는 목탄불에 그을려 조각만 남은 일련의 숭고한 편지들 가운데 가장 친밀하고 솔직한 편지는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버지가 처형당한 후에 그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런던교의 대못에 걸려 있던 모어의 머리를 구했다. 결국 그는 그것을 자신의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그의 가장 귀중한 보존 행위는, 마침내 마리 영왕 치세에 인쇄된 위대한 2절판에 대비해, 런던탑에서 쓴 편지들로 감동적인 절정에 달한 아버지의 모든 영어 저술을 모은 것이었다.

가이는 재능과 위대함이라는 측면에서 모어의 경쟁자로서 마가렛을 매우 높게 평가하며, 그가 모어라는 인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자료 대부분을 제공했다고 본다. 그는 눈감아줄 수 있는 과장을 섞어 마가렛이 없었다면 그의 아버지는 “단지 역사의 또 다른 각주”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그는 마가렛의 탁월한 희랍어 학식과 번역에 근거하여 마가렛을 튜더 왕조 초기 잉글랜드에서 틴들(Tyndale)의 것에 필적하는 신약성서 번역본을 내놓을 수 있었던 정통 가톨릭교도로 본다. 가이는 이 점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헨리 왕조의 주교들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물론 그녀는 여자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결코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회고담으로 모어에 대한 초기 전기작가들에게 최선의 자료를 제공한 마가렛의 남편 윌리엄 로퍼(William Roper)를 모욕한다. 가이는 그를 부인의 성취로 명성을 얻은 기회주의자로 본다. 그는 가부장제를 맹목적으로 신봉하여 모어의 정치적 삶에서 마가렛을 “덮어버렸다”는 이유로 모어에 대한 최초의 전기작가인 성직자 니콜라스 합스필드(Nicholas Harpsfield)를 비난한다. 이는 전혀 공정하지 못하다: 합스필드는 제한된 사료를 가지고 작업했으면서도 마가렛의 학식과 선한 성품 그리고 토머스의 “가장 중요하고 거의 유일한 세속적 위안”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열광적으로 칭찬했다. 그럼에도 가이의 책은 모어의 가장 중요한 관계에 적절한 초점을 맞춘, 모어의 삶에 공감하는 전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모어에 대한 가이의 공감은 몇 가지 측면에서 놀랍다. 가이의 이전 작업은 그의 훌륭한 스승 제프리 엘튼 경(Sir Geoffrey Elton)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인 모어의 종교적 견해에 대한 열광의 결여를 공유했다. 그러나 이번 저작에서 가이는 따뜻하고 탄복하는 어조로 모어에 관해 저술하며, 모어가 분명 영웅이었고 심지어 성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몇 가지 유보조건을 유지한다. 그는 모어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저술들을 따분해하며 그 맹렬한 표현을 거부한다. 그는 튜더 왕조 시대의 논박들 가운데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은 모어의 [[이교도들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Heresies)]]를 두고 “매우 중요하다”는 입에 발린 말을 한다. 그러나 이 기지 넘치고 강력한 논증을 펼친 책에 대한 그의 열광에는 확신이 없으며, 그는 이 저작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폭력의 정당화에 초점을 맞춘다. 가이는 모어의 복잡한 인성 가운데 이러한 측면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탐색하지 않은 채 이전의 이상에 대한 배반으로만 본다.

가이의 책은 인쇄된 자료에 대한 독보적인 지식뿐 아니라 기록보관소들에서의 새로운 작업에 근거한다. 이 책은 지식을 가볍게 전달한다 — 각주는 없으며 학식은 뒷부분의 도서목록에 대한 에세이 안에 감추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 따뜻하고 생생한 초상화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전문가도 읽을 만할 것이다.

Eamon Duffy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기독교 역사학 교수이다.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 경(1478-1535)은 런던시의 주 장관 대리로 정치적 삶을 시작하여 승진을 거듭해 하원 의장이 되었으며 이후 1529-1532년에는 대법관을 지냈다. 1516년에 펴낸 [[유토피아]]는 책 제목이 하나의 술어가 되었다.. 그는 헨리 8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한 지 400년 후인 193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처형대에 올라서서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이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 죽는다고 말했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7. 18.

번역: 라티오 출판사

물, 어디에나 있는 물: 이 신선한 역사는 우리가 마시기에 충분한 것을 제공한다
Jonathan Gibbs

Rupert Wright, Take Me to the Source: In Search of Water, Harvill Secker, 2008.

밀레투스의 탈레스에 따르면 “만물은 물이다.” 우리의 신체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 전체의 2/3가 물로 이뤄져있다는 사실은, 물이 인간생활의 모든 요소들 — 정치, 종교, 예술 그리고 학문 — 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주제를 아우르는, 물에 대한 책을 쓰는 일은, 웃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면, 바보같은 짓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우리가 무시하는 것만큼 우리가 취하는 것이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물의 즐거움 — 목욕할 때 아이들이 물장구 — 과 그것의 무서운 면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1931년 중국 황하에서 일어난 홍수는 “어디든지 백만에서 사백만에 이르는” 인명을 앗아갔다.

“물을 찾아서”란 부제가 달린 Rupert Wright의 개관은 독자들에게 개인적인 관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세계은행에서 물 문제에 관해 일하면서 그의 관점은 더 세련돼졌다. 정치인들이 수질보건 관련 팜플렛을 망쳐놓았던 우간다에서 일했던 경험과 슬럼가의 가족들이 하루치의 식수를 배급받기 위해 길 모퉁이에서 기다리던 뉴델리에서의 여행을 그는 회상한다. 물은 깨끗하고 이용이 자유롭지만, 그곳의 아이들은 학교 바깥에서 식수를 실은 물 탱크를 줄지어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Wright는 거대한 스케일의 물 관련 프로젝트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놀랄만치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는 경고를 포함한 10개의 계율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사람은 그들이 먹을 물을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다. 배송비용을 지불하고도 물의 낭비를 막기에 충분한 비용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1983년에 전임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Boutros Boutros-Ghali의 “앞으로 서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정치가 아닌 물과 관련해서 일어날 것이다”라는 발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라크에서 두 차례의 전쟁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확실히 물 때문이 아니었다고 반문할 수 있다.

