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은 어떻게 진화론 경쟁에서 승리했는가   
Robin McKie

다윈이 과학사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이라는 가장 획기적인 발견을 한지 150년이 지났다. 그러나 다윈의 독창적인 연구는 지구 반대편의 한 젊은 조류학자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로빈 맥키Robin McKie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에 감추어진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1858년 초, 말레이 제도 터네이트Ternate 섬에서 한 젊은 표본 채집가가 매우 잡기 어려운 이 섬의 극락조를 추적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이후에 그는, ‘매일 오한과 잇단 고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워서 내가 특별히 관심 갖고 있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머리 속은 돈이나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질병과 기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떻게 이것들이 인구를 제한하는지, 그리고 지구의 나이가 광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근의 발견들을 생각하였다. 그는 영겁의 시간 동안 되풀이되는 이 죽음의 물결이 어떤 영향을 미쳐 서로 다른 종들을 만들어 내는지가 궁금했다.

열이 내려가자 영감이 떠 올랐다. 그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변종들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 남아 마침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연선택 이론이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 중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열병처럼 떠 오른 것이다. 월리스는 그의 생각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그 당시 박물학자로 이미 유명했던 다윈에게 보냈다. 이 서신은 1858년 6월 18일 그러니까 150년 전 지난 주에 켄트의 다운Downe에 있는 다윈에게 전달되었다.

다윈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20년 동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해왔는데, 이제 다른 사람이, 오늘날 고생물학자인 굴드Stephen Jay Gould가 ‘자연사에 가장 위대한 이념 혁명’이라 부른, 또는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인간의 심상에 떠오른 가장 중요한 생각’이라고 말한 연구로 그 공적을 가로 챌 지도 모르게 된 것이었다. 고통 속에서 다윈은 친구인 식물학자 후커Joseph Hooker와 지질학자 라이엘Charles Lyell에게 편지를 썼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과학사에서 전설이 되었다.

후커와 라이엘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대한 주장을 보호해 주기 위해 피카딜리의 벌링톤 하우스Burlington House에서 린네 학회를 열어 두 사람의 연구물을 같이 살펴보았다. 7월 1일 학회 회원들이, 지금은 왕립 아카데미의 일부가 된 방에 역사상 다른 어떤 것보다 인류에게 모욕적이며 문제를 일으킨 이론에 대해 듣고자 모였다. 정확히 150년 전 다음 주, 마르크스의 생각보다 더 급진적인 개념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맨 처음에 다윈과 월리스가 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린네 학회 회원들의 환호에 맞추어 웅변적인 연설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측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월리스는 여전히 말레이 제도에 있었고 다윈은 집에서 그의 아내 엠마와 함께 6월 28일 성홍열로 죽은 19개월 된 아들 찰스때문에 비통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젠틀맨으로 구성된 청중들이 있었다. 다윈과 월리스의 노트와 논문, 서신들을 읽은 후 그들은 몇 시간 동안 학회업무의 몇몇 항목들을 가지고 심한 말다툼을 하였다. 역사가인 무디JWT Moody가 그 모임에 대한 1986년의 연구에서 묘사한 것처럼 회원들은 ‘새로운 개념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기보다 자신들에게 쏟아진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 채 결국 자리를 떴다. 인류가 창조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소식을 맞이한 것은 지루한 침묵이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아주 하찮은 지적인 대응도 없었다. 린네 학회장 벨Thomas Bell은 1858년에 대한 검토에서 ‘과학분과에 즉시 혁명을 일으킬 어떤 놀라운 발견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도화선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유전학자 존스Steve Jones는 ‘월리스의 편지가 다윈을 한 방 먹였다. 다윈은 20년 동안 얼버무리려 했고, 다른 사람이 유사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 다음 20년도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윈에게 1858년 여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결코 거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윈은 자신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왕립 학술원 금메달 수상자였고 말레이 제도에 있는 애송이 표본 채집자에게 굴복 당할 수는 없었다. 그의 긴 다리에 알맞은 집안에 있는 유일한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판을 놓고 지난 20년 간의 연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다윈 탄생 200주년과 더불어 출간 150주년을 내년에 맞이할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놀랍게도 이 글은 중요한 자연과학 논문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쓰여진 저서로 그 엇갈려 짜인 줄거리가 엘리어트George Eliot 혹은 디킨스Charles Dicken의 작품에 비교되어 온, 독창적인 은유가 풍부한 책이다. 다윈의 전기를 쓴 브라운Janet Browne은 ‘다윈은 영원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였다’고 말했다.

이번 8월에 BBC 채널 4에서 방영할 다윈 시리즈에서 도킨스는 이러한 칭송을 되풀이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종의 기원]]을 읽을 때 다윈이 몹시 이해 되길 원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윈은 그저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이 진리라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그가 그렇게 하려고 몹시 애썼기 때문에 이 책이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문장이 현대의 기준으로는 좀 지루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책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선택을 확신하는 이러한 서술이 이해되기 쉬웠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생생한 형태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다윈이 걱정했던 비통에 찬 격분에 찬 반응도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오래 전에 다윈을 가르친 선생 세지윅Adam Sedgwick는 그의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완전히 거짓이며 극도로 유해’하다고 말했다. 다윈을 보호하기 위한 후커, 라이엘, 헉슬리Thomas Huxley 등으로 이루어진 다윈 지지자들의 모임은 1860년 6월 옥스퍼드 영국 고등과학협회에서 벌어진 헉슬리와 윌버포스Wilberforce 주교간의 유명한 논쟁으로 정점에 오르게 된 싸움을 시작하였다. 헉슬리는 졸업생의 3분의 2가 성직자가 되는 기관에서 윌버포스를 이겨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헉슬리의 결정적인 ‘승리’의 본질이 지금 여러 역사가들에게 문제되고 있지만 형편없는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동점으로 비겼다고 평가했다. 다른 한편으로 변화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으며 [[종의 기원]]의 출간이 이 변화를 가속화시켰음은 분명하다. 그 때까지 자연세계에 대한 권한을 가진 교회는 그 토대를 잃어가고 있었으며 과학이 그 자리를 물려 받고 있었다.