환경정치를 다루는 부분은 이 책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나는 지하수의 최대 매장지인, 여러 대수층帶水層에 관해 배운 것이 만족스러웠다. 몇몇은 유익했지만 몇몇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예시의 나열이나 숨겨진 이야기가 아닌, 사실과 전체적인 지도를 원했다. 이러한 산발적인 접근은 독자들에게 피상적인 인상만 남길 수 있다. Wright는 미네랄이 함유된 깨끗한 물을 검사하며 수맥탐지업자가 자신의 정원을 살펴보게는 하지만, 현상을 속속들이 조사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이들이 어떤 감명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조지아 주 의회의사당의 중앙 단상 위에 서서 이 지역의 사상 유례없는 가뭄을 끝내고자 기도하고 있는 Sonny Perdue 주지사의 엉뚱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세계은행은 그에게 연락을 줄 것이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7. 22.

번역: 라티오 출판사

Kant and the Early Moderns

Editors: Daniel Garber, Beatrice Longuenesse
Paperback: 276 pages
Publish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August 20, 2008)
Language: English
ISBN-10: 0691137013
ISBN-13: 978-0691137018

Review
이 책은 근대철학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여가 될 것이다. 글쓴이들은 선행 철학자들에 대한 칸트의 비판을 면밀하게 살펴보면서 칸트와 근대 초기의 사상가들, 즉 데카르트, 로크, 라이프니츠, 버클리, 흄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Edwin McCann,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Product Description
지난 200년 동안 칸트는 철학사와 근대 초기 지성사에 관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렌즈 — 더러는 왜곡된 렌즈였지만 — 역할을 해왔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로크, 버클리, 흄에 관한 칸트의 저술은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칸트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편집자들은 세계의 주도적인 철학사가들의 글을 묶어냄으로써 칸트를 선행하는 사상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

기고된 글들은 몇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첫번째 글은 칸트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로크, 버클리, 흄의 철학적 사상에 직접 관련을 맺는 것을 논의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은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러한 초기 철학자들에 좀 더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고 칸트의 독해를 반성함으로써 그들 본래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근대 초기 인식론, 형이상학, 심리철학으로부터 칸트의 비판철학으로의 “초월론적 전환”을 형성하는 논쟁에 관한 풍부하고도 복합적인 그림이다.

기고자들은 다음과 같다. Jean-Marie Beyssade, Lisa Downing, Dina Emundts, Don Garrett, Paul Guyer, Anja Jauernig, Wayne Waxman, and Kenneth P. Winkler.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개인 컴퓨터에서 티셔츠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위해 세계가 값을 치르다
Jeremy Seabrook

Confessions of Eco-sinnerFred Pearce, Confessions of an Eco-Sinner: Tracking Down the Sources of My Stuff, Beacon Press, 2008.

오늘날의 거대한 이주현상 — 지방에서 도시로 이전하거나 지구상의 변두리 지역을 버리고 떠나는 — 을 살펴보면, 영국의 산업화 초기에 일어났던 현상이 전지구적인 규모로 단순히 되풀이 되고 있다고 결론짓기 쉽다. 세계화의 드라마가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던 격변을 세계적인 무대에서 재상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한가운데로 떠난 피어스Fred Pearce의 여행담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제국권력의 경험은 “개발”이라는 거대한 채취사업이 구축될 수 있었던 반영부半影部인 “내륙지역hinterland”에 의존하였다. 오늘날 맹렬한 속도로 이루어지는 산업화는 이러한 공급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이 때문에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지역이 전례 없이 자신들의 — 그리고 다른 — 정부에 의한 내부 식민주의에 고통 받고 있다.

피어스가 찾는 것은 매우 단순해 보인다. 그는 운송되는 상품과 일상생활에서 받고 있는 서비스와 같은 “물건”들이 실제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어한다. 이것들을 생산하는데 관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이런 것들이 어떤 상황 아래서 우리의 세속적인 즐거움이라는 정원에 기적적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피어스는 인류에 대해서 염려하는 만큼 환경적 발자취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다.

그는 일모작으로 인해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으로 덮인 논을 가진 그리고 중개인, 마피아, 정치인들의 조직이 가난한 자들을 위협하는 방글라데시의 적막한 새우 농장으로 떠난다. 그는 여성 노동자들이 시간외 근무와 과도한 노동, 학대에 저항함에 따라 폭력사태가 일어났던 의류공장을 방문한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소금기 가득찬 불모지로 향하는데, 그곳에서는 목화가 아랄해를 집어 삼키고 있다.

피어스는 금으로 된 그의 결혼반지의 기원을 지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남아프리카의 드리폰테인Driefontain의 광산에서 찾는다. 그는 컴퓨터, 파란색의 곰 인형, 신발, 가짜 유화 그림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는 중국의 모든 도시들을 찾아간다.