‘그 다음 몇 십 년에 걸쳐 다윈의 옹호자들이 영국과 미합중국의 지성계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브라운은 기록하고 있다. ‘세기말에는 그들이 의회, 국교회, 대학, 정부처, 식민지의 관청, 귀족, 해군, 변호사들과 의사 등 영국과 해외 전역에 퍼졌다.’ 이들은 자연선택론이 지속되도록 지켰으며, 다윈이 1882년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히게 되는 사실 — 불가지론자라고 시인한 이에게는 과히 나쁘지 않은 — 에서도 이를 볼 수 있었다.

다윈의 초상이 10파운드 지폐에도 있듯이 그는 현재까지 숭배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월리스는 잊혀졌다. 그는 기꺼이 다윈과 그의 친구들이 자연선택론을 널리 알리게 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것이 제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명한 이를 알았고 그를 도왔다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혹이 막연하게나마 남아있다. 보잘것 없는 집안 출신으로 독학한 월리스는 성공한 의사였던 부친이나 대학교육 등과 같이 다윈에게 주어진 특권 중 그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는 견습 목수로서 자신의 길을 닦아야 했으며 저명한 박물학자가 되기 바로 전에는 토지 측량기사로 훈련 받았다. 그는 또한 초기 사회주의자였고 여성의 참정권 및 토지개혁 운동을 지지했으며 매우 숙련된 저술가였다. 콘라드Joseph Conrad는 월리스가 8년 간 그 지역에서 지내며 저술한 보고서인 [[말레이 제도The Malay Archipelago]]를 침대 곁에 두고 그의 작품들 —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로드 짐Lord Jim]]이다 — 을 쓰는데 이 책을 참조하였다.

그러나 월리스는 운도 없었고 성격도 형편없었다. 그의 최초의 원대한 표본 채집 탐험인 아마존 행은 영국으로 귀환하는 배에 화재가 나 그의 수입원이 될 수천 개의 표본과 함께 가라 앉음으로써 대실패로 끝났다. 월리스는 몇 권의 노트와 아마존에서 가져 온 앵무새만 지닌 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월리스는 충동적이었다. 다윈이 그의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여 이 이론이 그의 아내를 포함한 기독교 신자들을 당황케 할 것을 알고 출간을 유보했다면, 월리스는 돌진하여 기꺼이 사회를 뒤집어 놓으려 하였다. 작년에 [뉴욕커]에 월리스에 대한 글을 쓴 로젠Jonathan Rosen은 그가 그런 일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여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 그가 대중들의 의식으로부터 거의 잊혀진 여러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월리스는 (다윈과 그의 친구들이 경멸한) 심령술을 믿었고 나중에는 종두 반대운동을 벌였다. 어텐버로우David Attenborough는 ‘월리스는 감탄할 만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성인같았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그는 다윈에게 필적할 수 없었다. 월리스는 수 주 동안 말라리아 열에 들떠 자연선택에 관한 이론을 생각해 냈다. 다윈은 이론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엄청난 정보들을 모았다.’

역사가인 엔더스비Jim Endersby도 이러한 지적을 뒷받침한다. ‘자연선택 이론은 놀라운 생각이었으나 그것이 믿을만 했던 것은 다윈이 제공한 증거의 양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윈을 자연선택 이론의 제일의 창시자로 기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31년에서 1836년까지 비글 호를 타고 세계일주 항해를 하면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공책을 그가 관찰한 것들,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의 각기 다른 섬에서 본 밀접하게 관련된 동물들에 대한 관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다운의 거대한 정원에서 난초를 교배하고 시계풀을 재배했으며 종종 지렁이가 진동에 어떤 반응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바순을 연주했다. 그는 자신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것을 입증하고자 동식물의 번식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러나 월리스는 이와 같은 것들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라해도 다윈과 그의 지지자들이 월리스를 망하게 하려고 더러운 책략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멈춘건 아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다윈은 그가 주장한 것보다 몇 주 전에 월리스의 서신을 타네이트로부터 받았고 그 내용을 슬쩍 훔쳐 자신의 것인양 [[종의 기원]]에 썼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20년 전에 미합중국에서 출간된 브랙만Arnold Brackman(A delicate arrangement: the strange case of Charles Darwin and Alfred Russel Wallace)과 브룩스John Langdon Brooks(Just before the origin: Alfred Russel Wallace’s theory of evolution)의 책들에서 약술되었는데, 이 책은 다윈을 파렴치한 기회주의자이며 지적 절도범으로 그렸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 모두 설득력이 없으며 그 후 학계의 대다수가 이들의 주장이 공평하지도 믿을만 하지도 않다고 결론내렸다.