과학저술가인 피어스는 지구가 망가지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 없어 하는 것을 손만 쥐어짜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녹색당원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위적인 구조와는 다른 맥락 — 이것이 업계에서는 업계에는 현실적인 세계로 알려져 있다 — 에 우리의 일상 생활을 가져다 놓으며, 삶의 유용한 것들을 선전할 때 거의 드러나지 않는 관계를 밝히고 있다. 경이로운 그의 여정 — 항공여행으로 180,000km라는 — 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에너지로 입증된다. 그는 시베리아의 유전에서, 마닐라의 매춘굴에서, 말레이시아의 익명의 야자기름 일모작에서 그리고 에이즈에 시달리고 있는 스와질란드에서 취재한 것을 보고한다. 불안정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다른 지역을 착취하고 소진시키는 것과 결부시키는 이 연결망에 대해 “무언가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피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해지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탄소를 상쇄하는 것에서, 중고의류를 탄자니아의 사업가에 판매하는 것에서, 다카의 의류 공장으로 이주했던 시골 여성의 삶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개선된 것에서 그 유효성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해답”을 찾는데 이르면 피어스는 절망적인 열심 녹색당원만큼이나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그는 다루기 힘든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 “국제적 공동체”로 단합되는 포괄적인 “우리”, 신뢰할 수 없는 일인칭 복수로 물러서고 있다. 세계의 보상물이 분배될 때 “우리와 그들”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대체물이 없을 정도로 자원을 소진하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환기시킴으로써 생존이 위협받는 조건에 처하면 인류가 단결할 것이라는 생각을 맹신하고 있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신들의 숙명을 실현하지 못한 것처럼 인류 생존을 위한 가장 최근의 청사진도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이 밝혀졌으니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를 제외한, 버려진 컴퓨터에서 금속을 회수하기 위해 산酸에 손을 담그는 델리의 어린 노동자들, 사우디 아라비아 황실의 쾌락에 빠진 이들, 아프가니스탄의 양귀비 재배자들, 워싱턴의 무기 판매상들, 그리고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끝나는 시점에서 존재했던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노예화된 사람들이 포함된 이들에게는 초기 자본주의보다 더 위험한 현 상황에서 어떤 구원의 대리인도 없는 것이다. 이들이 연합하는 일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무력한 노동자들이 연합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쓴 시브룩의 최근 저서로는 Consuming Cultures (New Internationalist) 가 있다.

출처: The Independent, 2008. 6. 20.

문화: 고급문화, 저급문화, 중류문화, 그리고 대중문화
Mark Henrie
2004. 10. 15.

내용 요약
‘문화’라는 관념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문화’라는 말의 용례는 아주 많아 그 말이 관념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실체를 가진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문화’라는 답이 나오는 질문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다문화주의’와 ‘문화 전쟁’을 살펴보자.

다문화주의에 따르면 문화들을 판단할 초월적 입장은 없다. 문화란 그 자체가 완전한 ‘전체’로, 그 안에 나름의 판단 기준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문화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의 산물을 이해할 초월적인 시각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얼핏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나 전통적인 교양교육과 다문화주의는 의도하는 목적이 아주 다르다. 전자는 판단력이나 식별력을 날카롭게 다듬으려 하고, 후자는 그러한 구별을 없애려 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다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미적이거나 지적인’ 무언가를 가리킨다. 이러한 문화는 특정한 집단이 공통으로 보유하는 것으로,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화는 구별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문화인이란 고급과 저급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문화란 통합과 분리, 공통성과 구별 모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문화 전쟁’에서 문화는 무엇보다 ‘도덕적’ 의미로 쓰인다. 문화란 우리가 공통으로 갖는 도덕이라는 것이다. 미합중국에서 ‘문화 전쟁’은 공통의 도덕적 지평의 상실과 그에 대한 두 가지 반응, 곧 찬양과 반동을 포함한다. 오래된 전통의 지지자들이 도덕적 반항자들을 새로운 공통성을 벼리려는 집단으로 이해하게 된 바로 그 순간에 미합중국의 ‘도덕적 위기’는 ‘문화 전쟁’이 되었다. 문화란 특정한 공통성이다.

문화와 정치 중 무엇이 우선하는가? 고전시대에는 정치가 문화에 우선했다. 그러나 계시종교가 출현한 이래로 ‘사회적’인 무언가가 정치 영역 외부에서 등장했고, 이는 상당 부분 ‘컬트cult’가 도시의 주권적 감독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문화(culture)라는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했을까? 문화는 유럽혁명시대 이후의 범주이다. 그리고 ‘문화’는 — 우리가 문화를 경험하는 문제적 방식으로 — 자유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애초에 ‘공적인 것res publica’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완전한 삶의 방식을 구성했다. 기독교는 개인들을 공적인 것에서 떼어낸 후 상이하고 더 높은 수준에서 공통의 지반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자유주의 체제는 사람들을 ‘개인들’로 추상화함으로써 정치와 문화를 분리했다. 한때 정치적 삶은 공동체의 열망을 반영하고 표출했지만, 자유주의 체제는 그와는 다른 것 — 개인들의 의지의 총합? 최소공통분모? 최고악을 피하자는 합의? 자유롭고 평등한 거래를 위한 전제조건? — 을 표출했다.

문화의 문제는 이러한 전개의 결과이다. 따라서 문화라는 답이 나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정치가 한때 자신의 자율성이라고 선언했던 공동선의 잔여물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문화는 공통의 무언가에 관해 공적으로 더 말하려는 공통된 열망의 표현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문화의 범위가 줄어드는데, 이는 공동선, 인간의 선 또한 위축된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고급문화, 저급문화, 중류문화, 대중문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대중문화(mass culture)는 대중들에게 호소하여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생산된 문화이다. 곧 유기적으로 연결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인들을 위한 문화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모조리 대중문화 — 저급문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문화 — 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중류문화 역시 고급문화인 척하는 대중문화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고급문화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문화는 ‘공통성’에 뿌리 박고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것’에서 등을 돌리는 것은 문화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 공동체의 공동선을 표상하는 것이며, 이심성(離心性)이 아니라 중심성이 진정한 문화의 표어이다. 이러한 문화 내에서만이 고급이 저급을 이끄는 방식으로 고급과 저급이 공존할 수 있다. 따라서 수도사가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수도사는 그들 자신의 공통성에 뿌리 박고 있으면서도 가장 공통적인 것들을 길러내기 때문이다.