Alfred Wallace월리스의 전기(Alfred Russel Wallace: A Life)를 쓴 래비Peter Raby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어떤 흥미로운 이론도 빈약한 증거 위에 세워질 수는 없다. 인간적인 요소로 보자면, 다윈의 생애에서 그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지적 사기를 칠 수 있었을 거라는 주장을 펼 어떠한 요인도 없다. 그가 특별히 자신의 이론에 대한 출처와 신세 진 부분에 대해 인정할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실상 역사가들은 다윈이 아니었다면 자연선택 이론이 매우 손상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윈이 자연선택 이론을 발전시킨 최초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월리스가 명성과 주목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이론은 매우 다른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결국 월리스는 더 높은 힘이 때때로 진화를 이끈다고 믿게 되었다’고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 판으로 곧 출간 될 [[종의 기원]]의 편집자 엔더스비는 덧붙인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이 인간정신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인류는 동물의 왕국 외부에서 다루어지는 힘에 의해 영향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위험하게도 현대 창조론자들이 내놓은 개념, 신이 진화의 과정을 지휘하였다는 지적인 설계 개념에 근접한다. 정반대로 다윈이 보는 상은 엄격하여 굴드가 서술한 것처럼, 인류는 ‘삶이라는 거대한 나무모양의 관목의 작은 나뭇가지에 불과하며, 이것이 종자로부터 다시 심어진다 해도 다시 이 나뭇가지로 자라날 수 없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을 암시했다. 다윈에 따르면 어디에도 인류를 위한 탈출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박테리아나 거북이처럼 자연선택의 법칙에 매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용서할 수 없는 이론의 근원지는 매우 인간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다윈의 삶과 경력은 꼭 맞물려 있었다. 그는 참으로 가정적인 인물이었고 1858년에는 아들 찰스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겨 있었다면 1851년에는 10살 난 그의 딸 애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고 다윈의 고손자인 케인즈Randal Keynes는 그의 책 [[애니의 상자: 찰스 다윈, 그의 딸과 인간진화Annie’s Box: Charles Darwin, his daughter and human evolution]]에서 밝히고 있다. Annie's Box겨자 습포, 브랜디, 표백분, 암모니아가 애니가 아프기 시작 할 당시 줄 수 있는 약의 전부였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애니가 1851년 4월 23일 ‘한 숨도 내쉬지 못할’ 때까지 겪은 구토와 정신착란을 낫게 하지 못했다. 다윈은 ‘노년의 나이를 위로하는 집안의 기쁨을 잃었다’고 회상했다.

케인즈는 애니의 죽음이 다윈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다. ‘생의 말기에 애니의 얼굴이 치명적인 병으로 수척해져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하는 것을 다윈은 지켜 보았다. 무자비한 자연의 힘에 매달려 본 사람만이 삶의 진정한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윈은 진화를 추동하는 용서 없는 과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몇 년 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기쁨에 차서 빛나는 자연의 얼굴을 본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하는 일 없이 지저귀는 새들이 곤충과 씨앗을 먹고 살며 따라서 삶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거나 잊어 버린다. 혹은 얼마나 많은 노래하는 새들이나 그들의 알들이나 그들의 갓 태어난 병아리들이 새들과 맹수에 의해 잡혀먹는지 잊어 버린다.’ 그가 다른 곳에 적었듯이 ‘모든 자연은 전쟁이다.’

맹목적인 계기가 생존투쟁과 진화과정에서 결정적 요인으로 강조되는 이와 같은 무자비한 생각은 근면과 자조를 굳게 믿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1세기 반 동안 관찰을 통해 옹호되어 왔고 지금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자연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것은 즐거운 과정이 아니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자연선택론은 과학이론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주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소수이나 사회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집단에 의해 주기적으로 거부당하고 공격받고 있다. 이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 빅뱅 이론,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별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나 인류가 나머지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다거나 원숭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생각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런던 대학의 유전학 교수 존스는 ’20년 전에는 이러한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요즘에 수 십 명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 때문에 진화에 대한 강의를 듣지 않겠다고 요청하고 있다. 심지어 이 학생들은 내가 자연선택이 객관적인 사실들로 입증된다고 말하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멘델의 유전 법칙을 믿는지 물어본다. 물론 그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DNA의 존재를 믿냐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인간과 침팬지가 DNA의 98퍼센트를 공유하고 있는 것을 믿냐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자연선택이 뭐가 잘못되었냐고 하면 그건 다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정말 모르겠다.’

도킨스도 이와 같은 당황스러움을 겪고 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이 만년도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규모의 질서에서 보면 틀린 것이다.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이다. 이들은 그냥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무지하다. 그러나 나는 상식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존스 역시 동의하고 있다. ‘지나가는 단계다. 20년 안에 이러한 터무니 없는 생각은 없어질 것이다.’ 존스는 자연선택은 너무 중요해서 이것 없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생태계의 문법이고 우리 지구상의 무수한 동식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을 생물학자들에게 제공한다. 어텐버로우도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그의 [지구상의 생명Life on Earth] 프로그램은 다윈주의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대자들은 자연 선택이 관찰이나 실험에 근거한 이론이 아니며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고 증명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글쎄, 그렇지 않다. 이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이론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1066년 일어난 헤이스팅스의 전투를 증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전투가 그 때 일어난 것을 알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구상의 진화의 과정이 다윈이 옳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음을 안다.’

다윈과 월리스의 이론: 4가지 핵심적인 부분
1. 동일한 종의 생물체는 유전된 방식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것은 변종으로 알려졌다. 다윈이 상세하게 연구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거대한 거북이 그 사례이다.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이 거북들 중에 일부는 다른 거북보다 긴 목을 갖게 될 수도 있다.

  1.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생물체들이 태어난다. 이것이 생존경쟁이다.

3. 동일한 종의 일부 생물체는 그 종의 다른 일부보다 생존과 번식을 더 잘 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갈라파고스 거북의 경우에 긴 목을 가진 거북은 풀을 먹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고 이 특성은 가뭄이 들어 먹을 풀이 없게 되었을 때 유용할 것이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1. 이 우세한 특성은 다음 세대로 전해져 쌓이게 된다. 오랜 기간 동안 새로운 생물체가 서서히 나타난다. 이것이 종들의 기원이다. 갈라파고스 제도 중 더 건조한 섬들에서 더 높은 가지까지 몸을 뻗칠 수 있는 거북이 나타난 것이 종의 기원이다.

우연한 발견: 다윈의 행운
찰스 다윈의 이름은 자연 선택과 돌이킬 수 없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론에 연루된 것은 미리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비글호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였는데 곧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게다가 그가 배 위에서 수행한 직책에는 기원이 있었다. 박물학자 자리는 비글호의 함장인 피츠로이Robert Fitzroy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댄 것이었다. 피츠로이는 타고난 뱃사람이었지만 토리 당원으로 1822년 8월 12일 자신의 목을 그어 죽은 외삼촌 카슬레이 자작의 자살에 사로잡힌 우울한 사람이었다. 피츠로이는 자신도 동일한 자살 성향을 물려받아 항해 중 어느 때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5년의 여행기간 동안 의기소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동반자, 즉 다윈에게 돈을 지불한 것이었다. 다윈은 피츠로이의 ‘의기소침’이 어느 때는 정신이상에 가까웠다고 회상했다. 따라서 다윈의 장기간의 여행은 한 사람의 유전적 정신이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보수당 정부의 원로의원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의 조카는 가문의 광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테고 그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도와 줄 박식한 동반자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사도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다윈주의라는 용어는 알려지지 않았을 터이고 오늘날 우리는 자연선택을 이야기 할 때마다 월리스주의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윈의 존재는 유익했었던 것 같다. 피츠로이는 무사히 돌아왔고 후에 기상청이 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해상기상예보 지역) 기구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살에 대한 공포는 빗나가지 않았다. 1865년 4월 30일 우울한 나머지 그는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했다.

간략한 진화론의 역사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그들이 말한 것

서기전 6세기
종이 변할 수 있고 다른 종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윈과 월리스가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하기 전에 존재했다. 예를 들면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초보적인 진화 개념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생각이 심각하게 논의된 것은 식물학과 지질학이 발전한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박물학자에게 문제는 단순했다. 신이 모든 유형의 생물체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떤 한 유형의 동물 혹은 식물이 다른 유형으로 변화한 것일까? 어떤 과정이 진화를 추동 한 것일까?

1800
최초로 제안된 작동기제 중 하나는 프랑스 박물학자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동물이 사는 동안 획득한 형질을 다음세대에게 물려준다고 주장했다. 근육이나 긴 목을 발달시킨 동물은 이 형질을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진화론을 유도해 낸 최초의 적절한 시도였다. 라마르크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이론은 과학의 엄밀한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꼬리가 잘려 나간 고양이들의 일족이 꼬리가 없는 고양이들로 진화하지는 않는다. 이 생각이 20세기까지 중요한 과학적 개념으로 존속하였지만,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1830-1833
종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작동기제의 발전에 주요한 또 다른 사건은 1830년에서 1833년까지 3권으로 출간된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였다. 라이엘은 지구의 역사는 단기간의 격렬한 변환이나 대이변이 아닌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일어난 점증적인 변화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지구가 영겁의 시간 동안 일어난 부식, 퇴적물의 형성, 바람의 영향 그리고 다른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 작은 변화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런 통찰력이 박물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1858
월리스와 다윈의 이론들이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읽혀졌다. 지구 상의 야생 생물에 대한 관찰이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다윈은 비글 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동안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 책은 갈라파고스와 다른 지역의 동식물에 대한 다윈의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월리스의 경우에는 아마존과 말레이 제도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1865
1859년 출간된 [[종의 기원]]에는 유전학에 대한 이해라는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이 결핍되어 있다. 이 지식은 멘델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는 1865년 식물을 연구하여 유전학의 법칙들을 발전시켰다. 유전학의 기본단위는 유전자로 이는 자연선택을 강제하는 힘이다. 그러나 멘델의 법칙은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주류 자연과학계에서 간과되었고,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연선택을 입증하는 유전학적 작동기제가 이해되었다.

1953
크릭Francis Crick과 왓슨James Watson은 개미에서 고래까지 모든 생물체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질인 DNA(디옥시리보핵산)의 2중 나선구조를 풀었다. 이 발견으로 과학자들이 자연선택이 분자 단위에서 벌어지는 영향을 상세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출처: The Observer, 2008. 6. 22.

번역: 라티오 출판사

Damasio’s Error and Descartes’ Truth: An Inquiry into Consciousness,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Author: Andrew Gluck
Paperback: 100 pages
Publisher: University of Scranton Press (June 15, 2007)
Language: English
ISBN-10: 1589661273
ISBN-13: 978-1589661271

Product Description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에 의해 제시된 정신과 육체의 관계 문제는 아직도 철학자들에게 근본적인 논쟁거리이다. 이 책에서 Andrew Gluck는 Antonio Damasio의 저작 Descartes’ Error에 대해 다차원적인 응답을 구축하고 있다. Gluck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Damasio의 책에서 발견되는 중립적이고 일원론적인 주장을 비판하면서 적응이론(adaptive theory) — 자연과학에서는 물리적 일원론, 사회과학에서 이원론, 미학에서는 중립적 일원론 — 을 옹호하고 있다. Gluck의 저작은 역사적 논쟁에 있어서 새로운 의의가 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

Author : Antonio R. Damasio
Paperback: 336 pages
Publisher: Harper Perennial; 1 edition (November 1, 1995)
Language: English
ISBN-10: 0380726475
ISBN-13: 978-0380726479

From Library Journal
정신은 육체와 분리된 실체라는 생각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언명한 이후부터 서구 문화에 심오한 영향을 끼쳐왔다. Iowa대학에서 인지심리학과 인간의 뇌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Damasio는 감정과 정서가 인간의 합리성에서 수행하는 중심적인 역할에 관한 논증을 가지고 이 전제에 도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동일한 뇌 구조가 인간의 생물학과 행동을 규율하며, 이는 정상적인 인지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Damasio는 전두엽 피질에 손상을 입은 환자(자신의 환자는 물론 19세기 철도 노동자인 Nicholas Gage)가 효과적인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서를 더이상 만들어내지 못함을 논증하고 있다. 재능있는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Damasio는 Oliver Sack 스타일의 르포르타쥬를 복잡하고 이론적인 신경과학의 주제들과 잘 결합시키고 있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 1999년 한국어판 출간, 현재 절판 상태.