전체 번역문: Mark Henrie, Culture
출처: The Intercollegiate Review

번역: 라티오 출판사

다윈은 어떻게 진화론 경쟁에서 승리했는가   
Robin McKie

다윈이 과학사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이라는 가장 획기적인 발견을 한지 150년이 지났다. 그러나 다윈의 독창적인 연구는 지구 반대편의 한 젊은 조류학자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로빈 맥키Robin McKie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에 감추어진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1858년 초, 말레이 제도 터네이트Ternate 섬에서 한 젊은 표본 채집가가 매우 잡기 어려운 이 섬의 극락조를 추적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이후에 그는, ‘매일 오한과 잇단 고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워서 내가 특별히 관심 갖고 있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머리 속은 돈이나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질병과 기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떻게 이것들이 인구를 제한하는지, 그리고 지구의 나이가 광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근의 발견들을 생각하였다. 그는 영겁의 시간 동안 되풀이되는 이 죽음의 물결이 어떤 영향을 미쳐 서로 다른 종들을 만들어 내는지가 궁금했다.

열이 내려가자 영감이 떠 올랐다. 그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변종들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 남아 마침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연선택 이론이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 중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열병처럼 떠 오른 것이다. 월리스는 그의 생각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그 당시 박물학자로 이미 유명했던 다윈에게 보냈다. 이 서신은 1858년 6월 18일 그러니까 150년 전 지난 주에 켄트의 다운Downe에 있는 다윈에게 전달되었다.

다윈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20년 동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해왔는데, 이제 다른 사람이, 오늘날 고생물학자인 굴드Stephen Jay Gould가 ‘자연사에 가장 위대한 이념 혁명’이라 부른, 또는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인간의 심상에 떠오른 가장 중요한 생각’이라고 말한 연구로 그 공적을 가로 챌 지도 모르게 된 것이었다. 고통 속에서 다윈은 친구인 식물학자 후커Joseph Hooker와 지질학자 라이엘Charles Lyell에게 편지를 썼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과학사에서 전설이 되었다.

후커와 라이엘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대한 주장을 보호해 주기 위해 피카딜리의 벌링톤 하우스Burlington House에서 린네 학회를 열어 두 사람의 연구물을 같이 살펴보았다. 7월 1일 학회 회원들이, 지금은 왕립 아카데미의 일부가 된 방에 역사상 다른 어떤 것보다 인류에게 모욕적이며 문제를 일으킨 이론에 대해 듣고자 모였다. 정확히 150년 전 다음 주, 마르크스의 생각보다 더 급진적인 개념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맨 처음에 다윈과 월리스가 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린네 학회 회원들의 환호에 맞추어 웅변적인 연설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측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월리스는 여전히 말레이 제도에 있었고 다윈은 집에서 그의 아내 엠마와 함께 6월 28일 성홍열로 죽은 19개월 된 아들 찰스때문에 비통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젠틀맨으로 구성된 청중들이 있었다. 다윈과 월리스의 노트와 논문, 서신들을 읽은 후 그들은 몇 시간 동안 학회업무의 몇몇 항목들을 가지고 심한 말다툼을 하였다. 역사가인 무디JWT Moody가 그 모임에 대한 1986년의 연구에서 묘사한 것처럼 회원들은 ‘새로운 개념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기보다 자신들에게 쏟아진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 채 결국 자리를 떴다. 인류가 창조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소식을 맞이한 것은 지루한 침묵이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아주 하찮은 지적인 대응도 없었다. 린네 학회장 벨Thomas Bell은 1858년에 대한 검토에서 ‘과학분과에 즉시 혁명을 일으킬 어떤 놀라운 발견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도화선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유전학자 존스Steve Jones는 ‘월리스의 편지가 다윈을 한 방 먹였다. 다윈은 20년 동안 얼버무리려 했고, 다른 사람이 유사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 다음 20년도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윈에게 1858년 여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결코 거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윈은 자신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왕립 학술원 금메달 수상자였고 말레이 제도에 있는 애송이 표본 채집자에게 굴복 당할 수는 없었다. 그의 긴 다리에 알맞은 집안에 있는 유일한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판을 놓고 지난 20년 간의 연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다윈 탄생 200주년과 더불어 출간 150주년을 내년에 맞이할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놀랍게도 이 글은 중요한 자연과학 논문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쓰여진 저서로 그 엇갈려 짜인 줄거리가 엘리어트George Eliot 혹은 디킨스Charles Dicken의 작품에 비교되어 온, 독창적인 은유가 풍부한 책이다. 다윈의 전기를 쓴 브라운Janet Browne은 ‘다윈은 영원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였다’고 말했다.

이번 8월에 BBC 채널 4에서 방영할 다윈 시리즈에서 도킨스는 이러한 칭송을 되풀이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종의 기원]]을 읽을 때 다윈이 몹시 이해 되길 원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윈은 그저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이 진리라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그가 그렇게 하려고 몹시 애썼기 때문에 이 책이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문장이 현대의 기준으로는 좀 지루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책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선택을 확신하는 이러한 서술이 이해되기 쉬웠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생생한 형태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다윈이 걱정했던 비통에 찬 격분에 찬 반응도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오래 전에 다윈을 가르친 선생 세지윅Adam Sedgwick는 그의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완전히 거짓이며 극도로 유해’하다고 말했다. 다윈을 보호하기 위한 후커, 라이엘, 헉슬리Thomas Huxley 등으로 이루어진 다윈 지지자들의 모임은 1860년 6월 옥스퍼드 영국 고등과학협회에서 벌어진 헉슬리와 윌버포스Wilberforce 주교간의 유명한 논쟁으로 정점에 오르게 된 싸움을 시작하였다. 헉슬리는 졸업생의 3분의 2가 성직자가 되는 기관에서 윌버포스를 이겨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헉슬리의 결정적인 ‘승리’의 본질이 지금 여러 역사가들에게 문제되고 있지만 형편없는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동점으로 비겼다고 평가했다. 다른 한편으로 변화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으며 [[종의 기원]]의 출간이 이 변화를 가속화시켰음은 분명하다. 그 때까지 자연세계에 대한 권한을 가진 교회는 그 토대를 잃어가고 있었으며 과학이 그 자리를 물려 받고 있었다.

‘그 다음 몇 십 년에 걸쳐 다윈의 옹호자들이 영국과 미합중국의 지성계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브라운은 기록하고 있다. ‘세기말에는 그들이 의회, 국교회, 대학, 정부처, 식민지의 관청, 귀족, 해군, 변호사들과 의사 등 영국과 해외 전역에 퍼졌다.’ 이들은 자연선택론이 지속되도록 지켰으며, 다윈이 1882년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히게 되는 사실 — 불가지론자라고 시인한 이에게는 과히 나쁘지 않은 — 에서도 이를 볼 수 있었다.

다윈의 초상이 10파운드 지폐에도 있듯이 그는 현재까지 숭배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월리스는 잊혀졌다. 그는 기꺼이 다윈과 그의 친구들이 자연선택론을 널리 알리게 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것이 제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명한 이를 알았고 그를 도왔다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혹이 막연하게나마 남아있다. 보잘것 없는 집안 출신으로 독학한 월리스는 성공한 의사였던 부친이나 대학교육 등과 같이 다윈에게 주어진 특권 중 그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는 견습 목수로서 자신의 길을 닦아야 했으며 저명한 박물학자가 되기 바로 전에는 토지 측량기사로 훈련 받았다. 그는 또한 초기 사회주의자였고 여성의 참정권 및 토지개혁 운동을 지지했으며 매우 숙련된 저술가였다. 콘라드Joseph Conrad는 월리스가 8년 간 그 지역에서 지내며 저술한 보고서인 [[말레이 제도The Malay Archipelago]]를 침대 곁에 두고 그의 작품들 —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로드 짐Lord Jim]]이다 — 을 쓰는데 이 책을 참조하였다.

그러나 월리스는 운도 없었고 성격도 형편없었다. 그의 최초의 원대한 표본 채집 탐험인 아마존 행은 영국으로 귀환하는 배에 화재가 나 그의 수입원이 될 수천 개의 표본과 함께 가라 앉음으로써 대실패로 끝났다. 월리스는 몇 권의 노트와 아마존에서 가져 온 앵무새만 지닌 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월리스는 충동적이었다. 다윈이 그의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여 이 이론이 그의 아내를 포함한 기독교 신자들을 당황케 할 것을 알고 출간을 유보했다면, 월리스는 돌진하여 기꺼이 사회를 뒤집어 놓으려 하였다. 작년에 [뉴욕커]에 월리스에 대한 글을 쓴 로젠Jonathan Rosen은 그가 그런 일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여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 그가 대중들의 의식으로부터 거의 잊혀진 여러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월리스는 (다윈과 그의 친구들이 경멸한) 심령술을 믿었고 나중에는 종두 반대운동을 벌였다. 어텐버로우David Attenborough는 ‘월리스는 감탄할 만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성인같았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그는 다윈에게 필적할 수 없었다. 월리스는 수 주 동안 말라리아 열에 들떠 자연선택에 관한 이론을 생각해 냈다. 다윈은 이론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엄청난 정보들을 모았다.’

역사가인 엔더스비Jim Endersby도 이러한 지적을 뒷받침한다. ‘자연선택 이론은 놀라운 생각이었으나 그것이 믿을만 했던 것은 다윈이 제공한 증거의 양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윈을 자연선택 이론의 제일의 창시자로 기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31년에서 1836년까지 비글 호를 타고 세계일주 항해를 하면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공책을 그가 관찰한 것들,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의 각기 다른 섬에서 본 밀접하게 관련된 동물들에 대한 관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다운의 거대한 정원에서 난초를 교배하고 시계풀을 재배했으며 종종 지렁이가 진동에 어떤 반응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바순을 연주했다. 그는 자신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것을 입증하고자 동식물의 번식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러나 월리스는 이와 같은 것들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라해도 다윈과 그의 지지자들이 월리스를 망하게 하려고 더러운 책략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멈춘건 아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다윈은 그가 주장한 것보다 몇 주 전에 월리스의 서신을 타네이트로부터 받았고 그 내용을 슬쩍 훔쳐 자신의 것인양 [[종의 기원]]에 썼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20년 전에 미합중국에서 출간된 브랙만Arnold Brackman(A delicate arrangement: the strange case of Charles Darwin and Alfred Russel Wallace)과 브룩스John Langdon Brooks(Just before the origin: Alfred Russel Wallace’s theory of evolution)의 책들에서 약술되었는데, 이 책은 다윈을 파렴치한 기회주의자이며 지적 절도범으로 그렸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 모두 설득력이 없으며 그 후 학계의 대다수가 이들의 주장이 공평하지도 믿을만 하지도 않다고 결론내렸다.