|국내 관련 도서|
올리버 색스(지음), 조석현(옮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이마고, 2006.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더 많은 가라오케를!”
Justin Wintle

Daniel A. Bell, China’s New Confucianism: Politics and Everyday Life in a Changing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문화대혁명 동안에, 유교는 마오쩌둥에게 혐오받았던 ‘중요한 조타수’ 중의 하나였다. 최근에 들어서 — Daniel Bell의 저서가 섬세하게 탐구하고 있는 바와 같이 — 유교는, 적어도 떠들기를 좋아하는 부류에서 만큼은 재조명받고 있다. 마오쩌둥의 붉은 책(Little Red Book) 이래로 어떤 출판물도 위딴(于丹)이 편집한 논어선집만큼 널리 읽히지 않았다. 중국의 대학들에서도 공자를 다시 가르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에 앞서, 중국 정부는 포스터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도 베이징의 거주민들이 외국인에게 유교적 “올림픽 문명”을 홍보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모범적 개체”의 전형인 문명은, 중국이 마오쩌둥에게 물려받은 도덕적 공백을 채우려는 것으로서 문제가 되는 이슈이다. 신흥 부유층들은 (대개의 경우 한 명뿐인) 자녀와 그들 자신을 위하여 “문명 사회”로의 복귀를 모색하고 있다. 유교는 자식에 대한 애정은 물론 어른에 대한 “존경”까지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유서깊은 가치를 마음 속에 심어주는 일은 어른들에게 뚜렷한 이익이 있다.



베이징에 있는 칭화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Bell은 중국인들의 변화하는 태도에 대해 적절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는 강의실에서, 거리에서, 혹은 가라오케에서 공산주의 이전 전통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되살아나는 징후를 발견한다. 후자는 특히 Bell의 주의를 끈다. 유학자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진, 긴밀한 유대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특성은 가라오케 바에서 명백해지고 있다. 호스티스가 성 뿐만 아니라 조화로운 대화까지도 제공한다면, 그것은 군자가 충분히 바랄만한 것이다. 그는 서기전 5세기의 자신의 제자들에게 만족스러워하며 말했었다. “나는 외면적인 아름다움보다 덕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Bell이 논의하듯이) 그러한 조합은, 호스티스에게 이익이 되는 ‘고용기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가족을 유지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궁극적인 유교적 선이다. 남편이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지만 머지않아 그 가정이라는 토대로 돌아온다. 의료기관 종사자들과 여성주의자들은 불쾌할 수 있지만, Bell은 문화적 차이들을 날카롭게 감지한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정치적 방향이다. 그는 그것이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니지만 거기에서 굉장한 포괄성을 감지한다. 그는 내적 탐구로서 유학에 대한 위딴의 시덥잖은 재조명을 평가절하하면서 장칭을 높게 평가한다. 장칭의 유교적 정치는, 선출되지 않은 현명한 연장자들이 정부에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의심할 바 없이 사회주의적이었다.



Bell이 우리에게 꺼내놓는 흥미롭고도 놀라운 이야기 중에는 자유주의 철학자에 의해 미합중국화된 유교와 근대 간의 대화가 있다. ‘Hu 교수’는 소크라테스적 방법을 ‘비판적 사고’를 위한 수단으로서 촉구하지만, 유교는 이미 그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방법은 과다한 지식을 습득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학생들을 불필요한 스트레스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그는 반박한다.

[[중국의 신유학]]은 어떤 도식적인 개관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 저작은 중요한 오늘날의 경향에 대한 세련되고 통찰력있는 잠정적인 응답이라 하겠다. 


출처: Independent Books, 2008. 6. 6.

번역: 라티오 출판사

Italo Calvino, “Why Read the Classics”

  1. 고전이란 흔히 ‘되풀이해서 읽어야 할’ 혹은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일컫는 책이다.
  2. 우리는 ‘고전’이란 단어를, 그것을 읽고 아끼는 이들이 높이 평가하는 책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지만, 그것들을 즐길 최적의 조건에서 처음 마주친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높이 평가된다.
  3. 고전이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기억해야만 할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든, 집단적 혹은 개인적 무의식으로 변장한 기억의 다발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때든, 언제나 고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책을 말한다.
  4. 고전을 다시 읽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첫번째 읽었던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항해와 같다.
  5. 사실상,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다시 읽는 것이다.
  6. 고전은 그것이 말해야만 하는 바를 그침없이 계속하는 책이다.
  7. 고전은 인류가 이전에 낳아놓았던 사유들의 흔적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그러한 자취 속에서 인류가 남겨놓았던, 이제까지 영위해온 문명과 문화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언어와 관습을) 전수받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8. 물론 고전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9. 고전을 읽으면 거기에 우리가 그것에 대해 주워들어 생각한 것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10. 우리는 책에서 ‘고전’이란 단어를, 그 책이 고대의 성스러운 물건처럼 우주와 동등한 형태를 취할 때 사용한다. 우리는 이러한 정의에 따라 말라르메가 상상했던 “완전한 책”에 대한 생각에 다가서게 된다.
  11. 고전의 저자들은 우리가 무관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의 연관 속에서 심지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의심 속에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한다.
  12. 한 고전은 다른 고전들이 등장하기 전에 주어지는 책이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읽든 저것을 먼저 읽든 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전의 계보 속에서 그것의 자리를 알아챌 수 있다.
  13. 고전은 특정한 국면에 연관된 것을 부수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이 부수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14. 고전은 매우 모순되는 국면적 연관들에 의해 상황이 제어되고 있을 때 조차도 그것을 사태의 부수적인 것으로 고수한다.