Alfred Wallace월리스의 전기(Alfred Russel Wallace: A Life)를 쓴 래비Peter Raby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어떤 흥미로운 이론도 빈약한 증거 위에 세워질 수는 없다. 인간적인 요소로 보자면, 다윈의 생애에서 그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지적 사기를 칠 수 있었을 거라는 주장을 펼 어떠한 요인도 없다. 그가 특별히 자신의 이론에 대한 출처와 신세 진 부분에 대해 인정할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실상 역사가들은 다윈이 아니었다면 자연선택 이론이 매우 손상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윈이 자연선택 이론을 발전시킨 최초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월리스가 명성과 주목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이론은 매우 다른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결국 월리스는 더 높은 힘이 때때로 진화를 이끈다고 믿게 되었다’고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 판으로 곧 출간 될 [[종의 기원]]의 편집자 엔더스비는 덧붙인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이 인간정신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인류는 동물의 왕국 외부에서 다루어지는 힘에 의해 영향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위험하게도 현대 창조론자들이 내놓은 개념, 신이 진화의 과정을 지휘하였다는 지적인 설계 개념에 근접한다. 정반대로 다윈이 보는 상은 엄격하여 굴드가 서술한 것처럼, 인류는 ‘삶이라는 거대한 나무모양의 관목의 작은 나뭇가지에 불과하며, 이것이 종자로부터 다시 심어진다 해도 다시 이 나뭇가지로 자라날 수 없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을 암시했다. 다윈에 따르면 어디에도 인류를 위한 탈출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박테리아나 거북이처럼 자연선택의 법칙에 매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용서할 수 없는 이론의 근원지는 매우 인간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다윈의 삶과 경력은 꼭 맞물려 있었다. 그는 참으로 가정적인 인물이었고 1858년에는 아들 찰스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겨 있었다면 1851년에는 10살 난 그의 딸 애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고 다윈의 고손자인 케인즈Randal Keynes는 그의 책 [[애니의 상자: 찰스 다윈, 그의 딸과 인간진화Annie’s Box: Charles Darwin, his daughter and human evolution]]에서 밝히고 있다. Annie's Box겨자 습포, 브랜디, 표백분, 암모니아가 애니가 아프기 시작 할 당시 줄 수 있는 약의 전부였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애니가 1851년 4월 23일 ‘한 숨도 내쉬지 못할’ 때까지 겪은 구토와 정신착란을 낫게 하지 못했다. 다윈은 ‘노년의 나이를 위로하는 집안의 기쁨을 잃었다’고 회상했다.

케인즈는 애니의 죽음이 다윈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다. ‘생의 말기에 애니의 얼굴이 치명적인 병으로 수척해져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하는 것을 다윈은 지켜 보았다. 무자비한 자연의 힘에 매달려 본 사람만이 삶의 진정한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윈은 진화를 추동하는 용서 없는 과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몇 년 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기쁨에 차서 빛나는 자연의 얼굴을 본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하는 일 없이 지저귀는 새들이 곤충과 씨앗을 먹고 살며 따라서 삶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거나 잊어 버린다. 혹은 얼마나 많은 노래하는 새들이나 그들의 알들이나 그들의 갓 태어난 병아리들이 새들과 맹수에 의해 잡혀먹는지 잊어 버린다.’ 그가 다른 곳에 적었듯이 ‘모든 자연은 전쟁이다.’

맹목적인 계기가 생존투쟁과 진화과정에서 결정적 요인으로 강조되는 이와 같은 무자비한 생각은 근면과 자조를 굳게 믿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1세기 반 동안 관찰을 통해 옹호되어 왔고 지금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자연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것은 즐거운 과정이 아니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자연선택론은 과학이론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주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소수이나 사회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집단에 의해 주기적으로 거부당하고 공격받고 있다. 이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 빅뱅 이론,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별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나 인류가 나머지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다거나 원숭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생각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런던 대학의 유전학 교수 존스는 ’20년 전에는 이러한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요즘에 수 십 명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 때문에 진화에 대한 강의를 듣지 않겠다고 요청하고 있다. 심지어 이 학생들은 내가 자연선택이 객관적인 사실들로 입증된다고 말하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멘델의 유전 법칙을 믿는지 물어본다. 물론 그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DNA의 존재를 믿냐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인간과 침팬지가 DNA의 98퍼센트를 공유하고 있는 것을 믿냐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자연선택이 뭐가 잘못되었냐고 하면 그건 다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정말 모르겠다.’

도킨스도 이와 같은 당황스러움을 겪고 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이 만년도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규모의 질서에서 보면 틀린 것이다.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이다. 이들은 그냥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무지하다. 그러나 나는 상식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존스 역시 동의하고 있다. ‘지나가는 단계다. 20년 안에 이러한 터무니 없는 생각은 없어질 것이다.’ 존스는 자연선택은 너무 중요해서 이것 없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생태계의 문법이고 우리 지구상의 무수한 동식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을 생물학자들에게 제공한다. 어텐버로우도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그의 [지구상의 생명Life on Earth] 프로그램은 다윈주의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대자들은 자연 선택이 관찰이나 실험에 근거한 이론이 아니며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고 증명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글쎄, 그렇지 않다. 이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이론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1066년 일어난 헤이스팅스의 전투를 증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전투가 그 때 일어난 것을 알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구상의 진화의 과정이 다윈이 옳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음을 안다.’

다윈과 월리스의 이론: 4가지 핵심적인 부분
1. 동일한 종의 생물체는 유전된 방식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것은 변종으로 알려졌다. 다윈이 상세하게 연구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거대한 거북이 그 사례이다.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이 거북들 중에 일부는 다른 거북보다 긴 목을 갖게 될 수도 있다.

  1.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생물체들이 태어난다. 이것이 생존경쟁이다.

3. 동일한 종의 일부 생물체는 그 종의 다른 일부보다 생존과 번식을 더 잘 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갈라파고스 거북의 경우에 긴 목을 가진 거북은 풀을 먹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고 이 특성은 가뭄이 들어 먹을 풀이 없게 되었을 때 유용할 것이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1. 이 우세한 특성은 다음 세대로 전해져 쌓이게 된다. 오랜 기간 동안 새로운 생물체가 서서히 나타난다. 이것이 종들의 기원이다. 갈라파고스 제도 중 더 건조한 섬들에서 더 높은 가지까지 몸을 뻗칠 수 있는 거북이 나타난 것이 종의 기원이다.