Political MindThe Political Mind: Why You Can’t Understand 21st-Century American Politics with an 18th-Century Brain

Author: George Lakoff
Hardcover: 304 pages
Publisher: Viking Adult (May 29, 2008)
Language: English
ISBN-10: 0670019275
ISBN-13: 978-0670019274

Product Description
What’s the Matter with Kansas?에서 Thomas Frank는 아주 많은 수의 미합중국 국민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과 어긋나게 투표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책에서 George Lakoff는 그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존재는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온 것처럼 합리적인 피조물이 아님이 밝혀졌다. 관념, 도덕, 그리고 가치가 신체 바깥의 어딘가에 있어서 검토되고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뇌 안에 있으며 거기에서 육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이야기를 우리의 정신에서 형성할 때 우리가 타이핑을 하거나 댄스를 할 때 특정한 근육 기억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그 이야기에 적합하게 끼워넣는다. 그러한 정보를 우리의 이야기 형태에서 꺼내어서 다른 것에 넣거나 전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밴조 연주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정신은 바꾸는 것은 신체를 바꾸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진보 정치인들과 활동가들은 사람들이 정치적 결정을 하는데 있어 객관적인 추론 체계를 이용한다고 계속해서 믿어왔으며, 이러한 믿음이 지속되는 한 민주당은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다. 그들은 반대자들의 프레임을 받아들여 그것과 논쟁을 벌이기 보다는 논쟁의 관점들을 붙잡고 씨름해야만 한다.

열정적이며 박식하고 혁신적인 이 책은 Steven Pinker와 Thomas Frank의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움직이는지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무척 흥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

|국내 관련 도서|
조지 레이코프(지음), 나익주(옮김), [[프레임 전쟁: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 창비, 2007.
조지 레이코프(지음), 유나영(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삼인, 2006.
조지 레이코프/M. 존슨(지음), 노양진/임지룡(옮김), [[몸의 철학]], 박이정(서광학술자료사), 2002.

여분의 두 시간이 당신의 글을 어떻게 두 배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가.

에세이나 소논문쓰기에 맞닥뜨렸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비슷한 패턴을 따른다. 관련된 읽을거리들을 훑어보면서 손가락 관절을 뚝뚝거리거나 크게 한숨을 쉬고는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를 요하는 인간관계의 치명적인 변화에 대비하여 자신의 Facebook(http://www.facebook.com) 계정을 다시 한번 체크하여 친구관계 상태에 약간 중요한 변화가 있는 경우에는 바짝 신경을 쓴 뒤 깊은 체념과 함께 글쓰기를 시작한다. 타이핑을 조금 한다. 인상적인 인용구를 덧붙인다. 워드 프로세서 좌측 아래 구석에 있는 페이지 쪽수를 흘깃 쳐다본다. 조금 더 타이핑을 한다. 마침내 정해진 페이지 쪽수에 다다랐다. 부수적인 편집작업을 재빨리 해치운 뒤 일을 끝마친다.

글쓰기 중심 페이퍼의 문제들
나는 이러한 글쓰기 태도를 ‘글쓰기 중심’이라 부른다. 이것은 글쓰기라는 핵심 행위를 중심으로 관련된 행위를 집중시킨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제출기한을 초과하여 교수를 기다리게 하는 평범한 보고서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미합중국 청소년의 상태에 관련된 어두운 절망일 뿐이다. 소논문과 에세이에서 이러한 글쓰기는 스타일을 완전히 개선하는데 쓸모가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 한 두 시간 정도가 필요한 — 글쓰기 과정의 ‘간단한’ 조정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보고서의 질을 (그리고 글쓰기 과정에 대한 경험을) 두드러지게 향상시킬 것이다. 또한 교수에게서 좋은 점수를 얻게 될 것이다.

아이디어 휴가
학생들의 전형적인 글쓰기 사례를 돌이켜 보자. 지금 관련 읽을거리에 대한 훑어보기를 끝마쳤다 — 이 글은 에세이와 소논문을 다루기 때문에 중요한 조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닌 강의에서 배당된 읽기를 한다고 가정한다. 당신은 컴퓨터로 가서 일을 착수한다… 여기서 잠깐! 컴퓨터를 켜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지말고 읽을거리를 갖고서 걸어라.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 주제에 대해 내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가 참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대신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차이점은 무엇이며, 그는 왜 이러한 특정한 시각을 택하였는가?”
“내가 말할 것은 무엇인가?”
“이에 관해 내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러저리 오가면서 — 글쓰기 중심 페이퍼에 연료를 공급하는 — 첫번째 분명한 생각을 따라야 한다. 그러고 나서 더 깊게 파고들어라. 날카로운 질문들을 계속 던지자. 자료에서의 개인적 관심사에 적합한 테제라는 작은 보석을 찾아내라. 이것이 탁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직접 생각한, 정직하고 고유한 어떤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계속 해라. 밖에서 자신의 생각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겨라. (이때는 공부거리를 확장하는 것과 병행하기 좋은 단계이다.)

적당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생각하면 도서관에서 가장 영감을 주는 자리에 앉아라. 편안한 의자, 오래된 나무 재질의 책장들, 그리고 엄숙한 백인이 보이는 변색된 유화 초상화는 덤이다.

앉은 다음 관련된 읽을거리를 다시 돌이켜보라. 세부 사항들을 구체화해 나간다. 몇몇 부분은 노트를 하라. 간단한 수준의 밑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이 일을 끝마치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확신시키는 간소한 스피치를 할 시점이다. 사실상, 자신의 생각을 담당 교수에게 즉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면담 시간 전에 적당한 아이디어 휴가를 가지는 것이 좋다.

혼자만의 시간
현대의 인문학을 익히는 학생들의 사례에서 매우 놀라운 사실 중의 하나는, 그들이 복잡한 정신적인 독백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사고를 꼼꼼하게 되짚어보는 데 거의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세이와 소논문 쓰기는 이 기회를 제공한다. 많은 학생들은 이것을 무시하고는 “나는 보고서가 싫어!”라며 글쓰기 중심 접근법에 무턱대고 발끈한다.