우연한 발견: 다윈의 행운
찰스 다윈의 이름은 자연 선택과 돌이킬 수 없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론에 연루된 것은 미리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비글호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였는데 곧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게다가 그가 배 위에서 수행한 직책에는 기원이 있었다. 박물학자 자리는 비글호의 함장인 피츠로이Robert Fitzroy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댄 것이었다. 피츠로이는 타고난 뱃사람이었지만 토리 당원으로 1822년 8월 12일 자신의 목을 그어 죽은 외삼촌 카슬레이 자작의 자살에 사로잡힌 우울한 사람이었다. 피츠로이는 자신도 동일한 자살 성향을 물려받아 항해 중 어느 때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5년의 여행기간 동안 의기소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동반자, 즉 다윈에게 돈을 지불한 것이었다. 다윈은 피츠로이의 ‘의기소침’이 어느 때는 정신이상에 가까웠다고 회상했다. 따라서 다윈의 장기간의 여행은 한 사람의 유전적 정신이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보수당 정부의 원로의원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의 조카는 가문의 광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테고 그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도와 줄 박식한 동반자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사도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다윈주의라는 용어는 알려지지 않았을 터이고 오늘날 우리는 자연선택을 이야기 할 때마다 월리스주의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윈의 존재는 유익했었던 것 같다. 피츠로이는 무사히 돌아왔고 후에 기상청이 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해상기상예보 지역) 기구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살에 대한 공포는 빗나가지 않았다. 1865년 4월 30일 우울한 나머지 그는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했다.

간략한 진화론의 역사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그들이 말한 것

서기전 6세기
종이 변할 수 있고 다른 종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윈과 월리스가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하기 전에 존재했다. 예를 들면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초보적인 진화 개념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생각이 심각하게 논의된 것은 식물학과 지질학이 발전한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박물학자에게 문제는 단순했다. 신이 모든 유형의 생물체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떤 한 유형의 동물 혹은 식물이 다른 유형으로 변화한 것일까? 어떤 과정이 진화를 추동 한 것일까?

1800
최초로 제안된 작동기제 중 하나는 프랑스 박물학자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동물이 사는 동안 획득한 형질을 다음세대에게 물려준다고 주장했다. 근육이나 긴 목을 발달시킨 동물은 이 형질을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진화론을 유도해 낸 최초의 적절한 시도였다. 라마르크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이론은 과학의 엄밀한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꼬리가 잘려 나간 고양이들의 일족이 꼬리가 없는 고양이들로 진화하지는 않는다. 이 생각이 20세기까지 중요한 과학적 개념으로 존속하였지만,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1830-1833
종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작동기제의 발전에 주요한 또 다른 사건은 1830년에서 1833년까지 3권으로 출간된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였다. 라이엘은 지구의 역사는 단기간의 격렬한 변환이나 대이변이 아닌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일어난 점증적인 변화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지구가 영겁의 시간 동안 일어난 부식, 퇴적물의 형성, 바람의 영향 그리고 다른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 작은 변화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런 통찰력이 박물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1858
월리스와 다윈의 이론들이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읽혀졌다. 지구 상의 야생 생물에 대한 관찰이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다윈은 비글 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동안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 책은 갈라파고스와 다른 지역의 동식물에 대한 다윈의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월리스의 경우에는 아마존과 말레이 제도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1865
1859년 출간된 [[종의 기원]]에는 유전학에 대한 이해라는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이 결핍되어 있다. 이 지식은 멘델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는 1865년 식물을 연구하여 유전학의 법칙들을 발전시켰다. 유전학의 기본단위는 유전자로 이는 자연선택을 강제하는 힘이다. 그러나 멘델의 법칙은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주류 자연과학계에서 간과되었고,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연선택을 입증하는 유전학적 작동기제가 이해되었다.

1953
크릭Francis Crick과 왓슨James Watson은 개미에서 고래까지 모든 생물체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질인 DNA(디옥시리보핵산)의 2중 나선구조를 풀었다. 이 발견으로 과학자들이 자연선택이 분자 단위에서 벌어지는 영향을 상세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출처: The Observer, 2008. 6. 22.

번역: 라티오 출판사

Damasio’s Error and Descartes’ Truth: An Inquiry into Consciousness,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Author: Andrew Gluck
Paperback: 100 pages
Publisher: University of Scranton Press (June 15, 2007)
Language: English
ISBN-10: 1589661273
ISBN-13: 978-1589661271

Product Description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에 의해 제시된 정신과 육체의 관계 문제는 아직도 철학자들에게 근본적인 논쟁거리이다. 이 책에서 Andrew Gluck는 Antonio Damasio의 저작 Descartes’ Error에 대해 다차원적인 응답을 구축하고 있다. Gluck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Damasio의 책에서 발견되는 중립적이고 일원론적인 주장을 비판하면서 적응이론(adaptive theory) — 자연과학에서는 물리적 일원론, 사회과학에서 이원론, 미학에서는 중립적 일원론 — 을 옹호하고 있다. Gluck의 저작은 역사적 논쟁에 있어서 새로운 의의가 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

Author : Antonio R. Damasio
Paperback: 336 pages
Publisher: Harper Perennial; 1 edition (November 1, 1995)
Language: English
ISBN-10: 0380726475
ISBN-13: 978-0380726479

From Library Journal
정신은 육체와 분리된 실체라는 생각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언명한 이후부터 서구 문화에 심오한 영향을 끼쳐왔다. Iowa대학에서 인지심리학과 인간의 뇌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Damasio는 감정과 정서가 인간의 합리성에서 수행하는 중심적인 역할에 관한 논증을 가지고 이 전제에 도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동일한 뇌 구조가 인간의 생물학과 행동을 규율하며, 이는 정상적인 인지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Damasio는 전두엽 피질에 손상을 입은 환자(자신의 환자는 물론 19세기 철도 노동자인 Nicholas Gage)가 효과적인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서를 더이상 만들어내지 못함을 논증하고 있다. 재능있는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Damasio는 Oliver Sack 스타일의 르포르타쥬를 복잡하고 이론적인 신경과학의 주제들과 잘 결합시키고 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 1999년 한국어판 출간, 현재 절판 상태.