나는 학생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권한다. 키보드에서 타자를 치기 전에 1, 2시간 정도 아이디어 휴가를 가져라. 학생의 낮은 글쓰기 실력에 절망해 있는 담당교수를 끌어당길 뿐만 아니라,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의 보고서를 쓸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다.

출처: Study Hacks

번역: 라티오 출판사

<<쓰여지지 않은 철학>> 이명훈, 라티오 (#ISBN9788996056119)

Unwritten Philosophy and Other Essays

고대 희랍철학의 대가 콘퍼드Francis Macdonald Cornford의 논문들을 그의 제자인 거스리W. K. C. Guthrie가 편집한 책.

거스리의 회고에 이어 “문학과 철학에 깃든 무의식적 요소(1921)”, “천체의 음악(1930)”, “쓰여지지 않은 철학(1935)”, “플라톤의 국가(1935)”, “플라톤의 [[향연]]에 나타난 에로스(1937), “희랍의 자연철학과 근대의 자연과학(1938)”,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서 제의(祭儀)의 기반(1941)”, “고대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1942)”의 8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으며, “콘퍼드의 고전학 관련 연구목록”이 부록으로 덧붙여져 있다.

콘퍼드 약력
콘퍼드(1874 – 1943)는 캠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의 펠로우로 1899년부터 1902까지 가르쳤다. 1931년에 고대철학에 관한 권위있는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로렌스 석좌교수가 되었다. 플라톤의 저작들에 관한 탁월한 주석서로 유명하다.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F._M._Cornford

콘퍼드의 주요 저작들
Before and After Socrates
From Religion to Philosophy: A Study in the Origins of Western Speculation
Greek Religious Thought, from Homer to the Age of Alexander
Micro Academia
The Origin of Attic Comedy
Plato’s Cosmology and Thucydides Mythist
Plato’s Cosmology: The Timaeus of Plato
Plato’s Theory of Knowledge: The Theaetetus and the Sophist
The Republic
Thucydides Mythistoricus

참조: http://www.bookfinder.com/author/francis-macdonald-cornford/

국내 번역본
<<종교에서 철학으로>>, 남경희(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5. (#ISBN9788973000630)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 이종훈(옮김), 박영사, 2006. (#ISBN9788971893715)

번역자
이명훈

초고: 3장, 쓰여지지 않은 철학

2008년 7월 출간 예정

혁명? 가든파티
Diane Purkiss

Going DutchLisa Jardine, Going Dutch: How England Plundered Holland’s Glory, HarperPress, 2008.

1688년 11월 1일, 외침이 없었던 영국은 500척의 군선, 20,000명의 군사, 20,000명 이상의 해군으로 이루어진 외부세력에게 침공받았다. 그리고 오렌지공이라 불리우는 윌리엄(William of Orange)[또는 오라네 공 빌렘]이 현 통치자로부터 왕좌를 차지했다. 그 외부세력은 네덜란드였는데, 이 흥미로운 책에서 Lisa Jardine은 영국에서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한 검토를 시도한다.

왜 윌리엄은 그가 영국인이라도 되는양 사람들에게 환대받았던 것일까? 부분적으로 이는 선전활동의 승리였다. 윌리엄은 명쾌하고 지적인 술어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서한들을 써왔다. 이는 또한 조직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는 반년동안 이 조직과 함께 군사력을 키워왔다. 여기에 더하여 제임스 2세를 둘러싼 추문도 있었는데, 그의 왕비가 몇차례의 유산 끝에 출산한 건강한 후계자가 왕의 대타를 왕비의 침실로 몰래 들여보내 얻은 자식이라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돌았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있었던 탓에, 후계자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윌리엄은 자기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에게서 제임스의 후계자로 기대를 받아왔다.



윌리엄은 영국의 권좌를 차지한 후 정원에 대한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성 제임스 파크(St James’s Park)를 가로지르는 미래의 궁전 배치를 직접 검토하였다. 그러나 Jardine은 학적이고 세련된 이 문화사에서 이미 다른 데서 여러 번 다루어진 바 있는 이 문제가 가진 미묘한 점을 보여준다. 전(前) 세기동안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공물, 서적들, 그리고 정보를 비롯한 문화와 과학의 교류로 연결되어 왔는데, 이것이 윌리엄과 그의 군사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수용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교류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Constantijn Huygens였는데, 이는 최근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Jardine은 그러한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결심한다. 우리가 아는 Huygens는 광범위한 인문교육을 받은 박식가로 비올라의 전문가이자 고급 예술품의 수집가였으며 망원경과 현미경에 관심이 깊은 아마추어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Jardine 자신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위대하고도 좋은’이란 말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치계에서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숨은 실력자였다.



Jardine은 Huygens에 의해 촉진된 문화 교류를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들을 훌륭하게 연구했다. 우리는 Rubens와 Dudley Carleton이 교류로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대리석상’ 또는 조각상의 교류품은 Rubens의 캔버스를 위한 것이었다. 영국 내전은 네덜란드인들이 추방되어 빈털털이가 된 왕당파들의 수집품들을 찾아나서게 자극했고 동시에 망명자들은 자신들의 재보를 가져와 네덜란드의 시장에 내다 팔았다. 우리는 Huygens에 의해 그 매력과 공포가 지적된 Rubens의 뛰어난 그림인 ‘메두사의 머리’를 볼 수 있다.



전쟁 이후 네덜란드인들이 사들인 많은 그림들은 Huygens와 특히 Van Dick의 안락한 궁정에 들어간 네덜란드인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예술품 중개인이자 음악가인 Nicholas Lanier, 보석상이자 다이아몬드 상인인 Gaspar Duarte와 같은 다른 핵심적인 인물들은 예술품의 교류연합을 굳건히 했다. Huygens는 그러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Huygens의 아내인 Susana는 Huygens에 못지않은 광범위한 인문적 학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Rene Descartes와도 서신을 주고 받았다. Descartes의 [[성찰]]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그에게 전달할 수 있기 전에 비극적으로 요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Jardine에 따르면, 네덜란드인은 자신의 부유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Huygens도 자신의 부와 권력 그리고 영향력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사실상의 관저였던 저택을 지었으며 이를 부유하거나 기발한 생각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제공했다.

그는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변칙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엔트워프(Antwerp)의 시민들 역시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Huygens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Duarte 또한 장엄한 저택을 저택을 즐겨 지었다. 엔트워프에 온 별난 영국인 William과 Margaret Cavendish는 그곳에서 부유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의 소란 뒤에 정착했던 그들은 저택을 꾸미기 위해 네덜란드 신고전주의와 심지어 장인들을 들여왔던 영국인 망명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영국인들은 Huygens를 비롯한 네덜란드인들과 저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원은 자신들을 파괴하려는 사태로부터의 불확실한 도피처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네덜란드인들은 육지를 잠식해오는 바다의 끊임없는 위협을 통해서 이런 생각에 도달했음에도 말이다. 시인 Andrew Marvel은 네덜란드를 가리켜 ‘바다의 혼란스런 분화구’라 불렀지만 1621년 Thames강이 범람한 이래로 네덜란드의 치수 기술은 영국에서도 쓰이곤 했다.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과학에 대해서도 교류했다. Hooke의 발견과 그 의미에 대한 논쟁은 국경을 넘나들며 이뤄졌는데, Hugens는 이 논쟁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상업 또한 경쟁과 교류의 계기여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적수인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우열을 다투었다. 궁극적으로, 더할나위없이 가장 주목할만한 결과는 현재의 New York인 New Amsterdam에 있는 Manhattan의 식민지화였다. 그 거대한 건축물, 예술 작품들, 그리고 공원들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 개척자 모두를 만족시키게 될 터였다.



영국인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의해 자신들이 틀지워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좁은 바다를 건너있는 가까운 이웃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저작을 통해서 영국은 네덜란드의 역사적 소산이라는 생각이 뚜렷해진다. 신고전주의 건축물에 대한 애호에서부터 경험적 방법에 대한 열중 그리고 정원에 대한 열광까지 영국인들이 ‘영국적’이라 생각하는 모든 특징들은 네덜란드인들과 공유되고 있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다. 영광스러움 못지 않게, 윌리엄과 메리에 의해 얻어진 네덜란드의 조세 수입과 부는 네덜란드의 힘과 명성을 갉아먹었던 반면에 영국의 부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 쓰여졌다. 이것은 Jardine이 책의 부제에서 영국이 네덜란드의 영광을 ‘빼앗았다’고 말한 까닭을 설명해주지만, 그 자신은 문제가 이것보다 좀 더 미묘하다고 덧붙인다. Jardine의 지적에 따르면, 모든 영국인들은 오래 전 네덜란드에 갔으며, 이제 그것을 말하고 낮은 땅의 똑똑하고 건장한 남녀에 대한 문화적 과거를 되짚어 볼 때가 되었다고 한다. 이 흥미로운 연구는 영국이 지닌 네덜란드의 유산에 대한 보다 깊은 탐구에 영감을 불어넣게 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출처: Independent Books, 2008. 4. 18.

번역: 라티오 출판사

|국내 관련 도서|
리사 자딘(지음), 이선근(옮김), [[상품의 역사Worldy Goods: A New History of the Renaissance (1996)]], 영림카디널, 2003.

But is it Art?: An Introduction to Art Theory

Author: Cynthia Freeland
Paperback: 256 pages
Publisher: Oxford University Press, USA; New Ed edition (April 4, 2002)
Language: English
ISBN-10: 0192853678
ISBN-13: 978-0192853677

Product Description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에서 아주 도발적인 대변이 흩뿌려진 마돈나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예술 세계에서는 많은 낯설고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것들이 전시된다. 이것을 본 격분한 관객들은 종종 ‘이게 정말로 예술인가’하고 묻는다.

예술에 관한 이 책에서 Freeland는 우리를 사로잡는 예들과 철학, 예술 이론을 짜맞추면서 예술에서 혁신과 논쟁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그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예술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하고 있으며, 현대의 감각주의적 작품들에서 펼쳐 나오는 전통의 지속성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그 전통은 파르테논 신전이나 중세의 성당들, 아프리카의 조각들에까지 가 닿는다. 그는 해석의 어려움을 탐색하고, 뇌가 예술을 지각하는 방식에 관한 최근의 과학적 연구를 검토하며, 웹, 비디오 아트, 예술관 씨디롬과 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예술 세계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 보들리야르에 이르는 다양한 예술 이론가들을 안내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이론, 예술가, 작품들에 대한 암시적 고찰을 통해 문화적 의의가 어떻게 물리적 매개체에서 포착되는지, 왜 우리의 지각에 도전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전체의 노력에서 중심적인지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제공한다.

앙리 마티스 자신이 스스로를 “야수”라고 비웃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비평가들에게 그의 대담한 색과 뒤틀린 형태들은 기이해 보였을 것이다. 1세기가 지난 지금, 한때는 충격적인 것들이 이제는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진다. Freeland는 바로 그것이 예술이라 말한다.

About the Author
University of Houston 철학과 교수. 예술과 영화의 철학, 고대 희랍 철학, 페미니즘 이론에 관한 책들을 출간하였다. 저서로는 The Naked and the Undead: Evil and the Appeal of Horror (1999)

출처: Amazon.com

번역: 라티오 출판사