|국내 관련 도서|
올리버 색스(지음), 조석현(옮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이마고, 2006.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더 많은 가라오케를!”
Justin Wintle

Daniel A. Bell, China’s New Confucianism: Politics and Everyday Life in a Changing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문화대혁명 동안에, 유교는 마오쩌둥에게 혐오받았던 ‘중요한 조타수’ 중의 하나였다. 최근에 들어서 — Daniel Bell의 저서가 섬세하게 탐구하고 있는 바와 같이 — 유교는, 적어도 떠들기를 좋아하는 부류에서 만큼은 재조명받고 있다. 마오쩌둥의 붉은 책(Little Red Book) 이래로 어떤 출판물도 위딴(于丹)이 편집한 논어선집만큼 널리 읽히지 않았다. 중국의 대학들에서도 공자를 다시 가르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에 앞서, 중국 정부는 포스터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도 베이징의 거주민들이 외국인에게 유교적 “올림픽 문명”을 홍보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모범적 개체”의 전형인 문명은, 중국이 마오쩌둥에게 물려받은 도덕적 공백을 채우려는 것으로서 문제가 되는 이슈이다. 신흥 부유층들은 (대개의 경우 한 명뿐인) 자녀와 그들 자신을 위하여 “문명 사회”로의 복귀를 모색하고 있다. 유교는 자식에 대한 애정은 물론 어른에 대한 “존경”까지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유서깊은 가치를 마음 속에 심어주는 일은 어른들에게 뚜렷한 이익이 있다.



베이징에 있는 칭화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Bell은 중국인들의 변화하는 태도에 대해 적절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는 강의실에서, 거리에서, 혹은 가라오케에서 공산주의 이전 전통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되살아나는 징후를 발견한다. 후자는 특히 Bell의 주의를 끈다. 유학자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진, 긴밀한 유대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특성은 가라오케 바에서 명백해지고 있다. 호스티스가 성 뿐만 아니라 조화로운 대화까지도 제공한다면, 그것은 군자가 충분히 바랄만한 것이다. 그는 서기전 5세기의 자신의 제자들에게 만족스러워하며 말했었다. “나는 외면적인 아름다움보다 덕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Bell이 논의하듯이) 그러한 조합은, 호스티스에게 이익이 되는 ‘고용기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가족을 유지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궁극적인 유교적 선이다. 남편이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지만 머지않아 그 가정이라는 토대로 돌아온다. 의료기관 종사자들과 여성주의자들은 불쾌할 수 있지만, Bell은 문화적 차이들을 날카롭게 감지한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정치적 방향이다. 그는 그것이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니지만 거기에서 굉장한 포괄성을 감지한다. 그는 내적 탐구로서 유학에 대한 위딴의 시덥잖은 재조명을 평가절하하면서 장칭을 높게 평가한다. 장칭의 유교적 정치는, 선출되지 않은 현명한 연장자들이 정부에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의심할 바 없이 사회주의적이었다.



Bell이 우리에게 꺼내놓는 흥미롭고도 놀라운 이야기 중에는 자유주의 철학자에 의해 미합중국화된 유교와 근대 간의 대화가 있다. ‘Hu 교수’는 소크라테스적 방법을 ‘비판적 사고’를 위한 수단으로서 촉구하지만, 유교는 이미 그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방법은 과다한 지식을 습득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학생들을 불필요한 스트레스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그는 반박한다.

[[중국의 신유학]]은 어떤 도식적인 개관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 저작은 중요한 오늘날의 경향에 대한 세련되고 통찰력있는 잠정적인 응답이라 하겠다. 


출처: Independent Books, 2008. 6. 6.

번역: 라티오 출판사

Political MindThe Political Mind: Why You Can’t Understand 21st-Century American Politics with an 18th-Century Brain

Author: George Lakoff
Hardcover: 304 pages
Publisher: Viking Adult (May 29, 2008)
Language: English
ISBN-10: 0670019275
ISBN-13: 978-0670019274

Product Description
What’s the Matter with Kansas?에서 Thomas Frank는 아주 많은 수의 미합중국 국민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과 어긋나게 투표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책에서 George Lakoff는 그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존재는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온 것처럼 합리적인 피조물이 아님이 밝혀졌다. 관념, 도덕, 그리고 가치가 신체 바깥의 어딘가에 있어서 검토되고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뇌 안에 있으며 거기에서 육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이야기를 우리의 정신에서 형성할 때 우리가 타이핑을 하거나 댄스를 할 때 특정한 근육 기억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그 이야기에 적합하게 끼워넣는다. 그러한 정보를 우리의 이야기 형태에서 꺼내어서 다른 것에 넣거나 전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밴조 연주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정신은 바꾸는 것은 신체를 바꾸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진보 정치인들과 활동가들은 사람들이 정치적 결정을 하는데 있어 객관적인 추론 체계를 이용한다고 계속해서 믿어왔으며, 이러한 믿음이 지속되는 한 민주당은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다. 그들은 반대자들의 프레임을 받아들여 그것과 논쟁을 벌이기 보다는 논쟁의 관점들을 붙잡고 씨름해야만 한다.

열정적이며 박식하고 혁신적인 이 책은 Steven Pinker와 Thomas Frank의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움직이는지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무척 흥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국내 관련 도서|
조지 레이코프(지음), 나익주(옮김), [[프레임 전쟁: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 창비, 2007.
조지 레이코프(지음), 유나영(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삼인, 2006.
조지 레이코프/M. 존슨(지음), 노양진/임지룡(옮김), [[몸의 철학]], 박이정(서광학술자료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